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5일 제천 개나리 공원에서는 고종조 김화현감 겸 철원진관병마절제도위에 오른 통훈대부 진재 정혼공(정운종 전경향신문 논설위원 증조부)의 유고집 진재유고(초역) 출판 고유제가 한국유림총연합(총재 안명호) 후원으로 엄수됐다. 공의 손 휘 교원공의 가족묘원을 조성하고 제천 금성면 월림리 샘골에 안장했던 교윈공 내외분 유골을 이곳에 봉안하면서 거행된 이날 행사에는 공의 후손들과 영일정씨 통덕랑공 종친회 정규원 상임고문, 정운규 명예회장, 정은택 회장, 정병택 부회장, 정하택 총무, 정노태 서울종친회 총무를 비롯 많은 하객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근래에 보기드문 행사여서 이날 배포된 자료와 행사 사진을 참고 삼아 소개한다.
* 정운규 종친회 명예회장
* 정규원 종친회 상임고문
* 행사후 제천시내 한음식점에서 담소중인 종친회 회원들
< 告由 祭文 >
단기 4356년 계묘. 윤 2월 己卯朔 초 4일 임오. 孝子 雲宗 아버님 어머님 영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아버님께서는 평생 동안 강직과 근면 성실을 몸소 실천하셨으며 극심한 절대빈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시고 남다른 가족 사랑과 숭조향념의 가풍에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에 아버님의 높으신 유지를 받들고 가족 간의 화합과 후손들의 건강 번영을 기원하며 늦게나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이곳 개나리공원에 가족묘원을 조성하고 아버님 어머님 내외분 유골을 봉안 하오니 부디 새로운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옵기 바라옵니다.
아울러 오늘은 아버님께서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해 오셨던 통훈대부 김화현감 휘 정 혼 증조부님 문집을 초역해 출판한 기쁨을 고하게 되오니 아버님의 유지를 조금이나마 받들게 되었음에 감개가 무량하옵나이다.
증조부 정혼 선생은 1834년 갑오 11월 11일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출생하시어 어려서 부터 학문이 뛰어나셨고 일찍이 監役(감역)에 오르셨으며 김화 현감 겸 철원진영을 관장하는 兵馬節制都尉(병마절제도위)로 재임하시는 동안 고을 백성들이 만인산을 봉정할 정도로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1886년 6월 24일 향년 53세로 타계하기까지 조선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갑오경장 이후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의 섭정 등 이조 말엽 국내외 상황이 말해주듯 진재공은 나라사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생애를 사셨습니다. 증조부님이 남기신 유고는 내용면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신 행적과 높은 철학관, 더 나아가 당대의 시대상을 관조하며 심오한 안목으로 후진들을 일깨우려 하셨던 우국충정이 행간마다 진솔하게 묻어나 있어 많은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진재 증조부님의 행적이면서 이조말엽 격동기의 시대상황을 단편적으로 나마 재조명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진재 증조부님은 한학자로서 일찍이 성균관이나 향교를 출입하며 유교적인 꼿꼿한 기질로 이웃과 사회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고 기회 있을 때 마다 조정에 소를 올려 파사현정을 주창하심으로써 올곧은 선비정신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수 많은 명문의 글을 지으셨고 당대의 명재상과 문신들과의 교류를 통해 격동기의 아픔을 달래셨습니다.
진재 문집은 일신상의 안위와 득세만을 위해 아부하고 눈과 머리를 굴리는 모리배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대쪽 같은 선비정신으로 불의와 부도덕한 권력에 항거하고 백성을 위해 발분의식을 보이고자 꾸준히 노력한 흔적이 넘쳐 납니다.
어떤 난관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고단한 삶의 개선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여 해결하려 한 정신, 그 구휼의 정신이 극명하게 들어난 ‘대책’ 상소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던 한 시대를 광정하려 했던 정의감의 표출이라 하겠습니다. 진재공의 사상과 철학은 친지들과 나눈 서찰에 잘 들어나 있습니다. 틈틈이 쓰신 시(詩)를 비롯하여 고종조 등장인물로 세도가 하늘을 찔렀던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을 비롯 그 시대에서 한몫했던 문신 지도자들과 나눈 문서들은 단순한 안부정도에 그치지 않고 공의 심오한 사상과 철학이 진솔하게 투영돼 있습니다.
