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이 내게 준 선물 --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중에 소록도에 대해 쓴 부분이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이라서 소개하려고 한다. 정호승 시인이 오래전에 소록도를 방문하여 소록도 신정식 병원장의 안내를 받아가며 보고 느낀 바를 쓴 것이다.
나는 툭하면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인용하곤 하는데, 좋은 책을 쓰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그런 훌륭한 책을 세상에 소개하는 것도 책 쓰는 것 못지않게 좋은 일이라는 나만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인용하면서 나의 부족한 글을 보충하려는 얄팍한 계산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시인답게 책 제목부터가 다분히 시적 감수성이 잘 발휘된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142 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 내가 신 원장을 따라 처음 가본 곳은 육영수 여사가 건립했다는 ‘양지회관’. 마침 양지회관엔 서른 명쯤 되는 노인 환자들이 식탁에 앉아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손가락도 없는 몽당손에다 무슨 비닐끈 따위를 친친 감아 그 속에다 숟가락을 끼워 밥을 먹고 있었다.
“저걸 보세요. 저분들은 저렇게 식사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분들입니다. 손가락이 없는 ‘도장손’, ‘주먹손’에다 밴드나 반창고를 대거나 철사로 꽁꽁 묶어 그 사이에다가 숟가락을 끼워 밥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저분들이 군인처럼 절도있게 직각을 이루면서 숟가락질을 하는 것은 바로 손가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분들은 저렇게 밥 먹는 일조차 괴로운데 하물며 용변을 보고 뒤처리하기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저분들이야말로 용변을 자동세척할 수 있는 비데가 필요하고, 한 사람 앞에 한 사람씩 보조의자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신 원장이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허공에 직각을 이루며 하는 팔동작과, 그 팔동작 끝에 간신히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숟가락과, 입 안으로 들어갔으나 끝까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 언저리로 흐르는 미역국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 광경은 신 원장을 따라 가본 제2병동도 마찬가지였다. 제2병동은 중증 양성환자들이 있는 병동이었는데, 병동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두 손 모두 손가락이라고는 하나 없는 몽당손을 한 남자, 손가락은 몇 개 남아 있으되 그만 갈고리손이 된 중년 여인, 약물 복용으로 얼굴이 검게 착색된 사내, 이미 한쪽 눈이 실명되고 이빨마저 다 빠져버린 할머니, 코가 문드러지고 눈썹조차 없어 그대로 해골을 연상시키는 할아버지 등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 중략 .....
“그냥 지나치지 말고, 저기 저 마늘밭을 한번 보십시오. 저 마늘밭 주인은 부부인데, 부인은 눈이 있으나 다리가 없고, 남편은 다리는 있으나 눈이 없어요. 그래서 다리 있는 남편이 눈 있는 부인을 업고 서로 한몸이 되어 거의 기다시피하면서 밭을 매요.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일대 마늘밭에서 저 마늘밭이 잡풀 한 포기 없이 가장 잘 가꾸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그런 몸으로 몇백 평이나 되는 마늘밭을 가꾼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텐데도 저들 부부는 그저 일편단심으로 밭만 맵니다. 그래서 참으로 많은 걸 느껴요. 얼핏 보기에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불행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저들 부부와 한번 이야기를 해보면 놀랍게도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우리 소록도 사람들을 통해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섬하늘의 여름햇살은 강렬했다. 눈앞이 다 어지러웠다. 쥘부채를 펴 햇볕을 가렸으나 가려지지 않았다. 조용조용 신 원장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인간이니까 병에 걸리는 겁니다. 병에 걸리면 나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게 인간입니다. 건강한 외부인들이 우리 환자들을 볼 때 저게 인간이냐, 저렇게 살 바에야 아예 죽고 말지 아둥바둥 살 필요가 뭐 있겠느냐 하겠지만, 저것이 바로 인간의 진실된 삶의 모습입니다. 생명을 부여한 절대자가 허락할 때까지는 운명에 순종하고 살아가야 하는 게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
