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인을 주목한다] : 김덕남 시인
적공積功과 열정이 빚어내는 '늦시조의 항심恒心
- 김덕남 시의 융숭한 모습
정용국
1. 들어가며
스토리문학 봄호에 황삼연 시인의 글을 쓰면서 본연의 직장을 마무리 하고 새롭게 문단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시인으로 거듭 난 분들의 이 야기를 거론한 바 있다. 이제 이런 상황을 희귀하거나 볼썽사나운 치기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의 숫자도 그러려니와 늦깎이 시인들이 보여주는 열정과 작품의 수준들이 이제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2013년 계간 <시조시학>에 김덕남 시인의 첫 시집 『젖꽃판』 서평 을 쓴 적이 있는데 「대의 기원」, 「줄 타는 남자」 등의 시편을 통하여 예사롭지 않은 시인의 통찰력을 감지하고 있었다. 대학교 교무직에 오래 봉직하면서 퇴직하기 전부터 이미 공무원 문예대전에서 장관상을 수상하고 시를 갈고 닦은 흔적으로 보아 오래 전에 시인의 길을 모색해 온 것으로 감지되었다. 또한 공무원으로서의 오랜 경륜과 인문학 소양 들도 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견된다. 이러한 상황들은 오히려 불안정한 일상에 치이며 살아가는 요즘의 젊은 세대에 비해 적공을 쌓기에는 유리한 입장이 될 수도 있다. 김덕남의 시에는 만만찮은 인생의 내공과 삶을 투시하는 노련한 예지력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특히 여류시인이 간과하기 쉬운 사회 이슈에도 깊은 이해와 시인으로서의 따뜻한 시각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안정된 모습을 볼 수 있다.
2. '늦시조'의 항심
철이 지나거니 늦게 수확한 감자를 '늦감자'라 부르고 늦되어 우수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늦깎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앞서 거론한 제 2 인생을 맞은 시인들의 작품을 '늦시조'라 불러도 되겠다. 김덕남의 늦시조에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글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회를 투시하는 내공이 깊고 따듯하다. 이런 결과물은 인생의 경륜과 치열한 독공이 없이는 이뤄내기 힘든 것이다.
새벽별 보는 사내 인력시장 찾는다
막노동 삼십 년에 이력이 날만한 데
늘어난 이자만큼이나 졸아든 어깻죽지
팍팍한 건설현장 새파란 감독 앞에
헛딛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두 다리로
땡초를 화끈하게 푼
콧물까지 들이켠다
알바를 끝낸 자정 꼬불꼬불 끓인 속을
맵짠 생 후후 불며 희망 몇 올 건지려다
면발에 구르는 눈물 고명으로 얹는다
- 「라면 먹는 남자」 전문
'라면'의 생김새와 싸고 간편한 음식으로의 특징을 추출하여 시에 갈무리 하고 있다. 나이 들어 인력시장에서 일감을 찾아야 하는 곤궁한 삶과 라면의 이미지가 튼튼한 기둥을 이루며 시를 일으켜 세우는 축을 이룬다. 첫 수 종장 "늘어난 이자만큼이나 졸아든 어깻죽지"가 남자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밀어 올리며 시를 풀어가는 수법도 자연스럽다. 늘어난과 졸이든, 이자와 어깻죽지가 대비를 이루면서 독자의 상상을 자극한다. 사내는 무슨 이유로 귀신도 울고 간다는 사채라도 끌어다 쓴 것일까. 집에 아픈 가족이 있는지 집안에 갑자기 큰일이 벌어졌는지 읽는 이의 마음도 함께 졸아든다. “새파란 감독"은 사내가 늙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으며 “버팅기는"에서는 고된 노동의 강도가 전해진다. 힘든 일을 끝내고도 푸근한 저녁밥은커녕 라면으로 때우는 끼니가 시리고, 거기다가 "눈물 고명'까지 얹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자니 울컥 마음이 아프다. “꼬불꼬불 끓인 속을"에서는 라면의 면발 모양과 사내의 꼬인 삶이 교차되며 시 전체를 단단한 알레고리로 묶어내고 있다. 이 시에서의 '라면'은 시대의 아픔과 우리 사회의 고민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담아 낸 시어가 되었다.
