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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부흥회 ] 예배, 어떻게 드려야 하나 _ 오재호 목사
안녕하십니까 오늘 참 많은 일들이 있었죠? 우리 침례를 받은 다섯 분들 축하를 드립니다.
제 얼마 전에 둘째 아이가 사진첩을 보고 이런저런 사진을 보다가 자기 침례 받은 사진을 보고 신기했던지 사진을 찍어가지고 휴대폰에 저장하는 것을 좀 봤습니다.
어릴 때 침례 받을 때는 자기들이 얼떨떨한 상태에서 받았고
지금 시간이 지나서 자기가 어릴 때 침례받았었던 제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침례를 받았는데 그걸 보고 나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더라고요.
다시 한 번 우리 침례받은 분들 또 우리 가족 모두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오늘 네 번째 시간으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예배를 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게 됩니다.
여기 김동춘이라고 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향해 인간은 무엇인가를 향해 예배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쇼핑센터에서 예배하며 tv 드라마 앞에서 스포츠 경기장에서 그리고 정치 권력을 향해 예배한다.
소비적 욕망에 빠진 인간은 상품을 예배한다.
물신 숭배에 끌려다니는 소비적 인간은 예배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 내가 열망하는 모든 것은 예배의 대상이 되며 우리는 그것을 예배하고 있다.
여러분 꼭 예배는 종교적인 행사로 신에게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든지 운동 선수라든지 여러분 그런 사람들을 찬사를 보내거든요.
박수를 보내고 칭찬을 하고
감탄을 하고 좋게 말하고 자랑하고 여러분 이것들이 다 뭐냐 하면 예배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사람이든지 장소든지 심지어 음식이라든지 좋게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자기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맛도 주고 기쁨도 주고 뭔가 즐겁게 해주고 감동도 주고 우리는 그런 대상에게 다 찬사를 보내죠.
이 모든 것들이
예배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에 어떤 대상에게 찬사를 보내셨습니까? 어떤 대상 때문에 감탄하셨습니까? 그런 대상이 있었습니까? 그런 대상이 없으면 재미없어.
인생이
물건을 보든지 맛있는 걸 먹었든지 뭔가 여러분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자랑하고 칭찬할 게 있어야 사람이 좀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 대상이 우리가 하나님일 때 우리는 가장 멋지게 아름다운 꼴 집어주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여러분 예배라고 하는 한자는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뜻입니다.
이 한자에 담긴 의미죠
우리 예배를 영어로 월십이라 그럽니다.
이 월십이라는 단어의 원어의 의미는 물건이나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대상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서 높이고 존중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겠죠 여러분 물건도 높입니다. 어떤 대상도 높이거든요.
그래서 이 월십이라고 하는 단어에는 그 대상이나 존재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대상입니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죠.
이게 예배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때가 되면 중요하게 경배 문제, 예배 문제가 우리에게 대두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언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현대 진리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현대 진리 현대 진리가 뭐예요? 현대 진리 그 시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이슈가 되는 진리죠.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을 잘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노아 시대 때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해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앞으로 세상이 너무 악해서 물로 세상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에 너는 방주를 만들고 사람들을 방주로 초청하라 그랬습니다.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어디에 들어가야 돼?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현대 진리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거는 뭐예요?
하나님이 9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집트 사람들과 주변 나라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고 마지막 10번째 재앙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명령을 하지 어린 양을 잡아가지고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다가 바르고 그 집 안에 피를 바른 집 안에 들어가 있어라.
그게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 시대에 적어도 이집트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어요?
피를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 그 당시에 예수님을 잘 믿고 섬긴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게 현대의 진리예요. 그 시대마다 시대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삶의 모습과 행위로 드러나는 진리가 있었다는 거죠.
마지막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현대의 진리는 어떻게 표현이 될 거냐 하면 일요일이라는 것과
안식일이라는 것을 통해서 현대 진리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라고 말할 때에는 계명에 온전히 말씀하고 있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현대 진리로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표가 나타나겠다는 것이죠.
그때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죠.
노아 방주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안식일도 마찬가지.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각각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라고 하는 경배와 예배가 뭔지를 우리는 늘 대두되어 왔었습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한테 넓은 의미의 예배를 좀 말씀드릴 거고 이것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릴 거고
그다음에 우리가 화요일, 금요일 특별히 안식일에 드리는 좁은 의미로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고요.
실질적인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준비와 마음 자세가 필요한지 좀 말씀을 드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설교를 어떻게 예배한 부분에 설교를 어떻게 잘 듣고 설교를 어떻게 다 적용하고 있을지 뭐 시간 되면 하고 시간 없으면 마치겠습니다.
삶으로서의 예배 먼저 좀 살펴보겠습니다.
