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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가니까야
전재성 역주
제1품 계행다발의 품
13. 세 가지 베다의 경 [Tevijjasutta]⁶⁷⁸⁾
바라문 학인 바쎗타와 바라드와자
1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오백 명의 많은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꼬쌀라 국을 유행하시면서 꼬쌀라 국의 바라문 마을 마나싸까따⁶⁷⁹⁾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그곳 마나싸까따 마을의 북쪽에 있는 아찌라바띠⁶⁸⁰⁾ 강변의 망고숲에 계셨다.
13.2
그 무렵 너무나 잘 알려진, 많은 바라문 부호들 곧, 바라문 짱끼, 바라문 따룩카, 바라문 뽁카라싸띠, 바라문 자눗쏘니, 바라문 또데이야와 너무나 잘 알려진 다른 바라문 부호들이 마나싸까따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다.⁶⁸¹⁾
678) DN. I. 235 : 장아함16 三明經(大正1 104c~107a) 참조
679) Manasākata : 이 경에만 등장하며, Smv. 399에 따르면, 유명한 바라문들이 때때로 이곳에 모여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구절(mantra)을 외우기도 했다.
680) Aciravatī : 히말라야 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Vin. Ⅱ. 237에 따르면, 오대강(panñcamahānadī)의 왕은 궁전에서 이 강을 볼 수 있었다.
681) Smv. 399에 따르면, 짱끼(Caṅkī)는 오빠싸다(Opasāda)에, 따룩카(Tārukkha)는 잇차낭갈라(Icchānaṅgala)에, 뽁카라싸띠(Pokkkharasāti)는 욱까타(Ukkaṭṭha)에, 자눗쏘니(Jāṇussoni)는 싸밧티(Sāvatthi)에, 또데이야(Todeyya)는 뚜디가마(Tudigāma)에 살았다. 이들은 마나싸까따(Manasākaṭa) 바라문 마을의 바라문 모임에서 높게 평가를 받았던 부처님과 동시대인의 저명하고 부유한 바라문들이었다. 이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성전의 구절을 외우기 위해 마나싸까따(Manasākaṭa)의 바라문들은 쾌적한 삶을 위해 강언덕에 집을 짓고 주위를 둘러싸고 다른 사람들의 침입을 막았으며, 자주 그곳에 가서 지냈다.
바라문 학인 바쎗타와 바라드와자
13.3
한편 바라문 학인 바쎗타⁶⁸²⁾와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⁶⁸³⁾는 산책을 하면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여러 가지 길에 대한 대화⁶⁸⁴⁾를 나누었다. 그 때 바라문 학인 바쎗타는 이와 같이 말했다.
[바쎗타]
“바라문 뽁카라싸띠가 설한 이것이야말로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⁶⁸⁵⁾
682) Vāseṭṭha : Smv. 399에 따르면, 바라문 뽁카라싸띠(Pokkkharasāti)의 제자로서 훌륭한 가문에 출생하여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자이다.
683) Bhāradvāja : Smv. 399에 따르면, 바라문 따룩카(Tārukkha)의 제자로서 훌륭한 가문에 출생하여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자이다.
684) maggāmagge kathā : Smv. 399에 따르면, 어떠한 길을 실천하면 행복한 하느님의 세계에 갈 수 있는지의 길(道)과 여타의 길(非道)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685) Smv. 400에 따르면,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해탈에 도움이 된다(niyyāṇikoniyyāti)’는 말은 ‘가는 것이 간다(gacchanto gacchati)’라는 말처럼 중복된 것이다. 역자주 :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즉, 범행(梵行)을 번역한 것으로 청정한 삶, 고결한 삶 등으로 번역할 수 있따. 범행에 대한 불교적 관점은 이 책(DN. I. 84)의 ‘청정한 삶’과 그 주석을 보라.
바라문 학인 바쎗타와 바라드와자
13.4
그러자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바라드와자]
“바라문 따룩카가 설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이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
바라문 학인 바쎗타는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를 결코 설득시킬 수가 없었고,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는 바라문 학인 바쎗타를 결코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13.5
그러자 바라문 학인 바쎗카는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에에 말을 건냈다.
