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삼국시대와 장성
전성을 누리던 신라가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경덕왕대(742~765)부터의 일이었다.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경덕왕 16년(757)에 있었던 녹읍(祿邑)의 부활에서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경덕왕은 이러한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드디어 혜공왕대(765~780)의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정변을 겪은 끝에 혜공왕은 죽음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 상대등 김양상(金良相 ; 선덕왕)이 즉위하였다(780). 그는 내물왕의 10대손이라 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김경신(金敬信 ;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이라고 하였는데(785), 그 뒤에는 모두가 원성왕의 계통에서 왕위에 올랐다. 중대(中代)의 왕위를 이어오던 태종무열왕계(太宗武烈王系)는 끊어지고 원성왕계(元聖王系)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를 보통 하대(下代)라 부르고 있다.
흔히 하대는 정치적 혼란의 시기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진골귀족의 분열 속에 치열한 왕위다툼이 전개되었고, 6두품귀족들은 골품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대 약 150년 사이에 20명의 왕이 즉위하였고, 그 중 상당한 수의 왕은 내란에 희생되었다.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면서 진골귀족에 반항하였고, 심지어는 최승우(崔承祐)와 최언위(崔彦撝)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예 신라를 등진 채 후백제와 고려로 투신해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 혼란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경주 중심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중앙에서의 그같은 정치적 혼미 속에 지방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회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족(豪族)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방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은,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강하게 내세우는 존재였다. 호족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간 중앙귀족 출신도 있었지만, 지방에 토착해 있던 촌주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세력기반인 향리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중앙정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강한 의욕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반독립적(半獨立的)인 자세에서 중앙정부와 연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서에 장군(將軍)․성주(城主)․성수(城帥)․수(帥)․적수(賊帥)․적(賊)․웅호(雄豪)․호걸(豪傑)․호족(豪族)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대략 낙향귀족(落鄕貴族) 출신의 호족, 군진세력(軍鎭勢力) 출신의 호족, 해상세력(海上勢力) 출신의 호족,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 등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호족의 대두는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약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은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거둬들일 수 없게 하였다. 신라 말기에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늘어갔고, 이에 따르는 비용도 증가하였지만, 이를 충족시킬 만한 재원은 반대로 줄어들었던 셈이다. 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정부는 지방의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하기에 이르렀다(진성여왕 3년, 889). 농민들에 대한 부담만을 가중시키는 조치였다.
원래 농민들은 신라의 융성기에 조차도 조세와 역역의 부담 때문에 유망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다니거나, 혹은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어서 질서를 교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호족의 보호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이 새로운 변화는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옛 질서에 대한 타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세의 독촉은 말하자면 신라 귀족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농민들을 반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반란의 첫 봉화를 든 것은 상주(沙伐州) 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다. 이들의 반란세력은 상당히 강한 것이어서, 이를 평정하러 나선 정부군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그 뒤 각지에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원주(北原)의 양길(梁吉), 죽산(竹州)의 기훤(箕萱), 전주(完山)의 견훤(甄萱), 양길(梁吉)의 부하 궁예(弓裔) 등이 두드러진 반란군의 두목들이었다. 또 왕경의 서남 방면에서는 적고적(赤袴賊)이라 하여 붉은 바지를 입은 반란군들이 휩쓸기도 하였다(진성여왕 10년, 896). 이밖에도 초적(草賊)이라고 하여 이름없는 농민반란군이 수없이 일어났었다.
원종이나 양길․기훤 등은 아직 지방의 한낱 반란군 두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신라와 대항하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견훤과 궁예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건국하여 신라와 정립하였으므로, 이를 후삼국이라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장성지역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호족이 대두하고 후삼국이 정립되어 가던 격동의 소용돌이에서, 장성지역만이 예외일 수가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아마 장성지역에서도 토착세력가들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가고, 또한 농민들이 유망하는 현상도 나타났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데, 우선 장성지역 호족의 존재를 짐작하게 해 주는 토성(土姓)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 토성이란 지역 토착세력의 성씨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15세기의 공․사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조선초기 들어 지방관아(地方官衙)에서 소장 중이던 옛 문서(古籍)를 토대로 작성하여 중앙에 보고한 것이, 지리지류(地理志類)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조선초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고려시기 이래의 지역 실정이 반영되어 있다 할 것이다. 토성은 그 연원이 중국의 고전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형성 시기가 신라말․고려초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요컨대 토성이란 곧 고려시기 지역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사회집단으로서, 신라말․고려초의 호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장성지역에는 그와 같은 토성이 여럿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장성(長城) ; 이(李), 서(徐), 유(兪), 공(孔), 노(魯)
진원(珍原) ; 박(朴), 오(吳), 안(安), 문(文)
삼계(森溪) ; 주(周), 최(崔), 손(孫), 성(成), 공(公), 전(田)
지역의 크기에 비하여 매우 많은 토성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만큼 다양한 세력이 서로 얽혀 있었던 셈인데, 이는 곧 당시 장성지역에 주변을 압도할 만한 대호족(大豪族)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말․고려초기의 장성지역에는 중심이 될 만한 큰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그만그만한 크기의 중소호족(中小豪族)들이 상호 견제하고 협조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나 않았는가 여겨지는 것이다.