미가서 6장 6절, 8절 여러분 너무 잘 아시죠? 제가 파란 글자 읽을 테니까 빨간 글씨는 여러분 좀 읽어주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장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고하시는 것은 오직 읽습니다.
시작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죠 하나님이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이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가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경배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러면서 여기에 재물이 나와요.
1년 된 송아지 그다음에 천천히 수양이나 만 마의 강물
재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뭐가 나는가 하면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드릴까? 여러분 여기서 맏아들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을 상징합니다.
여러분 자식을 바칠 수 있겠어요? 차라리 나를 바치지.
여러분 그 당시에 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을 섬기면서
어떤 좋은 대상을 들여서 내가 믿는 신에게 경배할까 고민하다 고민하다가 최고 좋은 재물이 누구예요? 자식이에요 여러분 그걸 하나님께서 절대로 명하지 않으셨지만 사람이 거기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신한테 내 맏아들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뭐를 행하며
정의를 행하며 이 정의라는 단어가 미시파이라고 하는 유명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인자를 사랑하며 인자는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들어보셨나요? 구약에 등장하는 헤세드 여호와의 은혜 자비 인해 여러 가지로 번역되는데 받을 가치가 없는 대상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 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여러분 이 세 번째는
십계명의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 같은 것이고 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라고 하는 것에 앞서서 우리의 삶이 예배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당시에 미가 선지자 당시의 형편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빨간 글자만 제가 읽을게요. 뇌물을 위하여 재판을 하고 싹을 위하여 교훈을 하고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목사들은 싹을 위해서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노란 부분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를 의뢰하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그러니까 이 미가 당시에 백성들이 우두머리들은 판사들은 뇌물을 위해서 재판을 하고 목사들은 싹을 위해서 교훈하고 선지자들은 돈을 위하여 점을 치고 이렇게 하면서도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야 우리가 여호와를 신뢰하고 우리가 여호와께 예배를 하니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않냐
우리에게 절대로 안 좋은 일은 안 일어난데 여러분 이렇게 하고 있었던 시대가 미가 시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삶으로의 예배를 말씀하신 것이지.
여러분 지난주에 여러분은 예배하셨습니까? 예배를 드리셨나요? 지난주에 여러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예배에 참석하셨습니까? 오케이 이런 질문을 받아보셨습니까? 지난주에 여러분은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셨습니까? 이런 질문 잘 안 받죠 안식일날 예배드렸는지 안 드렸는지 우리는 그 질문을 봤는데 봤어도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이런 생각 안 해보셨죠? 여러분 여기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처에 11조는 들리되 여기서 박하와 회향과 근처는 당시 사람들이 집 안에서 키우던 채소를 가리킵니다.
텃밭에서 가꾸는 채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집에서 여러분 상치 심어가지고 추수하면 12조 드려요.
오이 심어 가지고 집에 그러니까 뭐 대량으로 무슨 비즈니스 하듯이 그렇게 심는 게 아니고 텃밭에 자기 먹으려고 가꾸면서 오이 심어 가지고 11조 드리냐고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랬다 이겁니다.
회향과 박하와 근처의 11조를 뭐 10분을 정확하게 내가지고 그렇게 하나님께 11조 드렸어요.
여러분 나쁜 거 아니죠
그렇게 11조 들은 게 나쁜 게 아닙니다.
근데 그 11조는 들렸지만 뭐는 잊어버렸다 율법에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도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야 그러니 11조 드리지 마라 그러셨어요.
그러지 않아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드리는 11조 드리는 생활 맞다 이 말이죠.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뭐예요
너희의 삶에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이 하라는 거죠. 그래서 안식일날 예배드리는 것도 하고 11조 드리는 것도 하고 우리의 평소의 삶에서도 정의를 행하고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삶이 따르지 않으면 무익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하고 미가는 동시대의 선지자예요.
다 남방 유다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거는 미가하고 거의 비슷한 때예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들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너희가 내 마당만 바라볼 뿐이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 카페트만 밟고 있대.
오지 마라. 이제 이 재물 들이지 마라.
여러분 이 하나님이 재물 가지고 오지 마라는 게 핵심 메시지일까요?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 안 드리기를 바라실까요? 그렇지 않죠 이 핵심 메시지가 뭐예요? 삶은 뭐예요? 지 마음대로 살면서 예배만 드리고 있는 이 예배드리는 건 나 더 이상 못 받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비가 하도 와가지고 이거 별로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기우제를 드렸습니다.
한번 보셔요. 이 기우제를 여러분이 이제 드린다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정성스럽게 재물을 올리고 절도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이 앞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람들은 굉장히 경건하죠 이 기우제 혹은 제사를 드리는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면 이 사람들은 계속 경건해요 안 해요?
