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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전북 구례. 남원
* 산행일시 : 2022년 05월 15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 회차 : 대간 63-5
* 산행코스 : 성삼재~고리봉(인증)~묘봉치~만복대(인증)~정령치~큰 고리봉~주촌마을~수정봉(인증)~입 망치~갓바 래봉-(주지봉)-여원재(20.6km/9시간)
* 산행시간 : 03:40~11:28 (산행 7:48분/휴식시간:0시간 37분)
* 산행속도 : 2.98 km/h
* 산행거리 : 21.35km
* 날씨 : 맑음
* 기온 : 5~ 15
* 약수터 정보 : 깃대봉 샘터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산행난이도 : 고도차:중상 , 거리:상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 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이나라 골격의 틀 중에서 장대하고 당당한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길게 연결된 장대한 산줄기로 그 길이는 약 1,400km이나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약 684km이다.
오늘은 일전에 산불방지 기간이 끝나고서 5월 1일 날 지리산 성삼재에서 중산리 백두대간 1구간을 위하여 성중 종주를 끝내고서 2회 차로 성삼재에서부터 서북능선으로 향한다.
이전에는 너무 추워서 장갑을 끼고 산행을 할 정도로 추웠는데.
오늘은 영상 5도에 바람도 엄청 심하여 손이 시릴 정도이다.
백두 대간은 차가 우리만 있었는데.
다들 서북능선으로 바래봉을 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같은 산악회에서도 2대와 이곳저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박으로 바래봉을 찾는다
바래봉의 멋진 철쭉을 못 봐서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가보지 못한 지리산 서북능선 산행이 좋다.
아직도 지리산 가보지 못한 코스가 참 많다.
백무동 코스. 뱀사골 코스. 거림 코스 아직도 미탐지이다.
그래도 다녀본 코스로 화대종주. 남부 능선. 그리고 오늘 서북능선 일전에 바래봉 코스는 와 봤기 때문에..!
그리고 음정마을
산이 크다 보니 코스도 정말 많다.
설악산도 정말 20번을 가서 설악이 이렇게 생겼구나 조금 알았는데.
아직 이 지리산은 10여 번만 와서 그런지 아직 모르는 코스가 많다.
몇 번 가본 코스지만 기억이 없는 봉우리도 있으니...
한동안 사진을 담을 수 없다.
지금 시간이 새벽 3시 40분 아직도 해가 뜨려면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무박의 단점은 이렇다 좋은 곳인데 밤에 이동을 하다 보니 사진이 남지가 않는다. 그래도 몇 번씩 오는 것보다 이렇게 한 번에 길게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무박 백두대간에 참여를 하였다.
화장실을 다녀온 다음이라서 그런지 우리 일행은 보이지가 않는다. 다들 모자도 쓰고서 추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삼재 (1,102m)
먼 옛날 마한 땅의 어느 왕이 진한의 난리를 피해 지리산 골짜기에 숨어들어 달의 궁전을 짓고 산기슭에 도성을 쌓았다.
그 뒤에 각 능선마다 장수를 파견해 지키게 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달궁 둘레에 있는 정령치, 황령치, 팔랑치, 상삼 재라는 곳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는 곳으로 유명한 성삼재는 성이 다른 3명의 장수가 방어했던 곳이라 해서 성삼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다른설명◆
삼한시대에 진한 대군에 쫓기던 마한 왕이 전쟁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래 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이 달궁이라 이름 지어져 불렸다 한다.
그 당시 마한 왕은 달궁을 지키기 위하여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峙), 서쪽 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鄭嶺峙), 동쪽은 황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령재(黃嶺峙),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姓三峙)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리산 성삼재는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로,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많이 사용한다. 지금은 861번 지방도로가 뚫려 사람들이 차를 이용해서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이전에는 힘겹게 올라가던 고개였다. 해발 1,102m이니 웬만한 산을 오르는 수준 이상이다. 이 높은 고개가 삼한시대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흔적은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명을 따라 그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그 역사가 곧 지리산의 역사인 것이다.
성삼재는 ‘3개의 고개(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진한 군에 쫓기던 마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 재다.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했다고 해서 황령재, 남쪽은 성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고 해서 성삼재(姓三峙)라 했다고 전한다.
국립공원 사진공모전에서 수상한 지리산 사진. 아름다운 능선이 구름과 어울려 넓게 펼쳐져 있다.