[바쎗타]
“바라드와자여, 싸끼야 족의 아들로서 싸끼야 족에서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가 마나싸까따 마을에 있는 마나싸까따의 북쪽의 아찌라바디 강변의 망고 숲에 계십니다. 그 세존이신 고따마는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추신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부처님, 세상에 존귀한 님이다.’라고 훌륭한 명성을 드날리고 있습니다.
벗이여, 바라드와자여, 수행자 고따마를 찾아갑시다. 가까이 다가가서 수행자 고따마에게 그 취지를 말씀드리고 수행자 고따마가 우리에게 답변해주면 그것을 새겨보도록 합시다.”
[바라드와자]
“벗이여, 그렇게 합시다.”
바라문 바라드와자는 바라문 바쎗타에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길에 대한 대화
13.6
그래서 바라문 학인 바쎗타오 바라드와자는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바라문 학인 바쎗타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여기 저희들은 산책을 하면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여러 가지 길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와 같이 ‘바라문 뽁카라싸띠가 설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는 이와 같이 ‘바라문 따룩카가 설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이것에 관해서 이설이 있고 쟁론이 있고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13.7
[세존]
“바쎗타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바라문 뽁카라싸띠가 설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 학인 바라드와자는 이와 같이 ‘바라문 따룩카가 설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쎗타여, 여기 어떠한 것에 대해 이설이 있고 어떠한 것에 대해 쟁론이 있고 어떠한 것에 대해 다양한 설이 있다는 것입니까?”⁶⁸⁶⁾
13.8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여러 가지 길에 관한 것입니다.⁶⁸⁷⁾
존자 고따마시여, 이러한 바라문들 즉, 앗다리야파의 바라문들, 띳띠리야파의 바라문들, 찬도까파의 바라문들, 바바히릿짜파의 바라문들⁶⁸⁸⁾은 어떠한 다양한 길을 시설하더라도, 그 모든 길은 해탈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대로 실천하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예를 들어 마을이나 도시에 멀지 않은 곳에 다양한 길⁶⁸⁹⁾이 있다면, 그 모든 길이 마을로 통합니다. 이와 같이 존자 고따마시여, 이러한 바라문들, 앗다리야파의 바라문들, 띳띠리야파의 바라문들, 찬도까파의 바라문들, 바바히리짜파의 바라문들은 어떠한 다양한 길을 시설하더라도, 그 모든 길은 해탈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대로 실천하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686) Smv. 400에 따르면, “당신도 ‘이것만이 길이다.’라고 자신의 스승의 이론을 고집하고 있다. 바라드와자도 또한 자신의 스승의 이론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자에게도 어느 것에도 의심이 없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쟁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뜻이다.
687) Smv. 401에 따르면, 곧바른 길이냐 아니냐의 분제이다. 바쎗타는 “어떠한 바라문의 길도 ‘길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스승의 길이 곧바른 길이듯,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688) Daṭ. I. 520에 따르면, ‘앗다리야’는 야주르베다(Yajurveda)를 신봉하는 자를 말하고, ‘띳띠리야(Taittirīya)’는 흑(黑)-야주르베다(Yajurveda)를 신봉하는 자를 말하고, ‘찬도까’는 싸마베다(Sāmaveda)를 신봉하는 자들이고, 바바히릿짜는 리그베다(Rgveda)를 신봉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바바히리싸(vavahiricā)는 bavhiricā, chandāvā, brhmacariyā, bavhārijjhā, bavharidhā로도 표기된다.
689) nānāmaggāni : Smv. 401에 따르면, 크고 작은 인도나 차도 등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마을이나 하천이나 못이나 밭 등을 거쳐서 와서 마을로 들어오는 통로를 말한다.
13.9
[세존]
“바쎗타여, 그대는 인도한다고 말합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세존]
“바쎗타여, 그대는 인도한다고 말합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세존]
“바쎗타여, 그대는 인도한다고 말합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13.10
[세존]
“그런데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⁶⁹⁰⁾에 능통한 바라문 가운데 어떠한 한 바라문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없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없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성직자들 가운데 옛 선인들은 성전을 쓰고 전했고, 지금의 성직자들은 그 성전이 외어지고 설해져서 모아진 것을 따라서 외우고 따라서 설하고, 그 설해진 것을 따라서 설하고 가르쳐진 것을 따라서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앗타까, 바마까, 바마데바, 벳싸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싸, 바라드와자, 바쎗타, 깟싸빠, 비구와 같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도 ‘어디에 하느님이 있는지, 어떻게 하느님이 있는지 어느 곳에 하느님이 있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본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없습니다.”
