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불여장성’의 주인공, 노사 기정진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
흥선대원군은 조선 팔도를 평가하면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하여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라고 장성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전적으로 노사 기정진의 높은 학문과 관련이 있다.
노사 기정진의 학문적 깊이를 알려주는 다음 일화는 유명하다. 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 황제의 명이라며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 용단호장 화원서방(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 龍短虎長 畵圓書方)”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괴상한 문제를 낸다. 문제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동해에 고기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척추뼈도 없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 그게 뭐냐고 물은 것이다. 용은 길고 호랑이는 짧아야 하는데 그 반대이니, 조정 대신들은 답하지 못하고 쩔쩔맨다. 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 장성의 노사 기정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노사는 문제를 한참 들여다보고 난 뒤, 해(日)를 주제로 표현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고기 어(魚)자에서 머리와 꼬리를 빼면 밭 전(田)만 남고, 다시 척추에 해당하는 획 ‘ㅣ’를 없애면 일(日)만 남게 됩니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는 십간(十干)에 용은 진(辰)이요, 호랑이는 인(寅)인데, 해가 진방에서 뜰 때는 겨울이라 해가 짧고, 인방에서 뜰 때는 여름이라 해가 길다는 뜻으로 일조(日照)의 장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나는 것(日)’은 바로 해(日)입니다” 라고 답한다.
이에 청나라 사신은 천재적인 해석과 답에 감탄했고, 철종도 노사의 지식에 탄복하여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서울의 만개의 눈이 장성의 눈 하나만 못하다.’는 칭송에 나오는 ’장성일목‘은 당시 6살 때 천연두를 앓아 한쪽 눈을 잃어 애꾸가 된 노사를 가리킨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철학자이자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현상윤(1893~1950)은 그의 명저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시대 유학자 중 대표적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과 그 뒤를 이은 녹문 임성주,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등 6분을 꼽았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성리학을 마무리한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을 들었다. 이항로는 경기도 출신이고 기정진은 전라도 출신이며, 이진상은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항로는 기정진보다 6년 연상이고, 기정진은 이진상 보다 20년 연상이었다.
서울 만개의 눈을 이겨버린 애꾸눈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그는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槽洞, 구수동)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자란다. 본관은 행주, 호는 노사(蘆沙)다.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배운 적도 없는데,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 아는 아이였다. 그의 천재성은 7살 때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부친의 유언으로 34세의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지만, 끝내 과거시험은 응시하지 않는다. 40여 차례나 나라의 부름을 받지만, 45세에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벼슬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고향 근처의 무장 현감의 벼슬이 내리지만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재신의 지위인 공조참판·호조참판에 임명되었어도 모두 사양한다. 그가 한평생을 바친 것은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였다.
고산서원 고산사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김석구, 정재규, 정의림, 기우만, 조성가, 이최선, 김녹휴, 조의곤 등 9명이 배향되어 있다. 1960년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을 보면 노사에게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명이나 되고, 그들 제자의 제자까지 합하면 6,000명이 넘는다. 노사와 이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데, 그중 고산사에 배향된 8명이 수제자인 셈이다.
노사 학문의 정수는 누가 누가 뭐래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46세에 『납량사의』, 48세에『정자설』, 56세에 『이통설』 그리고 81세에 그가 평생 연구한 이기론을 정리한 『외필』을 저술한다.
『납량사의』와 『외필』은 그의 이(理)에 대한 철학사상의 핵심 저서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일(理一)과 이분(理分)은 서로 완전히 용납되는 관계이므로 이와 분은 대치하여 서로 막히는 것이 아니지만, 이(理)의 존(尊)은 무대(無對)하기 때문에 기와 짝할 수 없고, 기는 이에 순종하여 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의 실행은 곧 이의 실행이라고 주장한다. 기보다는 이를 절대시한 유리론(唯理論)의 주창이다.
‘임술의책’과 ‘병인소’를 쓰다
노사는 초야에 묻혀 강학과 저술에 몰두했지만, 농민의 궁핍한 삶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깊숙이 연구해 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임술년(1862)에 진주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임술의책」이다. 그는 「임술의책」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킨 백성들은 어미의 젖을 잃고 우는 어린아이와 같다‘면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으로 규정하고, 그 폐해를 바로잡을 5가지 개혁안을 제시한다. 지금 고산서원 입구에는 ‘임술의책’을 요약해서 새긴 비가 서 있다.
나라 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했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상소를 올린다.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쓴 6개 조항의 상소문인 「병인소」가 그것이다. 그 당시 대세는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노사는 결사반대한다. 전쟁을 위해 군비강화책을 열거한 후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편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에게는 공조판서라는 관직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노사 기정진의 이름은 전국에 알리는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이 상소는 이후 한말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같은 시기 화서 이항로도 위정척사의 상소를 올리는데, 노사의 상소가 2달이 빨랐다. 지금 장성 황룡면 그의 무덤 앞에 ‘위정척사기념탑’이 세워진 이유다.
‘임술의책’과 ‘병인소’는 노사 기정진이 공리공담에만 머물렀던 성리학자가 아닌 철학의 이론을 정책으로 다듬어 제시한 실천적 학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셈이다.
그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도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한말의병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