지하철 계단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동전을 기다리는 두 손이 얼어 있다
치솟는 빌딩에 가려 빛을 본 지 오래인 듯
하이힐 찍는 소리 서둘러 멀어진다
단속반 툭 건드리자 통째로 구르는
오늘을 그리는 촉수 화석으로 멎는다
- 「공」 전문
「공」이라 붙인 시 제목이 깊은 사색과 상징을 통째로 품고 있는 출중한 모습이다. 물론 걸인의 모습을 공球에 비유하였지만 시의 내용을 깊이 음미하다 보면 공空으로 읽어도 뜻이 잘 통한다. 그만큼 읽히는 그림이 우울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툭 건드리자 통째로 구 르는’ 이 두 구절을 읽다보면 마치 짐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모든 동물들은 위급하거나 고통을 참을 때 몸을 동그랗게 말아 표피를 줄여 방어자세를 취한다. “지하철 계단에서, 동전을 기다리는" 걸인의 상황도 이러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하이힐 찍는 소리”는 배경음악처럼 쓸쓸하고 애달픈 지하도에 깔리며 반사음으로 오래 맴돌고 있다. “오늘을 그리는 촉수 화석으로 멎는다”라고 마무리 한 둘째 수 종장은 마치 폼페이 유적의 화석을 연상시키며 이미지를 확장하고 있다. 시인은 지하철 계단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오래 각인시키기 위해 이런 종장을 구상하였을 것인데 그것은 오랜 탁마와 기다림으로 점철된 항심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보여 진다.
3. 시공을 넘나드는 추임새의 맛
김덕남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젊은 상상력에 있다. 나이가 들면 생각 이 단순해지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관례인데 비해 그의 상상은 힘차고 시공을 예사로 넘나든다. 위에서 살펴 본 발표작에서도 그랬지만 그 서늘하면서도 중의를 유발하는 단단한 구성력은 그의 연치를 잊게 한다. 아래 소개할 작품도 재미있으면서도 가공할 상상은 자유롭고 통쾌하다.
유혹이 불을 켜면 바닷물도 흔들렸어
바깥이 궁금할 땐 줄낚시 타는 거야
술잔 속 생을 찢는다
칼칼한 저녁 한 때
까짓것, 살다보면 씹히고 씹는 거야
시든 청춘 메들리에 추임새를 넣다보면
저 쪽배 하늘을 건넌다
그림자를 등에 업고
- 「오징어와 소주」 전문
“유혹이 불을 켜면 바닷물도 흔들렸어/ 바깥이 궁금할 땐 줄낚시 타 는 거야" 필자는 이 두 장을 읽으면서 한참 생각에 잠겼는데 그 이유는 이 문장의 '주어'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오징어를 찢어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바다 속에 사는 오징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찢는다”, “씹히고 씹는” 등의 시어들이 오징어를 찢어 먹는 단순한 행위에서 출발하지만 우리 삶에서 유발되는 상처와 아픔들을 고스란히 받아들고 있어서 감칠맛을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중의를 담은 구절들은 독자들의 상상을 불러오고 시를 깊이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사람이나 오징어나 “바깥이 궁금한 것은 호기심의 발동이다. 새로운 현장은 삶을 기운차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줄낚시“를 타다가 오징어는 죽음에 이르고 사람은 새로운 달관에 다다른다. “찢는 다”, “씹히고 씹는” 것이 인생의 길인지도 모른다. 이것에 집착하게 되면 수렁에 빠져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시든 청춘 메들리에 추임새를 넣다보면" 인생이라는 배도 평상심을 얻어 “하늘을 건너"는 정경은 시인의 경륜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모진 아픔과 상 처들을 어루만지고 가족과 주변을 모두 그러안고 생을 건너가는 푸근한 모습이 아슴푸레 한 폭 수묵화로 걸려 있다.
4. 관조와 평정이 엮어내는 신명과 복심(腹心)
동물 중에서 인간처럼 늦되는 종도 드물다. 물론 생의 길이가 길기도 하지만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바로 중심을 잡고 일어서는 짐승들의 출산을 보면 신기롭기만 하다. '철들자 망령 난다'는 속담은 그런 인생의 흐름을 재치 있게 표현한 글귀라 하겠다. 요즘 고령인구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나이 드는 즐거움'이라거나 '늙어가는 재미' 등의 제목을 단 저작물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60세 이상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 노령의 삶을 극복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역설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의학의 발달에 기초한 노년의 삶은 첫째 건강과 취미생활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는데 그 중 '시쓰기'도 아주 세련되고 유익한 새 방편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덕남의 시도 처음에는 '나의 삶과 부모'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특히 전쟁 통에 유복자의 삶을 헤쳐나간 역경도 그렇거니와 산화하신 아버지와, 딸 하나에 온 생을 걸고 가셨던 어머니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한과 시름이 서려 있었을 것인지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시공부가 사회를 보는 시각을 트이게 만들고 뒤를 돌아보며 삶을 곱씹고 묵상하고 정갈한 내일을 걸어갈 힘과 경건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으니 제2의 생에 '시'가 큰 축복이 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 위무와 희망을 심어주는 시는 얼마나 큰 행복일 것인가. 그의 시조는 이제 출발한지 5년을 넘어가고 있지만 등단 연령보다 훨씬 확장되고 몰입의 깊이를 가진 단단한 시가 되었다. 처음으로 대한 그의 사설시조도 세태와 아량과 배려가 흠뻑 담긴 수작이라 보여 진다.