690) tevijjā : 세 가지 베다는 리그베다(Rgveda), 야주르베다(Yajurveda), 사마베다(Sāmaveda)를 말한다.
13.11
[세존]
“그렇다면 참으로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 가운데 어떠한 한 바라문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일곱 세대 이전의 스승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바쎗타여, 성직자들 가운데 옛 선인들은 성전을 쓰고 전했고, 지금의 성직자들은 그 성전이 외어지고 설해져서 모아진 것을 따라서 외우고 따라서 설하고, 그 설해진 것을 따라서 설하고 가르쳐진 것을 따라서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앗타까, 바마까, 바마데바, 벳싸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싸, 바라드와자, 바쎗타, 깟싸빠, 비구와 같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도 ‘어디에 하느님이 있는지, 어떻게 하느님이 있는지 어느 곳에 하느님이 있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본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을 설한다.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길이다.’라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12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세존]
“바쎗타여, 그렇습니다. 바쎗타여.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로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설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봉사의 비유
13.13
[세존]
“바쎗타여,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⁶⁹¹⁾ 앞에 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듯, 이와 같이 바쎗타여, 생각건데 그들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들이 설한 것은 봉사들이 줄을 선것과 같이 앞에 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들이 설한 것은 단지 웃음거리이고, 이름뿐인 것이고, 공허한 것이고, 허망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691) andhaveṇi : Smv. 401에 따르면, 한 눈을 가진 자의 지팡이 끝을 봉사가 붙잡는다. 그 봉사를 별도의 눈을 보지 못하는 자가 붙잠는 방식으로 오십 내지 육십 인의 눈을 볼 수 없는 자가 순차적으로 연결할 경우의 열을 말한다. 이때 눈을 가진 자는 제외하고 남은 열을 말한다.
13.14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⁶⁹²⁾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달이나 해가 뜨거나 지면, 달이나 해를 보고 기원하고 찬양하고 합장하고⁶⁹³⁾ 순례합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달이나 해가 뜨거나 지면, 달이나 해를 보고 기원하고 찬양하고 합장하고 순례합니다.”
13.15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달이나 해가 뜨거나 지면, 달이나 해를 보고 기원하고 찬양하고 합장하고 순례하는데, 그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달이나 해와 함께 사는 길로서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달이나 해와 함께 사는 길이다.’라고 가르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692) Smv. 402에 따르면, 삼베다에 정통한 자들이 예전에 보지 못한 하느님의 세계가 지금 있는지 또한, 삼베다를 통한 자들이 보고 있는 달이나 태양에 관해서도 그것들과 함께 가는 길이 있는지를 설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느가라고 묻는 것이다.
