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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승님들의 끝을 직접 봤고..
이 일이 (결국은) 끊어질 줄 알고 들어섰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먼 미래를 생각하면 내가 이 일을 한 게 잘 한 듯싶습니다.
기분이 좋아요.."
보통은 광주시 내에서 역사 답사를 하는데요
이날은 특별히 서울시 선정릉을 방문했습니다
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4호이자 갓일 장인인 정춘모 선생님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죠!
광주시에 계시지만 갓일 작업은 이곳에서 하고 계신답니다~
선정릉역에 하차하자마자 전수교육관이 나옵니다
찾기 편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로비로 들어가니 다양한 전통 굿즈들이 진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이 고급스러운 느낌..
전시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나라 전통복식과 갓에 대한 역사, 갓일의 유래, 그리고 정춘모 선생님을 간단히 소개했습니다
(사진 찍어주신 관계자님 감사합니다!)
드라마 킹덤으로 인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갓.
갓의 인기를 의식해 위의 장면을 일부러 삽입할 정도로 그 열기가 매우 높았죠~
이러한 분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요. 일찍부터 조선은 중국으로부터는 의관의 나라, 다른 이방인들로부터는 모자의 나라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바다 건너 나폴레옹도 관심을 가졌던 갓. 언제부터 생겼던 걸까요?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해요!
고려 공민왕 시기에 관모로 자리 잡게 되고, 조선시대에 와서 바로 우리가 아는 그 모습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흑립은 조선의 국모, 즉 나라의 모자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갓을 쓰면 그 모습이 중후하고 여유 있어 보이죠~
외국인들은 한복의 남자 복식을 청교도의 엄숙한 차림과 비교하는가 하면 의장을 다 갖춘 범선으로 묘사했다고 하네요~
갓은 시기별로 유행을 탔는데요
한때는 어깨를 덮고도 남을 만큼(거의 90cm) 갓이 매우 컸다고 하네요~ 한 방에 3명 이상 앉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갓은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요~ 사대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갓에 비하면 가채를 비롯한 여성의 사치는.. 음.. 비교할만한 것도 못되었다고 하시네요~
결국 조선 후기 갓이 허세와 낭비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흥선대원군 때 그 크기와 높이가 대폭 줄게 되었다고 해요~
선생님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작업도구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선생님이 갓일을 하시게 된 계기도 매우 운명적이었는데요
경북 예천에서 자라셨고 그곳에 갓 만드는 곳이 있어 어릴 적부터 그 일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를 위해 대구로 가셨는데요
마침 선생님이 하숙하던 집에 통영의 대가들이 모여있는 갓방이 있었다고 해요~
정말 운명인가..
그 인연으로 선생님은 입자장 김봉주 선생님, 총모자장 고재구 선생님, 양태장 모만환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갓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스승들을 따라 통영으로 내려가셨고 거제도에 계시던 소문도 선생님을 모셔 양태까지 익히셨다고 하네요~
스승님이 세분이나 되시다니~!! 왜일까요?
갓을 만드는 일은 고도의 섬세함과 많은 작업량을 갖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머리에 얹는 원통을 만드는 사람(총모자), 모자의 챙 부분을 만드는 사람(양태), 둘을 합쳐 모자를 완성하는 사람(입자) 이렇게 세분야로 분업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기술을 다 전수받으셨기에 세분이나(?) 은사가 계시는 거고요~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해보니 갓일을 완벽하게 배우기 위해 더 많은 분들에게서 사사를 받으신 듯합니다)
선생님께선 거의 갓일에 미쳐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몰입하셨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생활 스타일이 현대화되면서 갓을 사러 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오지 않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갓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남은 사람은 선생님뿐이었다고 합니다.
"자식, 손자가 있는데 전수자가 없다는 건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시기 선생님도
정말 난감한 시기를 거치셨다고 해요..
갓일을 버릴 수도 없고.. 계속할 수도 없고..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지금 모습을 이미 알고 있죠~ 결국 갓일을 계속 이어나가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갓일이 끊어지는 것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 없으셨던 것이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자부심과 무거운 책임감으로 묵묵히 이 외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조선 남자에게 갓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비의 유교 정신과 품격을 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정수에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인데요~
의관을 정제한다고도 하죠~
선조들은 옷을 격식에 맞게 바르게 차려입어야 바른 행동이 나온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집에 혼자 있어도 하루 종일 갓을 쓰고 바르게 앉아 책을 봤고요
화장실에 갈 때는 갓을 벗고.. 볼일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다시 갓을 쓸 정도였다고 합니다~
선조들이 의관을 정제하는데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을 듯하죠?