노고단에서 성삼재에 도착하기 직전 성삼재에서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는 사람은 임도를 따라가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화엄사계곡에서 올라가는 등산객들은 그 가파른 등산로 때문에 시작부터 입에 단내가 날 정도다. 계곡 위로 올라서면 백두대간 코재에 도착한다.
화엄사에서 코재까지 줄잡아 4시간 정도는 소요된다. 이 코스는 경사가 워낙 급해서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이어 종석대가 나온다. 성삼재의 남쪽이자 코재의 서쪽에 올라있는 봉우리다. 정상부가 암릉인데, ‘엎어놓은 종처럼 오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성삼재에 도착하면 확 트인 전망 때문에 등산객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도 눈에 많이 띈다. 팔랑 재와 황령재, 반야봉 등을 바라볼 수 있고, 구례의 지리산온천이 눈 아래 내려다보인다.
달궁(達宮)
우리 민족이 부족 국가 사회를 이루고 있던 삼한시대에 부족 상쟁으로 크게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마한의 대군에 쫓기던 진한 왕이 전쟁을 피하여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을 달궁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 한다.
노고단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반야봉을 구비구비 감돌아 흐르는 곳에 자리 잡았던 심원 달궁은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이고 보니 이곳이 소수로서 다수의 적을 막기에 천혜의 요지였다.
그 당시 진한 왕은 달궁을 방비하기 위하여 서쪽 10리 밖의 영(영) 마루에 정장군을, 동쪽 20리 밖의 영마루에 황장군을 , 그리고 남쪽 20리 밖의 산령에는 3명의 각성(각성) 바지 장군을, 또 북쪽 30리 밖의 높은 산령에는 8명의 젊은 장병을 배치하여 일당 백으로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 하여 정령재, 황령재, 성삼재, 팔랑재의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같은 전설의 고장 달궁 마을에도 이제 그 옛날의 궁터는 찾아볼 길 없다.
당동 고개
작은 고리봉이다.
이곳은 인증지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핸드폰을 켜보니 인증 지라 한다.
사람들의 헤드랜턴을 비추고서 인증을 하고 다음 만복대로 출발을 한다.
오늘은 만복대에서 일출을 보기로 계획하고 산행을 한다.
큰고리봉 (1305.4m)
위치 : 전북 남원시 운봉읍
능선 첫 봉우리는 ‘작은 고리봉(1,248m)’이다. 만복대 능선에는 고리봉이 두 개 있다.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중간지점쯤 백두대간 마루금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로 꺾이는 능선이 있다. 바로 그 능선이 고리봉이다. 성삼재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나오는 고리봉은 ‘작은 고리봉’으로 불러, 고리봉과 구별한다.
고리봉은 섬진강에서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그 높은 곳에 무슨 배를 묶은 고리가 있었을까 의아해하지만, 아무튼 현재까지 전하는 얘기다.
고리봉은 마한 당시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달궁마을뿐 아니라 인근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해 모셔왔다고 전한다. 수일 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제물은 대추, 밤, 곶감 등 삼실과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은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했다고 한다.
작은 고리봉 [ 還峰 ] (1248m)
위치 :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산 110-1
해발 1304m인 고리봉은 큰 고리봉과 작은 고리봉이 있다. 고리봉 하면 큰 고리봉을 말하는데, 일명 환봉이라 하며, 가을철 억새의 노란색과 은회색 그리고 참나무 잎의 주황색 빛이 마치 스펙트럼 같이 보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주변의 등산 코스로는 광활한 억새밭과 초원이 길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성삼재로 빠지는 것이 좋다.
정령치에서 출발하여 만복대, 고리봉을 거쳐 성삼재로 내려오는 이 코스는 3시간쯤이면 충분하므로 지리산까지 간 김에 가벼운 기분으로 산행을 즐길만하다.
다만 11월 초에 첫눈이 내릴 만큼 기온이 낮고 바람도 매섭게 부는 곳이므로 두툼한 스웨터와 방풍복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묘봉치인데 기억이 없다.
표지목이 있어서 잠시 사진으로 담았을 뿐.
별다른 표식도 내용도 없다. 아무래도 깜깜한 밤이라서 조망이 되지 않아 기억이 없는 듯하다.
