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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후예와 구원파&세대주의자의 차이 중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에 대한 이해입니다. 개혁주의는 율법의 3번째 용도를 주장하며 율법폐기론을 반대하고, 루터교회도 아래 글에서 보다시피 십계명을 신약 성도들도 지키기를 주장하며 율법폐기론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파와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키고 분리하여 율법폐기론으로 갑니다. 이러한 율법폐기론을 경계하고 십계명이 신약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최고 규범임을 인정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성도들은 구원파 스타일의 율법폐기론을 피하고 안식교 스타일의 율법주의를 피하며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이 박스 글아래에 마틴 루터의 『대교리문답1 : 마틴 루터의 십계명 해설』 중 “십계명의 결론”을 타자쳐 올립니다. 잘 읽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핸드폰으로 보면 조금 내용이 긴데, 그래도 다 읽어 보시길 강추합니다. |
십계명의 결론
Conclusion of the Ten Commandments
십계명은 바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정리한 거룩한 가르침의 개요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십계명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바로 이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샘과 물줄기에 모든 만물이 소생하고, 바로 거기에서 선한 행위가 흘러나온다. 때문에 어떠한 것이 설령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하고 귀중하게 보일지라도 이 십계명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하나님께 선하다 칭함을 받을 수 없다. 행위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다. 자, 이제 우리의 위대한 성인들이 마치 매우 무의미하거나 또는 이미 오래전에 완벽하게 완수해 버린 것처럼 이 계명들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영적인 의식이나 그들이 만들고 세운 위대하고 중대한 행위들에 대해 살펴보자.
내 생각에 어떤 사람들은 온화함, 인내 그리고 원수를 향한 사랑, 정숙, 친절 등 그러한 가치들과 관련이 있는 행위들로 가득 차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또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과시할 일도 아니다. 그것들은 특별하거나 자랑할 만한 행위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의식과 문화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이고 어느 시대나 우리 삶 속에서 이웃끼리 서로 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높게 칭송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과 다른 종류의 어떤 행위들, 즉 무언가 특별해 보이는 어떤 행위에는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열릴 정도로 열광을 한다. 사람들은 그 행위를 칭송하면서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비용을 지불하며 장엄한 건축물을 세워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게 한다.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노래를 하며, 종을 울리고, 가는 심지와 초에 불을 켜 이 행위 이외에 다른 것들이 드러날 수 없게 한다. 사제가 금박으로 자수한 백의를 입고 섰을 때에 혹은 평신도가 교회에서 늘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누구도 충분히 칭송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한 소녀가 어린 아이를 돌보며 신실하게 배운 것을 순종할 때에는 아무도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행위들 외에 수도원에서 수도승과 수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십계명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일상적인 삶을 말하고 있을 뿐 성자들이나 이상적인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 십계명이 가르치고 있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훌륭한 생활방식을 멋대로 만들고 있는 절망적인 성인들의 저주받은 억지 주장이지 않은가? 그리고 불쌍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명을 지켜야 하지만, 그 내용을 순종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우리가 배우게 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을 수 있고,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랑하며 말하기를, “확실히, 난 내야하는 돈, 오천 원은 없지만, 분명하게 오만 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가운데 깊게 뿌리박혀 모든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통탄할 만한 오류가 제거되기 바라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올바른 순종을 하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권면하며 글을 쓴다. 십계명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교리나 지위를 만들고자 한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어느 누구도 인간적인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지고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계명에 도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의 거룩함을 넘어서는 천사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라 불릴 수 있다. 오직 그 계명에 집중하라.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최선을 다하며 모든 힘과 능력을 쏟아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충분히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다른 행위나 거룩한 것을 찾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십계명이 기독교인을 위한 기본적인 교리의 첫 번째 부분이 될 수 있게 하자.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자. 그러나 첫 번째 계명에서 이미 다뤘듯이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의 말씀들을 반복해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마침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요구하시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바로 십계명을 반복해 가르치고 훈련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개역개정, 출 20:56-6)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여기에 기록된 부가내용은 첫 번째 계명에 이어 나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명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계명을 언급하며 지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십계명이 젊은이들에게 전수되고 가르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 젊은이들이 그것을 배우고 기억해서 우리가 이 십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이 부가된 말씀이 모든 계명에 스며들고 영향을 미치게 하기위해서 특별히 각 계명마다 첨가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 이 본문 말씀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를 경책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주의를 주는 분노의 말씀과 친밀한 약속의 말씀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은 이 내용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스럽고 진실한 말씀으로 고귀하게 여기기며 받아들이도록 이끌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이 얼마나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얼마나 확고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을 멸시하고 어기는 모든 사람에게 두렵고 무서운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그 계명에 따라서 거룩하게 살며 그 말씀을 소중하게여기는 자에게는 모든 상주시고 복주시며 선한 모든 것을 행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길 원하신다. 또한 우리가 멸망으로 이끌려가지 않도록 그러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피하기를 원하신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친절하게 말씀하시고, 모든 은혜와 선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만 믿으며 하나님의모든 뜻을 행하기 원하신다.
