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金弘宇 1539~1598)는 호가 백곡(白谷) 으로 본관은 光山이며, 고창 출신이다. 조부 김기서(金麒瑞 1497~?)는 조선전기 문신으로 호는 돈목재(敦睦齋)이며 광릉참봉을 하였는데 부인은 양팽손(梁彭孫)의 누이이다. 돈목재(敦睦齋)는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와 같이 학문을 논하였다. 그런데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신진 사림들이 박해를 받자, 그는 세상과 등지고 숨어 살았다.
김홍우의 아버지 김경희(金景熹 1515~1575)의 호는 노계(蘆溪)로 외삼촌 양팽손에게 수업하였다. 양팽손은 청백리 지지당 송흠(宋欽 1459~1547) 의 문인으로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한 절의의 선비였다. 송흠의 정자 관수정(觀水亭)에는 양팽손의 시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김경희 (金景熹)는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간당들의 농간에 의해 급제자 명단 에서 빠졌다. 이를 중종(中宗)이 애석하게 여겨 비단으로 장식한 두보의 시 1질을 하사하였다(1534).
김홍우는 1539년에 전북 고창군 고창읍 노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른다운 기상이 있었고, 오음 윤두수(尹斗壽 1533~1601)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575년에 부친상을 당하여는 예법에 따라 상례를 마치니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583년 동서분당의 의논이 시작되자 송강 정철(鄭澈), 백사 이항복(李恒福) 등과 경사를 토론하며 교의를 두터이 하였다.
김홍우는 임란 때 장성 의병청의 참모장(參謀長)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592년 7월 20일에 김경수ㆍ기효간ㆍ윤진(尹軫)등이 작성한 격문을 도내 선비들에게 전달하였다. 김홍우는 동생 김광우(金光宇 1546~1611), 김덕우(金德宇 1548~1638) 등과 함께 3형제가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홍우는 김경수(金景壽)ㆍ기효간(奇孝諫)ㆍ윤진(尹軫) 등과 장성현 남문루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열읍(列邑)에 격서를 보내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였다. 또 붕래재 서연(徐渷)과 함께 10조목(條目)을 마련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에게 올렸다. 장성 남문의병 제1차 활동 시 김제민(金齊閔)ㆍ이수일(李守一)ㆍ김부(金溥)ㆍ유희진(柳希津)ㆍ윤황(尹趪)ㆍ홍원(洪遠)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진군할 무렵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왜적을 맞이하여 전공을 세웠다. 또 1593년 1월에 용인과 안성까지 진군하였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 남하하던 중 여산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대적하였다. 또 동년 6월에 장성 남문의병이 제2차 활동을 시작하자, 공은 아우 김광우에게 의사와 의곡을 주어 김극후(金克厚)ㆍ김극순(金克純) 형제, 김인혼(金麟渾), 김언희(金彦希) 등과 함께 진주로 보냈다. 당시 고창 현감 정운용(鄭雲龍)이 임소에서 졸(卒)하자, 공은 임시로 발령된 관원 진욱(陳旭)과 병사들을 모아 성(城)을 사수하였다. 동년 10월에 도내 선비들에게 통문을 보내 무명과 솜을 모아 명군(明軍)을 구원하였다. 또 12월에 전주에서 시행된 별시문과 [甲1‧乙1‧丙7- 총 9명중 5위로 병과 1위 합격] 에 동생 김사우(金仕宇)와 함께 응시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우 김사우(金仕宇)가 실격되자, 공은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백곡(白谷)에 집을 짓고 아우들과 강론하며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594년 10월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정9품)에 제수되었다. 1596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6품)에서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으로 승급하였으나,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장수 해생(解生)과 함께 소사(素沙)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나라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을 제수하였고, 이후 아우 김광우ㆍ김덕우 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여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종4품)에 제수되었다. 또 10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종3품)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정조(正祖)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증직되었다. 공의 위패는 오산창의사에 봉안되어 있다. 김기성(金箕性)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조진관이 창의사 예성축문을 찬하였다.
김홍우는 임란 때 장성 의병청의 參謀로 활동하였다. 특히 1592년 7월 20일에 김경수ㆍ기효간ㆍ윤진 등이 작성한 격문을 도내 선비들에게 전달하였다. 김홍우는 동생 金光宇(1546~1611), 金德宇(1548~1638) 등과 함께 3형제가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공의 자는 伯容, 호는 白谷, 본관은 光山이며, 고창 출신이다. 광산김씨의 시조인 金興光이 세상을 피해 광주(西一洞)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金景壽ㆍ奇孝諫ㆍ尹軫 등과 장성현 남문루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열읍에 격서를 보내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였다. 또 붕래재 徐渷과 함께 10條目을 마련하여 都體察使 鄭澈에게 올렸다. 장성 남문의병 제1차 활동 시 金齊閔ㆍ李守一ㆍ金溥ㆍ柳希津ㆍ尹趪ㆍ洪遠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진군할 무렵 직산에서 왜적을 맞이하여 전공을 세웠다. 또 1593년 1월에 용인과 안성까지 진군하였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 남하 하던 중 여산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대적하였다. 또 동년 6월에 장성 남문의병이 제2차 활동을 시작하자, 공은 아우 김광우에게 의사와 의곡을 주어 金克厚ㆍ金克純 형제, 金麟渾, 金彦希 등과 함께 진주로 보냈다.
한편 고창현감 鄭雲龍이 임소에서 卒하자, 공은 임시로 발령된 관원 陳旭과 병사들을 모아 城을 사수하였다. 동년 10월에 도내 선비들에게 통문을 보내 무명과 솜을 모아 明軍을 구원하였다. 또 12월에 전주에서 시행된 별시문과에 동생 金仕宇와 함께 응시하였다. 그러나 아우 金仕宇가 실격되자, 공은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白谷에 집을 짓고 아우들과 강론하며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594년 10월에 문과 급제하여 이듬해에 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1596년에 成均館典籍에서 禮曹正郞으로 승급하였으나,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우 김광우ㆍ김덕우 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여 軍資監僉正에 제수되었다. 또 10월에 南原府使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正祖 때 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공의 위패는 오산창의사에 봉안되어 있다. 金箕性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조진관이 창의사 예성축문을 찬하였다.
(목포대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