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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강도
눅 23:39~40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갈보리 산에 십자가가 셋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예수께서 살인강도와 함께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사야 53장 12절에 예언한 대로 예수께서 범죄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강도들과 함께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이해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문이 활짝 열려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한 강도는 어째서 구원을 받았을까요? 확실히 구원을 보장받은 한 강도를 통하여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좌․우편의 강도는 죄를 지었지만 결과가 달랐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우편, 좌편에 매달린 강도들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살인 강도로 같은 재판장에서 같은 사형 판결을 받았고, 십자가에도 같이 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회개하므로 구원을 받았고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아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한 사람은 낙원에 갔지만 한 사람은 지옥에 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행로는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가다가 피차의 운명이 아주 달라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여자가 맷돌질 할 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사람은 버려둔다,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두 강도들 중에 한 사람은 회개했고 한 사람은 회개하지 못하여 한 사람은 구원의 길로, 한 사람은 멸망의 길로 빠진 것을 볼 때 회개란 귀한 것입니다.
2.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강도가 예수님을 비난했을 때 이 강도는 ‘우리는 벌을 받아 마땅하나 이 사람은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 네가 아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조차도 심판의 예수님으로 만날까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회개한 강도는 자기 죄를 예수 앞에 고백했습니다
‘나는 벌받아 마땅하다. 나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다’고 자기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지은 죄, 손으로 지은 죄, 발로 지은 죄, 생각으로 지은 죄를 일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어 주실 줄 믿습니다.
4. 회개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으신 그때에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결백을 말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했고 여인들은 울기만 했으나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행한 것 중에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변호한 것입니다.
결 론
십자가 아래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찌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연약한 몸에 손을 대서 그 몸을 상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도망한 사람들입니다. 방관자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 강도처럼 예수님을 변호하고 예수님 편에선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본체만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강도였지만,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을 변호하고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변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셔서 의리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창 35:1~7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축복의 대를 이은 자손은 이삭의 둘째 아들인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으로부터 약 3,900년 전의 인물로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형제로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야곱은 성격이 온순하여 어머니 곁에서 가정 일을 보살피므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형 에서는 성격이 낙천적이어서 가정일 보다는 사냥을 즐겨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이삭이 장자인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명하고 축복을 약속하는 것을 어머니 리브가가 듣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야곱은 형 에서인 척 거짓으로 꾸미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별미로 아버지의 축복을 형 대신에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형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까지 빼앗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빼앗은 일로 인해서 형의 화를 피하여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다 날이 저물어 돌베게를 하고 잠을 자다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꿈에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지면에 닿았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꿈을 깬 후 돌로 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 4가지의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지켜주시고, ② 먹을 양식을 주시고, ③ 입을 옷을 주시며, ④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내세우면서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을 드렸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서원이었습니다. 오늘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 어떻게 야곱이 축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통해 우리도 축복 받을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야곱이 서원한 것을 보면 크게 3가지로 봅니다
1. 야곱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겠다는 서원을 했습니다.
1. 하나님은 축복의 주권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우상의 도시)에서 떠나게 하신 하나님은 세겜 땅 상수리나무 있는 돌산에 머물게 하셨지만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시므로 조카 롯과 헤어지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또한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시요, 구원의 길이십니다.
죽어서 4일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예수님이시며, 사도들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의 저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더욱더 예수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젊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늙어지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건강할 때 더욱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병들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재력이 나에게 있을 때 더욱 열심히 하나님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재력권을 자녀들에게 다 빼앗기면 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가 올 때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야곱이 두 번째로 서원한 것은 성전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1. 성전은 예수님의 보혈로 사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세운다는 것은 보이는 교회를 세우는 것과 교회조직과 운영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교회 건물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가면 얼마나 떳떳할까요?
제가 알고 있는 뉴욕의 남정관 장로님이란 분은 연세가 금년 99세(1900년생)로 고향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평생의 소원으로 있다가 드디어 세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교회 일에 순종하여 넘어지는 교회, 기관을 세우는데 공헌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경찰서 경목실에서 어느 여집사 한 분을 만났는데, 이분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집사였습니다. 신자는 자신이 교회에 맞춰야지 교회가 나를 맞춰주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3절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2. 성전을 가까이 하는 자가 축복을 받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성전을 사랑함으로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야곱이 세 번째 서원한 것은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1)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축복 받는 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약속들을 지키지 않다가 징계를 받았습니다.
1. 야곱은 세겜에 도착하자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겜의 풍요로움에 반해 하몰이란 사람에게서 은 100개를 주고 땅을 사서 거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지 않음으로 당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야곱에게 임하였습니다.
2. 외동딸 디나가 구경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3. 그로 인해 아들들이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의 자손과 통혼을 약속하고 율법대로 할례를 받게 하니 3일이 지나자 고통이 가장 심할 때에 습격하여 하몰의 가족을 몰살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과 거짓 약속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죄를 더했으며, 하몰의 가족을 말살할 때 그 집의 물건을 노략질함으로 십계명의 8번째 계명까지 범하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십계명은 없었지만 … .
3. 이때에 야곱은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 벧엘로 올라갈 것과 단을 쌓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생명의 양식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통해 생명의 양식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2. 또 단은 제단, 즉 예배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사귄다”라는 뜻으로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신자끼리 교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벧엘로 올라갈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우상입니다.
2. 두 번째로 자신을 정결케 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바르게 말씀으로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3. 세 번째로는 2절 후반에 보면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행동을 바르게 하여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벧엘에 올라갔을 때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동안 형의 낯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장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장자는 부모를 모실 수 있는 권한과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의 장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며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으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세 가지 서원을 잘 지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며,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생활을 잘 지켜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회복함으로 명성의 축복,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을 받을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야곱이 받은 명성의 축복은 이스라엘로 개명(改名)을 받았으며, 역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녀의 축복으로 12명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물질의 축복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떼의 축복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집으로 돌아올 때 많은 재산을 거느리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건강함으로 147세를 사는 축복도 함께 누렸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야곱과 같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웃어봅시다
빌 1:1~8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별로 소비되는 것은 없고, 건설하는 것은 많으며 이것을 주는 사람에게는 해롭지 않고, 받는 사람에게는 넘치며, 짧은 인생으로부터 생겨나서 그 기억은 길이 길이 있으며, 이것이 없이 참으로 부자가 될 사람이 없으며, 이것을 가지고서 정말 가난한 사람은 없다. 이것은 가정의 행복을 더하며, 사업에 호의를 찾게 하며, 친구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고, 이것은 피곤한 자에게 휴식을 주게 되며, 실망한 자에게 소망이 되며, 우는 자의 위로이고, 인간의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살 수도 없고, 벌 수도 없으며, 꿀 수도 없고, 도둑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웃음이라는 약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만일 당신이 아주 무력하여 인류를 위하여 아무런 공헌을 못했다고 생각되거든 만나는 사람마다 미소로써 대하라. 미소는 큰 재산이며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에 미소하는 얼굴 모습을 찍기 위해 ‘치이즈’라고 발음하도록 합니다. 나의 형편이 어려웠을 때에 ‘치이즈’하며 발음을 하여 웃는 얼굴이 찍히도록 합시다.
본문 말씀은, 상황이 고요하거나 일이 순탄하게 잘 풀리는 환경에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인데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간 바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3, 4)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에 자기의 얼굴과 마음 판에 웃음이 피어올랐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참 아름답지만 그것보다도 바울의 살아가는 자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삶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바울의 마음에 좋은 일만 남겨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후회를 붙들고 살지 않았으며, 아픈 감정을 자꾸 키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해결되는 않는 갈등으로 계속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립보 4장에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때로 궁핍할 때도 있었고, 비천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런 아픔의 상처자국을 찾아 나서지 않았고 그들에게 있었던 좋은 자국만을 즐거운 추억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런 자기의 감정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이 가능했다고 힘주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즐거운 추억들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예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추억이 될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위로와 즐거움이 되며 자신을 기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고 하였습니다.