안 하죠 요 기우제 혹은 요 제사를 드리는 시간과 장소에서만 경건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셔요? 안식일 시간을 벗어나면 우리는 일주일간의 삶에 경건해요 안 해요 여러분 우리 안식일 교인들한테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는 좀 다른 시간이죠 그중에서도 토요일 11시부터 12시까지는 조금 더 다르죠
그렇잖아요 나머지 시간대는 뭐 하는 거는 불편하지 않는데 11시부터 12시까지 만약에 예배를 안 드리면 굉장히 좀 불편해.
일단 그 시간은 드려야 돼. 근데 드리고 나서 넥타이 풀고 옷 좀 편한 옷 입으면 내가 예배를 드릴 때 드리던 자세와 태도가 나머지 시간대에도 연관이 돼요 안 돼요
그럼 그러면 이 기우제 지내고 이렇게 제사 지내는 거하고 뭐가 다르냐 이 말이에요.
이 제사드릴 때도 이 사람들은 경건합니까? 굉장히 경건하고 절하고 재물 들이고 뭐 하지? 옷도 함부로 입고 하니까 옆에 딱 들릴 때 말도 안 하고 여러분 분명히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예배를 잘 제사를 잘 드린다 이 말이죠.
근데 이 기우제를 드렸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 이 기우제를 드린 거하고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사는 거지요.
맞나요 여러분? 여러분 안식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삶이 6일에 영향을 미쳐요 안 미쳐요? 여러분 6일 동안에 사는 삶이 안식일 예배드리는 데 영향을 미쳐요 안 미쳐요? 미쳐요.
말이 좀 이상한데 영향을 줘요. 그죠? 여러분 6일 동안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데 굉장히 영향을 미칩니다.
근데요 예배를 경건하게 잘 드리고 난 뒤에 안식일에 예배가 일주일에 영향을 미칠까요 안 미칠까요? 영향을 끼쳐요.
그래서 하나님은 6일의 삶이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데 영향을 주고 안식일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6일의 삶에 영향이 주어져서 이 안식일과 6일이 연관되기를 바라는 거죠.
근데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 않아.
https://www.youtube.com/live/ACK7bqBVUN0?si=216FtkAkbkZ3YmJV
6일 동안에는 그냥 살아요. 똑같이 세상 사람들하고.
그러다가 금요일에 해가 지거나 이렇게 하면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뭐 해요 이렇게 변화가 되는 게 아니고 변신을 해요.
옷도 좀 깨끗한 거 입고 옛날에 원도우면 이렇게 천한 바퀴 돌면 쫙 나오듯이 그리고 우리는 예배드리러 와.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좀 엄숙한 것 같고 경건한 것 같아.
그래서 넥타이 풀고 양복 벗고 그러면 뭐 해 똑같아.
여러분 과연 우리가 토요일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빼고 나면 세상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다를까요? 비슷할까요? 안식일날 와서 분명히 그 사람들은 안식일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날 어디까지는 어디 안 가고 다른 데 가
일도 안 하고 놀러도 안 가고 뭔가 자기들의 이 퇴계원 교회에 오는데 그 퇴계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벗어나면 6일의 삶이 하나님 없는 사람하고 많이 다를까요? 비슷할까요? 그럼 우리한테 예배는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죠.
단지 그 시간을 구별해가지고 여기 와서 하나님께 찬미 부르고 설교 말씀 듣는 것으로 끝인가 이 말이지.
여러분이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일주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가 일주일 살아가고 있는 삶이 예배를 드리는데
여러분 제가 안식일이 제일 감격스러운 때는 군대 때였어요.
예배 못 드리게 하고 맨날 하다가 안식일날 교회에 와 있으면 그 눈물부터 나오는 거야.
그 예배가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어.
찬양을 하면 뭐예요? 다 내 이야기 같아.
여러분 혹시 시편 읽어보시면 시편이 내 이야기 같아요 남의 이야기 같아요? 시편이 내 이야기 같은 사람은 인생이 평탄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고난이 많은 사람은 시편이 굉장히 가깝습니다.
여호와여 어떻게 이렇게 대적이 많도소이까 다 대적이니까 그런 구절을 읽으면 막 그냥 가슴에 와닿아.
그래서 여러분 시편을 읽어서 가슴이 막 와닿으면 여러분의 삶이 고난이 많다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성경 말씀이 가슴에 와닿고 예배드리는 그 감동이 있는 그게 되려면 일주일의 삶하고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 감동적인 상황을 보게 됐습니다.
한 직장 여성의 간증인데 이 여성은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라요.
근데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싶어졌어요.
그 이유가 뭐였는가 하면 이 아가씨가 회사에서 큰 실수를 했어요.
