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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9-13, 에베소서 5:17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세요?”
“한 번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겠구나 생각하며 그대로 살려고 했지요.”
“혹시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극심한 고통에 있을 때도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방언이나 예언, 병 고치는 능력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런 기도도 할만하잖아요?”
“구하지 않아도 이미 다 해주신다고 나와 있더라고요. 구해도 잘못 구하면 안 된다면서.”
“그래도 살다 보면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잖습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명령하는 겁니다. 나는 알아요. 내가 요구하면 하나님은 들어줘요.
기도하면 이뤄지지요. 그런데 그것은 내가 기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시킨 거지요.”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천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해요.”
“내가 계획 세워서 장기판에 장기 두듯 하면 안 되지요. 장기판에서 훈수 두 듯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아야지요.”
“그러면 목사님은 기도를 하기는 하십니까?”
“아, 회개 기도와 감사 기도는 날마다 해요. 하루도 빼먹지 않아요. 회개와 감사만이 내 몫이에요.”
“목사님은 성공했다고 생각하세요?”
“성공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요.”
“그래도 세속적인 관점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세요?”
“박경리 씨의 ‘토지’를 예로 들자면 나는 ‘길사이 과’(머슴)에 속해요.
그런 내가 지금 대학에서 강의하고 미국 가서 방송도 하고 장관과 식사도 같이해요.
그럼에도 나의 근본은 바꾸지 않아요. 아랫것으로 컸던 경험이 몸에 항상 깔려 있어요. 평생 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서 행복을 느낍니다.
낮은 자, 작은 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작은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정도면 성공했지요.”
위의 대화는 ‘배 부르리라’의 저자 이태형 씨가 ‘시골교회’ 임경락 목사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시골교회는 임경락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이름인데, 처음 그 이름 대신에 ‘망할 교회’로 등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노회 서기 목사가 “장난치느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망할 교회’라는 이름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임목사님이 말합니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교회가 부흥하면 됩니까? 우리에게 부흥은 장애인이 넘쳐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루 빨리 망해서 없어져야 합니다. 지금도 ‘망할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전남 순창에서 태어난 임목사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맨발의 성자’로 불리던 이현필 선생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문둥이 성자’로 불리는 최흥종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이 인생의 전기가 되어 평생 동안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이후 환자들과 장애인들을 돌보며 살다가 목사로 그들을 돌보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는
무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버려진 장애인들과 함께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와 무인가 신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임목사님은 감리교 연수원에서 8년 째 강의를 하고,
또 상지대에서는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화천에 있는 사단 장병을 대상으로 4년 동안 매주 4 시간 씩 교육을 실시합니다.
임목사님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단장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임목사님은 장애인들에게 최고의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무공해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공급해 왔습니다.
그런 임목사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예수 팔아 장사회 소속 목사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며 살았습니다.
기독교를 내세워 나에게 이로운 일을 했다면 누구나 예수 팔아 장사회 소속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모든 목사들은 예수 팔아 장사회 소속 목사입니다.
다만 차이는 임목사님은 그 사실을 알고 다른 목사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세 번 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임목사님 말대로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지켜 복받는 비결을 적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시림들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그렇게 하신 목적이 2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다스린다는 것은 군림하고 휘두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라다(radah)는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부버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상대방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인정과 격려로 그것을 다져주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 때문에 살아난 사람, 행복해진 사람이 있는가?
“당신 나 때문에 살아났잖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당신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을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든 피조물들의 각각의 존재 목적에 합당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타락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브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이브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 3:17)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태어나면서 시작됩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대통령은 국민에게, 그럴 사람이 없으면 세상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 책임전가의 일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리하여 세상은 점점 더 저주로 가득하게 됩니다.
‘살다’는 영어로 live입니다. 그것을 거꾸로 하면 evil입니다. 곧 ‘악’입니다. 생명에 역행하는 것이 곧 악입니다.
악은 나쁜 것입니다. 나쁘다의 어원은 “나뿐이다.”입니다.
나만 살려고 그러는 것이 곧 악입니다. 반대로 좋다의 어원은 “조화롭다”입니다.
좋은 인생, 제대로 된 삶이란 서로 조화로운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도와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서로 ‘라다’하고 살려주면 아무리 어려워도 살만합니다.
남을 살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답게 사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묻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되고 싶니?” “네가 가장 잘 하는 일이 무엇이니?”
많은 학생들의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입니다.
한편 공부 좀 한다면 모두 다 의대나 법대고, 공부하기 싫은 애들은 모두 다 연예인이 되겠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들이 그저 돈 되는 일만 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태어나자마자 경쟁에 내몰립니다. 수많은 반목과 질시가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탈락한 다수들의 한숨과 끌탕이 있고, 성취한 소수의 오만과 횡포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내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지 못하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깃발만 높다랗게 펄럭입니다.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비본질은 절대로 본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은 절대로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비본질과 악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도 진짜 선이 등장하는 순간 악은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라고 할지라도 촛불 하나만 켜도 어둠은 물러나 버립니다.
아무리 악이 강화된다고 하여도 절대로 그 작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울왕이 군대 삼천을 풀어 목동 다윗을 쫓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왕은 점점 힘을 잃고 몰락해가고 광야 동굴에서 십년 동안 숨어살았던 다윗은 점점 그 기운이 욱일승천합니다.
그의 지략과 능력과 감성마저도 당할 자가 없게 됩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울왕은 왕권을 오용한 것이고,
다윗은 억울해도 하나님, 답답해도 하나님, 절망해도 하나님, 죄를 지어도 하나님, 형통해도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
세상은 먹고 먹히는 이리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는 법은 더 사나운 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순결한 비둘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더욱 지혜로운 뱀이 되는 것입니다. 간교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준비된 자가 준비되지 않는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가장 잘 삽니다.
기도와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더욱 순수해져야 합니다. 준비된 진짜 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신앙행태를 냉정하게 판단해보십시오.
기도와 전도와 헌금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이, 기껏해야 햄버거집 하오리까, 문방구 하오리까 입니다. 동쪽으로 가오리까, 서쪽으로 가오리까 입니다.
또한 기도 전도 헌금 열심히 했으니까 잘 되겠지 믿다가 덜컥덜컥 걸려들어 낭패를 당합니다.
한편으로는 열심히 했는데도 안됩니다. 실망합니다. 정신과 영혼에 병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르칠까요?
그래야 교회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헌금이 쌓이고 교회가 웅장하게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내 뜻이 이루어진들 이웃과 하나님께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누구보다도 이기적이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 5:17)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단언합니다.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나를 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하신 뜻입니다.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골 1:9)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시종일관 기도합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무엇을 기도합니까?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 1:10)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세 번째는 아무리 어려워도 난관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영광의 힘이 드러나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귀담아 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은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이사야 61:4-6)
제사장은 타락한 인간들 중에 선발되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다시 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존재들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와 너를 살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기로 합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한 교회에서 사람들을 제대로 살게 합시다.
그리할 때, 무너진 것들이 세워집니다.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사람들이구나” 인정과 존경을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보내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첫댓글 주일예배 마치고 이곳에서 좋은말씀으로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