내가 8월에 쓴 글에서 대통령영부인 김건희 여사가 가끔 소록도를 방문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 것도 바로 이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록도를 영부인 김건희 여사가 방문해서 의료진과 환자들과 주민들의 손을 잡아가며 위로하고 격려해준다면 소록도는 한바탕 눈물바다가 될 것이다. 영부인께서 소록도를 방문하려면 눈치없이 빈손으로 가지 말고 눈깔사탕도 사가고 과자도 사가고 과일도 사가고 떡도 해서 가져가면 좋을 것이다. 이보다 더 대통령과 영부인의 품격을 높이는 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소록도 뿐이랴. 음성 꽃동네도 소록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늘진 곳을 영부인 김건희 여사는 부지런히 방문하고 다니라는 것이다. 한 번만 방문하지 말고 일 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잊지 않고 방문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경남교통방송이라는 데서 느닷없이 내게 연락이 왔다. 2년 전에 내가 책을 냈었고 그것이 경남일보에 기사로 나간 적이 있는데, 그 기사를 보고 나를 방송국에 불러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니, 그 기사가 나간 지가 2년이 넘었는데 이제와서 무슨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이오?”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꾹 참고 방송국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살다 보니 방송에도 나가는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내가 교통비는 줄 거냐고 물으니 당연히 “출연료는 드립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인터뷰 문답 내용은 사전에 방송국 측과 조율을 거쳤다. 인터뷰 내용 중 괄호 친 부분은 방송국 측의 사전 요구로 삭제된 것이니 실제 방송에서는 나가지 않은 것임을 밝힌다.
내가 방송국에 도착하자 방송 담당자는 나같은 특별한 손님을 모시게 됐다면서 반색을 한다.
인터뷰 내용 전문을 공개한다. 별 내용은 없다.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문 :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주실까요?
답 : 예, 저는 현재 진주에서 진주교도소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고 17년간 마라톤을 하고 있는 남창우입니다.
문 : 진주에서 살게 되신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답 : 고향은 충남 논산인데 진주에는 2017년부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주에서 6년째 살아가고 있네요. (제가 그전까지는 대전교도소에서 일했었는데, 2016년에 대전교도소에서 발생한 사형수 도주 미수 사고로 문책을 당해 이곳 진주로 유배를 오게 되었습니다).
문 : 현재 가족들과 떨어져 사시는데, 힘들진 않으세요?
답 : 당연히 힘들죠. 가족들도 힘들어하고 (저 역시 유배지에서 살아가려고 하니) 애로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집에도 자주 못 가고 한 달에 겨우 한 번, 많이 가면 두 번 정도밖에 못 가는 불쌍한 처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연로하신 부모님이 늘 저를 걱정하시는 바람에 제가 많이 괴롭습니다.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는 것이 불효인데, 저는 불효자식입니다. 그마나 다행히 제가 (유배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 요리를 배웠어요. 유튜브 보면서 배웠습니다. 이제 웬만한 요리는 자신있습니다. 정년이 일 년 남았는데, 퇴직하면 식당을 차려볼 생각까지 있습니다만 아내한테 그 얘기는 차마 못 꺼내고 있습니다. 식당 차리겠다고 말 꺼내는 순간 이혼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 : 그러나 6년 동안 진주에 살면서 정도 많이 쌓였을 것 같아요. 진주에서의 삶, 어떠신가요? 고향 논산과 어떻게 다르세요?
답 : 처음 진주에 오니까 경상도 말투에 적응이 안 돼서 힘들었어요. 마치 외국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됐지만 이곳이 아직도 외국같다는 느낌은 여전합니다.
이곳 진주에서 한 시간 정도만 가면 지리산을 갈 수가 있고 남해바다에 갈 수가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진주가 물가가 많이 쌉니다. 제가 살아본 논산하고 대전보다 확실히 쌉니다. 다른건 몰라도 농산물하고 수산물 가격이 많이 쌉니다. 수산물은 종류도 다양하고 싱싱하고 맛있는 것이 많습니다. 바다가 가까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진주에서 제일 놀랐던 것은, 겨울에도 진주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 구경하기가 힘들어요. 겨울에 겨우 한 번 정도 눈이 내리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 구경하기가 힘드니까요. 우리나라에 눈이 안 오는 곳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나요?