이토록 훌륭하신 선조님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에 더 없는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가슴깊이 새기며, 오랜 세월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선조님의 학문과 사상과 철학이 이번에 발간한 문집을 통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어찌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나이까. 이제 후학들은 선조님의 넓고 깊은 학덕을 재조명해 나가야 하는 중차대한 소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삼가 아버님 내외분 영전에 진재유고 출판을 고하오니 기뻐하소서.
<進齋遺稿 刊行辭>
높으신 學德 우국충정 불태운 장한 행적
(증손자 鄭雲宗)
진재집(進齊集 전 5권)은 高宗朝(고종조) 중반 김화 현감을 지낸 鄭 混(정혼) 선생의 유고집으로 선생의 손자 휘 敎자 源자 님이 소장해 오시다 장남인 소생에게 물려주신 고전이다. 10여 년 전 이 책을 여러 권 복사해 宗中 몇 몇 분에게 증정한 바 있으나 이제야 후손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이를 초역 출판하게 되니 학문적으로 그 의미가 지대할 뿐만 아니라 門中의 큰 경사라 아니 할 수 없다. 鄭 混선생은 迎日(영일)을 본관으로 字는 景益(경익), 호는 進齊시며 宣祖朝(선조조) 좌의정을 지내신 가사문학의 거성 송강 鄭 澈 선생과 태백오현 중의 한분인 포옹 鄭 瀁선생의 直孫으로 通訓大夫이시다. 1834년(조선 23대 국왕 순조 34년 갑오) 11월 11일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출생하시어 어려서 부터 학문이 뛰어나셨고 일찍이 문과에 급제, 감역 監役(감역)에 올랐으며 김화 현감 겸 철원진영을 관장하는 兵馬節制都尉(병마절제도위)로 재임하시는 동안 고을 백성들이 만인산을 봉정할 정도로 선정을 베푸셨다.
1886년 6월 24일 향년 53세로 타계하기까지 조선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갑오경장 이후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의 섭정 등 이조 말엽 국내외 상황이 말해주듯 진제공은 나라사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생애를 사셨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신 진재공의 행덕과 높은 철학관, 더 나아가 당대의 시대상을 관조하며 심오한 안목으로 후진들을 일깨우려 하셨던 공의 학덕이 행간마다 진솔하게 묻어나 있어 많은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진재공의 행적이면서 이조말엽 격동기의 시대상황을 단편적으로 나마 재조명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책을 출판함에 있어 원문을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해주신 한국유림총연합회 안명호총재(인간문화재 706호)님의 각별하신 후의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 번역본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 특히 진재공의 후손들이 이 글을 통해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깨닫는 바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賀詞>
進齋遺稿 출판은 家門의 자랑
鄭雲規(통덕랑종친회 명예회장)
먼저 증조부 휘 鄭 混 공의 유고집 진재집을 초역 출판하게 된 것을 자손 된 입장에서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이 책을 출판해주신 雲宗 舍兄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선친께서 보관하시던 유일한 원본 진재집을 형님께 물려주신 것은 언젠가 이 책을 자손들이 함께 돌려 볼 수 있기를 바라신 때문이라 생각하니 그 선견지명에 새삼 머리가 숙여집니다. 선친께서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조상에 대한 향념이 남다르셨고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으로 종사를 돌보셨습니다. 진제 유고집을 고이 간직하셨다 물려주신 참뜻도 이 같은 숭조향념의 진수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李朝 말엽 그 격동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파사현정을 줄기차게 진언 하셨던 진재공의 우국충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진재공의 심오한 통찰력 그 냉철한 시국관과 알기 쉽게 풀이한 성리(性理)도학(道學)사상은 고전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이 각별하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시 한 번 진재공의 유고집이 알 기 쉽게 초역돼 출판된 것을 충심으로 축하하며 이 책 출판이 종중의 대동 화합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입니다.