이것은 또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첫 번째 계명의 의미, 그 계명의 바른 해석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다른 계명들이 파생되었다. 기본이 되는 바로 이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것은 '너는 너의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으로 나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신뢰하라'는 간단한 내용을 의미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바로 이것이 이 계명과 다른 모든 계명들을 충족시킨다. 반면에 하나님 이외에 하늘이나 땅에 있는 다른 어떤 것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 계명뿐만 아니라 어떠한 계명도 어긴 것이 된다. 이렇게 성경의 모든 내용은 어디나 이 계명을 포함하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라는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특별히 시편을 기록한 예언자 다윗은 시편 147 편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만약 모든 계명을 한 절로 해석한다면, '여호와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 계명은 모든 다른 계명들의 그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선언이 화환의 테처럼 처음과 마지막이 맞닿아 함께 연합되어 모든 계명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 선언은 계속 반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며, 결코 그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두 번째 계명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반대로 그 이름을 저주나 거짓말, 속임수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타락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첫 번째 계명을 따라 사랑과 신뢰에서 나오는 기도나 찬양, 감사 같은 알맞고 선한 방식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경외와 사랑 그리고 신뢰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과 거리가 먼 개념이며 오히려 배우기 기뻐하고 그 말씀을 거룩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것과 가까운 것이다.
이와 같이 이후에 따라오는 계명들을 이웃과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해석할 때 모든 내용이 동일한 방식으로 첫 번째 계명의 의미에 비춰 설명되어진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주인들과 모든 권위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뜻에 따르는 것이다. 당신은 부모를 무시하거나 공경할 수 있다. 또는 사랑으로 대하거나 어느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행위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당신에게 요구하고 계신내용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간과한다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반대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이웃에게 위험을 가하거나,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며, 또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신체나 아내나 재산이나 명예나 또는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계명의 내용에 따르는 것이다. 심지어 당신에게 기회가 주어지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더라도, 또 아무도 당신의 행위를 증명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그것을 할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상 주실 것이라는 확신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재산을 늘려주며,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렇게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계명이 다른 모든 계명을 이루는 수원 같은 역할을 하며, 다시 모든 계명이 첫 계명으로 돌아와 해석되어진다. 그래서 처음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젊은이들에게 그들을 훈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고 적합하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가축처럼 체벌이나 강요하는 것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라게 된다. 이것을 숙고하고 마음에 두는 것은 사람의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만유의 주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그분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며, 그것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진노와 벌을 내리시고, 반면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풍성한 상을 내리신다. 바로 거기에 자발적인 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행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벽과 구석마다, 심지어 의복에도 십계명을 기록하라는 구약에 있는 명령은 허황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을 이 말씀에 고정하고, 언제나 기억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이나 걸음 속에서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그것을 기록한 것처럼, 그렇다 그가 걸어가고, 서는 모든 곳에 이것을 기록한 것처럼 만들어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든, 일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매일의 훈련으로 이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집에 있든지 아니면 이웃들과 외출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십계명의 말씀을 충분히 훈련하게 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십계명이 지위나 명령, 우리가 가르쳐 온 다른 행위들보다 얼마나 고상하고 소중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지혜자들과 성인들아, 만약 할 수 있다면 앞으로 나와 이 계명들과 같이 위대한 작품을 [하나라도]만들어 보아라.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진정성을 가지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에 가장 큰 진노와 형벌을 더하셨으며, 게다가 너무나도 은혜로운 약속을 더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으로 축복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그렇기에 십계명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가르쳐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고상한 보물처럼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마틴 루터, 정준수 역, "십계명의 결론", 『대교리문답1 : 마틴 루터의 십계명 해설』(유페이퍼, 2013년).
첫댓글 율법의 3번째 용도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 달린 댓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cafe.daum.net/1107/YY6J/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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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세 번째 용도] (third use of the law):
하나님의 율법은
첫째,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둘째,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다.