묘봉치
위치 : 전남 구례군 산동면
고리봉 정상 비석 이어 묘봉치(1,108m)가 나온다. 만복대와 작은 고리봉 사이 고갯길이다. 묘소가 있는 봉우리라고 해서 묘봉치라고 부른다. 마루금은 이후부터 계속 치고 오른다. 만복대(1,433.4m)가 그 정점에 있다.
만복대(萬福臺)는 풍수지리적으로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마루금은 다시 내려간다. 정령치(鄭嶺峙․1,172m)에서 한숨 돌리듯 잠시 쉬어간다. 다시 고갯길이다. 한국에서 차가 다닐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인 만항재(1,330m) 다음으로 높은 곳으로 꼽힐 정도다. 정령치는 황령치와 함께 마한의 궁성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나 고갯길이 매우 넓어 주차장도 함께 마련돼 있다.
벌써 날이 밝아 온다.
이제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어서 가지고 산행을 한다.
아직 갈길은 먼데..!
앞에 사람들이 있어서 뒤만 따라가다 보니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앞사람들을 다 추월하면서 만복대로 향한다.
일출이 있을까..!
저 멀리 구름이 조금 있다.
결국 사람들을 앞질러서 만복대에 일출 시간을 맞춰서 도착을 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인증 사진을 담으려고 줄을 서고 있다.
아직 일출이 있지 않아서 줄을 서면서 기다렸는데 구름이 잔뜩 하여 일출은 볼 수 없었다.
너무 추워서 간단하게 풍경사진만 담고서 다음 정령치로 출발을 했다.
만복대[ 萬福臺 ] (1437m)
위치 :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
높이는 1,437m이다. 노고단(老姑壇:1,507m)·반야봉(盤若峰:1,732m)과 함께 지리산 국립공원의 서부를 구성하며, 소백산맥 중의 고산을 이룬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 전체가 부드러운 구릉으로 되어 있어 산 높이에 비해 산세가 부드러운 편이며, 고리봉(1,305m)까지 3km에 이르는 남능선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억새 군락지가 있어 주변의 정경과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정상에서는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1,915m) 등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북쪽에 있는 정령치(1,172m)와 남쪽에 있는 성삼재(1,090m) 고개에는 도로가 나 있어, 두 고갯마루를 잇는 당일 산행을 할 수 있다.
섬진강의 지류인 서시천(西施川)이 만복대의 서사면에서 발원한다. 인근 구례군의 산동면(山洞面)에 있는 온천관광지와 연계한 등 반지로서 찾는 이들이 많다.
지리산 서북능선에 있는 만복대 정상 봉우리와 돌탑.
팔랑재(혹은 팔랑치)는 조선시대에는 항상 국가에서 지켰다. 나랏 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했지만 남해로부터 침입해오는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다. 팔랑재에서 여원재까지 산성 만해도 상당했다고 전한다. 달의 경관이 좋은 인월(引月)에서 보면 팔랑치는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져 있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마한이 도성을 쌓은 곳이 달궁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다. 그 능선에 남은 억새들만 자취를 대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27년 마한 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기 9년의 일이다. 같은 <삼국사기>에서 온조왕 34년 마한의 장수 주근을 토벌했다는 기록과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시차는 조금씩 있지만 서기 100년 전에 마한은 역사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성삼재에서 지방도 861번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는 코스가 만복대 능선이다. 그것이 바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출발지점이기도 한 곳이다. 성삼재에서 작은 고리봉을 거쳐 묘봉치~만복대를 지나 정령치까지는 8㎞에 이른다.
만복대 정상에서 지리산 성삼재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만복대 능선은 기본적으로 마한의 토성으로 전한다. 지금도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조각이 고려시대 양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달궁마을이나 주변에서는 ‘마한 장군상’으로 부른다.
해가 뜨는 것은 아니지만 저 멀리서 쑥 하고 해가 머리만 내밀더니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일출의 아쉬움을 남기고서 다시 산행을 한다.
만복대까지는 꽃들이 없다.
연달래도 이것이 처음이고 또 철쭉도 없다.
또한 다른 야생화도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저곳에서 몇 명의 사람들에게 사진을 담아 주고서 연락처를 받았다. 집에 와서 어두운 화면을 조금 밝게 조절하고 다시 넘겨주었다.