2. 삶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합시다(6)
어떤 사업가가 사업 때문에 늘 불안해하며 살다가 어느 날 큰 깨달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며 그때부터 하나님께 맡기고 잠을 평안히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공장에서 큰불이 나서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 그 사업가는 그 현장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더니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있으시겠지 … .”라며 태연한 모습으로 나머지 일을 처리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웃음과 감사가 있었던 것은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실 것을 확신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작하심과 이루심은, 양끝의 현상이며 인생이라는 책의 첫 장과 끝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애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을 믿고 산다는 것처럼 안정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가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오늘날에 심각한 것은 근심과 스트레스 그리고 두려움입니다. 근심이란 근거 없는 사실에 대한 염려로서 우리의 삶을 서서히 썩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스트레스는 자기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통제할 수 없어 긴장하므로 흔들리는 마음상태이며, 두려움이란 어떤 상황에서 안정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즉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는 요인들은 모두가 견고하게 받쳐주는 바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뿌리를 견고하게 해주며 삶에 받침이 되어 주는 것은 바울이 고백한대로 우리 속에 좋은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실 줄을 확신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는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30)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자신의 생애에 좋은 일을 만나며, 좋은 일을 만드는 방법은 성도의 견인(堅忍) 곧 시작하신 그 하나님의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실 때까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하였습니다.
3. 사랑의 둥지를 품는 생활입니다(7) ~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의 삶이란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선택하며 사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심한 곤경에 처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상황이 되어 나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할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자신의 선택이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쁨을 선택하는 것 곧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의 둥지를 품을 수 있을 때, 새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윌콕스는 ‘운명의 바람’이란 시에서 ‘자신이 품고 사는 삶의 방향이 문제를 좌우한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불고 있지만 어떤 배는 동쪽으로,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가는구나. 우리가 가는 길을 정해주는 것을 바람의 방향이 아니라 돛의 방향이니라. 인생의 여정을 가는 동안 운명의 길은 바다의 바람과 같은 것이니 인생의 목표를 결정하는 것은 고요함이나 고난이 아니라 내 영혼이 세운 방향이니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삶이란, 먹을 것을 구하려고 날아가는 것만을 배우고 그것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 바라야 하는 것은 사랑의 둥지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나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고만 몸부림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살아봅시다. 잠언 15장 13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한 것과 같이 주 안에서 참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현대인의 빈곤
욘 4:6~11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이든지 풍부하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더 바랄 것이 없어 풍족하다고 그만큼 더 큰 것도 아닙니다.
모자라는 듯한 여백! 그 여백이 오히려 기쁨의 샘이 될 수가 있습니다. 가난함과 부요함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때로는 가난해지는 수 있고, 가난한 자가 부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기에 가난이 곧 불행이 아니라 그 가난을 극복할 의지를 잃었을 때가 불행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큰 성읍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요나라는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사랑의 부요함을 나타내시려고 하는데, 인간 요나에게서 나온 무서운 질투와 악한 감정의 표출이 인간적 빈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니느웨 성 사람들이 구원 얻는 것보다 멸망당하는 것을 더 기뻐할 수밖에 없는 요나의 빈곤한 마음이 우리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요나를 제외시키지 않으시고 요나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끊임없이 교육하시고, 그의 마음을 격려하고 계심은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모습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 이만 여명의 영혼이 조그만 박넝쿨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요나의 빈곤함이 오늘 우리 사회 속에 많은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빈곤하게 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1. 이해관계로만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6~8)
요나가 니느웨성 사람들의 구원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자기와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민족이 잘 사는 것이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는 더 큰 고통을 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악한 감정을 표출하는 이유는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식물 곧 자기가 심지도 않은 박넝쿨 때문이었습니다. 박넝쿨이 자기 자신에게 잠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에 지금 박넝쿨의 있고 존재 여부는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사는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열매 하나 때문에 낙원을 잃어버렸고, 에서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팔아버렸으며, 가룟 유다는 은 30 때문에 예수를 팔아버렸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부요함은 이해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박넝쿨이라는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 인간의 빈곤한 마음이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잠 15:15에서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한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했습니다.
2.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생활입니다(9)
본문의 내용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과 그에 대한 인간의 저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요나가 저항하는 이유는 자신은 선택된 백성이요, 니느웨성 사람들은 버림받은 족속이며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요나가 하나님께 행한 악한 모습이나, 니느웨 사람들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신을 제쳐놓고 니느웨 사람들만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자신을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지금의 어려움 때문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 찼을 뿐 아니라 자신은 은혜를 받아 누릴 권리가 있고, 용서받아야 할 자격이 있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곧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 뿐 아니라 그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살아 온 은혜를 잊어버리고 박넝쿨 때문에 죽기를 고집하는 사람이 되어 그야말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3. 방관자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11)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 자신만의 평안한 휴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휴식이란 달콤한 유혹에 이끌리어 죽었으면 하는 충동을 받기도 합니다. 요나의 상태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망해도 자신은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쉬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것은 니느웨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만 하였습니다.
오늘의 시대적 현상을 진단하기를 ‘감동하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감동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동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즉 현대인은 방관자로,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만 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소생시키시고 기운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시 42:5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요나는 더위와 그늘의 틈 사이에서 그의 고통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틈 사이에서 빨리 빠져 나와야 인생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인간적 틈 사이를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갑시다. - 아 멘 -
동 행(1)
창 5:21~25
그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우리 나라 대중가수 중에 뛰어난 가창력과 수려함 외모와 유익한 노래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던 최성수 씨의 ‘동행’이란 노래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이혼을 하고 미국의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그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심금을 울려서 저는 즐겨 불렀습니다. “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네요 …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진정 누가 우리와 끝까지 동행할까요?