문 : 앞서 소개에서 말씀해 주셨지만 교정직에 몸담고 계신데요. 다양한 직업들 가운데 교정직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답 :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요. 당시 교정직 시험이 공무원 시험 중에서는 그래도 좀 쉽다고 해서 응시한 것뿐입니다.
문 : 이 일을 하신 지는 현재 얼마나 되셨나요?
답 : 제가 1989년에 교도관에 입문했으니까 33년이 넘었네요.
문 : 교도관으로 일하시면서 다양한 사연들이 있을 것 같아요. 힘든 순간은 언제인가요?
답 : 교도관은 사무직 근무자 빼고는 대부분 야근을 하고, 4부제라서 4일에 한 번씩 저녁에 출근해서 밤을 새고 다음 날 아침 퇴근하게 되니까 생활리듬이 당연히 불규칙하고 건강에도 좋지는 않죠. 밤 새워 야근한다는 자체가 극한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더군다나 요즘은 옛날처럼 강압적으로 수용자들을 다스릴 수도 없고, 툭하면 인권 시비에 휘말리기 때문에 교도관들이 강력한 법 집행을 하기가 힘듭니다. 수용자들이 인권을 들먹이며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요즘 세상이 그렇잖아요. 학교도 그렇고 군대도 그렇고 불법을 일삼는 시위대도 그렇고 교도소도 그렇습니다. 인권 중시 풍조 때문에 강력한 공권력 행사를 하기가 어렵고 강력한 처벌이라든가 법질서 확립이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제가 감히 이 자리를 빌어 소원을 말한다면, 우리 후배 교도관들은 위축되지 않고 소신껏 법에 따라 규정에 따라 정당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세상에서 근무했으면 합니다)
문 : 보람있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답 : 제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수용자들에게도 종종 책을 선물합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할께요. 이곳 진주교도소에서 흉악범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수용자 한 명에게 제가 책 몇 권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 수용자가 책을 다 읽더니 저에게 말하더군요.
자신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제가 준 책을 통해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불우했던 가정 형편을 원망하고 부모님을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래서 그 수용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 해서 미안하기는 하다만, 네가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 했더라면 너는 징역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고요. 제가 아주 직설적으로 말해버렸지요. 그랬더니 그 수용자가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자책하더군요. 제가 그래서 “야, 너는 아직 그래도 기회가 있지 않느냐. 너는 언젠가는 사회에 나갈 것이고 앞으로는 인생 헛되이 살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백 마디 말보다 효과가 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대, 혹시 집에서 말썽피우거나 주위가 산만한 아이 또는 청소년이 있다면 말로 훈계하려고 하지 마시고 조용히 책을 한 권 손에 쥐어 주세요. 그게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잔소리하면 싫어합니다. 저도 어릴 때는 그랬어요. 어떤 책이 좋을까 궁금해서 제게 문의해오신다면 제가 추천해드릴 수도 있어요. 저는 세상에 할 말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문 : 취미이자 일상으로 마라톤을 하고 계신데요. 벌써 17년 정도 되셨다는데, 마라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답 :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요. 제가 나이 마흔 셋 되던 2005년 어느 날 심심해서 동네 운동장에 나가서 몇몇 사람들이 힘차게 달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저도 달리기 시작했고 운명적으로 마라톤에 빠지게 됐습니다. 마라톤에 깊이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문 : 이런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 달라진 것도 있을까요?
답 : 달라진 것, 당연히 엄청 많죠. 마라톤으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을 하면 일단 체력이 좋아지고 심장이 튼튼해지고 하체가 단단해지고 혈액순환이 잘됩니다. 그러니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지요. 체력이 좋아지고 건강이 좋아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니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리 역경이 닥쳐도 이겨나가는 정신력이 생깁니다. 힘든 마라톤도 했는데 이까짓 어려움 쯤이야, 하는 정신력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몸이 허약하거나 건강이 안 좋으면 그 반대겠죠.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건강이 최고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감히 말합니다. 본인이 허약체질이거나 매사 자신감이 없거나 스트레스가 많거나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꼭 마라톤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신천지 같은 새로운, 놀라운 세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다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마라톤에 중독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라톤을 하지 못 하시겠다면,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하고 어울리기만 하더라도 긍정적인 기운과 에너지를 듬뿍 받을 것이니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주시면 좋겠네요. 마라톤은 이 정도로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문 : 이런 경험을 몸소 하셨기 때문에 마라톤이 가진 효과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책까지 내셨는데요. 특히 오해와 편견에 대해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다고요?