실수를 해가지고 회사에 많은 경제적인 손실을 끼쳤습니다.
완전히 해고를 당할 수준이었죠. 근데 자기 위에 있는 윗선에 있는 상사가 더 윗선에 보고를 하지 않고 그 실수를 자기가 뒤집어 쓴 거예요.
자기가 한 것처럼 욕을 얻어먹는 거죠.
그러니까 이 밑에 있는 직원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하루는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이 상사를 찾아갑니다.
왜 그러시냐고 차라리 제가 잘못했다고 윗선에 보고하시라고 제가 이전에 직장을 다닐 때에는 제가 열심히 밤새우고 그렇게 열심히 한 프로젝트를 직장 상사가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공을 가로채 가지고 위에 사람한테 보고하는 그런 상사는 봤는데
부하직원이 잘못했는데 그걸 자기가 뒤집어 쓰고 위에 사람한테 그렇게 욕을 얻어먹고 있는 상사는 처음이라고 내가 불편해서 못 살겠으니까 그냥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안 그러면 제가 자기가 이야기하겠다고 왜 그러시냐고 그렇게 이 부하직원이 가서 말을 할 때 이 상사가 쭈뼛쭈뼛하면서 말을 안 해요.
그러다 하도 물으니까 조심스럽게 입을 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또 맡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 닿는 데까지 남들의 짐을 지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게 직장 상사의 답이에요? 제정신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여러분 사람들은 직장에 왜 다녀요? 돈 벌려고 다녀요.
맞아요 근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직장에 돈 벌려고만 다니면 안 됩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거듭난다는 게 뭐예요? 거듭난다는 것은 종로의 계단에 의하면 새 마음을 품는다는 거예요.
새 목적과 새 동기와 새 욕망을 품는 게 거듭나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직장에 돈 벌러 갑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도 재림 신자들도 직장에 돈 벌러만 가면 세상 사람들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여러분 거듭난 마음은 새 목적과 새 동기와 새 욕망을 갖는다는 게 거듭난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직장에 돈 벌러만 가지만 재림 신자와 그리스도인은 직장에 돈 벌러만 가면 안 됩니다.
맞아요 별로 동의 안 하시는 것 같아.
여러분 만약에 내가 하나님 없는 사람과 하나님 나가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왜 해요? 결혼 왜 하셨어요? 행복하려고 하셨잖아요.
혼자 살 때보다 행복하려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결혼해요.
근데 거듭난 사람이라면 결혼하는 동기와 목적도 뭐예? 달라야 돼요.
여러분 자녀 왜 낳으셨어요?
자녀 낳아서 부모가 행복하고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해서 자녀가 행복하는 걸 보고 싶잖아요.
여러분 그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해요.
거듭난 사람이라면 자녀를 양육하는 목적도 동기도 달라야 돼요.
여러분 그래야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이건 제정신 아니에요 제정신 아니고 이거는 거듭난 정신이에요.
예수의 정신이니까.
여러분 이렇게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다르게 보지.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회사에서 돈 버는 것으로만 회사를 다닌다 그러면 무슨 빛이 되겠어요 여러분 이 아가씨가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해진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저 내 직장 상사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거죠.
여러분 이게 뭐냐 하면 삶에서 드리는 예배지.
이 사람이 교회 다닌다 안 된다다 말 안 했지만 이 사람의 삶이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가가 보통 일반 사람에게는 물음표가 붙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이 이렇게 선택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예수라는 거죠.
여러분 그때 사람들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요 오늘 우리가 만약에 재림 신자로서 내가 안식일이라고 하는 시간과 교회라고 하는 공간 속에서 내 모습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6일 동안의 내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달라야 정상이에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안식일에만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똑같이 그 사람들처럼 돈에 욕심이 있고 똑같이 세상의 명예와 인기와 자리에 탐심이 있고 내 자식 좋은 대학 보내고 좋은 데 직장 시켜서 출세시키고 만들고 싶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하고 뭐가 달라요? 아무런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사람의 삶이 아닌 거지.
오늘 우리가 6일 동안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한번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시작
설교는 흔히 맺히는 값싼 열매이나 빈민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선한 행실에 나타난 예배는 참 열매로서 좋은 나무에서 자연스럽게 자란다.
여러분 제가 여기서 입에 아무리 거품 물고 설교 번지르하게 잘해 봐도 이건 값싼 열매예요.
차라리 삶에서 뭐예요
불쌍하고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한테 친절한 한마디 사랑 하나 베푸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하나님 보시기에 무익하다 그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적어도 삶으로서의 예배와 예배로서 우리가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어디를 더 친다고요? 삶으로서의 예배
내가 삶에서 이 안식일의 시간과 교회라고 하는 공간 속에 들어오기 전에 살아가는 6일 동안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말아야 되는가 너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좁은 의미로서의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우리가 이제 퇴교 온 교회에서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예배는 상호작용입니다. 예배를 여러 가지로 정의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배는 만남이다.