드디어 정령치에 도착을 했다. 정령치에 도착을 했더니 우리 일행들이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사진을 담아준 일행도 같이 아침을 해결하고서 바로 출발을 했다. 혹시 야생화가 있을지 몰라서 조금 서둘러서 가야만 남들과 같은 시간에 야생화를 담으면서 산행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령치[ 鄭嶺峙 ] (1172m)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높이 1,172m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에 걸쳐 있는 지리산 국립공원의 고개로, 지방도 737번이 지나간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황령 암기( 黃嶺庵記)》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령치(鄭嶺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령치 고갯마루에 서면 동쪽으로는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성삼재와 왕시루봉, 서쪽으로는 남원시가지가 보여 전망이 뛰어나다. 정령치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서북쪽 능선을 타면 고리봉~세걸산~부운치~팔랑치~바래봉이 이어지고, 남쪽 능선을 타면 만복대~묘봉치~고리봉~성삼재로 연결된다.
올라가는 길에 병꽃과 함께 제비꽃들이 이곳저곳에 많이 있었다. 처음 보는 제비꽃인가 하여 찾아봤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하나는 아직 이름을 찾지 못했고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제비꽃은 여름에 피는 졸망 제비꽃인 것 같다.
저 아래가 정령치이다.
정말 정령치는 높은 산을 넘는 고개이다.
1천 고지를 넘은 산 능선길 꼭 대관령 길 같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에 제법 많은 철쭉이 피었다.
만복대에서 정령치 오는 능선도 참 이쁘다.
초록초록 5월이다 보니 온통 능선길이 초록이다.
묘봉치에서 바라본 지리산 쪽 모습이다.
어딜 봐도 탁 트인 조망에 이렇게 철쭉까지 정말 멋진 풍경이 아닌가 한다.
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멀리 만복대도 이쁘고 능선도 험하지 않고 평탄하게 좋은 듯하다.
고리봉에서 이렇게 저렇게 철쭉을 담고서 이제 본격적으로 서북능선과 이별을 하고서 백두대간길로 접어든다. 일부 일행들이 백두대간 길로 향하다 보니 모르는 사람이 이곳으로 가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서 여쭈어본다. 혹시 바래봉 가시는 것 아니냐고. 맞다고 한다. 헐..! 이 길은 백두대간 길인데. 그래도 조금 빠르게 알아서 다행이다. 정상에서 100m도 내려오지 않았으니 다시 올라가서 바래봉으로 향하면 되니까 말이다.
조금 가파른 돌길을 내려간다.
내려가는 동안에 일행을 만나서 같이 산행을 한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또 야생화가 보여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 보니 조금씩 늦어진다.
이곳은 참싸리가 많이 있고 또 이렇게 소나무 군락으로 숲이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 산은 거의 대부분 활엽수 인데 이렇게 소나무 군락을 보니 멋지기도 하고 좋다.
고기리로 하산을 하여서 이곳부터는 국도를 걸어야 한다. 백두 대간길도 어김없이 사람의 발길을 벗어나진 못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수정봉이고 그 아래 작은 마을이 노치마을이다.
저기까지 이렇게 국도를 걸어야 한다.
노치 마을에 도착을 했는데 제법 오래된 마을인가 보다.
마을에 있는 나무가 제법 오래된 것 같다.
노치마을
노치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 속하는 마으로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회덕리와 노치리를 병합하면서 회덕과 노치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턱 치리가 되었다.
노치마을은 덕음산. 지리산. 만복대 등의 산줄기의 높은 곳에 갈대가 많아 갈재라고 하다가 갈대노(蘆) 자를 사용하여 한자식 표기인 노치리가 되었다.
노치마을은 조선 전기에 경주정 씨와 경주 이 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는 수령 500년의 소나무가 위치하고 있어 백두대간을 찾는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대부분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고 있다.
노치마을 인근의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 일원에는 남원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전시관이 조성되어 20016년 4월 26일부터 개장하여 운영 중에 있다.
노치샘이라고 있는데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샘을 돌아서 산으로 등산로를 접어들면 이렇게 장송이 딱하니 자리 잡고 있다. 정말 멋진 소나무가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 멋지게 단체 사진을 담고서 수정봉으로 향했다.
사진으로 보니 웅장한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소나무 앞으로 가면 정말 크고 멋진 소나무이다.
위쪽에서 본 소나무 모습이다.
이곳 수정봉에 오르는 길에도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이 참 많이 있다.
덕운봉(742m)이라 한다. 덕운봉에 오르면 수정봉까지는 능선길을 걸으면 된다.
드디어 마지막 봉우리인 수정봉에 도착을 했다. 이곳에서 또다시 일행을 만나고서 사진을 인증하고 이제 하산을 한다.