어둡고 험한 길을 혼자 가면 외로운 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험하고 힘든 길이라도 힘이 들거나 지루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험하고 위험한 길이라고 모든 이들은 말합니다. 혼자 가다 보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낙오자가 되거나 고립된 인간이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가족을 이루고 단체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도 서로에 대한 협력 관계를 만들고 동반자의 관계를 이루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인(人)는 서로 기대여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하며 인간(人間)이란 단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 곧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서로의 뜻에 부합되는 동반자를 찾고 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훌륭한 동반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모나 부부 친구는 인생의 대표적인 동반자로 좋은 부모를 만나면 많은 유익을 얻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부부 생활은 서로를 아껴 주는 아름다운 생활이 될 것이며, 그밖에 친구간의 만남,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만남, 사회생활에서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의 동반자 관계를 이루어 가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원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려고 해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죽음이라는 벽을 뛰어넘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는 동반자가 아니라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한 길을 인도할 동행자 한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분과 같이 가는 길은 위험하고 험한 길이라도 쉽고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고도 지루한 길이라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예수님입니다. 저는 창세기 5장 21~25절에서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복을 받았던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복 받는 삶입니까? 그것은
1.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에녹이란 말은 “하나님의 신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에녹에 대한 기사를 많이 기록하지도 않았고, 모세나 다윗, 사무엘처럼 큰 업적을 남겼거나 커다란 공적을 기록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신앙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이것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도 우리에게 크게 다가옵니다. 인생의 승리자가 된 에녹, 인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커다란 복을 받았던 사람, 이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시며 에녹의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에녹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말씀으로 주장하시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여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주인이 종에게 명령을 하면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주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종은 주인의 명령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인의 뒤를 바싹 따르는 것입니다. 주인과 같이 길을 가면서 주인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에 빠져서 주인을 무시하고 마치 자기가 상전처럼 앞서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하면서 앞서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5분 앞을 모르고 사는 존재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를 헤치고 나갈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뒤를 따르며 나아갈 때 우리의 주인 되시는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는, 주인의 명령을 받기 위해서는 너무 먼 거리에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연속극에 보면 주인이 “밖에 누구 없느냐?” 하고, 안방에서 부르면 어디에 있었는지 쏜살같이 달려나와 “부르셨습니까? 어르신”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더라”(막 14:54) 이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과의 거리가 멀어짐으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히시기 바랍니다. 항상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속삭임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행할 수 있도록 가까이 아니 예수님 내 안에 나도 예수님 안에 거하여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인생의 승리자가 되십시다. 아브라함은 갈길을 몰랐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았으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셉과 다윗도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과 삼손,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룟 유다는 절대자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므로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서 인생의 바른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인생의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딤후 3:1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으며 살아 역사하며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7)처럼 말씀 속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바르게 깨달아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과 같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규칙을 어기고 반칙을 하면 퇴장을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인생에서 퇴장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옛말에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내 발이 길과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에 큰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복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 복을 받고 감사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험하고 위험한 길을 갈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평가의 조건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가정, 들판에도 어디에나 계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각자의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농부는 들에서 열심히 일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주부는 가정에서 항상 자기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큰일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에녹은 보통 사람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삼백년을 동행하면서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에녹은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의 인생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소금 같은 인생,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향기인 것입니다. 에녹은 마치 저녁에 붉은 노을을 남기는 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아무리 험하고 힘든 길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인생을 기쁨으로 웃으면서 찬송을 부르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나의 복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사셔서 은혜롭게 살아 복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동 행(2)
수 1:5~9
그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리빙스턴 처음 아프리카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탈 때였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의 안전을 기원하며 부두까지 나와 주었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그가 여행하게 될 검은 대륙에서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특히 한 친구가 리빙스턴에게 영국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애원하자 리빙스턴은 마태복음 28장을 큰 소리로 읽어 주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을 명령하면서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2번이나 거듭하시면서 5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9절에서도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확고하게 동행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서 견지해야 할 자세 몇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지표가 되시길 바랍니다. 먼저
1.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6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로 인하여 그는 겁도 났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죽은 후 그가 풀어야 할 첫 번째 과제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에는 용기가 있어야 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은 신앙의 적입니다.
섬에서 목회할 때, 저희 교회에서 걸어서 약 1시간 걸리는 지역에 30여세대가 있는 마을에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전도사님은 큰 마을로 임지를 옮기고, 그곳은 목회자가 없는 목자 잃은 양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치리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러 다니시던 중, 하루는 무서움에 떨게 되었는데 그 이유인즉 밤에 봉고차를 몰고 가다가 도깨비를 2번이 보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두려워 갈 수가 없게 되어 저와 아내는 함께 예배를 인도하러 약 6개월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제일 낙후한 곳이라 길은 험하여 마을 버스도 잘 안 다녀 그 당시에 저에게는 교통수단이 없어서 걸어다녔습니다. 길 한편은 낭떠러지였고 한편은 길을 넓히느라고 산을 깎아내어 그곳의 모습을 흉측하고 무섭게 하였습니다. 주일에는 저희 교회예배를 인도하고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서서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올 때는 어두워져 괜찮지만 수요기도회 대신 목요기도회 때는 밤길을 걸어갔다 오는 것은 젊은 나로써도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종종 걸음으로 찬송을 부르며 큰 소리내어 기도하며 두려움을 이겨내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과 이사야 35:5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이런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줄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 신앙의 커다란 적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치우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치우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דו(수르) ‘방향을 돌이키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 정도로부터의 이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New International Commentary) 본문을 보면 7절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을 ‘법으로부터 좌로나 빗나가지 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도에서 이탈하지 말고, 요동하지 말고 확고히 약속의 말씀만 붙들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자기에게 불리하면 시시때때로 변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만고불변하십니다. 확고히 붙잡고 의지하면 말씀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따르면 됩니다.
어떤 식물학자가 식물채집을 다니다가 높은 벼랑 중간쯤에 있는 신비한 식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벼랑아래에는 깊은 바다가 출렁거렸고, 절벽은 깎아지른 듯 급해서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벼랑 위로 가서 내려가 보려 해도 역시 험해서 그 식물을 채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물학자는 지나가는 한 소년을 불러서 든든한 밧줄을 소년의 몸에 매어 주면서 “줄을 붙잡아 줄 터이니 네가 내려가서 따오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기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아버님이 밧줄을 붙잡아 주면 내려가겠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을 모셔 오려고 합니다.” 소년은 급히 가서 아버지를 불러왔습니다. 그러고 몸에 끈을 맨 후 용감히 벼랑으로 내려가서 식물을 캐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년의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벼랑에서도 우리를 끌어 올려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의심하거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전폭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17:7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말씀을 묵상하고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일어나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영과 영의 생명적 관계입니다. 그런 만큼 그 본질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입니다. 영의 본질이 사랑이니 그 속성인 생명의 진리, 평안, 광명, 거룩함, 능력등과 신앙, 은혜 이 모든 것도 다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실천하는 것이 곧 우리 신앙이요,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본성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생활’이란 말속에는 2가지 뜻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유와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행함은 두 가지 따로가 아닙니다. 한 사물의 양면, 즉 겉과 속입니다. 성도들의 행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필연적 결과이어야 합니다.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자의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이 들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선, 나의 생은 죽고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으로 내 안에 살아계시사 나로 행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매일의 생활 중에서 예수님의 뜻을 발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삼고 사는 때에 신앙생활의 극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도 예수요, 둘도 예수요, 백도 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 뜻대로만 살면 만사 OK요, 만사 형통입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어떤 구세군 전도부인이 가난하고 병든 과부를 심방하려고 갔는데, 병석에 누운 부인이 하는 말인즉, “듣기 싫다. 그러니 입도 뻥긋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하면서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전도대신 그 집 아이들을 씻기고, 밥을 지어 먹이고, 방을 깨끗이 청소해 주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한 달 동안을 계속하자 병든 과부는 전도부인의 소행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탈무드에 나오는 “세 사람의 친구”란 이야기로 결론을 짓고자 합니다.
어느 이른 아침, 임금님께서 당신을 당장 궁전으로 데리고 오라는 분부를 받은 사자가 왔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놀랍고 두려워 친한 친구를 찾아가 함께 가기를 요청하였지만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는 힘없이 두 번째 친구에게로 갔습니다. “자네라면 같이 가 줄 수 있겠니? 제발 부탁이네!”하니 “궁전 문 앞까지만 가도록 하겠네”하여 별수 없이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였습니다. 이 친구는 “나는 자네를 믿네 두려워하지 말게! 내가 자네와 함께 가 주겠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물을 비유한 것으로 재물은 무엇보다도 아끼고 귀중하게 생각하지만 죽을 때는 이 땅에 모두 남겨 두고 갑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입니다. 그들은 무덤까지는 따라오지만 그를 그 곳에 두고는 곧 가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착한 행동을 비유한 것으로 착한 행동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로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시며 지금도 함께 하시고 영원까지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분부를 실천한 결과는 어떠할까요?
첫째, 5절 말씀에 우리 평생에 우리를 당할 자가 없게 하십니다.
두번째, 7절 말씀에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하십니다.
세번째, 8절 말씀에 우리의 길이 평탄케 됩니다. 이러한 복이 죽는 날까지 충성하시며 인정받는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의로운 사람
마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사람의 인격은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나 유난히 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급하고 다혈질인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저는 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입니다만 … .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그 순하고 부드러운 사람도 예상치 않은 일이나 최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나라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문 성경말씀에 마리아란 처녀와 요셉이란 총각이 약혼을 하였습니다. 약혼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무지개 꿈에 부풀어 인생을 설계하며 아들과 딸은 몇 명을 낳을까?, 첫날밤은 어떠할까?,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남녀간의 관계는 어떠할까?, 첫아기를 낳으면 누굴 닮았을까? 등등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 두 사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 임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청천 벽력같은 소식에 접한 요셉은 낙태를 결심하게 되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자로 인류를 구원할 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셉의 입장이 되었다면 어찌 하였겠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이렇게 예상치 않고 뜻하지 않은 일들이 무수히 다가오는 데, 이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일들을 해결해 나가야 할까요?
