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성도일지라도 죄를 짓습니다. 성도는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려면 ‘도르트 신조 다섯째 교리(성도의 견인) 제1항 : 중생했지만 남아 있는 죄성’의 해설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성도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성령으로 육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개혁주의 성화론의 핵심인 죄 죽이기의 현실적인 모습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회개를 하고 죄와 투쟁하며 성도의 견인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교리(성도의 견인) 제1항 : 중생했지만 남아 있는 죄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다.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의 몸과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
교제 안으로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유효한 부르심으로 불러서 그들에게 실제로 구원이 일어나게 하셨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마무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성도의 견인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전 1:1). 성도는 성령에 의해 중생된 자를 의미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은덕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견인의 은혜 가운데 거한다.
중생의 효과
성령께서 중생하게 하신 목적은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따라서 중생한 자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롬 6:1). 죄에 매여서 죄가 이끄는 대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며, 그 원리가 성령의 역사로 심령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한 자는 죄를 습관적으로 지울 수 없으며(요일 3:6, 9) 반드시 죄를 미워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롬 8:13). 더욱이 중생한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어 의에 대해 살도록 되어 있기에(롬 6:10) 반드시 새 생명 가운데 행해야 한다(롬 6:4).
육신의 연약함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있다. 날마다 죄와 싸우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지만 항상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육신에 남아 있는 죄성과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는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는 한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은 아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죄에 대해 계속 싸우게 되어 있다(고전 15:24, 25; 계 6:10, 11). 이렇게 죄와 싸우고 의를 향해 살려고 애를 쓸수록 육신의 연약함을 더욱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의지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려고 애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견인 교리가 강조하는 내용이다.
제2항: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성도의 반응
성도는 최 앞에 연약해지기 쉽다. 또한 가장 선한 행위라 하더라도 오염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아래 피한다. 그리고 성령의 간구하심과 거룩한 경건의 연습으로 육신을 더욱더 죽이고, 사망의 몸으로부터 자유하고 하늘에서 어린양과 함께 다스릴 때까지 완전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
그리스도인의 죄
새 생명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것은 새 생명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죄성이 육신 가운데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성도는 죄를 짓는다. 육신은 죄의 힘이 되어서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억제하고 성도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그래서 성도는 매일의 삶에서 생각이나 혹은 말로 죄를 짓는다. 만약 가장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이는 죄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는 상태다.
성도의 반응
죄에 대한 연약함으로 인해 성도는 우선 자신에게 거룩한 삶에 대한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고 거룩한 삶을 위한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게 된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면 교만으로 인해 넘어질 수밖에 없다. 즉, 죄에 대해서 자신을 방임하게 되어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약 4:6, 7). 따라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된다. 그리고 겸손해져야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이는 필수다.
둘째, 중생했을지라도 육신에 죄성이 남아 있어서 성도는 죄를 짓게 된다. 성도가 이렇게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요 13:10). 회개하면 죄에 대해 더욱 뼈아프게 느끼게 되며 죄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죄 용서함을 더욱 소중히 느끼게 된다. 이러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 용서의 확신을 가지게 되어 결코 정죄의 두려움 가운데 거하지 않게 된다.
셋째, 성도는 매일 죄의 유혹과 시험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성령으로 육신을 죽여야 한다(롬 8:13). 이는 성화의 소극적인 부분으로 성도가 해야 할 평생의 작업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육신을 죽이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육신은 새 생명의 원리를 말소하기 위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넷째, 이 땅에서 성도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죄를 짓는다. 따라서 이러한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지는 천성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가 있는 천성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이다. 이럴 때 정욕적인 삶을 피하게 되어 세상 유혹을 극복하게 된다(히 11:16). 육신의 최성과 세상이 만날 때 성도는 죄의 유혹에 강력히 노출된다. 이럴 때 성도는 천성을 바라보면서 유혹을 극복한다.
김홍만, 『52주 스터디 도르트 신조』, pp.108∼109.
첫댓글 종교개혁이 바라본 성도의 신분과 현실적 상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이것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법조문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일부 어리석은 위선자들은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행위는 죄가 아니라고 어거지를 씁니다. 구원파와 율법폐기론자들이 그런 교묘한 유혹을 하지요. 성도가 원죄의 사함을 받은 이후 짓는 죄들도 죄는 죄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에서 “우리”는 불신자가 아니라 성도들입니다. 성도들도 중생∙회심한 이후 잘잘한 죄들을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웨민과 도르트 신조 해설을 함께 보니 이해와 믿음이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장 5항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이러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요일 1:8, 10; 롬 7:14, 17-1, 823; 약 3:2, 잠 20:9, 전 7:20).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 받고, 극복되었다고 해도 그러한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위는 엄연한 죄에 해당한다(롬 7:5, 7-8, 25; 갈 5:17)."