693) Smv. 402에 따르면, ‘기원하고’는 ‘달님이여, 떠오르소서. 햇님이여, 떠오르소서.’라고 기원하는 것을 말하고, ‘찬양하고’는 ‘달은 아름답다. 달은 둥글다. 달은 빛난다.’라고 찬탄하는 것을 말하고, ‘합장하고’는 합장하여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미녀의 비유
13.18
[세존]
“바쎗타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이 나라에서 단지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원하고 갈망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에게 ‘이 사람아, 그대가 원하고 갈망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가 왕족인지 바라문인지 평민이지 노예인지 아는가?’라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물으면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이와 같이 ‘이 사람아, 그대가 원하고 갈망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가 이러한 이름 이러한 성이나, 크기나 작거나 중간이지나, 피부가 검은지 황색인지 갈색인지 또는 어느 마을이나 읍면이나 도시에 있는지 아는가?’라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물으면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이와 같이 ‘이 사람아,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 못한 사람을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3.19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말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바쎗타]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말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마녀의 비유
13.20
[세존]
“이와 마찬가지로 바쎗타여,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 가운데 어떠한 한 바라문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일곱 세대 이전의 스승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바쎗타여, 성직자들 가운데 옛 선인들은 성전을 쓰고 전했고, 지금의 성직자들은 그 성전이 외어지고 설해져서 모아진 것을 따라서 외우고 따라서 설하고, 그 설해진 것을 따라서 설하고 가르쳐진 것을 따라서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앗타까, 바마까, 바마데바, 벳싸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싸, 바라드와자, 바쎗타, 깟싸빠, 비구와 같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도 ‘어디에 하느님이 있는지, 어떻게 하느님이 있는지 어느 곳에 하느님이 있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본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을 설한다.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길이다.’라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21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13.22
[세존]
“바쎗타여, 그렇습니다. 바쎗타여.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라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설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사다리의 비유
13.23
[세존]
“바쎗타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거리에서 누각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만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에게 ‘이 사람아, 그대는 누각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만드는데, 그 누각이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위나 아래나 중앙에 있는지 아는가?’라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물으면 그는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이와 같이 ‘이 사람아,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 못한 누각을 오르기 위해서 사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3.24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말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바쎗타]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말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13.25
[세존]
“이와 마찬가지로
바쎗타여,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 가운데 어떠한 한 바라문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일곱 세대 이전의 스승의 스승들 가운데 어떠한 한 스승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바쎗타여, 성직자들 가운데 옛 선인들은 성전을 쓰고 전했고, 지금의 성직자들은 그 성전이 외어지고 설해져서 모아진 것을 따라서 외우고 따라서 설하고, 그 설해진 것을 따라서 설하고 가르쳐진 것을 따라서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앗타까, 바마까, 바마데바, 벳싸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싸, 바라드와자, 바쎗타, 깟싸빠, 비구와 같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도 ‘어디에 하느님이 있는지, 어떻게 하느님이 있는지 어느 곳에 하느님이 있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본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을 설한다.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길이다.’라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26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13.27
[세존]
“바쎗타여, 그렇습니다. 바쎗타여. 참으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라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고 이것이야말로 해탈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이다.’라고 설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아찌라바띠 강의 비유
13.28
[세존]
“바쎗타여, 예를 들어, 아찌라바띠 강이 물이 가득 차서 둑으로 넘쳐 까마귀가 마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쪽 언덕을 바라고 저쪽 언덕을 구하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고자 하여 여기에 옵니다. 그리고 그가 이쪽 언덕에 서서 ‘저쪽 언덕이여, 이쪽 언덕으로 오라. 저쪽 언덕이여, 이쪽 언덕으로 오라.’라고⁶⁹⁴⁾ 호소합니다.
바쎗타여, 어떻게 생가합니까? 그 사람이 호소한다고 해서 소청한다고 해서 환영한다고 해서 아찌라바띠 강의 저쪽 언덕이 이쪽 언덕으로 오겠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13.29
[세존]
“바쎗타여, 이와 같이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바라문이 실천하는 원리가 있는데,⁶⁹⁵⁾ 그러한 원리를 버리고 바라문이 아닌 자가 실천하는 원리⁶⁹⁶⁾를 획득하여 행하면서 이와 같이 ‘인드라 신에게 호소합니다. 쏘마 신에게 호소합니다. 바루나 신에게 호소합니다. 이싸나 신에게 호소합니다. 빠지빠띠 신에게 호소합니다. 하느님에게 호소합니다. 마힛디 신에게 호소합니다. 야마신에게 호소합니다.’⁶⁹⁷⁾라고 말합니다.
바쎗타여, 그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바라문이 실천하는 원리가 있는데, 그러한 원리를 버리고 바라문이 아닌 자가 실천하는 원리를 획득하여 행하면서 이와 같이 호소한다고 해서 소청한다고 해서 환영한다고 해서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694) Smv. 402에 따르면, ‘저쪽 언덕이여, 이쪽 언덕으로 오라. 그리고 나를 붙잡아서 가게 해 달라. 나에게는 급한 용무가 있다.’라는 뜻이다.