그리고 이렇게 엄청난 일을 요셉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첫째, 감정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감정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때로 감정대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정말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있는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인격이 그만큼 수양되었다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혈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사자나 늑대라고 하지 않으시고 양에다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양이라 하셨지요. 혈기를 꺾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꺾임을 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평생 예수님 안에서 막대기나 몽둥이(징계)를 맞으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천국은 가지요 … .
둘째,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성급히 행하는 일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을 인(忍)자를 보면 칼 도(刀) 밑에 마음 심(心)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칼을 잘 쓰는 자와 같습니다. 칼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요리사가 잡으면 맛있고 영양 있는 요리를 만들고, 의사가 잡으면 죽을 사람도 살리고, 강도나 깡패가 잡으면 산 사람도 죽이듯이, 마음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이지만 내가 그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14:29)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잠 29:20)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외국인도 ‘빨리 빨리’란 단어를 다 안다고 합니다. 냉수 한 그릇을 마시더라도 잠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며 잠깐이라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대단히 좋아하실 것입니다.
셋째,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0)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24~25)
<마 2:13~15, 애굽으로 피신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요셉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였다면 요셉은 인류의 멸망을 몰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 감정을 죽이고 말씀을 따른 결과, 자신은 좀 망신스러웠을지라도 온 인류의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뜻에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마 26:53~54)
말씀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길은 후회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같은 순례의 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욥 8:5~7)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 4:18~19)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크게 귀하게 자라며 쓰임을 받는 그릇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 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사람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0~18)
지금 이 세상은 인간이 보기에는 깨끗한 것 같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썩고, 병들고, 멍들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그러나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가 의로운 사람입니까? 하나님 곁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아벨, 아브라함, 욥, 요셉 등).
염소가 아니면 양의 편, 가라지가 아니면 곡식 편, 쭉정이가 아니면 알곡 편, 어두움이 아니면 빛 가운데 거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창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에 롯이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물로 제공하므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아 모두가 멸망할 때에 살았습니다. 심지어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천한 계집 기생이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 내용도 하나님의 사자를 목숨을 걸고 숨겨준 공로로 의인으로 인정받아 살아나게 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로운 사람으로 승리하며 영원 멸망의 길에서, 인생의 험난한 길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예수, 예수의 피, 골고다의 예수님의 피를 믿고, 예수님을 섬기고, 몸된 교회의 뜻을 잘 받들어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셨듯이 저나 여러분도 의로운 자로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고, 천국백성으로 예수님과 동행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일이 닥쳐도 감정을 버리고 서두르지 말 것이며,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후의 승리자
고후 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얼마전에 세계적인 골퍼 박세리양과 야구선수 박찬호 선수가 모국을 찾았습니다. 그들이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수 백 명의 취재진과 팬들이 몰려들어 온통 난리가 난 것 같은 상황을 TV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다니는 것일까? 그들에게 무슨 힘과 능력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비결이 깊숙이 내포되어 있기에 그 숨겨진 승리의 비결을 소개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대립 속에서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이 생겨도,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실패하지 않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수천 억의 천문학적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 인생을 마친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3~14)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창 37:5~10)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에 살고 있는 로버트 고다드 씨는 소량의 연료를 싣고 달나라까지 갈 수 있는 특수연료를 만들기 위하여 낮이나 밤이나 연구에 몰두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법원에 고소까지 하였고, 1929년 1월 13일자 뉴욕 타임즈 지는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 이상자’란 비난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후 40년 뒤인 1969년 닐 암스트롱, 콜린스, 올드린 세 사람은 로버트 고다드 씨가 만든 연료를 통하여 사상 처음으로 달나라에 갔습니다. 꿈은 위대한 미래를 여는 열쇠이며 도구입니다.
2. 소망을 가진 자는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마라톤 선수 황영조씨는 마지막 35km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었으나, 한국민의 성원과 바닷속에서 물질하며 자기에게 소망을 두고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새 힘을 얻어 기어코 일본 선수를 제치고 세계적인 마라토너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명예와 부를 한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5)
목표를 정했으면 변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진 이상 낙심하지 마십시오. 헛된 소망을 버리십시오. 출세, 승진, 부요, 향락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무엇인가 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아름다운 행복한 성도가 되십시다.
3. 약속을 믿는 자는 최후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19~22)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0)
결 론
나는 질그릇이요 하나님은 나의 보배와 나의 능력임을 믿는 자는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30)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4~46)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시련과 연단이 와도 꿈을 버리지 마십시다. 그리고 어두움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소망을 가집시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영웅 맥아더 원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살아질 뿐이다’라고 하였듯이, 성도는 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포기할 뿐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약점이 있다면 배설물같이 버리십시오. 승리만 하면 성공만 하면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태평양 가운데서 몇 십 톤 되는 고래가 춤을 춘다고 바다물이 넘칩니까? 흔들립니까? 최후의 승리자에게 작은 약점은 다 묻힐뿐더러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은 초등학교를 석 달 밖에 못 다니고 학교에서 퇴학을 맞았지만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 역시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인류 역사에 최고의 정치가가 되고 위인이 되었습니다.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음에도 불구하고 4번(32, 33, 34, 35대)이나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파스칼은 어머니 아버지가 다 돌아가신 고아 출신인데도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음악가 베토벤은 귀가 멀어 소리가 안 들려도 훌륭한 작품을 얼마든지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헬렌 켈러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 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만인이 우러러보는 생애를 살아 전세계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귀족 넬슨이나 프랑스의 황제이자 전쟁 영웅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지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어떠한 극단적인 불가능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므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 속에 보배 같은 예수님과 성령님이 담겨지면 전능하신 예수님은 그를 귀하게 여기시고 책임져 주시며 마지막에 최후의 승리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가을에는 감사하게 하소서
롬 14:6~9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 서 언 / 삶의 순간 순간이 늘 감사의 계절입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홀로 기도의 불을 밝혀들고 예수님의 궁정에 들어가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인 것 못지 않게 감사의 계절입니다. 이 계절에 풍성한 열매들이 익어 감사함이 넘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추석이 있고, 세계적인 절기로 추수감사절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 사랑의 하나님께 기도의 초대권을 들고 무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마지막 열매가 익기까지 남국의 태양을 며칠만 더 주소서’하고 간구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구에도 더 많은 열매(소득)를 추구하는 현실안(現實眼)보다는 열매를 익도록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더 두드려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맘때면 우리의 입에서 즐겨 읊조려지는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로 이어지는 ‘가을의 기도’에도 기도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홀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읍(感泣)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겸허한 모국어 - 저는 이 ‘모국어’(母國語)를 어떤 이들처럼 이 지상에서 누리는 ‘우리의 국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명증(明證)하는 ‘영원한 천상의 언어’라고 이해합니다 - 로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은혜요,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어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예수님의 은혜요, 거치른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은 외로운 까마귀같이 홀로 있게 되는 것도 예수님의 은혜라는 감사와 찬송의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이 권고하는 것처럼, 가을 들판에 익은 곡식과 곡간에 넘치는 양식 때문만으로 감사하는 삶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고(살전 5:18), 무엇을 하든지 감사하고(골 3:17), 비천한 데서 우리를 기념하심을 감사하는(시 119:107) 삶이 진정한 의미의 ‘감사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은 감사의 자리에 초청을 받도록 합시다.