답 : 네, 그렇죠. 그런 마음이 굴뚝같아서, 변변치는 않지만, 책을 쓰고 말았네요. 제가 마라톤을 하면서 지인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마라톤을 하면 무릎이 절단난다는데 괜찮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무릎 괜찮느냐고 말입니다. 무릎이 문제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빌어 제가 이 점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무릎은 달리기를 열심히 하면 대부분 강해집니다. 약했던 무릎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무릎은 열심히 운동해서 망가지는 것보다 운동 부족으로 약해져서 망가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퇴행성 관절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니 마라톤으로 무릎 망가질까 걱정하시지 말고 운동 부족으로 퇴행성 관절염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라톤을 몸이 상할 정도로 무리하게 하지는 말라는 말씀도 드립니다. 그저 자신의 체력에 맞게 적절하게 조절해서 달리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즐기면서 달리면 됩니다. 하루 한 시간 또는 10km만 달릴 수 있는 체력만 갖춰진다면 그 사람은 평생 건강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달릴 수는 없으니 기초부터 차근차근 하시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처음에는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다 점점 실력이 늘면 조금씩 거리를 늘려나가시면 됩니다.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문 : 선생님은 하루 중 언제, 얼마나 달리시나요?
답 : 네, 저는 매일 새벽 4시쯤 기상해서 4시 30분쯤 달리러 나갑니다. 제가 특별히 새벽에 달리는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새벽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엄청 부지런합니다. 부지런하기로만 따지면 제가 대한민국에서 등수 안에 들 것입니다.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러 나갑니다. 한여름 천둥.번개.벼락이 칠 때도 달린 적 있습니다. 한겨울 영하 15도나 20도로 떨어져도 저는 달리러 나갑니다. 저는 추울수록 달리는 게 즐겁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북극곰입니다. 저의 먼 조상이 에스키모인일 거라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달리는 거리는 보통 10km ~ 12km 정도 되고 시간으로 따지면 60분 ~ 80분 정도가 되겠습니다. 가끔씩 휴일에는 20km도 달립니다. 하루 중 언제 달리는 것이 좋으냐 하면 자기에게 맞는 시간에 달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새벽도 좋고, 아침나절도 좋고, 오후 시간에 달려도 좋고, 밤에 달려도 좋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편리한 시간에 달리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가급적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저처럼 새벽시간을 좋아하면 새벽에 달리시고, 밤시간이 잘 어울리면 밤에 달리시라는 말씀입니다. 가급적 일정한 패턴만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컨디션 조절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문 : 처음 마라톤을 시작하는 초보 마라토너들에게 조언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방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처음부터 달리기를 잘해보겠다는 욕심은 버리시고 느긋하게 천천히 하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해보세요. 무엇보다 결심이 중요합니다. 내가 꼭 마라톤에 도전해보겠다는 위대한, 놀라운 결심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운동장이나 트랙을 한 바퀴나 두 바퀴부터 시작을 하세요.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해서 해보는 겁니다. 꾸준히, 열심히 하다보면 한 달만 지나도 자신의 몸이나 체질이 변하고 있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기한 경험을 할 것입니다. 놀라운 결단과 꾸준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동네 마라톤클럽에 가입해서 회원들의 도움을 받으면 아무래도 마라톤에 좀 더 빨리 적응하고 좀 더 체계적으로 재미있게 달리기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클럽에 가입하면 회비도 내야 하고 대회 나갈 때 참가비도 내야 하고 같이 어울려 막걸리도 마셔야 하고 이런 저런 명목으로 돈은 들어가게 마련인데, 다 건강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나중에 병들어 병원에 돈 갖다 바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문 : 지금 준비 중인 대회가 있을까요?
