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살다보면 수많은 악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마음은 힘들고 상처를 입고,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과연 주님은 악에 대해서, 악한 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주님께서는 먼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무엇보다 악과 악한 자는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악과는 힘을 다해 싸워야하고 멀리해야 하지만, 그러나 악한 자와 싸우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율법이 가르치는 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주신 참된 목적을 알지 못하여, 실제의 삶 속에 복수의 원리로 삼았다. 즉 악은 악으로 응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 속에 그 참 목적을 발견할수 있다. 내 몸과 마음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도 소중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징계와 처벌의 원리이지만, 속으로는 악을 경계하는 깊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악한 자에 대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악은 또 다른 악을, 어쩌면 더 큰 악을 불러들이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악을 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악으로 악을 제하면 여전히 악이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하면 물로 불을 끈다. 악이 불이라고 하면, 물은 선이다. 즉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주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가르치신다. 오른 편 뺨을 치는 자에 대해서 복수하지 말고 왼편 뺨을 대주라는 말씀이다. 오히려 한대 더 맞을 각오로 악을 제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신다. 그러면 그것으로 악이 끝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복수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아니면 더 큰 방식으로 악을 응징해야 할 것이다. 결국 악으로 악을 제거하게 되는 것인데, 결국 악의 승리일 뿐이다. 악의 잔치일 뿐이다. 그 곳에 선은 없다. 그래서 주님은 복수하지 말고, 앙갚음하지 말고 한번 더 선을 택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분노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참 어렵다. 신성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다. 어떤 악한 자가 나에게 악을 행했다면, 당연히 그 악에 대한 나의 정상적인 반응은 악이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악을 악으로 응징해야 하는 정의론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악의 딜레마가 있다. 그렇게 해서 악이 제거되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을 때, 결국 석유를 차지하려는 미국의 탐욕스러움이 온 천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현실태이다.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속에는 음흉한 탐욕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총리가 뒤늦게 잘못을 고백했지만, 죄없이 죽거나 다치고 망한 사람들의 피해는 누가 어떤 식으로 보상해야 할까? 지금 세계는 곳곳에 전쟁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복수가 원리가 통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악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하나님이 사랑의 원리를 따라 만드신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병들어가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하나님은 장차 이 세계를 불살라버심으로써 악을 제거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두번째 가르침은 소유욕에 사로잡힌 소송건에 대한 말씀이다. 속옷과 겉옷은 큰 차이가 있다. 가격의 차이다. 소송하여 속옷을 탐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이다. 소송에서 지더라도 속옷만 주면 되지 굳이 겉옷까지 주어야 할까? 아니, 소송에서 반드시 이겨 속옷도 빼앗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말씀도 참 어렵다. 아마도 주님은 소송에 휘말리지 말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소송에 휘말릴 정도로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만일 누군가 억울해서 소송한다면, 그리고 소송의 목표가 속옷이라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겉옷까지 줌으로써 소송을 피하라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물론 세상 법정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싸우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지금 세상 법정은 소유에 대한 소송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누군가의 억울함, 그리고 소송... 씁쓸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인 것이다. 거짓과 탐욕이 승리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세상의 권세는 마귀에게 넘겨주신 것이고, 이제 심판의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소유욕에 사로잡혀 사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며, 결국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다. 소유욕이 그의 천국입성을 가로막는 것이다. 팔복의 첫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만큼 소유와 소유욕의 문제는 중요한 덕목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때문에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는 교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소유를 가르친다. 그리고 십계명에 기록하기까지, 그 중요성도 가르친다. 그러나 소유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즉 죄를 짓지 말라는이야기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소유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돈을가지고 헌금하면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도록 잘못 가르친 선생들이 받을 벌이 얼마나 클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세번째 교훈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교훈이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부탁할때 십리까지라도 함께 가주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도 참 어렵다. 오리를 갈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바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사실 오리를 안가도 된다. 굳이 오리를 가주어야 할 명분이나 실제적인 이유되지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오리를 가주고 되돌아와야 하는 낭비는 또한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큰 손해일수 있다. 유익이 없는데 굳이 오리를 가야할까? 그런데 주님은 십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신다. 인생을 살다보면 심은데로 거둔다는 것을 많이 배우게 된다.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많이 행해야 한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나하고 좀 같이 가줘라고 말할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줄 수 있다면 가주는 것이 사랑의 원리를 따르는 삶이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고, 부탁을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가? 주님은 거절할 때도 있으셨지만, 그러나 대부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적극적인 선을 보여주셨다. 때로는 선을 행친 않는 것이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적극적인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정말 감사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반응을 나타내시는 분임을 자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