2. 진정한 의미의 감사신앙을 확립합시다
본문의 말씀은 그렇게 쉬운 내용이 아니므로 주석적인 도움을 조금 받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몇몇 사본들에는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다음에 대칭법으로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하는 대칭구절이 있습니다. 영어성경 중 흠정역본(KJV)이나 우리 나라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없는 간결한 본문이 본래적 의미를 더 잘 전달한다는 사본비평원칙에 따라 한글개역성경에서처럼 이 대칭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하여’(for the Lord)라는 중심 단어입니다. 이 ‘주를 위하여’라는 중심 단어를 중심으로,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6절 상),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6절 하), (자기를 위하여)사는 자와 (자기를 위하여)죽는 자(7절), (주를 위하여)사는 자와 (주를 위하여)죽는 자로 계속 대칭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9절에 가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을 대칭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어떠하든지 그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우리를 위하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입장에서는 수고요 희생일 것 같은데 본문은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요 ‘감사의 제목’이라고 합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도 감사요 저래도 감사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의미요, 항상 감사하는 삶의 의미이며, 고난 중에 감사하는 삶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진리입니다.
이런 예화가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나라 궁정 앞에서 구걸을 하는 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걸인은 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행인들이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은화를 던져줍니다. 우리 나라 화폐단위로 말하자면 10전을 던지기도 하고 혹은 5전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걸인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10전짜리는 마다하고 5전짜리만 줍습니다. 그러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걸인을 두고 사람들은 바보 천치다, 좀 모자라는 사람이다 하면서 재미있어 합니다. 소문이 날 정도였고 많은 사람들은 이 바보의 선택을 통해 즐거움을 맛보려고 자꾸만 은화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그 걸인은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걸인은 바보가 아니라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큰 것을 탐했다면 사람들의 사랑을 계속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걸인의 마음속에는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요, 임금님의 궁정 앞에서 긍휼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사실 죄인된 우리들이 구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자세 말고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돌아보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회심한 어거스틴이 평생토록 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고백한 것은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은총박사이었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의 은총을 힘입는 감사박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 역시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 구할 것은 예수님의 긍휼 밖에 없다면서 입고 있던 남루한 구도자의 옷마저 벗기게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예수님 앞에 섰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문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의미의 감사는 이처럼 언제나 주를 위하여 자아의 남루를 벌거벗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힘씁시다.
3. 감사는 예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특유의 대칭법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6~8절까지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주를 위하여’ 날들을 중히 여길 수도 있고 중히 여기지 않을 수도 있으며, 우리는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으며,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를 위하여 먹는 것이 중요하거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야만 할까요? 주를 위해서 이처럼 인생 전체를 반납한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비상이 걸려서 모처럼의 휴가를 반납한 사병의 심정 같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필히 그렇게 해야 하고, 또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이유가 본문 9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9절). 8절과 9절 사이에는 ‘이를 위하여’(for to this end)라는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위의 6~8절의 문장 전체를 받습니다. 즉 우리로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말씀의 궁극적인 핵심은 ‘우리를 위하여’(for us)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증거에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아니 ‘나를 위하여’(for me) 하나님과 본체이시오 동등하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죄인의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의 보혈을 쏟으셨습니다. 다시 사시사 새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사시고 ‘우리를 위하여’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요 찬송의 제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마땅하며 ‘주를 위하여’ 죽는 것도 마땅합니다. ‘주를 위하여’ 먹는 것이 마땅하며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 것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값 주고 사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20; 7:2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신(시 107:7) 예수님께 영원한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13)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던(시 126:1), 구원의 그날 그 감격을 목메어 찬양하며 영원히 ‘그분을 위하여’ 살고 죽고, 먹고 마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더 깊은 감사, 궁극적인 감사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 즉 믿음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는 로마서에서 ‘주를 위하여’ 사는 실천적 행위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은화의 안팎 같은 것이며 언제나 영적인 밸런스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약 2:22)는 야고보의 화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를 통해, 우리를 먼저 위하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모습은 지금 어떤지 돌아봅시다. 오래 전에 레이디 엘진(Lady Elgin)이란 배가 침몰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스펜서(Spencer)라고 하는 용감한 청년이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17명이나 구했다고 합니다. 그가 늙었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그 17명 중에 무슨 감사의 표시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펜서의 대답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의 은혜로 그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환자 가운데 돌아와서 감사하며 영광을 예수님께 돌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눅 17:11~19). 나병보다 더 무서운 영혼의 질병으로 신음하던 우리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시간은 지금 몇 시쯤 되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청교도 시인 존 밀튼(John Milton)은 한창 일할 나이에 눈이 어두워져 44세 무렵에는 완전히 실명(失明)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처지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주께서 내 육안을 어둡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영안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감사했습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그는 「맹인의 노래」(On His Blindness)를 써서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저 유명한 대서사시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과 「복락원」(福樂園, Paradise Regained)을 써서 죄로 말미암아 낙원을 상실한 인간의 비극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된 생명을 노래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4. 결 언 / 우리 삶의 밭을 봅시다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의 밭은 지금 어떤지 살펴봅시다. 만물들이 알알이 여물어 무언(無言)의 예배를 드리며 고개 숙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밭에도 우리가 가꾸어 온 보람과 고통, 기쁨과 슬픔, 잘되는 일과 잘 안되는 일 등 다양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겸손의 바구니에 거두어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겐 감사하게도 찬송의 입술과 생명의 언어를 주셨으니 무언으로 말고 소리 높여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립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합시다.
그리하여 감사에 신속하고 부요한 자가 되어서 이 기쁨, 이 감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나누어 줍시다. 나도 쓸 것이 없고 이웃에게도 나눌 것이 없는 감사의 가난뱅이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랑이 식어 인간의 심성이 날로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범죄와 불법이 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물을 주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깊은 감사’에 초청받은 우리들은 그러기에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참된 감사의 사람이 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먼저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가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은총의 바다는 저리 무한한데, 저의 배는 지극히 작고 낡았나이다”하고 겸손히 기도한 브레튼의 어느 가난한 어부 같은 심정으로 살아갑시다. “주여! 가을에는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의 새 일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사 42:9)
1. 서 언 / 하나님의 새 일과 기적
새해에 맞는 언어가 있습니다. 가령, ‘아침’이라던가, ‘희망과 설렘’, ‘기쁨과 환희’, ‘찬란한 태양’, ‘감사와 찬송’, ‘사랑과 축복’, ‘새로운 출발’ … 이런 언어들입니다. 새해 아침 무렵인 지금 우리의 가슴에는 이런 언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해 아침 무렵의 예배를 통하여,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새해의 언어로 ‘기적’이란 단어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적’(奇蹟,miracles)에 대해 말합니다. 기적이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영역과 한계의 일로서 자연의 현상을 벗어나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기적은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기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異蹟)과 기사(寄事, wonder)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사는 크리스천은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령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이 기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창조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선포한 이 말씀은 구원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사역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 “내가 속히 오리라” 이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약속한 이 말씀은 심판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심판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만, 성경의 기적을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원받아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시기,
②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행해진, 유일하신 참 신이신 여호와와 이방신과의 대결의 시기,
③ 비록 몸은 포로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이방에 선포한 다니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포로시기,
④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성육신 하시고, 제자들이 이것을 증거한 신약시대가 그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기적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구원 사역입니다. 즉,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사건을 인류최대의 기적이요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오늘 하나님 앞에 모인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열거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의 대답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누군가 이 시간에 즉각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살아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크리스천이 ‘살아 있다’는 의미는 세상의 삶과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며,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누구나 힘쓰고 애쓰는, 말하면 햇빛과 비를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 아래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죄로부터 구원받은 생명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택한 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에 의한 삶인 것입니다.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아있다’는 말은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삶,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기적이요,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도 구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할 수록 기적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진술한 것처럼, 성경이 증거하는 최대의 기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인데 이로써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 중 가장 큰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구속하신 구원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의 전체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의 당사자인 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고 영광스러움이며 영원한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3. 인류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새 일’이라고 합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여기서 말하는 ‘새 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인류의 구속사역’을 뜻합니다. 성경을 주석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즉 ‘하나님의 새 일’이란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43장 18절 이하도 같은 관점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 ”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택한 백성을 위하여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일, 곧 구원의 길을 내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48장 6절 이하에서도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밀한 일을 내게 보이노니 … 네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새 일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마땅히 죽을 자를 멸절하지 않는 것, 즉 인애와 긍휼로 죄인을 구원하는 일임을 뜻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새해를 맞이하거나, 자녀들이 입학을 할 때, 또는 승진을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자주 상고되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새해도 축복하시고 새로운 사업이나 승진도 축복하십니다. 이러한 새 일도 우리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도 잘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원래 이러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죄 아래 처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절박하고 중요한 새 일은 없습니다.