답 : 네, 내년 3월에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 동아마라톤 대회에 풀코스 출전하려고 합니다. 저는 거의 매일 달리기 때문에 특별히 대회 준비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매일 꾸준히 달리는 자체가 대회 준비인 셈입니다. 물론 대회를 2 ~ 3주 앞두고 30km를 달리는 장거리 훈련을 한 번 해주면 그만입니다.
문 : 내년에 퇴직을 앞두고 계시는데요. 퇴직 후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답 : 출근 안 하다는 것 빼고는 특별히 지금보다 더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열심히 달리고 틈 나는 대로 책도 열심히 읽고 문화예술 공연이나 전시회에도 가고 연로하신 부모님께 밥도 자주 해드리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제가 요리는 제법 하니까요. 부모님과 같이 늙어가는 삶도 괜찮을 듯합니다. 여행도 종종 떠나보려고 합니다.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여 신년음악회에 가보는 것이 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틈틈이 원고를 쓰고 있으니까 원고가 모아지면 내년이나 내후년쯤 저의 두 번째 책을 내려고 합니다. 사막을 일주일간 달려야 하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도 출전해볼 생각입니다.
괄호 친 부분은 사전에 방송국 측 요청으로 삭제해 달라고 해서 실제 방송에서는 안 나간 것임을 거듭 밝힌다. 별 내용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방송국 측에서 삭제해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방송국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진주로 유배왔다고 하면 진주가 마치 유배지로 비쳐질까봐 그랬다는 설명이었다.
인터뷰 내용은 대부분 내가 지금까지 글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것들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방송국을 나서는데 담당자가 “선생님이 공직에 계셔서 출연료는 못 드립니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내가 방송국에 도착할 때는 특별한 분 모셨다며 좋아 죽으려고 하더니만, 인터뷰 끝나니까 약속했던 출연료 지급을 하지 않겠다니!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던가!
내가 분기탱천하여 “아니,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섭외할 때 분명히 출연료 주신다고 했잖아요. 내가 중생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를 사자후를 토하듯 들려주었는데, 차비도 안 주고 내쫓다니 이런 뭣 같은 경우가 있어요? 에잇, 안 되겠네. 방송국 사장실로 쳐들어가서 따져야겠군. 사장실 어디여요?”라고 호통치며 한바탕 난리 부르스를 추려다가 꾸욱 참았다. 차비도 못 주는 여기 방송국 살림살이도 좀 어렵구나,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나같은 미천한 중생을 과분하게도 방송에까지 출연시켜 준 것만 해도 방송국 측에 내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며칠 후 방송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출연료 드리겠으니 필요한 서류를 보내달라는 것이다. 어리둥절했지만, 방송국 측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으려니 하면서, 나는 그 연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감읍해서 얼른 서류를 보내주었다.
나는 교도관 마지막 몇 년을 유배 살면서 시련과 통한의 시간으로 보내며 마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우울증에 빠져 지내던 중 뜻밖의 방송 출연이라는 서프라이즈를 만났다. 인생이 내게 준 위로의 선물 같았다. 정호승 시인에게 인생은 술 한잔 사주지 않았지만 내게는 방송 출연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나는 부모님께 밥 해드리면서 부모님과 같이 늙어갈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나에게는 같이 늙어가야 할 어른이 두 분 더 계시다. 처가쪽 부모님도 다 살아계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본가.처가 양쪽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네 분의 부모님과 같이 늙어가는 인생을 살게 생겼으니 이것 또한 인생이 내게 준 고귀한 선물이 아닌가 한다. 30년 넘게 직장생활하다가 정년 마칠 때까지 나처럼 양쪽 부모님이 다 살아계신 경우가 과연 몇 %나 되는지 누가 전수조사를 해서 발표 좀 했으면 좋겠다.