695) Smv. 402에 따르면, 다섯 가지 계행(五戒)과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길[十善業道 : dasa kuslakammapathā] - ①불살생(不殺生) ②불투도(不偸盜) ③불사음(不邪婬) ④불망어(不妄語) ⑤불양설(不兩舌) ⑥불기어(不綺語) ⑦불악구(不惡口) ⑧불탐(不貪) ⑨부진(不瞋) ⑩정견(正見) –을 말한다.
696) Smv. 402에 따르면, 다섯 가지 계행(五戒)과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길[十善業道 : dasa kuslakammapathā]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697) 바라문교의 신들로 인드라 신은 뢰정신(雷霆神), 쏘마신은 쏘마酒神(쏘마주신, 月天)이고, 바루나 신은 사법신(司法神, 水天)이고, 이싸나 신은 자재천(自在天)이고, 빠지빠띠 신은 생주신(生主神)이고, 하느님은 범천(梵天)이고, 마힛디 신은 대위력신(大威力神)이고, 야마 신은 사신(死神)인 염마천(閻魔天)이다.
13.30
[세존]
“바쎗타여, 예를 들어,⁶⁹⁸⁾ 아찌라바띠 강이 물이 가득 차서 둑으로 넘쳐 까마귀가 마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쪽 언덕을 바라고 저쪽 언덕을 구하고 저쪽 언덕으로 가고자 하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고자 하여 여기에 옵니다.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아찌라바띠 강의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갈 수 없습니다.”
13.31
[세존]
“이와 마찬가지로 바쎗타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고귀한 계율에서 사슬이라고 불리고 족쇄라고 불립니다. 다섯 가지란 무엇입니까? 곧,
1) 시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원하는 것이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현상,
2) 청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원하는 것이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소리,
3) 후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원하는 것이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냄새,
4) 미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원하는 것이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맛,
5) 촉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원하는 것이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감촉이 있습니다.
바쎗타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고귀한 계율에서 사슬이라고 불리고 족쇄라고 불립니다.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묶이고 홀리고 탐닉하고 위험을 보지 못하고 여읨의 지혜가 없이 그것들을 즐깁니다.⁶⁹⁹⁾
바쎗타여, 그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바라문이 실천하는 원리가 있는데, 그러한 원리를 버리고 바라문이 아닌 자가 실천하는 원리를 획득하여 행하면서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묶이고 홀리고 탐닉하고 위험을 보지 못하고 여읨의 지혜가 없이 그것들을 즐긴다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사슬에 매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698) Smv. 403에 따르면, 이처럼 바라문들의 호소가 무의미한 것임을 설명하고 다시 세존께서는 바다에 태양이 빛나는 것처럼 오백 명의 수행승에 둘러싸여 아찌라바디 강 언덕에 앉아서 강의 비유를 들어 마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699) Smv. 403에 따르면, ‘묶이고’는 탐욕에 정복된 것을 뜻하고, ‘홀리고’는 혼미에 도달하여 극단적인 갈애에 사로잡힌 것을 뜻하고, ‘탐닉하고’는 가라앉는 것을 뜻하고, ‘위험을 보지 못하고’는 재난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고, ‘여읨의 지혜가 없이’는 ‘이것이 여기서 욕망의 여읨이다.’라고 완전히 아는 지혜가 없고, 성찰에 의한 수용(paccavekkhanaparibhoga)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13.32
바쎗타여, 예를 들어, 아찌라바띠 강이 물이 가득 차서 둑으로 넘쳐 까마귀가 마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쪽 언덕을 바라고 저쪽 언덕을 구하고 저쪽 언덕으로 가고자 하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고자 하여 여기에 옵니다. 그런데 그가 이쪽 언덕에서 머리가 덮힌 채로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아찌라바띠 강의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바쎗타]
“세존이시여, 갈 수 없습니다.”
13.33
[세존]
“이와 마찬가지로 바쎗타여, 다섯 가지 장애는 고귀한 계율이 덮개라고도 불리고 장애라고도 불리고, 가리개라고도 불리고, 씌우개라고도 불립니다.
다섯 가지란 무엇입니까?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의 장애,
분노의 장애,
해태와 혼침의 장애,
흥분과 회한의 장애,
의심의 장애입니다.