예배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예배를 통해서 드리는 게 있습니다.
뭘 드려야 될까요?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배자의 삶을 드리는 거죠. 뭘 드려요? 죄된 마음을 드린다.
뭘 드려요? 기도 또 뭘 드려요? 찬양
감사 헌금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자꾸 드려야 될 게 있습니다.
드리는 것만 하면 안 돼요. 예배는 받아야 돼요.
뭘 받아야 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돼.
예수님은 내가 또 무너지고 넘어지고 6일 동안에 실패했어도 여전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그분의 마음을 받아야 돼.
그걸 받아야 6일 동안에 살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보증과 확신 새 마음과 사명 등등 받을 게 많습니다.
여기에 죄된 마음이라고 하는 걸 좀 살펴볼게요.
여기 미국에 있는 쓰레기통입니다. 굉장히 큰 쓰레기통인데 생애의 빛 장로회 계단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때 우리는 무엇을 드리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써 순결하고 깨끗하게 해 주시도록 읽습니다.
시작. 우리의 죄된 마음을 그분께 드리게 된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갖고 오는 것이 그렇게 그렇게 고급지고 고상하고 거룩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 앞에 갖고 오는 거 대부분이 다 그게 더러운 거예요.
내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도요.
이거 뒤에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이거 하나 보고 이거 먼저 먼저 말씀드릴게요.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
회개하는 사람의 죄의 자복 등은 참된 신자에게서 향연처럼 하늘 성서로 올라가지만 그것들은 타락한 인간의 입술에서 나왔기 때문에 매우 불결하고 보혈로 정결하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다.
뭐라고요? 우리가 예배하고 경배와 찬양도 열심히 하고 설교도 뭐 어떻게 하고 기도도 하고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도 하고 여러분 이게 하나님 앞에 신자들이 드리는 얼마나 고상하고 값지고 아름다운 예물이에요.
근데 이것들은 타락한 인간의 입술과 본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게 불결해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간다 못 올라간다? 못 올라갑니다.
하나님께 못 올라가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중보자가
자신의 의로 그것들을 정결케 하여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간압하실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담은 향로를 가지고 계신다.
그 속에는 이 땅에 부패한 것은 하나도 없대.
그분은 향로에 신자들의 기도와 찬양과 죄의 자복을 모아
그 위에 자신의 흠 없는 의를 첨부하신대.
그 향은 그분의 속죄의 공로로 향기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온전히 받으실 만한 향으로 간압된다.
그다음에 기도 응답이 있게 된다. 잘 기억하셔.
이걸 왜 제가 말씀드리는가 하면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된다.
그러면
이거 이제 예배드리는 는 어떤 우리의 마음 자세 중에 하나죠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배하는 자가 뭐와 뭐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로 옛날에 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근데 이게 원어의 의미로는 푸유마와 알렉테이아라는 단어인데 푸유마는 성령이라는 단어고 알렉테이아라는 단어는 진리라는 단어예요.
합치면 그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것도 분명히 필요한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모든 것이 올라간다 안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성령이 함께하셔야 돼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가 되어야지 우리의 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이 함께 드리는 예배를 할 때 우리의 삶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예요. 그래서 오늘 여기 있는 말씀처럼 여러분 우리의 정성과 마음 자세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에 성령이 임재하시도록 강구하는 마음의 자세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도록 중보하시도록 마음속에 굉장히 그분을 갈구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그냥 우리가 정성스럽게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말 이해되시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이 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성령을 간구하고 성령 중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백해무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옷을 깔끔하게 입고 오고 아무리 예배드리는 장소를 세팅을 잘하고 모든 것이 흠 없고 점 없이 만들어 놓아도
거기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더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인간적인 마음 너머에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오는 것이 굉장히 거룩하고 고상한 마음이 아니고 뭐예요? 우리는 뭘 가지고 와야 돼 그러니까 이게 참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 오시면 됩니다.
있는 내 마음 그대로 그냥 가지고 오시면 돼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시면 하나님 제가 우리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건 이 죄된 마음뿐입니다.
제가 뭔가 어떻게 어떻게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번 한 주도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뻔뻔스럽게 이 죄된 마음 그대로 가지고 왔사오니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보열 예수님의 보열로 이 죄된 마음이 깨끗해져서 예배하는 자세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늘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돼요.
그런 예비를 하나님이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하실까요? 여러분 태계원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하실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시작.
