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박천이란 곳이었어요. 이북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아버지는 장사에 이골에 나 있던 터였습니다. 만주까지 오가며 주로 아편을 취급했다는데, 그래 그런지 중국어 실력이 대단했어요. 그런 와중에 동란이 터졌죠. 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을 온 게, 제가 열 살 때였어요. 저기 저 보수동 책골목 위의 산이 보이죠. 저 산이 복병산입니다. 저기 천막촌에 처음 피란 와 살았지요. 그때야 뭐 복병산 일대에 죄다 피란민들이 루핑으로 집을 지어 살 때였으니 사는 게 별반 차이가 없었죠. 그러니 가난이라는 게 지금처럼 부끄럽지도 않았어요. 피란 와서 집 근처에 있는 제동국민학교에 들어갔어요. 근데 나중에 남일국민학교와 합쳐졌지요. 남일초등학교 자리는 원래 삼육구병원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 제가 그 주변에 살았으니까 잘 알아요. 병원에서 팔 떨어지고 죽은 시신들 엄청 봤죠. 근데 하필 그 건물을 보수해 들어갔으니 기분 찜찜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특히 비 오고 어두운 날에는 아이들이 귀신 나온다고 화장실도 못 갔어요.
열 살 때 평북 박천서 피란 왔지. "이북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
하고 놀려댔으니 이북 억양이 없을 수밖에…. 그때는 외제를 파는 게 불법이라
그냥 박스에 좀 넣어와 바닥에 놓고 팔다가 단속 뜨면 도망치곤 했지.병원 보수한 학교 비 오면 무서워
말투에 이북 억양이 없다고요? 그럴 수밖에요. 생각해보세요. "이북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하며 놀려대니 저도 친구들이랑 어울리려면 할 수 없죠. 제가 워낙 활달해 친구들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했거든요. 집에서야 식구들이 죄다 이북말 쓰니 따라 쓰지 않을 수 없었지만 친구들이야 전부 부산 얘들이니 이중 언어생활을 안 할 수 있나요? 덕분에 의도적으로 부산 말투를 익히는 바람에 지금은 피란 2세대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해요. 어디 가도 보수동 토박이인 줄 안다니까요?
우리 아버지 사업 수완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했어요, 담도 되게 컸구요. 젊은 나이에 장사를 했으니 이미 이골이 나 있던 셈이었죠. 그러니 피란 와서도 여기 깡통시장 일대에서 물건도 제일 잘 팔았고 수입도 제일 좋았겠지요. 피란시절 때만 해도 이곳에서 '보초' 하면 다 알 정도였다니까요. 아, 보초는 아버지의 별명이었거든요. 어스름에는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산타클로스처럼 돈 가마니를 메고 집에 올 정도였습니다. 그때 번 돈으로 땅을 샀다면 부산을 다 샀을 겁니다. 어머니도 그래요, 정말 사업 수완 하나는 끝내줬다고요. 원래 장사란 게 그렇잖아요, 불법이니 이익이 많다는 거. 외제 자체가 불법이니 이문은 엄청났겠죠. 근데 수중에 돈 있으니 그런지 몰라도 한량이 되고 바람을 피우고 노름까지 해댔습니다. 어머니가 고집을 부려 지금 시장 안에 이 건물이라도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길바닥에 나앉았을 겁니다. 게다가 노름해서 망해 먹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 만남도 이루어지기 어려웠겠죠, 하하하.
떼돈 번 아버지 한량 되고 말아
아버지 돌아가신 지는 하마 21년짼가 그래요. 세월이 이리 흘러 그런지 아버지 얼굴도 잊었는데도 그 칼칼하던 성격이 내지르는 목소리만큼은 잊혀지질 않아요. '사바사바' 잘하지, 과단성 있지, 통 크지, 그러니 우리 엄마가 고역이었지요. 뭐라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이유 없이 뻑하고 고함부터 지르고 봐요. 그런다고 돈이라도 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되레 두들겨 패는 게 일이었는걸요, 뭐. 솔직히 술 먹고 행패 부리는 그런 아버지가 싫고 미웠어요. 그런 걸 보고 커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아내 패는 건 죽어도 안 해요. 내 스스로 화가 나면 내 팔을 물어버려도 말입니다.