바쎗타여,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는 고귀한 계율에서 덮개라고도 불리고, 가리개라고도 불리고, 씌우개라고도 불립니다.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로 덮히고, 막히고, 가려지고, 씌어있습니다.
바쎗타여, 그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바라문이 실천하는 원리가 있는데, 그러한 원리를 버리고 바라문이 아닌 자가 실천하는 원리를 획득하여 행하면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장애로 덮히고, 막히고, 가려지고, 씌어있다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교류
13.34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령이고 고령인 스승들의 스승들인 바라문들이 말할 때에 이와 같이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은 소유를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소유를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소유를 여읜 자입니다.”
[세존]
“마음에 원한을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마음에 원한을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원한을 여읜 자입니다.”
[세존]
“마음에 분노를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마음에 분노를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분노를 여읜 자입니다.”
[세존]
“마음에 오염을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마음에 오염을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오염을 여읜 자입니다?”
[세존]
“자재한 자입니까 자재하지 못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자재한 자입니다.”
13.35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소유를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까 소유를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소유를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존]
“마음에 원한을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까 마음에 원한을 여읜 자들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원한을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존]
“마음에 분노를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까 마음에 분노를 여읜 자들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분노를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존]
“마음에 오염을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까 마음에 오염을 여읜 자들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오염을 여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존]
“자재한 자들입니까 자재하지 못한 자들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자재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13.36
[세존]
“이처럼 참으로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소유를 여의지 못했고 하느님은 소유를 여의었습니다. 그런데 소유를 여의지 못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소유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소유를 여의지 못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소유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교류
13.37
[세존]
“이처럼 참으로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마음에 원한이 있고 하느님은 마음에 원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원한을 여의지 못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마음에 원한을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바쎄타여, 옳습니다. 마음에 원한이 있는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마음에 원한이 없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10.38
[세존]
“이처럼 참으로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마음에 분노가 있고 하느님은 마음에 분노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분노가 있는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마음에 분노가 없는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는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몸기 파괴되고 죽은 뒤에 마음에 분노가 없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10.39
[세존]
“이처럼 참으로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마음에 오염이 있고 하느님은 마음에 오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오염이 있는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마음에 오염이 없는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마음에 오염이 있는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마음에 오염이 없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13.40
[세존]
“이처럼 참으로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자재하지 못하고 하느님은 자재합니다. 그런데 자재하지 못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자재한 하느님과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자재하지 못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자재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13.41
“바쎗타여, 그들 세 가지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여기에 접근하여 빠지고, 빠진 뒤에 낙담하고, 마른 땅이라고 생각하여 건너는 것입니다.⁷⁰⁰⁾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소유한 그 세 가지 베다는 황야라고 불리고, 그 세 가지 베다는 밀림이라고 불리고, 그 세 가지 베다는 재앙이라고도 불립니다.”⁷⁰¹⁾
700) Smv. 404에 따르면, ‘여기에’는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라는 뜻이다. ‘접근하여’는 ‘길 아닌 것을 길이라고 접근하여’라는 뜻이고, ‘빠지고’는 평지라고 생각했는데 진흙탕에 빠지는 것을 뜻하고, ‘낙담하고’는 몸의 사지가 파괴되는 것을 뜻하고, ‘마른 땅이라고 생각하여 건넌다.’는 것은 ‘환영의 몸으로 기만하여 까마귀가 물을 마실 수 있는 강물이라고 생각하고 건너자.’라는 뜻이다.
701) Smv. 404에 따르면, ‘황야’는 마을이 없는 큰 한적한 숲을 말하고, ‘밀림’은 꽃과 열매를 누릴 수 없는 나무로 뒤덮인 물이 없고, 길 밖으로는 돌아다닐 수 없는 숲을 말하고, ‘재앙’은 다섯 가지의 재앙을 뜻하는데, 그것은
① 친지(의 잃음),
② 질병,
③ 재산(의 잃음),
④ 견해,
⑤ 계행(의 잃음)의 재난을 만난 자에게 행복이 없는 것을 말한다.
13.42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바라문 학인 바쎗타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저는 수행자 고따마께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을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마나씨까따 마을까지는 가까우니 먼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여기서 마나씨까따 마을까지는 가까우니 먼 것은 아닙니다.”