여러분 미사 혹시 천주교에서 예배드리는 거 한번 보신 적 있습니까? 파이프 오르간 쫙 치면서 뭐예요 스테인드 글라스부터 여러분 제가 캐나타에 갔을 때 집회를 했을 때 거기에 있는 목회자들이 저보고 꼭 성당이 어떤 성당이 저기 몬트리올에 있는 노르트담 성당을 꼭 한번 구경을 해보라 그래요.
여러분 노트르담이라고 하는 성당이 프랑스권에는 많아요.
노트르라는 말이 프랑스어로 무슨 말이냐 하면 부인 여성 부인을 존칭하는 말이에요.
담이라는 말이 여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마담 할 때 그 마담이 다음이 그러니까 노틀담은 말이 뭘 의미냐면은 우리의
여성 이런 뜻이에요. 성모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노틀담 성당은 다 성모 마리아를 높이는 성당이 그래서 제가 몬트리올에 있는 그 성당을 어떻게? 이렇게 물어서 찾아가게 됐습니다.
얼마나 큰지요? 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니까 입구에서 돈을 받아요.
캐나다 달러로 약 8달러인가 그렇게 받아요.
작지도 않아요. 이 돈을 주고 이걸 들어가야 돼 말아야 돼 사람들이 꼭 보라.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있는지 싶어서 들어갔어요.
들어가고 나서 딱 문 열고 들어가니까 이렇게 성당 안 전체가 황금색이에요.
자본금을 얼마나 갖다 발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조명과 금과 그 장식과 스테인드 글라스하고 세워놓은 여러 사이즈도 어마무시하게 컸습니다.
저 끝이 안 보여요. 넓고. 딱
한동안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거기 가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그 처음 순간에는 그 성당의 압도적인 그 장관의 일단 귀가 눌렸고요.
한참 쉬어 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속에서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뭔가 하면 교회를
성당을 이렇게 지어야 할까? 여러분 제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 예수님이 만약에 이 노털담 지역에 온다 그러면 여기 와서 예배드리고 갈까 이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만약에 퇴계원에 오면 어디 가실 것 같았습니까? 퇴계교 오실 것 같습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만약에 예수님이 퇴계원에 오시면 퇴계원에서 가장 열악한데 노숙자가 있는 곳이든지 아니면 가장 사람들이 안 찾아보는 그런 곳에 가실 것 같아요.
저는 거기에 노숙자 많습니까? 오시는 분들 거기 만나러 가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오해할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막 거룩하고 이렇게 만들어야 예수님이 거기에 거하신다고 진짜 거룩해야 되는 건 우리 마음이지.
여러분 어쨌든 간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왔을 때 머릿속에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이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계시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여러분 혹시 대통령 만나러 가보셨습니까? 여러분하고 저하고는 그런 그런 거리가 멀잖아요.
제가 어느 곳에 방문을 갔더니 그분이 대통령하고 찍은 사진을 자기 집 제일 중앙에 높은 데다 다 걸어놨더라고요.
굉장히 영광스러운 거잖아요. 대통령하고 사진 찍었으니까 아주 아주 중요하게 집에 가보처럼 그렇게 해놨더라고요.
여러분 우리 만약에 청와대 초청을 받으러 가면 굉장히 조심할까요?
여러분 청와대 우리가 대통령 만나러 가가지고 막 휴대폰 끄집어내고 가지고 막 왔다 갔다 할까요? 대통령 만나러 가가지고 안 할 것 같죠 근데 우리 하나님 만나러 와가지고 뭐 해요 여보세요 예배 드리는데 저는 이렇게 휴대폰을 물론 갖고 있습니다.
요즘 갖고 있는데 근데 11시에서 12시 사이에 휴대폰 문자를 보내는 안식일 교인들이 있어요.
굉장히 궁금해요. 여러분 분명히 그 사람은 교인이거든요.
교인이면 11시에서 12시 사이는 분명히 교회에 있을 텐데 그 시간에 휴대폰 문자를 보낸다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진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아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어떤 보열의 중보의 공로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 무가치하다는 것은 분명한 건데 근데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진짜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 무성의하게 여러분 사람이 늘 드리는 것은 굉장히 익숙해집니다.
그다음에 이제 타성이 붙어요. 어린이 드리는 예배
그래서여러분 경건과 마음의 자세는 그다음부터는 시들해집니다.
또 예배드리는가 보다 너무 익숙해지는 거죠.
여러분 익숙해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드릴 예배가 많거든요. 여기 빨간 글자 함께 읽겠습니다.
교회 정원 5건 495페이지 시작. 하나님의 집에 대한 존경심이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여러분 이 예배드리는 공간이 회계원 교회가 예배드리는 공간이 엄청나게 무슨 건물 건축 재료가 좋아서가 아니고 거기에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나도 함께 있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거죠.
