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95/ 가나안 족속을 급히 멸하지 말라는 명령과 속히 멸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조화되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 7:22)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3)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급히 멸하지 말라”(신 7:22)고하였고 또 “속히 멸하라”(신 9:3)고도 하였다. 분명히 충돌되는 명령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족속을 곧바로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미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그때 십계명과 각종 법규를 선포하신 후에 '왕벌을 앞서 보내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것'(출 23:28 참조)이라는 약속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3:29~30), 신명기 7장 22절은 이 말씀의 반복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서서히 쫓아내시려 하는 것은 땅이 황폐되고 들짐승이 번성하여 사람을 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가 망하면 땅이 황폐되고 들짐승이 번성한다. 역사적 사례들도 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그 도시가 멸망하면“그곳에 거주할 자가 없겠고…오직 들짐승들이 거기에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들의 가옥에 가득하며.…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사 13:20~21)고 하였다.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인구가 감소하자 사자의 수가 급증하여 사람을 해하기도 하였다(왕하 17:25).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족속은 자연의 황폐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야 땅은 경작이 가능하게 유지되고 문명이 이어진다. 이외에도 사사기에는 실제로 가나안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들이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삿 2:22)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삿 3:2) 두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신명기 9장 3절에서 가나안 족속을 속히 멸하라”는 명령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실제로 그들을 쫓아내는 시간을 빨리하라는 의미라기보다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꺼리거나 지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전쟁의 속도가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언급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라는 뜻이다. 이 말씀대로 그들의 여리고 성 점령은 신속히 이루어졌지만 이후의 전쟁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정복 전쟁 자체는 짧은 시간에 끝났지만 그 땅을 점령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위의 두 구절은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 “속히 멸하라”는 명령은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촉구이고 급히 멸하지 말라”는 명령은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다. 하나님의 시간 판단은 인간과 다르다. 주저하는 인간의 눈에 하나님은 너무 빠르게 생각될 수 있다. 반대로 조급한 인간의 눈에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 느리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처럼 서두르지도 않으시고 주저하지도 않으신다. 또 경솔하지도 않으시고 태만하지도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