명절날 쫄쫄 굶은 귀신들의 성토대회
차례상 받으려고 새벽같이 길 나섰지 그놈들은 더 빨랐어 해외여행 가버렸어 노기등등 김 귀신이 거품 물고 내닫는데. 하늘호텔 찾아갔던 이 귀신이 땅을 친다 겨우겨우 찾아가서 차린 음식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었더니 아래윗니 와장창, 플라스틱 음식인 줄 내 어찌 알았겠누. 점잖은 박 귀신은 택배음식 잔뜩 먹고 내리 사흘 설사하다 배를 깔고 누웠는데. 인터넷상(床 )받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정 귀신이 붉으락 푸르락 침 튀기며 내닫는다, 똑똑한 그 아비라 어깨 으쓱 치켜들며 휘황한 불빛 아래 PC방 두드렸지 노크는 필요 없고 로그인 하라하네, 고 아무개 이름 석 자 더듬더듬 치는 순간 귀신은 자격 없다 뒷발질로 걷어차네. 분통 터진 귀신들 종주먹 휘두르며
에라잇! 흥할 손들아, 자손만대 흥해라!
- 「에라잇! 손들아」 전문
사설시조를 자유시에 넣자고 하는 학설도 많지만 그것은 지나친 논리 라 할 수 있다. 자유시를 쓰는 시인이 사설시조를 절대 쓰지 않는 것에서 유추하면 되는데 시조에서 출발한 음보와 율격으로 사설시조가 엮여 가기 때문에 단시조의 확장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필자 의 견해이다. 그런데 요즘 사설시조에서 확장된 장에서 율격과 음보가 심하게 흐트러진 작품들이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김덕남의 사설은 활달하면서도 음보가 가지런하고 사설시조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물론 패러디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세태를 잘 버무려놓았다. 자식들의 행태를 반박하고 성토하고 있지만 종장에서는 결국 화를 풀고 뼈있는 일갈로 사설시조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 섭섭한 마음으로 "에라잇!" 꾸지람을 하면서도 “흥할 손들아, 자손만대 흥해라"라는 재치가 웃음을 자아내며 하늘 같이 넓고 자상한 부모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치마폭에 받아 안은 대추알의 붉은 기도
희붐한 창을 연다, 푸른빛 뻗쳐온다
젖은 손 하루를 열어
무릎 꿇는 어머니
밥심의 더운 목숨 땀방울로 일어서는
모퉁이 돌아오는 식솔의 긴 그림자
갓 지은 꽃밥 한 솥을
고슬고슬 퍼올린다
- 「대추나무 주걱」 전문
이 작품에서도 사설시조에서 우려냈던 어머니의 마음을 잘 그려내고 있다. 처음에는 ‘대추나무 주걱'이라는 제목이 생소해보이지만 작품을 몇 번 반복해서 읽으면 은근히 피어나는 푸근한 밥 냄새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치마폭에 받아 안은 대추알의 붉은 기도”에서 혼사 때 폐백을 드리면 부보님께서 덕담으로 건네주시던 대추를 겹쳐 놓으며 주걱을 형상화 해낸 솜씨도 눈에 띠는 대목이라 하겠다. 대추알-붉은 기도-주걱-어머니-식솔이라는 이미지들이 마치 폐백에 올라왔던 대추 꾸러미마냥 꿰어져 유기적 고리를 이루며 시를 완성해 나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젖은 손", "땀방울", "꽃밥 한 솥"은 어머니의 노고를 '정감 있게 그리고 있으며 “식솔의 긴 그림자" 에 이르게 되면 가족의 한 가운데에서 “밥심'의 원천으로, 사랑의 주인으로 집안을 지켜낸 거인으로 우뚝 서 있는 어머니와 마주하게 된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대추나무는 또 한 번 어머니의 단단한 복심으로 이 시에 녹아 있다.
5. 나가며
발표작과 신작 세 편을 통해 들여다본 김덕남의 시에는 짧은 시력에 비해 나름대로 쌓아 온 적공들이 오롯하게 숨 쉬고 있다. 오랜 공직의 연륜에서 풍겨 나오는 시각이 예리하고 허물과 상처를 덮어주는 연치의 아량도 흐뭇하게 녹아들어 있다. 굳지 않은 상상의 힘과 시조를 부리는 기교면에서도 꾸준한 열정으로 독공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장쾌 한 모습들을 보게 된 것은 더욱 기쁜 일이다. 사회의 응달을 주시하고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는 일을 멈추지 않고 오래도록 시조의 항심을 지켜나갈 것을 믿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늦시조'의 뚝심과 변치 않는 애정을 기대한다.
정용국 경기 양주 출생, 2001년 <시조세계> 등단, 이호우,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지원금 받음. 시집 '명왕성은 있다' 외
- 《스토리문학》 2015. 여름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