4.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 일을 우리들을 통해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마침내는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지상명령을 맡기셨습니다(마 28:19). 베드로와 바울에게 새 일을 맡기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새 일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크고 위대한 기적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에게 이 학원사역을 맡기신 것도, 희망의 새해를 허락하신 것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새 일을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지난 해와는 달리 새롭게 잘 살아보라고 우리에게 새해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무서운 IMF시대에 그래도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학원에서 일하도록 하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고전 10:31). 이것은 결코 거창한 얘기도 위선적인 얘기도 아닙니다. 참으로 절박하고 심각한 얘깁니다.
가끔 어떤 이는 말합니다. 대학은 어디까지나 학문하는 곳이지 전도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옳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옳은 판단이 아닙니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고, 시대의 지성인을 길러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대학은 이것을 최종의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학문을 바로 전수하고 시대의 지성인을 잘 길러 내어서 국가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것이 대학의 최고 목적입니다. 국가와 인류에 대한 최대의 봉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대학에는 국가와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되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영광스러운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봉사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백 위에 학문의 집을 짓고, 그 쌓은 지식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위해 써야 합니다.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기독교 대학의 존재 이유이며 최우선의 가치입니다.
5. 결 언 / 하나님의 새 일을 감당함으로 가장 큰 기적에 동참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에서 하는 사역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민족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새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 모인 우리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요 가장 큰 기적적인 새 일입니다.
특히 우리가 맞이한 1999년 새해는 20세기의 마지막 해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시간입니다. 야곱이 직면했던 얍복강 나루터의 밤과 같은 시간입니다. 이 20세기의 마지막 밤에 우리는 겸비하고 회개하며 저마다 자신을 성결케 하여야 브니엘의 아침같은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새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사람을 통하여 도도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오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새 일을 오늘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강의실에서 교정에서, 그리고 행정 사무실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시대의 지성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저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저 세상으로 내어보내야 합니다. 저들이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 일이자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크고 위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이처럼 영광스러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족복음화의 못자리판 같은 성결학원을 온전히 복음화하는 것이 새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새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원사역, 즉 하나님의 가장 크고 위대한 새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요 4:34). 즉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양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양식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뜻합니다. 우리에게 이 양식이 있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아버지 하나님의 새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생애 가장 복된 양식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롬 14:4~6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같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시요, 세계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가장 귀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는 신앙생활, 즉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 아니 나의 구주로 성령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영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모습인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윤리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윤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내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멸망 받기로 예정된 내가 예수님 때문에 그 무거운 죄를 다 탕감 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나는 티끌이 아니라, 대들보로 꽉 막힌 죄인된 나를 오직 은혜로 구원시켜 주시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에 감사하고 있다면 이제 그것이 생활 속에 윤리적인 생활 속에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한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판단의 자유, 도덕적 자유, 이성의 자유 등 우리는 전부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자유는 사랑이라는 굴레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따라다니는 윤리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은혜 아래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의 사랑 안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유가 있을 뿐이지 사랑을 버려 두고는 자유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진정한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본문 말씀대로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은 사랑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참아주는 것입니다. 즉 인내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당장은 조금 마음에는 들지 않더라도 아직은 서툴기 때문에 조금 더 지나면 잘 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일도 꾸준히 참고 끝까지 최선을 다할 때 얻어지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No pains, no gains"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할 때 처음 나온 성도들은 설교를 듣고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끝나고 인사할 때 “어떻게 잘 들으셨습니까”하고 물어 보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네요”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손을 꼭 잡고 “제발 조금만 참고 계속 꾸준히 나오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점점 귀가 열리게 되고 재미가 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고, 성도님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나와서 점점 믿음을 얻게 되었고 교회의 성실한 일군으로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날을 중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저런 날을 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에 어떤 사람은 주일날을 중히 여겼고,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안식일과 주일 둘 다 지켰습니다. 안식일만 지키자니 주일이 걸리고 주일만 지키자니 안식일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예 둘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느 날이 옳으냐를 판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날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보다 예수님을 중히 여기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먹느냐 먹지 않느냐, 이런 것들은 다 형식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기 때문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도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신앙을 분명히 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넓으신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실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렇게 볼 때에 먹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두가 똑같은 목적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받고 어떤 것이라도 은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받고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분에게도 감사하고 넉넉하게 대하면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면, 마귀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지으신 형제를 미워하며 비판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감사가 없고 짜증이 난 상태에서 어떤 좋은 말도 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원망과 시비가 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합시다.
제일은 사랑이라
요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베이커는 “사랑이란 그리스도인의 뺏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신분증이나 계급장이나 회사원이 뺏지를 달고 다니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언 땅을 녹이는 따듯한 봄 햇빛과 같습니다.
길가는 나그네의 두툼한 외투를 벗기기로 했던 바람과 해의 우화는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바가 큽니다. 크고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바람이 불면 불수록 나그네는 외투자락을 여미고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나 소리도 없고 요란스럽지도 않는 햇빛이 나그네를 비추자 그는 훌훌 외투를 벗었습니다.
사랑이란 냄새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만, 닫힌 마음을 여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나눠진 것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원자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랑과 미움이 한판 승부를 겨루기라도 하려는 듯 대치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증오와 싸움과 시기와 분쟁의 영입니다. 마귀는 할 수 있는대로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이 세상 곳곳마다 증오와 다툼을 일으키고, 서로 미워하며 싸우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국경분쟁, 종족간의 싸움, 이데올로기의 대결, 종교전쟁을 비롯하여 개인 대 개인의 갈등과 싸움도 따지고 보면, 사랑의 부재현상이 빚어내는 사단의 농간인 것입니다.
