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부인 육영수 여사처럼 총에 의하여 피살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날 오전은 박정희 대통령이 KBS 충남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본래 당진의 중앙정보부 시설까지 둘러 볼 계획을 세운 날이었으나, 차지철 경호실장이 명단에서 빼 버려서 종일 심경이 불편하던 터였지요,
박대통령이 서울로 올라 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각하께서 저녁 같이 하시자는데요” 라고 전화를 했고, 김재규는 “오늘 다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씩씩대면서 궁정동 안가에 나타납니다.
그리고서는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이 생각을 미리 알렸지만, 김계원은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하고 대충 들어 넘기고 말았지만 표정은 그 때부터 굳어 버렸지요. 대통령 경호실 직원이 그 날 저녁 참석자인 가수 심수봉과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생 모델 신재순을 불러 관례대로 “오늘 일은 무슨 일이든 모두 비밀로 해 달라”는 내용의 “보안 서약서”를 받고 방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불러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즉시 너는 대통령 경호처장과 부처장을 쏘는 거야” 또 박흥주 수행비서에게 “너는 경비원들과 식당의 경호원들을 다 처리해”라고 지시를 미리 해 두고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도 불러서 옆 건물에 대기시켰습니다.
시바스 리갈 12년산 비교적 값싼 양주를 곁들여서 한정식 교자상을 차려 놓고 TV 뉴스를 보다가 부산마산 항쟁 사태를 김재규가 너무 약하게 한다느니 김영삼이 제가 무슨 총재라구 나참.. 어쩌구 하더니 그냥 노래나 하나 부르자면서 심수봉이 기타를 치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노래를 부를 때에 김재규 정보부장이 밖으로 나가서는 조금 있다가 신재순이 “사랑해 당신을” 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에 방 안으로 다시 들어 왔다는데요.
8년 연하인 차지철에게 “너무 건방져” 간단히 한 마디 하고서는 독일제 발터 ppk 권총을 쏘아 버렸습니다. 오른손 손목에 휑하니 둥근 구멍이 날 정도로 첫 발은 차지철 손목을 관통했습니다. 좌중들은 차지철 손목에 둥그렇게 구멍이 난 채로 피를 씻으러 실내 화장실로 들어 가는 걸 보면서 “피, 피..!.” 하며 놀라고 있는 사이에 김재규는 또 한 발을 박 대통령 가슴에 명중시킵니다. 김재규는 어디론가 나가면서 불을 꺼 버립니다. 어둠 속에서 바깥의 우당탕탕 총 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지요.
심수봉은 기타를 벽에 세워 놓으려 잠깐 일어 났는데 신재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박대통령이 답하였지요. 방금 전만 해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박대통령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는 걸 본 심수봉이 얼른 와서 부축하면서 “정말 괜찮으세요?” 하며 또 물었습니다. “나는 괜찮아” 이번에는 다소 화난 듯한 목소리였는데 이 소리가 대통령의 생전에 마지막 육성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이내 심수봉의 무릎 위에서 “그르르르륵.... 그르르르륵” 소리를 냅니다. 이 소리가 박대통령이 마지막 숨 넘어가는 소리였는데 이 때는 아무도 그 소리의 의미를 몰랐다고 하네요. 이내 어둠 속에서 시커멓고 물컹거리는 물체가 바닥에 좌악 깔리면서 이 두 여인은 속옷까지 다 젖어 버립니다. 이 때에서야 두 여인은 그게 핏덩이인 걸 알고 “누구 없어요? 누구 좀 와 주세요”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 때 바깥에서 차지철과 김재규가 순서대로 급하게 들어오면서 다시 불이 켜지는데요. 차지철은 조그마한 밥상을 던지고 막고 했지만 김재규는 탕탕탕 마구 총을 난사했고 김재규의 눈을 하염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심수봉의 무릎 위 박대통령의 이마에 총을 대고 무정하게도 방아쇠를 당겼지만 “철커덕” 총알이 다 떨어진 거예요. 뒤따라 온 박선호가 다른 총으로 넘겨 주는 사이에 심수봉과 신재순은 얼른 옆 방으로 피해 버리고 김재규는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확인 사살이었지요. 이 마지막 총이 바로 5년 전 육영수 여사가 맞았던 총과 똑같은 종류인 미국제 스미스 앤 웨슨 사의 38구경이었습니다.
옆 방에서 24세의 심수봉은 손이 떨리고 목은 울먹울먹 졸도할 지경인데, 딸까지 있는 22세의 대학생 이혼녀 신재순은 활달하고 담도 컸다고 합니다. “언니언니, 누구하고 누구는 서로 짠 것 같애. 그렇지?” 계속 뭐라뭐라 재잘대는 통에 심수봉은 졸도도 못했다고 하는군요. 심수봉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야, 문도 꽉 잠그고 조용히 있어.” 그러면서 가만히 있는데 이번에는 전화 벨이 울립니다. “무조건 다 모른다고 해” 그랬더니 “전화 받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와도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말 잘 듣는 신재순의 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두 여인은 이후 두어 시간이나 무서운 공포의 적막을 좀더 경험한 뒤에야 두둑한 봉투를 받아 들고 프라자 호텔 앞까지 관용 차로 나와서는 “후유 살았구나” 하면서 조용히 시내로 사라졌습니다.
정승화 참모총장의 지시로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재빨리 박대통령의 시신을 확보하여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다음 순간을 맞이하게 되지요.
나중에 법정에서 김재규가 사건 당시에 말했다는 “차지철 버러지”라든가 “각하, 정치 좀... ”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그 때에 들은 적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 문장이 긴 말은 나눌 겨를도 없었다면서 현장의 두 여인은 지금도 중얼거리곤 한답니다. 김종필도 나중에 한 마디 했지요. “누굴 민주화 투사로 만들려 하나...”
1979년 10월 26일 그 날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지 꼭 70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그 날 논의되었던 부마 사태의 대규모 탱크 진압 계획도 무산되었고, 그동안 비밀리에 진행되어 오던 핵무기 확보계획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하루 0.85 그램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 규모의 자체개발계획은 이미 1976년에 미국 중앙정보부 CIA의 만류로 중지된 상태였고, 그 다음 계획으로 카나다, 프랑스 등으로부터 완제품을 구입해서 오는 계획도 진행 중이었다고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이 독재자였기 때문이었다든가, 측근의 내부 갈등 때문이었다든가 여러 가지 주장이 나왔지만, 우리나라의 자체 핵 개발 움직임 때문에 미국의 미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는 등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요.
사연이야 어떻든 박정희 대통령 부부는 20세기 최대의 불행한 부부였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금이 없으니 민주주의공화국이 된 건데, 새로운 임금님 김일성은 정치 라이벌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는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 주고 편안히 늙어 죽었지만, 마음 약하고 어설픈 독재자 박정희는 독재자라는 오명만 뒤집어 쓴 채로 5년 간격으로 두 부부가 나란히 총 맞아 죽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도 공무원 연금을 대신 받아야 할 부인도 없고, 유자녀 박근혜, 근영, 지만 삼남매도 당시 나이 이미 20세가 넘어 버려 이래저래 연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는 공무원 유가족 자녀가 되어 버렸지요.
이 부부가 묻혀 있는 동작동 국립 묘지 뒤의 충효길을 돌면서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
글쓴이 : 황재순. 문학박사
첫댓글 단숨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