<進齋遺稿刊行同心君子奉獻贊述>
한눈에 보는 進齊공의 삶과 사상
脩巖 安明護(한국유립총연합 총재)
又松 鄭雲宗씨는 한국유림총연합회 창립 때부터 뜻을 같이하며 한국유림총연합회회훈인 유림총화(儒林總和), 재명윤리(再明倫理) 正道柄禮(정도병례)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부단히 역설해 왔다. 진재 정혼(鄭 混)공은 우송선생의 증조부로 고종조에 김화혐감(金化縣監)을 역임하신 분으로 이분이 남기신 진재사고(進齊私稿)는 바로 李朝 말엽의 산 역사를 증언한 것으로 사료적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번역에 착수하고 보니 진재공의 학덕에 새삼 놀라고 진재공의 생애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공의 심오한 통찰력과 명쾌한 분석, 그 냉철한 시국관, 성리(性理) 도학(道學)과 삼라만상의 섭리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공의 사상과 철학은 친지들과 나눈 서찰에 잘 들어난다. 틈틈이 쓰신 시(詩)를 비롯하여 고종 조 등장인물로 세도가 하늘을 찔렀던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을 비롯 그 시대에서 한몫했던 인물들과 나눈 문서들은 단순한 안부정도에 그치지 않고 공의 심오한 사상과 철학이 행간마다 넘쳐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조정에 소(疏)를 올려 파사현정, 인의예지, 도덕 재무장을 역설한 일이라든지 ‘삼정의 문란’을 통박하며 대안을 제시한 ‘대책’은 공의 정의감과 아울러 고종조의 나라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대변해주고 있어 이 책의 무게를 더해준다. 이 모두가 동서고금의 역사에 등장한 성현 석학들의 사상을 통찰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분이라야만 해독할 수 있는 고전(古典)이라 사료된다.
숭조향념(崇祖向念)의 표상
象步 朴奎乙(한국유림총연합 명예총재)
먼저 進齋集(초역) 출판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안명호 한국유림총연합총재와 정운종 고문께 격려와 아울러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진재집(進齊集 전 5권)은 고종조 김화 현감을 지내신 진제 정혼(鄭混)공이 남기신 문집으로 매우 소중한 역사자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진재공이 직접 지으신 여러 편의 시를 비롯하여 조정에 올린 상소문, 당대의 문무백관들과 나눈 서찰, 심오한 철학관은 이 책을 접하는 후학들은 물론이고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값진 교훈을 안겨 주리라 생각된다.
진재집에 나오는 인물과 당시의 정치 경제상황을 부록 편에 알기 쉽게 소개한 점도 이 문집의 무게를 더해 준다. 연도 별로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진제공의 연보는 이조 말엽 고종조의 시대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집작할 수 있게 한다.
진재집 초역 출판에 즈음하여 우리가 또 한 가지 유념할 점은 이 책 출판이 숭조향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 이라는 교훈이다. 조상의 문집을 정성 드려 초역해 출판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높은 숭조 향념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조상의 행적을 통해 조상의 유지와 학덕을 배우고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민족정기를 깨닫는 다는 것은 이 책 출판이 단순한 고전 번역의 차원을 넘어 후손들이 조상의 넓고 깊은 교훈을 공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휘 敎源公 墓碑銘>
公의 휘는 敎源이며 영일 鄭씨 監務公 諱 克儒의 二十三세 손으로 휘 思道(문정공) 휘 澈(문청공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휘 瀁(문절공 자헌대부 태백오현)이 직대 先祖이시다.
서기 一九一五년 음 二월 二十九일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휘 混(통훈대부 김화 현감)公의 次子 海慤(배 원주 원씨)公의 三子로 태어나시어 당숙 海愚(배 원주원씨)公의 대를 이으시고 配 한산 李씨 사이에 三남 一女(雲宗 雲玩 雲規 雲姬(여))를 낳으셨다. 서기 一九八八년 음 八월 五일 타계(향년 七十四세)하시기 까지 평생 동안 강직과 근면 성실을 몸소 실천하셨으며 극심한 절대빈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시고 남다른 가족 사랑과 崇祖向念의 家風에 모범을 보이셨다.
이에 公의 높으신 유지를 받들고 가족 간의 화합과 후손들의 건강 번영을 기원하며 금성면 월림리 샘골에 모셨던 公의 幽宅을 이곳으로 移葬하여 가족묘원을 조성하고 삼가 그 추모하는 情을 이 碑에 새겨 傳한다.
2023년(癸卯) 孟春
迎日鄭씨 諱 敎源公 後孫 일동 謹撰
* 휘 교원공 가족묘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