며칠 전 내게 Y라는 룸메이트가 생겼다. 내가 12월 말이면 짐 싸서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내가 Y하고 지내는 기간은 고작 앞으로 두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 될 것이고 Y는 내가 진주에서 인연을 맺은 마지막 동료이자 룸메이트가 될 것이니 내가 성심껏 모시려고 한다. Y는 다행히 인상도 서글서글하고 인성도 훌륭하고 배려심도 있고 술도 즐길 줄 안다. 나처럼 똥배도 좀 나오고 식성도 좋아서 뭐든 잘 먹는다. 다만, 요리는 안 해본 것 같아서 내가 식사당번을 하고 있다. 아침이면 가지밥이며 계란볶음밥. 콩나물밥, 무밥, 김치볶음밥을 해서 같이 먹고, 저녁이면 고추장찌개,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두부콩나물찌개, 버섯전골, 마파두부, 무뼈닭발볶음, 돼지껍데기볶음, 오돌뼈볶음, 오리주물럭 등을 해서 열심히 같이 먹는다. 미역줄기볶음도 해서 먹는다. 매생이국도 자주 끓여 먹으려고 한다. 매생이는 겨울에 구입해서 냉장고에 잘 보관하면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다.
무뼈닭발볶음, 돼지껍데기볶음, 오돌뼈볶음은 가성비 최고의 술도둑놈들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술꾼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날이 좀 더 추워지면 토끼도 한 마리 사다가 토끼탕을 끓여 먹을 작정이다. 한여름 최고의 보양식이 보신탕이라는 건 다 알고 있을 것인데, 한겨울 최고의 별미는 토끼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조만간 무를 도톰하게 썰어 넣고 갖은 양념을 해서 토끼탕을 끓여보고 맛이 괜찮으면 일 년 내내 토끼탕을 해 먹으려고 한다. 나는 식성이 너무 좋아 못 먹는 음식이 없다. 송장 빼곤 다 먹는다.
“한여름에는 개를 잡아 먹어야 하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는 토끼탕을 먹어야 한다”는 나의 부친의 말씀이 귓전을 맴돈다.
내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마다 Y는 자기 입맛에 딱 맞는다며 싱글벙글이다. 아내한테도 못 얻어 먹는 음식을 먹는다며 좋아한다. 내가 Y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 엄마가 되겠소. 엄마가 되어 당신 밥 절대 굶기지 않겠소”라고.
내가 즐겨 해먹는 요리는 가지밥이다. 가지는 가격도 싸고 몸에도 좋은 웰빙식품인 데다가 맛도 좋고 요리하기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퇴직하면 가지요리 전문식당을 차리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칠 정도이다. Y는 내가 떠나면 내가 엄마처럼 해주던 밥이 많이 생각날 것이다.
내가 밥 잘 해먹고 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면서, 소문의 진원지는 아마도 나의 룸메이트로 짐작이 가는데, 동네 주민들(동료 직원들) 이 사람 저 사람이 수시로 찾아와서 밥 좀 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주민들 밥 해주느라 내 허리가 휠 지경이다. 물론 밥만 해주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술안주까지 만들어서 접대하고 있다. 내가 진주를 떠나면 나는 여기서 후배직원들에게 기껏 밥이나 잘 해주고 술상 잘 차려주던 선배로 기억되게 생겼다.
이 글이 진주에서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내가 진주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진주에서 책도 쓰고 신문에도 나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쉐프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나는 진주에서 출세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이를 발판으로 다음에는 서울 메이저 신문.방송에도 진출할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가져본다. 나를 출세시켜 준 진주여, 영원하라!
2022년 11월, 남창우
〈작별인사〉
제가 12월 9일 근무를 끝으로 짐 싸서 떠납니다.
늘그막에 진주에 와서 아무 도움도 못 되고 잔뜩 폐만 끼치고 떠나게 됐습니다.
제게 비록 시련의 시간은 있었으나 많은 분들께서 격려해 주시고 힘 주신 덕분에 마지막까지 잘 버티다 갑니다.
진주 직원들이 베풀어 주신 깊은 정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퇴직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나 웬수같은 가족들이 전부 들고일어나 결사반대를 외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감스럽게도 결국 오늘에까지 이르고 말았네요.
때로는 가족이 웬숩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근무하시고 건강한 인생 살아가시길 앙망합니다.
무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12월
진주에서
불초 남창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