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의 휘는 승종(承宗), 자는 효사(孝思), 성(姓)은 안씨(安氏), 순흥인(順興人)이다. 고려의 신호위(神虎衛)의 상호군(上護軍)이셨던 휘 자미(子美)가 비조(鼻祖)이며, 3남을 낳아 각자 파(派)가 나뉘어 졌으니 휘 영린(永麟)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제이파(第二派)의 파조(派祖)이시다.
3세를 전하여 휘 문개(文凱)는 호가 질재(質齋)며 좌정승(左政丞)으로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에 봉하여 지셨고,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며, 4세를 전하여 휘 준(俊)의 호는 노포(蘆浦)요, 봉상시(奉常侍)의 판사(判事)이셨는데 고려조(高麗朝)가 망하자 정포은(鄭圃隱)의 문도(門徒)로서 의령(宜寧)에 유배(流配)되셨다가 예천(醴泉)의 노포리(蘆浦里)로 옮겨져 유배되었던 곳에서 돌아가셨으며, 충정공(忠靖公)의 시호를 추증(追贈) 받고,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배향(配享)되셨으니 공에게 오대조(五代祖)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는 질(質)이니 문과(文科)로 대사간(大司諫)이셨고, 조(祖)의 휘는 숭도(崇道)니 당포만호(唐浦萬戶)였으며, 고(考)의 휘는 건(建)이니 사직(司直)이요, 비(妣)는 풍산유씨(豊山柳氏)인 생원(生員) 갑손(甲孫)의 따님과 안동김씨(安東金氏)인 사직(司直) 규(奎)의 따님으로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의 후손이다. 공은 성종(成宗) 계묘년(1483)에 예천 노포리(蘆浦里)의 옛집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서 멋진 풍채(風采)가 준수(俊秀)하고, 지조(志操)와 기질(氣質)이 맑고 밝았으며, 8세에 마을의 서당에 들어가니 재주와 슬기가 동료들보다 뛰어나고, 또한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문사(文司)가 일찍 이루어져 서당의 선생님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천성(天性)에 뿌리박은 효성이 있어서 두 형님과 이불을 함께 덮고 자면서 새벽에 일어나 머리 감고, 빗질하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안색(顔色)으로 양친(兩親)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 뒤에 책상에 단정히 앉아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탐구(探究)하였으며, 특히 희경(羲經: 주역)의 연구에 힘을 쏟았다.
부친(父親)의 명에 따라 시문(詩文)도 겸하여 익혀,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선친이 별세하시자 출세의 길에 나아갈 생각을 끊고, 형님을 부친과 같이 섬기며 우애(友愛)를 더욱 돈독(敦篤)히 하고, 또 경전(經傳)을 강습 및 토론하고 고상한 정취(情趣)를 시(詩)로 지어 창화(唱和)하면서 후학(後學)들을 장려하여 진척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또한 윤원형(尹元衡)의 횡포(橫暴)를 배척(排斥)하는 소(疏)를 올리니 이로부터 한때의 유명한 석학(碩學)들이 추중(推重)하였다.
족종(族宗) 설강(雪江) 위(瑋)의 형제(兄弟)들과 더불어 종족(宗族)을 수합(收合)하여 족보(族譜)를 처음으로 편수(編修)하였으며, 만년(晩年)에는 덕봉산(德鳳山)의 남쪽 검암(劒巖) 위에 집을 짓고서 그 당호(堂號)를 집승정(集勝亭)이라 하였으니, 대개 영남 고을의 아름다운 경치(景致)가 모였다는 뜻이었으며 간재(艮齋) 최연(崔演) 공이 그 정명(亭名)을 서술(敍述)하였고, 이로 인하여 호(號)로 삼으셨다.
퇴도선생(退陶先生)을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이 시(詩)를 지어 주어 그 시가 이미 권축(卷軸)이 이루어졌으니, 가령 송재(松齋) 이우(李堣)와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과 서암(西庵) 태두남(太斗南)과 용재(容齋) 이행(李荇) 같은 분들이 더욱 그중에 걸출(傑出)한 분이었다.
원형(元衡)이 실각(失脚)하고 연세가 85세에 이르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除授)되셨으며 돌아가신 해는 미상이다.
배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시니 훈련참군(訓鍊叅軍)인 영진(永珍)의 따님이요, 양간공(良簡公) 승택(承澤)이 후손이다. 태어나고 돌아가신 연도는 미상이며 묘소는 고위(考位) 오른쪽에 쌍봉(雙封)으로 되어 있다.
경손(慶孫)의 딸은 변희일(邊希一)에게 시집갔으며 순손(順孫)의 아들은 신(伸)과 전(佺)이요. 딸은 김응엽(金應燁), 권겸(權鎌)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경륜(經綸)과 재능을 안고서도 세상에 펼쳐보지 못하셨음은 운명(運命)이었다. 유문(遺文)이 반드시 상자(箱子)에 넘치도록 있었을 것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兵火)에 잿더미로 변하고 남음이 없음은 사문(斯文)의 불행이로다. 종(從) 18대손 영창(永昌) 씨가 여러 가문에 소장(所藏)된 문헌(文獻)을 널리 뒤적여 ‘연방시고(聯芳詩稿)’책을 편집하여 세상에 반행(頒行)하였으니, 이것은 가히 다행함이다.
어느 날 공의 17대손 춘호(春鎬) 씨가 그의 족인(族人) 문식(文植)과 더불어 안종식(安琮植)이 지은 행장(行狀)을 소매에 넣고 묘갈명(墓碣銘)의 글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짧은 비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닳고 결이 일어서 다시 고쳐서 세우기로 도모(圖謀)하면서도 잔약(孱弱)한 후손들이 세력과 살림이 보잘것없어 재력(財力)이 모자라 이루지 못한지가 여러 세대(世代)입니다. 지금 비석을 다듬어 세울 예정이오니 오직 집사(執事)께서는 우리 가문과 대대로 혼인을 맺었던 정의(情誼)가 있으니 한마디의 말씀으로 후세(後世)에 징빙(徵憑)이 되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문장력(文章力)이 부족하고 또한 늙어 혼미하나 선대(先代)의 우의(友誼)를 생각하니 감히 굳이 사양할 수가 없기에 삼가 그 행장(行狀)을 살펴보고 우(右)와 같이 서술(敍述)하였다.
이어서 명(銘)을 한다.
효우(孝友)에 물들어지셨고, 시례(詩禮)는 가문에 전하는 학문이었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영화로운 작록(爵祿)을 단념(斷念)하셨네.
간흉(奸凶)을 상소(上疏)하여 배척하니, 사우(士友)들이 덕을 우러러 보았네.
화려하게 정사(亭子)를 지었더니, 축하 시(詩)가 권축(卷軸)을 이루었네.
만년(晩年)에 은전을 받으니, 화려한 옷에 이마에는 옥관자(玉冠子).
곧은 비석에 묘갈명을 새겼으니, 백년토록 밝게 보여 주리라.
무인년(1998) 국추절(菊秋節) 9월 상한(上澣)
안동(安東) 권오근(權五根)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