그럼 우리 자세가 달라야 될까요? 달라야 돼요 여러분 우리 대통령 앞에 들어갈 때도 뭐예요 우리 얼마나 최선의 자세를 하고 경건하고 예모 있고 그렇게 들어가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데 우리는 아무렇게나 들어간다는 거죠.
근데 천주교 같은 경우는 그걸 분위기로 잡습니다.
파이퍼로간 쫙 깔죠 높죠 그다음에 아주 옷을 입은 사람들이 경건하게 뭔가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 분위기에 압도가 됩니다.
그런 데서 예배드리고 미사드린 사람이 교회에 오면요 굉장히 어수순해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활기차야 되고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라고 하는 그 자세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진짜 내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지 여러분 여기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첫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아시죠 그죠? 유명한 성경 구절이에요.
여러분 얼마나 나으면 첫날보다 나을까? 한 날이 천 배가 좋을까? 여러분 세상 어디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천배가 좋을까요?
제가 1995년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신학 공부를 할 때 수업 중에 하나가 공중전도 수업이었습니다.
공중전도 수업으로 학기 중에 수업을 하고 수업이 끝날 때 지역교회에 나가서 전도회를 하고 평가를 받는 그런 수업이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연결이 중국 심양에 가서 전도회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서 수업이 마치고 중국 심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양에서 여러 곳에서 대학원생들이 흩어져서 전도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다 모여서 어디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렸는가 하면 뚱광 교회라고 심장에 있는 엄청나게 큰 교회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3자 교회이기 때문에 이 교회는 교회의 소유가 아니에요.
이 교회는 안식일에는 안식일 교인들이 예배드리고 일요일은 일요일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곳이에요.
교회는 건물은 정부 거예요.
여기 갔는데 안식일이었습니다. 예배에 모인 인원은 3천 명이 넘었습니다.
굉장히 큰 교회였습니다. 근데요 여러분 여기에 중국 주민들 한족이었습니다.
여기는 조선족이었고 거의 100% 한족이었는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옷이 그렇게 엄청나게 깔끔하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근데요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진짜 잡담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어요.
이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희가 딱 가서 위에 그러니까 조금 늦게 갔기 때문에 안내하는 사람이 1층에는 안내를 안 하고 저희들은 2층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2층에서 딱 예배를 드는데 이 분위기가 느낌이 장엄하고 경건하고 이 예배 설교를 누가 했냐 하면 이 목사가 여자예요.
근데 앞에서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제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한 번씩 이렇게 둘러봤어요.
노트 같은 거 꺼내가지고요. 열심히 받아적으면서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딱 집중해가지고 우리 같은 경우는 이야기도 하고 관심도 가지고 뭣도 제가 예배드리러 가가지고 그 예배드리는 사람 모습에 더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를 이렇게도 드리고 있구나. 안식일 교인들이에요.
그리고 또 주중에는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에서 전도회를 하는데요.
이제 대학원생들이 여러 명이 갔으니까 이제 시간을 그래서 한 교회를 갔는데 대학원생 3명이 갔습니다.
목사님도 계셨고 근데 한 장소에 아침 일찍 갔는데요.
이 예배드리러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온 이 중국 청년들 중국 교인들이 그건 이제 조선족이었습니다.
한국말로 했기 때문에
여러분 열몇 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안 가요.
나중에 우리 전도사들이 지쳐가지고 저희들은 3시간 4시간 만에 바꿨습니다.
사람을 그런데 이 사람들은 딱 무릎을 꿇고 앉아가지고 하나님 말씀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서 눈이 초롱초롱해가지고 우리를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미안해서 고만하자 소리를 못하겠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한 세 사람이 3시간씩 4시간씩 돌아가는데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밥 한 번 안 먹고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딱 앉아가지고 말씀을 들어요.
제가 감동받은 것은 제가 신학대학원 다녔었으니까 뭐 설교를 얼마나 잘했겠습니까 그건 상관없는데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들으려고 하고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가 이게 우리한테는 더 감동이 됐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한국 교회하고 한번 비교를 해봤습니다.
우리 설교 12시 넘어가면 어떻게 돼?
여러분 우리 교회에 설교를 언제 시작해도 설교 12시에 끝마치는 목사님 계셨잖아요.
잘 모르십니까? 엄무수 목사님 계셨는데 그분 시계 딱 놓고 시작하잖아요.
그분은 어떤 행사가 있어가지고 하다가도 그분은 12시 딱 되면 설교하다가도 끝내버립니다.
근데 지금 연수원에 있는 원장님 우리 박모 목사님은 완전히 반대예요.
설교 시간과 상관없이 그분은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다 합니다.
아무리 앞에 행사가 길어가지고 설교를 시작을 12시에 시작해도 그분 자기 설교 다 해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우리 너무 뭔가 인간적으로 정해놓은 룰이 너무 많은 거죠.