일제강점기 때는 선비들의 이러한 정신이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단발령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갓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한국전쟁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갓을 찾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공방을 들어오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갓집이었습니다~
선조들은 모자를 매우 중요시 여기셨고 갓은 모양이 변형되기 쉬웠기 때문에 보관할 땐 이렇게 케이스에 넣었다고 하네요~
TMI로 군복의 경우도 마찬지고요
군복과 투구가 상하지 않도록 옻칠을 한 함에 정성스레 잘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갓일 공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인지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입니다
그중에 갓의 챙 부위에 해당하는 양태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계시네요
한 올 한 올 뽑아낸 가느다란 죽사(대나무실)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엮어냅니다
감탄사만 연발하게 되는 디테일
진사립(귀인이나 왕이 씀)의 경우 얼마큼의 노동력을 요할지 가늠하기도 힘듭니다~
보통 갓 하나 만드는데
최소 4~5개월은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년에 많아봐야
3개가 나온다는 이야기네요....
이쯤 되니 '갓 쓴 양반'이란 말이 어떤 말인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진사립의 경우는 정춘모 선생님이 아니라면 거의 재현이 어려운 정도라고 합니다~
정춘모 선생님~ 멋져요!
상투를 보호하는 원통형의 모양, 총모자라고 하는데요
보통은 말총으로 엮는다고 알고 있지요~
문턱을 넘다 보면 위에 걸리거나 부딪히면서 갓이 어그러지는 경우가 있는데요, 총모자로 엮으면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모든 총모자를 다 말총으로만 만들지는 않는다고 하시네요~
이 두 가지를 합해서 모자 형태로 만들어내는 최종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갓이 되는 거죠...
와... 정말 긴 여정이죠? (그럼에도 불구, 설명을 생략한 단계가 많습니다~)
총 51단계의 많은 작업량과 최고의 디테일로 인해 가격도 높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귀한 몸입니다~
그래서인지 현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갓은 아쉽게도 모두 가품이라고 합니다
나일론 제품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진품이 나온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이문열 원작의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는 일평생 갓일을 해온 장인이 만든 마지막 갓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정춘모 선생님은 작품에 나온 갓을 제작한 것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아버지로 잠깐 화면에 등장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오른쪽 이미지의 등장인물이 정춘모 선생님 같죠? ㅎㅎ
철제함을 여시는 분은 도국희 선생님이십니다.
정춘모 선생님의 부인이시자 양태장으로써 무형문화재에 등록되실 예정이시라고 하네요~
도국희 선생님뿐 아니라 아드님까지 온 가족이 갓일에 함께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가 삶아지면 칼로 긁어 얇게 만들고 홈을 내서 일일이 머리카락 같은 죽사를 만드신다네요
그 죽사로 양태를 만드는 겁니다
양태의 트집을 잡는 인두와 총모자를 만드는 틀, 갓을 식히는 망도 보이네요~
'트집 잡다'는 어원이 이 양태의 트집을 잡는데서 왔다는 거 아시나요~
수상실적도 많으셔서 걸어놓긴 하셨지만 별로 자랑을 안 하시는 선생님 ㅋㅋ
사진들을 보니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길이 한 조각 한 조각 느껴집니다~
손주분의 귀여운 편지~
할아버지가 만든 갓을 생각하고 그렸나 봐요~ 귀여워라!
할아버지는 그것을 액자에 고이 담아 공방에 걸어두었습니다~
약 두 시간 동안 선생님과 갓일에 대한 벅찬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문화유산은 현대에서도 수요가 있는 공예가 많지만 갓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거운 현실을 직시하고 계셨으면서도 이 일을 묵묵히 이어오신 정춘모 선생님!
그래서 갓일에 대한 선생님의 삶은 저에겐 무거운 고행길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미에 "지금 와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 보니 갓일한 것이 잘한듯싶다, 기분이 좋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왜 제 마음이 이렇게 뿌듯한지요?ㅎ
갓일을 하다 보면 어떤 정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 같다는 정춘모 선생님과 도국희 선생님. 갓일 뿐 아니라 문화재를 이어가는 장인의 마인드가 어떤 것인지 느낀 하루였습니다.
선생님께선 외국은 물론, 통영을 비롯한 많은 도시에 방문하셔서 갓일을 알리고 계십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선 매해 정기적으로 행사를 열어 전통공예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네요~
(갓일은 인기가 많아 금방 접수가 끝난다고 합니다~)
갓일 스터디를 끝내고 정춘모 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같은 건물에서 진행되고 있는 비어있는 전시를 관람했습니다.
해설사 선생님들께서 신선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기획한 전시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선생님과 갓일에 대해 공부하면서 완전 팬이 돼버렸네요~
먼 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정춘모 선생님 약력
1940 출생
1961 입자장 김봉주, 총모자장 고재구, 양태장 모만환 세분으로부터 통영 갓일 사사
1978 제3회 인간문화재 작품전시회 은상 수상
1979 제4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 입선
1980 제5회, 제6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82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사업 해외 특별 전시회 및 시연
1982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갓 기증
1983 오스트리아 비엔나 박물관 갓 기증
1984 로마 바티칸 박물관 및 연세대학교 박물관 갓 기증
1984 제9회 전승공예대전 문화공보부 장관상 수상
1991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 인정
1992 한국 공예가회 회장 취임
1995~2003 (사)한국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이사장
1999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한국공예문화진흥원 이사
2001 국무총리 감사패
2019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 보관문화훈장 수여
2020 예올이 뽑은 올해의 장인
첫댓글 수고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