수정봉[水晶峰](805.1/804.7m)
위치 : 전북 남원시 운봉읍
수정봉은 마치 학이 날개를 피고 날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수정봉의 노치마을에 옛날 민 씨(閔氏)라는 거지가 살았는데 그는 짚신을 삼아 팔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민 씨가 죽어 눈 덮인 산을 헤매어 시체를 매장하려는데 신기하게도 시체의 관이 알맞게 들어갈 만큼 눈이 녹아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용은 용인데 주인이 없다는 황룡 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이 묘를 쓴 뒤 그 후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묘에 호화롭게 석물을 세우고 보수를 한 뒤로는 자손들이 뜻밖에도 나쁜 일을 당해서 다시 석물들을 없앴더니 화가 없어졌다고 한다. 돌이 무거워 학이 날지 못했다는 것이다.
높이 804.7m로 운봉과 주천, 이백의 삼 개 읍면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봉우리로 남원에 들어선 백두대간은 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 치를 지나면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벌판 너머에 지리산 자락이 펼쳐진다.
『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 정간 13 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 분지 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가장 큰 백두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 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이 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
수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 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극적인 구간이 있는 이곳을 더욱 알려서 조상들의 정확한 분수계 설정과 백두대간의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수정봉은 운봉 분지를 에워싸는 북서 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 풍화된 남원 화강암의 운봉 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오랜 지질시대엔 정령치에서 구룡폭포로 빠지는 물줄기가 24번 국도를 따라 낙동강 쪽으로 흘러갔으나 급사면의 구룡천이 상류 쪽으로 심하게 침식이 진전되는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해 정령치 물줄기와 만나면서 정령치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어 구룡천으로 흘러들어 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하천이 흐르지 않는 구간이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계가 된 것이며 이를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 중분 수계(谷中分水界)로 보는 것이다.
다른 설명
수정봉은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양가리 경계에 있는 수려한 산으로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이백에서는 650m의 높은 산이 운봉읍 주촌리 서는 250m의 낮은 산이 된다.
입망 치를 사이로 양지 산성 남쪽에 위치한 수정봉은 운봉읍 주촌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로 두 개의 산봉우리를 포함하여 성의 평면 형태는 표주박 형태를 이룬다.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성의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족에 원형의 석축 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우무리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애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산길도 제법 평탄하고 이쁜 하산길이다.
소나무들이 즐비하고 험하지 않은 둘레길 같은 길이지만 그래도 몇 번을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이렇게 임도를 만나면 좌측 위쪽으로 주지사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가파른 절벽 위에 이쁘고 아담한 불상이 있다. 차에서 안내한 절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인 것 같다. 하산 지점 여원재에서 약 1km 못 미친 지점이다.
어찌어찌하여 절벽 정상의 주지봉에 올랐다. 주지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사방이 탁 트여서 조망이 정말 좋다. 그렇지만 오르는 길이 조금 험하여 조심해야 할 정도이다.
무등산은 보이는지 모르겠고 고리봉 쪽의 모습이다.
일전에 산행했던 아니 백두대간 첫날 산행을 했던 고남산이다. 그때에는 저 고남산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었는데. 얼마가 지났다고 이렇게 초록하다.
주지봉 암벽 정상에 있는 불경들이다.
수정봉에서부터 걸었던 능선길이다.
정상 바위 위에 있는 작고 아담한 불상이다.
저곳 저 바위 위에 불상이 있다. 또 내려올 때 잘못하여 주지사 쪽에 있는 밧줄을 타고서 길을 잘못 들었다. 방향이 이상하여 트랙을 확인해보니 길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내려가다 다시 올라와서 방향을 잡았다.
빨간 지붕 식당이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었다.
내가 조금 늦게 도착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다 점심을 먹고서 끝이난 상황이라서 난 차로 향해서 차에서 맛난 라면을 함께 하였다.
산행중 본 야생화
고비
노루발풀 (아직 개화전)
둥굴레
벌깨덩굴
삼색병꽃
붉은병꽃
섬노린재나무
애기나리
은방울꽃
졸방제비꽃
족두리풀
땅비싸리
땅비싸리는 키가 0.3~1M로 작고 아카시나무 꽃과 같이 생긴 연한 홍자색 꽃이 핀다.
싸리 중에서 가장 빨리 5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풀솜대
GPS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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