얼마 전 캐나다 신문을 보니까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 부인이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판장이 부인과 남편을 불러다가 사실 심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이 부인에게 이혼사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의 대답이 “남편이 노래를 너무나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얼마나 못하기에 이혼을 할 정도냐고 물었더니 그 부인 대답이 자기 남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아는 노래가 단 한 가지 뿐인데, 그 노래 제목이 ‘독신 생활이 좋아’라는 것인데다가 그 노래를 부르는 날이면 돼지 목따는 소리에다가 곡조가 도무지 맞지 않아서 함께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장이 그녀의 남편에게 그게 사실이라면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듣고 난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면서 “앞으로 6개월 동안 부지런히 성악가에게 개인 레슨을 받아서 노래를 잘 부르도록 한 다음 그때 가서 교정이 안되면 다시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자“라고 판결했다는 것입니다. 웃고 넘기기에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제 아무리 일생을 약속한 부부 사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떠나면 어제 듣던 ‘그대는 나의 태양’이라는 노래가 돼지 목따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오지 그릇 깨지는 소리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불행과 고민은 I. M. F라는 경제의 위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가 부패한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시대 우리들의 문제는 사랑이 식고 증오가 춤추고 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크게 네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20절을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을 다루고 있고, 21~30절은 가룟 유다가 최후의 만찬석을 뛰쳐나간 사건을 다루고 있고, 31~35절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을 다루고 있고, 36~38절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사단이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면, 예수를 멀리하고 자신을 감추고 남을 속이는 가면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정체를 벗기신 후에 둘러앉은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문 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경가 파머라는 사람은 “교회가 교회 될 수 있는 것은 표적도, 공적도, 사람의 수도 아니라 오직 사랑에 있다”고 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 역시 교회를 들락거린 연륜이나 공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교회다’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가르켜 34절에서 “새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는 경쟁심과 시기심이 있어서 누가 제일인가와 누가 높은가의 다툼이 거세게 일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남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올스하우젠은 늘 새로운 계명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 되며, 갱신된 계명이 되며, 늘 새로운 계명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자발적으로 동기를 만들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감정과 기분과 그때 그대의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그 사랑의 표준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나한테 잘하는 사람이나 내 기분에 맞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짐승들도 자기에게 잘해주면 애정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따지지 않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랑할 가치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별력도 부족한 사람들이었고, 대체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무식한 어부들이었고, 다투기 좋아했고, 시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로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너희가 사랑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은 것처럼 너희끼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레나 루즈벨트는 10살 때 고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20세 때 결혼해서 6남매를 키웠습니다. 6남매중 한 아이가 어머니 눈앞에서 죽는 슬픔을 당했을 때 친구들이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 나에게는 아직도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남아 있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남편 루즈벨트의 다리가 마르기 시작하여 쇠붙이로 받침대를 만들어 다리에 붙이고 휠체어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부인에게 “아직도 나를 사랑하오”라고 묻자 그녀는 “나는 당신의 나라(다리)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전체를 사랑했다”고 대답한 일화가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면 그를 떠날 것입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권력에서 밀려나면 그를 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엘레나 루즈벨트처럼 망가진 다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남편 루즈벨트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엔 변함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1. 몸소 실천하신 크신 사랑입니다
입으로 외친 사랑이 아니라 친히 자신이 겪으신 사랑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희생시킨 사람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잠깐 동안만 계속되는 사랑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3. 차별이 없는 사랑입니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4.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동기 속에 불순한 것들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이유도 그 속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저 인간이 불쌍하고 애처롭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5.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무엇에다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신 사랑이며 하나님 밖에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사랑을 행함으로 보여야 합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정말 제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혼탁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사랑의 메아리, 사랑의 노래를 이 땅위에 충만하게 하십시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사랑의 등불로 우리의 가정을 밝히고 교회를 밝히고 어두운 세상을 밝혀 작은 천국을 만드는 우리들이 되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하나님의 능력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 사도는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분쟁에 휩싸여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우리의 신앙은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사람은 제한된 환경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제한된 환경과 유한한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아름다운 말과 지혜는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문제의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간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인간의 말과 논리 즉 지혜의 아름다움에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지혜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삶의 유용한 문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철학과 과학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성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아름다운 문명의 시대를 이룩하였고, 생활에 편리한 자동차, 비행기, 세탁기, 냉장고 등 많은 것들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 새로 산 고급 자동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동차나 비행기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다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늘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크고 좋은 세탁기를, 이불 빨래도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세탁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세탁기도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케 만들어 줍니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냉장고를 자랑합니다. 얼음과 냉수가 누르기만 하면 나오는 냉장고, 그리고 오랫동안 신선도를 유지하는 냉장실을 지닌 냉장고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냉장고가 육신에 필요한 음식은 얼마동안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는 있어도 영적 음식을 우리에게 보관했다가 제공할 수 없습니다. 영적 음식은 성경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시계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롤렉스시계가 예수님의 때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신발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좋은 신발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또한 자연과 환경의 퇴락을 예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연이 병들고 그로 인하여 인간이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생명력, 하나님의 창조물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파괴, 하나님의 만드신 세계를 파괴하고 나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만들고 난 뒤 그것이 악용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문명의 발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격이 더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노벨상은 그렇게 출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육체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문명사회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영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참된 인격체를 형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도덕적인 문제로 씨름하여야 했고,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인간의 존재론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이 땅 위에서 잠시 지내는 그 시간을 탐하는 싸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지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지식으로 여기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지식이 무엇인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그분이시며,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주는 가장 귀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저주아래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십자가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사랑과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며 역사의 전환기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2. 바울 사도는 그가 아는 하나님, 죽기까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사건을 전할 때에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전도는 나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나의 경험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는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유한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부족한 가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나 경험을 자랑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의 용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고린도 지방은 이방인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유대종교 지도자들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언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고린도 지방은 항구도시였습니다. 다른 모든 항구도시들이 그렇듯이 그곳도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우상을 섬기는 12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은 우상을 섬길 뿐 아니라 성적으로도 타락을 하였던 대표적인 신전이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고린도 지방은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교육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1장 5절에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 철학을 사랑했고, 바울은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철학적 토론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지만(행 17:22~34), 소수의 무리만이 그의 증거하는 것을 경청하였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빌립보를 떠나 아덴에 이르러서도 철학적인 논쟁으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의 마음은 두렵고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떨리는 가운데에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도의 능력은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일어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오순절에 이르러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아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의 설교에 몇 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지만 성령은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처럼 순교하는 자리에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전도자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전도 여행을 통하여 경험하였습니다. 오늘날 마찬가지입니다.
3. 분쟁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신앙을 하나님의 능력에 두기보다는 사람의 말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말이, 또는 신학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의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현상은 우리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교리 논쟁이 실제로 우리의 역사 속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장로교파만이 제일인 것처럼 말합니다. 감리교회는 감리교회가 그런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리적인 논쟁이 복음을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교리가 당론이 앞선 것이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Y2K의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Y는 year의 약자이고, K는 주로 1000단위를 나타내는 약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주후 2000년에 나타나게 될 컴퓨터 프로그램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레니엄 버그는 단지 컴퓨터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종교적 밀레니엄 버그가 있습니다. 1999년은 바로 그런 해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종말론을 말머리로 하여 각종 사이비 종교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더욱 극심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한 어머니가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함께 그 집단을 이탈하려는 딸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그럴듯한 종말론을 내세우며 기독교인들을 유혹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된 신앙의 자세를 매일 매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종말을 준비하는 기독교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분쟁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다투는 사람들은 서로 좋은 점보다는 약점을 들추어냅니다. 서로 상대방의 나쁜 점을 공격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될 때에는 어느 한 쪽은 옳은데 다른 한 쪽이 잘못하는구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쪽을 다 추하게 봅니다. 우리 나라 국회가 바로 그런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양쪽의 추한 모습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회와 국회의원들을 존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추악하고 더러운 정치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I. M. F의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서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남의 것으로 돌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낸 세금으로 서로 권력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국회의원들을 정상적인 사람들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싸움이나 당 짓는 일은 더 추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서로 부족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장점을 자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소문이 그 교회 교인들이 만들어 냅니다. 교회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소문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야”하는 소문은 바로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교회에 방문한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며, 우리가 전도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은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한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함입니다. 오늘도 나와 더불어 역사하시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 멘
반석 위에 지은 집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실까 기다렸습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집을 짓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15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시작됩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구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앞의 문맥을 살펴보면 참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이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모래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지적해 주시기까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를 예수님께서는 대조적인 설명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참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미래를 말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전해서 백성들의 갈 길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늘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하나냐 선지자 사이에서 그러한 갈등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바른 소리를 함으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권력에 아부하는 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는 다른 말을 전하고 육신적으로 안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온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렘 28장).