이 조항은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 조항은 '신자의 완전함'과 관련된 모든 주장을 논박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바울도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름 7:17-21)라고 말했다. 바울이 자신의 감정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말한 것인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우리는 바울이 거듭난 자신의 상태를 비롯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교리는 이 구절만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
한 갈등은 참 신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도 똑같이 언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이 조항은 거듭난 자들의 경우에도 부패한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위가 엄연한 죄에 해당한다고 진술한다. 죄책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거되고, 죄의 권세가 성령과 은혜로 깨어졌지만 그 본성 자체는 죄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
이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술가들은 우리가 본성의 부패라고 일컫는 '보편적인 죄의 성향'을 '욕망'(concupiscence)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욕망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며그 자체로는 아무런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원죄가 세례를 통해 제거된다고 믿지만, 거듭난 자들에게도 이 부패한 성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고 아담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자연스런 본성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본래는 아담에게 그런 본성을 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도움이
그들은 원죄가 세례를 통해 제거된다고 믿지만, 거듭난 자들에게도 이 부패한 성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고 아담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자연스런 본성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본래는 아담에게 그런 본성을 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도움이 주어졌지만 죄를 지은 탓에 그런 도움이 그와 그의 후손으로부터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욕망, 또는 정욕을 죄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하고 나서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그는 탐심을 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pp.96∼97.
@장코뱅 도르트 신조 해설의 남아 있는 죄성을 로버트 쇼 목사는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좋은 설명입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갈5:24)은 그들 구원의 먼 옛날 시작점에 하나님의 예정이 있고 현생에서 현재적으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성화가 나타나고 미래에는 영화(롬8:30)가 있을 것입니다. 성화는 칭의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순간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이고, 보통은 점진적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강하지 못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완벽한 의인’이 아니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악하고요. 성도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묵상을 읽은 모든 성도들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며 연약한 가운데에서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을 믿고 안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께서는 보혜사로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성도들을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고 찬양합니다.
개혁주의를 비롯한 정통 복음주의는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칭의(과거)-성화(현재)-영화(미래)의 팽팽한 연속과 긴장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파와 율법폐기론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다 끝났다고 착각하며 방심하고 교만해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삶을 계속해 나아갑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현세에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인데요. 구원파 류 이단들의 오해와 달리 성경은 이미 구원받은(과거) 자의 구원(미래)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고 하며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 영적 각성과 분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롬13:11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13: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13:11과 13장이 불신자를 향하여 쓴 말씀이 아니라 신자들을 향하여 쓴 것임을 금방 눈치 채실 것입니다. 계1:3의 복을 받은 자들(위 문단들에서 설명)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우직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죄악 되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에서도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합니다. 이는 칭의된 성도들이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의미합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낮이 가까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팔복(마5:3∼10)에서 “복이 있나니” 앞에 쓰인 조건들(심령이 가난한 자∼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은 롬13:14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상태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참 성도들답게 신앙생활 하기를 기원합니다.
@장코뱅 아멘!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안 지혜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 지혜가 알게 하시는 내용은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되, 참되고 성숙한 믿음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인 자들이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으며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거듭나고 회심한 자들이, 그 믿음의 결과로서 열매로서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의 본문인 약4:1∼10 중 4:1∼4는 세상의 불신자가 아닌 신자들에게 신자답게 살기를 권면하는 것인데요. 신자답게 사는 성화가 가능한 것은 참 신자의 속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잘 이햐합니다. 반면에 믿음이 연약하거나 이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 해설이 유익합니다.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많은 신자들이 확실히 알면 이단이나 사이비에 기웃거리거나 발을 붙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많은 곳에서 구원 받은 신자들이 죄악 된 육체의 본성과 싸워야 할 것이 남아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데, 구원파 쪽에서는 애써 이러한 말씀들을 무시하고, 성경을 억지로 풀려고 하는 경향들을 보이는 것이 안타깝네요.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들은 성령을 힘 입어서 육체의 죄악 된 속성과 싸워 이기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나감으로써 점차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하늘나라의 시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며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려주셔서 위로와 힘을 주네요.
네, 공감합니다.
완전성화를 강조하는 교파나 교회는 행위구원론으로 가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단은 도덕률폐기론으로 갑니다. 이 두 극단을 회피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 개혁주의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22
중생했지만 죄성이 남아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믿던 신실한 목사에게 몸과 마음과 돈을 뺏기는 순진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위 도르트 신조의 해설 내용을 읽으면 죄성 있는 교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아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분볗이십니다. 공감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