13.43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떤 사람이 마나씨까따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 그가 마나씨까따 마을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길을 묻는다고 합시다.⁷⁰²⁾
바쎗타여, 그 마나씨까따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에게 마나씨까따 마을로 가는 길을 물으면, 우불쭈물하거나 곤혹스러워 하겠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존자 고따마시여, 그 사람은 마나씨까따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마나씨까따 마을의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13.44
[세존]
“바쎗타여, 설사 그 마나씨까따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에게 마나씨까따 마을로 가는 길을 물으면, 우물쭈물하거나 곤혹스러워 할 수 있어도, 여래에게 하느님의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로 이끄는 길에 대해 물으면, 우물쭈물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습니다.⁷⁰³⁾ 나는 하느님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로 이끄는 길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고, 그 길을 실천하는 대로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702) Smv. 405에 따르면, 태어나서 또한 성장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다른 곳에서 성장한 자는 그 마을의 길을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태어나 성장했더라도, 오래 나가 있으면, 모두 분명하게 알지 못하므로 ‘나오자마자’라고 덧붙인 것이다.
703) Smv. 405에 따르면, 이 말은 여래의 일체지지(一切知智 : sabbaññutañāṇa)는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사람에게는 악마의 유혹이 있기 때문에 지혜의 장애가 있어 우물쭈물하거나 곤혹스러워한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
13.45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바라문 바쎗타는 이와 같이 말했다.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저는 수행자 고따마께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을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에 대하여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바라문의 무리를 구제하여 주십시오.”
[세존]
“바쎗타여, 그렇다면 듣고 잘 새기십시오. 내가 말하겠습니다.”⁷⁰⁴⁾
[바쎗타]
“존자여, 알겠습니다.”
바라문 학인 바쎗타는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대답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
13.46
[세존]
“바쎗타여, 세상에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추신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이해하는 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부처님, 세상에 존귀한 님이 출현합니다. 그는 이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 관해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칩니다. 그는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삼을 가르칩니다.
704) Smv. 405에 따르면, 세존께서는 그에게 부처님의 출현을 보이고, 앞부분에서 계행의 실천과 자애의 닦음을 비롯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가르치기 위해 이와 같이 말했다.
13.47
그래서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종족의 출신자가 그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 여래에 대한 확신을 얻습니다. 여래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그는 '집에서 사는 것은 번잡하고 티끌로 가득 차 있지만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과 같다. 집에서 사는 자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 자, 나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는 것이 어떨까?'라고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그는 나중에 작은 재물을 버리고, 또는 큰 재물을 버리고, 그리고 적은 친지를 버리고, 또는 많은 친지를 버리고, 가사를 걸치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해서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지켜서 행동범주를 완성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 착하고 건전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갖추고, 청정한 삶을 추구하고 계행을 구족하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의 알맞은 분량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어 만족하게 지냅니다.”
13.80
[세존]
“바쎗타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⁷⁰⁷⁾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⁷⁰⁸⁾ 모든 곳을 빠짐없이⁷⁰⁹⁾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바쎗타여,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⁷¹⁰⁾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힘센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
706) ‘네 가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cattāro brahmavihārā : 四梵住)’을 말한다. 네 가지 청정한 삶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 : cattasso appamaññayo) 즉, 한량없는 자애의 삶(慈無量住), 한량없는 연민의 삶(悲無量住), 한량없는 기쁨의 삶(喜無量住), 한량없는 평정의 삶(捨無量住)을 말한다.
707) 원래는 ‘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두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고, 세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고,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고’라는 말인데, 역자가 의역을 한 것이다. vism.308에 따르면, 한쪽 방향에 최초에 포착되는 한 뭇삶을 취해서 한쪽 방향에 포함되는 뭇삶들에게 가득 채운다는 뜻이고, 방향은 동쪽 등의 방향의 어는 한 방향을 의미한다.
708) vism.308에 따르면, ‘상방으로, 하방으로, 사유(四維)로’를 의미한다.