지금 I. M. F의 체재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상태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편안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성숙한 삶입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려움을 감내하며 삽니다.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우리가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조그마한 고통 앞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세상은 늘 끊임없이 좋아만 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금주의 사상에 젖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I. M. F 체재는 그 동안 우리가 쌓아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쾌락과 육체의 편안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외형적 미에 두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미화주의 즉 beautifulism에 두며 생활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을 모방했습니다. 우리 자신만이 간직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찾아보려고 노력하지 아니하고 남들이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었습니다. 내적인 미모를 갖추기보다는 외적인 미모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성실한 삶보다는 화려한 삶을 원했습니다. 화려한 삶은 분수에 넘치는 무엇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서는 의류 상표를 겉으로 내어놓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청바지 뒤에 나타나는 상표, 그것 말고는 대부분이 상표가 옷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산되는 유명 브랜드는 겉으로 상표를 내놓습니다. 사실 겉으로 상표를 내놓는 것은 그다지 외관상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겉치레를 좋아하는 우리의 잘못된 사고를 그대로 반영하는 문화가 의복에서 형성되었습니다.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더 외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욱 겉으로만 화려하게 꾸미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문화는 점점 더 미화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행복이란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정신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건전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가 우리 모두의 행복의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든 사회 속에서 살았습니다. 겉으로 화려하지만 속으로 병든 그러한 문화와 정치구조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우리의 허영된 마음을 침투해 들어옵니다. 사단의 전략은 beautifulism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사단이 타락할 때에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지으신 고로 교만하여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있어서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평안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법을 자신들의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법의 정신,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그 형식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력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법으로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수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변호사들이 하는 일은 새로 나온 법망을 피해서 사람들의 편리를 보아주고 그 대가를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변호사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변호사는 양심을 팔고 법이 미처 막지 못한 부정한 수단을 제공함으로 그 대가를 얻습니다. 법이 제정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현대인들이나 법을 다루고 그리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법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 예수님은 “너희가 그렇게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까지 주며,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어주며,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거짓 선지자들은 율법만을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했습니다. 참 선지자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 안에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참 선지자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고통이 뒤따릅니다. 때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행할 때에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신앙으로 성숙한 인간이 됩니다.
2. 예수님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어떤 비유입니까? 우리는 집을 지을 때에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집을 짓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 서울 지하철 7호선공사 등 많은 건설현장과 건물들이 부실공사로 인하여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문화와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도 한결 같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도 같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오늘날 기초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기초질서를 무시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도로에서 속도제한을 지키면 답답한 사람처럼 여깁니다.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사람은 속도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계획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비전이 있고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은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며 그 안에 희망과 미래를 세워 가는 사람입니다. I. M. F의 위기는 금융권에서 돈을 대출함에 있어서도 바른 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정치권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더욱 든든하게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디서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회 구조악이 만연해 있는 듯 합니다.
우리는 집을 지을 때도 대충 짓습니다. 학교에서의 교육도 문제가 있습니다. 컨닝을 해서라도 일등이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 전 메스컴에서도 보도된 바와 같이 소위 일류대학의 책상 위가 새까말 정도로 컨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일등위주의 교육은 우리의 배움터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일류병, 일등병으로 인하여 한국의 대학은 학과의 특성, 지역의 특성에 관계없이 순위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일류주의, 일등주의는 대학의 특성도 전문성도 폐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장 많은 정치범, 경제범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국의 최고 대학 출신들이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지식인이 인격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등 한 사람을 위해 모두가 들러리를 서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아니 온 국민들 모두가 고통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공동체로 변하였습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은 구원받는 사람들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든든한 반석 위에 신앙을 세웁니다. 먼저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으로 삽니다. 육적으로는 비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선지자나 예언자는 이러한 비전을 심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비전을 반석 위에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행하는 행함 속에서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달란트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행하며 발전시키는 사람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선발하고 평가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각기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살려줄 수 있는 평가제를 도입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달란트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살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ane어 두었던 종을 책망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은 달란트를 주었건 많은 달란트를 주었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서 사용하고 발전시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보람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일하면서 비전을 키운 ‘신지식인’들은 존경받아야 할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달란트를 주셨습니까? 그 달란트를 사용할 때에 그리고 정직하게 노력할 때에 진정한 행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반석과 같은 기초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반석은 예수님이시오, 생활의 반석의 기초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맡기신 달란트 입니다.
결 론
반석 위에 집을 세우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정직하게 성실하게 비전을 가지고 키워나가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에서 우리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두려움 없이 전진하십시오. I. M. F체재도 우리의 행복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불행은 물질주의에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우리의 의식 가운데 바로 인식할 때 우리는 오늘도 행복할 수 있고, 성실할 수 있고, 인격체로서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교회
계 3:7~13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이 일곱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 중 가장 이상적인 교회며, 우리가 배우고 본 받아야 할 교회입니다. 왜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께 칭찬 받은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직장인은 상사에게 신자는 목사에게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칭찬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에 성실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에게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사회와 직장과 교회에서 칭찬 받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도 예수님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께 단 한번의 칭찬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는 책망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역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의 책망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두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를 예수님께서 특별히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할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오늘 이 땅에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웅장하고, 내부적으로 화려하고 찬란하며, 최고의 시설을 갖춘 교회가 있습니다. 참으로 보기에 훌륭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칭찬하실 교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외형을 보시고 기뻐하시거나 내부의 화려한 시설을 보시고 특별히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교회의 외형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겉모양은 아무리 훌륭해도 내용이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교회라면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하려고 성전에 들어가 보니 거룩해야 할 성전이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의 장터가 되었으며, 짐승의 배설물로 더러워 졌고, 돈 바꾸는 사람의 웅성대는 소리로 소란하여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몹시 분노하사 장사꾼들을 책망하시고 밖으로 쫓아내신 후 예배를 드리셨습니다(요 2:13~16).
성전 안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 복음이 선포되는 소리, 감사하는 소리만 들려야하며 예배의 향기와 제물의 향기가 가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싸우는 소리, 비난하는 소리, 교만한 인간의 소리가 복음의 소리보다 더 커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고, 인간의 썩은 냄새가 성전 안에 가득하고, 밖으로까지 넘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니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단에 바쳐질 제물입니다.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물인 성도가 죽지 않고 살아서 성전 안에서 돌아다니고 소란을 피운다면 참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성․악성․죄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갈 2:20), 교만․혈기․고집․미움․시기․불순종 등을 각을 떠 예수님의 거룩한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쳐야 하며, 우리의 삶이 교회와 세상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그 교회와 성도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께 칭찬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지만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지역에서 지위․명예․신분이 변변치 못하고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능력이 적은 사람들인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교회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소에 잘 믿는 것 같아도 환난을 당하고 생활이 곤고하게 되면 예수님을 떠나 물질을 따르기도 하고, 시험과 핍박이 있을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어려울 때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다가 넉넉해지거나 평안해 지면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 때, 넉넉할 때, 곤고할 때, 평안할 때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알곡 같은 성도며,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자이며, 구원의 확실한 증거를 체험한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환난․기근․적신․위험․칼날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지라도 결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 축복 받은 교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두고 그것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 다 얻었다고 진정한 복이 될 수 없고,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복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환난․시험․핍박 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이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유혹과 핍박이 올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면 이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1. 하늘 문을 열어 주신 복입니다.
이 교회 위에 하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문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문이기에 아무도 무엇도 닫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며 오는 사람마다 은혜 받고 축복을 받으며 부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와 가정 직장 위에 하늘 문이 열려야 범사가 잘 됩니다. 주께서 열러주신 축복의 문을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열리는 복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2.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는 복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시험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악하고 마귀는 강하고 우리는 약해서 시험에 들 때가 있으며 때로는 무서운 환난이 개인 가정 교회를 위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배반하지 않으면 주께서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며 면하게 하여 주십니다. 말세가 되면 무서운 시험이 올 것이라고 예수님 말씀 하셨는데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면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3. 승리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죄와 자신과 세상과 정욕과 마귀입니다. 이것과 싸워 이기려면 예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승리하는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성전의 기둥을 삼아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시대 필요하게 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쓸모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한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과 자손들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리가 배우고 본 받아야 할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우리도 이 교회를 본받아 예수님께 칭찬 받고 복을 받아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