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행일기(北行日記)아주신씨(鵝洲申氏)
신해진 (申海鎭)
서명 | 북행일기 : 北行日記 |
원서명 | 北行日記 |
저/편자 | 나덕헌 (羅德憲 , 1573 ~ 1640) 지음 |
저작시기 | 17 세기 |
분류사항 | 사부(史部) 잡사류(雜史類) |
번역대본 | |
원문판수 | |
항x자 | |
역자 | 신해진 (張裕昇 , 1959 ~ ) |
교열 | |
윤문 | |
해제작성 | |
색인/탈초작성 | |
번역주관기관 | 보고사 |
발행지 | 파주 |
발행처 | 보고사 |
발행년도 | 2020 |
초판발행년도 | 2020 |
형태사항 | 214 p. ; 20 cm. |
ISBN | 979-11-6587-060-7. 93910 |
총서사항 | |
번역형태 | 편역 |
원문수록방식 | 혼재 조판 수록ㆍ권말 영인 수록 |
판형 | 국판 변형 (201×145) |
번역문형태 | 한자병기 |
번역서본문(면) | 124 |
원문(면) | 71 |
주석(개) | 202 |
기타 | 머리말, 일러두기, 찾아보기, 영인자료 수록 |
1636년 2월 9일부터 4월 29일까지약 3개월간 중국 심양(瀋陽)에 춘신사(春信使)로 갔을때의 일을 거의 매일 기 록하고 있다 당시 사신을 간 경로는 평양(平壤), (安州), 숙천(肅川), 가산(嘉山), 정주(定州), 용천(龍川), 백마성(白馬城), 의주(義州), 사하보(沙河堡), 심양성(瀋陽城)이다
이 일기는 크게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월 3월의 일기는 평양에서 청나라로 가지전인 국내의 상황 즉 평양에서 물품을 준비하고 청나라의 사신과 의견 충 돌을일으키는 일 및 청나라에 도착하기 전의 일과 여정을 기록했다 4월에는 국외 즉 청나라 국경에 들어가심양성 에 가면서 겪었던 일과 심양성에 도착한 뒤 경축 반열에 참석하라는 명을 거부해 모진 고초를 당하는 장면을 아주 사 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특히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과 갓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수난을 당하고 거듭되는 고초 속에서도 회유를 시종거부하는 작자의 불굴의 모습에서 진정한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목차보기
머리말 –3
일러두기 –8
북행일기北行日記
1636년 2월 –13
2월 9일 -13
2월 16일 -13
2월 17일 –14
2월 18일 -15
2월 19일 -18
2월 20일 –23
2월 21일 –24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25
2월 29일 –25
2월 30일 –26
1636년 3월 –27
3월 1일 –27
3월 2일 –27
3월 3일 –28
3월 4일 –28
3월 5일 -29
3월 6일 –29
3월 7일 –31
3월 8일 –34
3월 9일 –35
3월 10일 –36
3월 11일 –37
3월 12일 –38
3월 13일 -39
3월 14일 –40
3월 15일 –45
3월 16일 –46
3월 17일 –47
3월 18일 –47
3월 19일 –48
3월 20일 –48
3월 21일 –49
3월 22일 -49
3월 23일 –51
3월 24일 –52
3월 25일 –53
3월 26일 –54
3월 27일 –55
3월 28일 –56
3월 29일 –56
1636년 4월 –58
4월 1일 –58
4월 2일 -59
4월 3일 –60
4월 4일 –60
4월 5일 –62
4월 6일 –62
4월 7일 –70
4월 8일 -73
4월 9일 –74
4월 10일 –75
4월 11일 –77
4월 12일 –87
4월 13일 –92
4월 14일 –96
4월 15일부터 23일까지 –96
4월 24일 –97
4월 25일 –98
4월 26일 -101
4월 27일 –101
4월 28일 –102
4월 29일 –103
참고자료 –109
나덕헌 | 윤행임 –108
나덕헌전 | 홍경모 –119
찾아보기 –137
[영인자료]
북행일기北行日記 -216
나덕헌 –166
나덕헌전 -156
나덕헌(羅德憲)
조선시대 창성부사, 의주부윤, 삼도통어사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羅士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했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해 여러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이확(李廓)과 심양에 도착했다.
이 때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우리 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했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해도 시종 거부하다가,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받지 않았다.
100여 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 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고 논핵했다.
영의정 김류(金瑬)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