709) 원래 ‘모든 곳에 모든 경우’에 라는 뜻이다. 싱할리본이나 미얀마본에서 ‘sabbatthatāya’는 ‘sabba’attatāya’로 읽는다. ‘sabba’attatāya’로 읽으면, 완전히 다른 번역이 된다. 즉, Lba. Ⅲ. 64에서는 ‘모든 방향으로 자신을 다시 인식하면서’라고 독역하고 있고, 비구 보디는 Cdb. 1325에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곳에’라고 영역하고 있다. vism.352에서는 ‘저열하거나 중간이거나 수승하거나 적대자이거나 친구이거나 동등한 자이거나 모든 존재를 자신을 바라보듯이’라고 해석한다.
710) Pps. Ⅲ. 450에 다르면, 감각적인 쾌락의 영역(kāmāvacara)에 관련된 한계 지어진 행위(pamāṇakataṃ kammaṃ)와 대조가 된다. 이 경우에 선정의 단계까지 고양된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 미세한 물질적인 세계나 비물질적인 세계와 관련된 선정이 성취되면, 감각적인 쾌락의 영역에 관련된 행위가 선정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 업보를 낳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미세한 물질적인 세계나 비물질적인 세계와 관계된 행위가 감각적인 쾌락의 세계의 행위를 지배하여 그 결과를 낳는다. 감각적 쾌락의 세계의 행위의 결과를 차단하고, 그가 닦은 거룩한 삶이 그를 하느님 세계로 이끈다.
13.81
바쎗타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연민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바쎗타여, 연민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
쎗타여, 힘센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연민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
13.82
바쎗타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기쁨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기쁨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바쎗타여, 기쁨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힘센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기쁨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
13.83
바쎗타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평정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정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바쎗타여, 평정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힘센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평정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
13.84
[세존]
“바쎗타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와 같이 살아가는 수행승은 소유를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소유를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소유를 여읜자입니다.”
[세존]
“마음에 원한을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마음에 원한을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원한을 여읜자입니다.”
[세존]
“마음에 분노를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마음에 분노를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분노를 여읜자입니다.”
[세존]
“마음에 오염을 여의지 못한 자입니까 마음에 오염을 여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마음에 오염을 여읜자입니다.”
[세존]
“자재한 자입니까 자재하지 못한 자입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자재한 자입니다.”
13.85
[세존]
“이와 같이 참으로 바쎗타여, 수행승도 소유를 여의고 하느님고 소유를 여의었습니다. 소유를 여읜 수행승이 소유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바쎗타여, 그 소유를 여읜 수행승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소유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타당합니다.”
13.86
[세존]
“이와 같이 참으로 바쎗타여, 수행승도 원한을 여의고 하느님도 원한을 여의었습니다. 원한을 여읜 수행승이 원한을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바쎗타여, 그 원한을 여읜 수행승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원한을 여읜 하느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타당합니다.”
13.87
[세존]
“이와 같이 참으로 바쎗타여, 수행승도 분노를 여의고 하느님도 분노를 여의었습니다. 분노를 여읜 수행승이 분노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바쎗타여, 그 분노를 여읜 수행승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분노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타당합니다.”
13.88
[세존]
“이와 같이 참으로 바쎗타여, 수행승도 오염을 여의고 하느님도 오염을 여의었습니다. 오염을 여읜 수행승이 오염을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바쎗타여, 그 오염을 여읜 수행승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오염을 여읜 하느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타당합니다.”
13.89
[세존]
“이와 같이 참으로 바쎗타여, 수행승도 자재하고 하느님도 자재합니다. 소유를 여읜 수행승이 소유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교류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그렇습니다.”
[세존]
“바쎗타여, 옳습니다. 바쎗타여, 그 소유를 여읜 수행승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소유를 여읜 하느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타당합니다.”
13.90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바라문 학인 바쎗타와 바라드와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바쎗타와 바라드와자]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조이신 고따마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희들은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⁷¹¹⁾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
711) Smv. 이들은 두 번 귀의했다. 첫 번째는 맛지마니까야의 바쎗타의 경[Vaseṭthāsutta: MN.98]에서 귀의했고, 또한 이 세 가지 베다의 경[Tevijjasutta: DN.13]에서 두 번째 귀의한 것이다. 며칠 후에 출가하여 세계 기원에 대한 경[Aggaññasutta: DN.27]에서 구족계를 받고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세 가지 베다의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