그에 더해진 셋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이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처음 두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한다.
스탠리 그렌츠 등, [신학용어사전].
저희 동네의 한 이웃교회에서는 매 주일마다 예배 순서 중에 십계명송을 부르더라구요~
예배를 통해 성도의 삶에 십계명의 가르침을 스며들게 하려는 노력과 예배에 대한 마인드가 엿보이더라구요~
오늘도 좋은 글을 읽으며 하나님의 율법과 약속을 상기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 중간쯤에 언급된 두번째 계명에 대해 장로교회 루터교 간의 차이가 느껴지는데요 이런 차이는 어떻게 발생했으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건전한 걸까요?
일단 칼빈주의와 루터교 모두 율법의 첫째 기능(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과 둘째 기능(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구원의 서정을 교리로 믿고 있기 때문에요. 성화가 또한 강조됩니다.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정-소명-중생-회심)-칭의-"성화"-영화... 정도로 보면요. 칼빈주의는... 율법의 첫째 용도와 둘째 용도에 더해진 "셋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에요.
@장코뱅 율법의 세가지 용도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음..저는 십계명 2계명에 대한 차이를 질문드렸던 거랍니다(노랑색)... 글이 긴데 무턱대고 본문 중간이라고 언급하여 애매하게 질문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아파르 아파르님이 죄송하실 것은 없고요^^ 오히려 제가 제1-제10 계명들과 율법의 제1-제3 용도를 혼동한 것이네요.
아파르님의 위 개별적 질문에 딱 맞는 답변은 바로 즉답이 어려울 수 있고요. 먼저 일반적으로 교회사(church history)적으로 개괄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루터 칼빈 쯔빙글리 모두 훌륭한 종교개혁자이지만... 칼빈 쯔빙글리에 비해서, 루터는 천주교로부터 탈출하고 천주교적 요소를 제거한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그래서 일례로 십계명의 순서와 내용이... "천주교와 루터는 같고요". "루터교를 제외한" 개신교의 십계명 순서와 내용은 천주교&루터교와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루터교의 개혁이 개혁주의의 개혁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고 내용도 조금 다릅니다.
@아파르 아래 내용은 천주교 측이 올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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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루터교회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반면에 정교회나 성공회, 여타 대부분의 개신교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마라.
이.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마라.
삼. 야훼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오. 부모를 공경하라.
육. 살인하지 마라.
칠. 간음하지 마라.
팔. 도적질하지 마라.
구.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십. 네 이웃의 아내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출처: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219199&path=200708
@아파르 천주교는 천주교와 루터교의 십계명은 같다고 하고요. "천주교&루터교" 이외의 교파는 다른 십계명을 사용한다고 천주교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위 링크 주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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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비교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 가톨릭의 제1계명이 개신교에서는 제1계명과 제2계명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가톨릭의 제9계명과 제10계명이 개신교에서는 제10계명으로 합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 20장을 읽어 보면,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사용하는 것처럼 '일, 이, 삼…'하는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번호를 매겨 분류하다 보니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 *가톨릭과 루터교*는 5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가 분류한 방식을 따르고 있고,/// 정교회와 성공회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는 초세기 유다교 학자인 필론이 분류한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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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에서 천주교가 말하듯이, 루터교는 천주교와 같은 순서 & 내용의 십계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르 아파르님이 너무 좋은 질문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파르님의 질문과 댓글로 인해 많은 독자들이 천주교와 루터교의 십계명이 장로교 등 개신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교의 개혁 강도가 칼빈 등 개혁주의의 개혁 강도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그래도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선구자로 존중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장코뱅 아하~ 장코뱅님께서 정리해 주신 덕분에 유래도 알게되고 엄청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카페의 글을 접할수록 존경심이 생깁니다.
아니? 이렇게 풍성하게 배울 수 있는 게시물이 있네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장코뱅님은 물론이고, 특히 아파르님의 댓글에서도 많이 배웁니다.
그렇네요. 공감과 댓글 감사하고요. 불금 및 즐주 되세요!
행위에 비해 복음을 훨씬 더 강조한 루터도 십계명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고 하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제1계명에서 하위 계명들이 파생 확산된 거라고 볼 정도이니 정말 십계명이 신약 이후에도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네요.
루터 역시! 훌륭하네요.
댓글을 통해서도 뜻하지 않은 공부를 하여 감사합니다~
네, 저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의외로 천주교 탈피의 모습이 약한 듯 하여서... 루터를 개혁주의의 범주에는 집어 넣지 않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