장성처럼 좁은 지역 내에 그처럼 많은 토착세력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농민들의 처지를 매우 어렵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토착세력의 숫자가 많은 만큼,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에 대한 수취도 더욱 가중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장성지역에는 농토를 떠나 유망하거나 또는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직하다. 다음의 자료를 살펴 보자.
반등산(半登山)은 고창현(高敞縣)의 동쪽 5리에 소재하는 현의 진산(鎭山)이다. 신라의 말기에 도적이 이 산에 터를 잡고서 크게 일어나니, 많은 양가(良家)의 자녀들이 붙잡혀갔다. 장일현(長日縣)의 어느 여성도 그 붙들려간 속에 들어 있었거니와, 남편이 곧바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자 그것을 풍자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 이름을 방등산가(方等山歌)이라 이르는데, 이 방등이라는 말이 바뀌어 반등으로 되었다. 장일현은 아마도 장성현(長城縣)이 아닌가 의심된다.
장성의 북서쪽에 우뚝 서 있는 방등산에 얽힌 설화이다. 통일신라의 말엽, 그러니까 호족이 각지에서 할거하던 즈음 큰 도적떼가 이 산을 근거로 자주 장성지역을 약탈하러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설화인 만큼 그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그러한 일이 늘상 벌어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때, 장성지역이라고 하여 그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을 듯하다.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위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여 하등 이상히 여길 일은 아니지 않을까 헤아려지는 것이다.
당시 방등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도적떼는, 장성을 포함한 인근의 고을에서 유망한 농민들로 구성되었음직하다. 전통시기의 도적집단이 으레 농토에서 이탈한 농민을 주요 구성분자로 하였으며, 주로 본래의 연고지 부근에서 활동하곤 하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라말․고려초 장성지역 농민들의 삶은 매우 고단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농토를 떠나 유망하는 농민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가 방등산에 모여들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가서는 떼를 지어 장성을 포함한 인근의 고을에 출몰하였던 것이 아닌가 헤아려지는 것이다. 위의 방등산가(方等山歌)와 같은 노래가 지어져 널리 불려졌던 것도,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의 일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장성지역을 휩쓸던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된 것은 견훤이 등장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무진주에 터를 잡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바로 이웃에 위치하는 장성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을 모른 체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 이르는 말이다.
견훤은 상주(尙州) 내지는 광주(光州)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 경주에 들어가 중앙군이 되어, 서남해 즉 현재 전남지방의 해안을 방수(防戍)하도록 파견되었다. 여기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에 오르는 등 출세의 길을 연 그는, 때마침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 틈을 타 무진주를 점령하고서는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진성여왕 3년(889)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 아래 스스로 왕이라 칭하더니(진성여왕 6, 892), 나아가 완산주(全州)로 근거를 옮겨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효공왕 4, 900)
견훤이 광주에서 새로운 정권을 세운 이래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장성지역은 후삼국시기 내내 후백제의 판도 안에 들어 있었다. 끝까지 후백제에 충성을 다하였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리하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에 미쳐서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하였다. 통일신라시기에는 갑성군(岬城郡)이라는 이름으로 진원현(珍原縣)과 삼계현(森溪縣)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는 큰 고을이었던 장성이, 고려시기에 들어서는 이웃 영광군(靈光郡)에 예속된 일개 속현(屬縣)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통일신라시기의 무진주 치소이자 후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광주가, 고려왕조에 들어 해양현(海陽縣)으로의 격하를 감수해야만 하였던 것에 비견되는 일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에서 후백제 편에 섰던 지역을 차별한 데 따르는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장성이 지방관도 없는 속현의 설움에서 벗어난 것은 먼 훗날(明宗 2년, 117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