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선린상고는 상고 명문이었고, 지금도 선린인터넷고로 교명을 변경 실업계고의 명문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당시 상고로서도 명문이었지만 선린은 뭐니뭐니 해도 야구명문 학교였다. 지금도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선린상고를 나왔다 하면 "아, 야구 잘하는 학교죠"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적엔 고고야구가 꽃을 피우고 있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모든 스포츠 중 국가대표 축구를 제외하면 인기를 가장 많이 받은 스포츠였을것이다. (프로야구는 1982년 처음 개최되었다.) 선린을 입학하기전 야구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학교를 입학하고 나선 공부보다 야구가 더 좋았다. 특히 2학년 때, 1년 아래로 박노준, 김건우 원투펀치가 입학을 하였고, 모교는 전국단위 고교야구대회에서 항상 4강안에 들어가는 실력있는 고등학교 되었다. 4월쯤 대통령기 야구대회가 시작되면 우리는 벌써 야구장으로 응원을 가자고 선생님들을 졸랐다. 보통은 4강에 올라야 응원을 가지만 16강에만 진출해도 "선생님 야구응원가요" 라며 설치는 애들도 많았다. 입학 후 체육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응원가를 배웠다. 학교 대운동장엔 야구연습이 한창이었고, 우리는 좌측 모서리에 있는 스탠드에서 한 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렀다. "효창언덕 푸른숲속 선린에 터에"로 시작하는 응원가는 60이 넘어가는 지금도 가슴을 뛰게 만든다. "선린 아카라카"라고 시작하는 응원구호도 있다. 이 둘은 한쌍으로 "선린, 아카라카"라 하고 응원 구호를 외친 다음, 응원가 시작 하면 응원가를 부르는 형식이었다. 사춘기를 지나가는 고등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야구응원을 하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넘겼던것 같다. 나는 키가 작았고 반에서 번호를 정할 때(보틍은 키 순서로 정했다) 5번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주눅 들어있고 뒤에 앉자 있는 친구들과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했다. 졸업 후 20년 쯤 지나 3학년 반장이란 친구를 만났다. 전혀 알아 보질 못하겠고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해보려도 알지 못한채 집에 가서 졸업앨범을 보고서야 아,같은 반이었네 하고 알게되었다. 물론 대체적으로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교 3학년때는 일찍 취업을 나가는 친구들이 많았고, 상반기 6개월 정도만 같은 반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더 못알아봤다. 간혹 동창회 모임 같은데서 고교시절 담임과 친구들과 학교생활 중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면 상세히 알고 있는 친구가 있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1학년 때도 야구성적이 좋았지만, 2학년 때(1980년) 부터는 선린야구의 전성시기였대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그때 전국고교야구대회는 4개 대회가 있었는데 "대통령배,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대회" 4개 였다. 그 중 2개 대회인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한해에 선린은 두번 우승했다. 그러니 공부할 생각이 들었겠는가? 청룡기는 마산상고와 결승전에서 붙어 선린이 우승을 했고, 황금사자기는 광주일고와 붙어 우승을 했다. 광주일고에는 그 유명한 무등산폭격기 선동열이 있었다. 선동열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고교시절엔 박노준을 못 따라왔다. 선린은 서울에 있는 학교였고 박노준은 생기기도 잘 생겼었다. 박노준은 여학생들의 우상이었고 고교때만 해도 선동열보다 더 잘나갔던것 같다. 지금은 DDP로 변신한 동대문구장에서 경기가 열리면 오전 수업만하고 응원을 갔다. 운동장은 재학생과 선배 동문들로 항상 가득 찼고, TV로 중계도 해줬다. 우리는 목청이 터져라 응원을 보냈다. 가방에서 주판을 꺼내 신나게 흔들며 응원가를 불렀다. 요즘 프로야구의 인기가 무척이나 좋다. 야구는 경기장에 가서 보면 TV를 시청하는것 보다 몇배는 흥분된다. 특히 응원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의 운명과 함께 울고 웃으며 희노애락을 느낀다. 우리나라 야구장을 아주 큰 노래방이나 클럽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신나게 노래부르고, 흔들어 제켜도 누구 하나 제재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잘한다고 박수를 쳐준다.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환호하고 스트레스를 멀리 날려버린다. 그러니 고등학교 때 그 젊음이 펄펄 끌어오를 때, 자기가 다니던 학교가 전국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한다면 그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날아가고 가슴이 찢어지는 감동을 느낀다. 아마도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야구 팀이 우승했을 때 느끼는 기분의 배는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생들은 우승 후 동대문운동장에서 청파동 모교까지 응원가를 부르며 뛰다가, 걷다가하며 돌아왔다. 너무 흥분해서 가만히 있질 못했다. 길가는 사람들이 어디 시위라도 하냐고 물었다. 경찰들이 나와 에스코트를 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릴 건드리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떠날갈 듯 소리치며 응원구호와 응원가를 불렀다. 하늘을 뚤고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연단에 서서 자제를 요청했다. 그렇게 일년에 두번씩이나 우승을 경험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런 행운을 맛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선린에 대한 애교심이 들끓었다. 나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이었다. 그러나 야구 응원을 하며 적극적이고 외향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공부보다 응원에서 배운 적극성이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교란 어쩌면 공부보다도 협력, 사랑, 이타심, 성실성, 적극성을 더 알려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선린을 졸업했슴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시절 내 젊은 피를 끌어오르게한 선린의 야구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