아버지가 골목 '보초' 노릇을 할 때 우리는 저 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살고 있었어요. 지금이야 책방골목으로 유명세를 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헌책방 몇 개만 있는 골목이었죠. 파는 것도 지금처럼 헌책이 아니라 헌 교과서나 참고서였구요. 새 책 사기도 힘드니까 학년 끝나면 내다팔고 새 학년 교과서 사고 그랬죠. 그때 요 앞에 오면 '떡대' 같은 형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가로채곤 했었어요. 50원에 팔릴 수 있는 것이면 30원에 뺏다시피 가져가 자기네들이 되팔았죠. 그리고 책방 위에 진짜 유명한 기생집이 있었구요. 부산에서 좀 있다 하는 졸부들은 한 번씩 거쳐 가는 이름난 기생집이었죠. 어떤 경우에는 밴드도 부르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밴드 부른다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나는 그 위에 바로 친구집이 있어 창문으로 구경하고 그랬죠. 그랬으니 따지고 보면 보수동 헌책방 골목도 국제시장이나 마찬가지예예요.
예전 헌책방골목엔 서점 몇 개만
그때, 아버지가 "야, 영삼아! 담배 한 보루 가져와"하면 여차 없이 집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당연히 시장으로 돌아올 때는 몸에 밴 습관대로 허리에 숨겨서죠. 용돈을 주는데 마다할 리 있나요. 되레 좋아라 싶어 골목에 어슬렁거리면서 심부름시키기를 기다렸죠. 에이, 그때는 외제 자체를 파는 게 불법이었으니까 가게도 없었어요. 그냥 박스에 좀 넣어와 바닥에 놓고 팔다가 단속 뜨면 도망치곤 했지요. 제가 지금은 그리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그때는 또래에 비해 작았거든요. 그러니 어른 자전거를 탈 수 없어 안장 사이로 다리를 끼워 페달을 밟아 심부름을 다녀오곤 했죠. 보수동 집까지 갔다와야 했으니 가장 빠른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저기 저 중턱에 중부교회 보이죠. 피란민이 세운 저 교회 지을 때 우리가 벽돌 날라주고 그랬어요. 날라주면 빵을 줬기에 그거 얻어먹으려고요. 그리고 요 책방골목으로 가기 전 이 거리에 유명한 '옥생관'이 있죠. 정말 유명한 중국집이었어요. 옛날엔 진짜 중국인이 경영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책 팔아서 큰 돈 생기면 '짜장면' 사먹곤 했지요. 옥생관 옛 주인 양반, 돈 엄청 벌었습니다. 근데 그 돈 싸서 미국으로 이민 가버렸어요. 옥생관 바로 곁에 소호관이 있었고, 그 다음 집이 '만복당'이라고 또 유명한 단팥죽 파는 가게였어요. 거기도 학생들이 많이 갔지요. 지금이야 뭐 지난 시절 더듬는 음식이 되고 말았지만 그 집은 단팥죽이 좀 독특했어요. 빵을 팥죽에 넣었다가 주는데 그 맛이 진짜 죽여줬거든요. 책을 팔거나 사고 남으면 그 '삥땅한' 돈으로 사먹는 맛은 기가 찼죠. 그때야 뭐 학생들이 갈 곳도 마땅치 않았으니까요.
전자제품점 운영 여행자율화로 쓴맛
사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시장에는 잘 안 왔어요.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좀 하다가 때려치우고 다시 이 골목으로 돌아왔죠. 이 가게가 있는 곳은 원래 참기름 골목이었어요. 여기 돌아왔을 때만 해도 장사 시작하면 삶이 고소하고 기름질 것 같았는데…. 참기름집을 했나구요? 아뇨, 참기름이 아니라 전자제품을 취급했어요. 그때만 해도 외제가 귀할 때고 비쌀 때였으니까요. 뱃사람들 살짝 들고 오는 카세트나 카메라 같은 것을 구해서 팔았는데 이익이 제법 괜찮았어요. 그래서 장사 좀 되나 했는데 이거 웬걸, 해외여행이 자율화되면서 수입품이 들어오지 않겠어요? 그러니 장사가 되야 말이죠. 디카랑 휴대폰이 나오자마자 이 장사는 일찌감치 접은 셈입니다. 지금이야 그냥 화장품이나 조금 취급할 뿐이죠. 그것도 거의 아들놈한테 맡겨놓고 잘 안 나와요. 제가 아버지 성격 반만 닮았어도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해요. 그랬더라면 이 나이면 기반을 잡았을 건데 난 아무래도 장사 체질이 아닌가 봅니다요. lsangsup@hanmail.net
취재 후일담
참기름 골목에서 기름진 삶을 꿈꾸었던 사람, 피란민 2세대로 가업을 잇진 못했지만 아직 어릴 때 놀이터이자 가족의 생존의 터였던 곳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분 중의 하나였다. 장사가 쉽지 않아 짜증스러울 뻔한데도 성품은 형처럼 소탈하면서 호탕했다. 김영삼 사장님의 취재 협조가 아니었다면 글쓰기가 꽤나 힘들었으리라. 그 생각만 하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