한번 제가 이 지금도 이 예배드렸던 이 모습은 정말 잊혀지지 않아요.
얼마나 말씀 앞에 진지하고 예배드리는 그 태도가 엄숙하고 경건한지
우리의 예배에 회개와 돌이힘이 있어야 합니다.
빨간 글자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동의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할 때 상한 마음이 좀 있을까요?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드리는 예배 빨간 글자 보십시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여러분 보통 교회 안식일 학교에 교장 선생님 딱 서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뭐예요? 저는 대부분 한 번으로 끝나는 사람 거의 못 봤어요.
일단 교회들의 반응이 없거든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또 두 번 여러분 우리 교인들은 예배드리는 게 경건해요 심각해요?
우리 교인들은 경건한 것을 자꾸 심각한 것으로 오해해요.
여러분 우리 교회 성경 많이 알고 예언의 신 많이 아는 사람이 밝아요 어두워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전도를 잘하려면요 전도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돼야 됩니다.
영적이어야 되고 사교적이어요. 근데 우리 교인들 중에서 성경을 많이 알고 예언의 신을 많이 알면 영적이거든요.
근데 영적인 사람은 사교적이지 않아요.
성경을 알면은 예언의 신을 많이 알면 괜히 그 사람 앞에 가면 굉장히 부담스러워.
근데 우리 교인 중에 영적 사교적인 사람이 있어요.
그죠?
말도 잘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
다 그런 건 아닌데 또 그런 사람들은 영적이지 않아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온갖 세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 하는데 깊이 있는 성경 이야기는 못 들어가.
그러니까 영적인 사람은 사교적이지 않고 사교적인 사람은 영적이지 않아.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많은 경우가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 전도를 잘하려면 뭐 하고 뭐 하고 돼야 돼
영적이면서 사교적인 사람이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뭐가 약한지 아셔요 나는 성경도 좀 알고 나는 예언의 신도 좀 알았는데 나는 좀 사교적이 부족한 것 같아.
그럼 사교성을 길러야. 근데 좀 사교적인 분은 아무튼 성경도 더 많이 알고 예언의 신도 더 많이 알아서 예수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아.
자기 약점 아시겠죠?
왜 우리가 찬양할 때 예배드릴 때 안 기쁠까요? 저는요 찬양할 때 경배와 찬양을 하거나 교인들이 찬양할 때 저는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저는 관심 없어요.
근데 찬양하는 얼굴을 봅니다. 저는 노래를 못해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별명이 음악가였습니다.
왜 음악가였나? 통신표 음악가를 받아서 그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1학기 때 수업을 하는데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 들어오셨어요? 홍신표에 이제 수미양가를 매기던 시절인데 저하고 여학생 이름 둘이를 부르면서 선생님이 그러는 거예요.
이 중에 음악은 한 명은 양이고 한 명은 가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음악 책이 들어 있었어.
음악책을 다 꺼내면서 노래를 시킬 거다.
통신표의 양은 받아야지 어떻게 가을 받겠나
가방에서 음악 책을 딱 꺼내는데 담임 선생이 조용히 저 이름을 부르는 거야.
재호야 어떻게 여학생이 통신표 음악 칼을 받아가겠니
그러니까 제가 음악 한 짓 아이들 친구들이 다 있는 데서 음악 그래서 그다음부터 친구들이 저보고 이 음악과 제가 음악가였어요.
저는 노래를 못합니다. 노래는 못하는데 제가 찬양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노래는 잘 못해도요 찬양을 하는 모습이 얼굴이 환하고 진짜 기뻐서 찬양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그 사람들은 감동이 있어요.
우리가 노래까지 잘하면 금상첨화죠. 근데 오늘 우리 찬양하는 모습은 내 일주일의 삶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일주일에서 하나님 만난 경험도 없고 내가 일주일 속에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은 것도 없고 그냥 정신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가 교회에 딱 왔는데 무슨 그 찬양이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래서요 여러분 6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진지하게 교제하는 삶이 없으면 안식일날 드리는 예배는 늘 안식일 학교 교장이 여러분 웃으세요.
옆사람하고 맨날 그거예요. 한 가지 질문드릴게요.
여러분 6일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개인적으로 읽고 영적으로 공급받는 사람이 설교를 잘 들을까요? 6일 동안에 하나도 말씀을 안 보고 바짝 심령이 마른 사람이 설교 잘 들을까요?
영국에서 한 기상학자가 실험을 했어요.
잔디밭 세 종류에다가 물컵을 넣고 바짝 마른 잔디 일반 잔디 물이 촉촉하게 스며 있는 잔디 똑같은 새 물컵 하나씩 들고 뒤집어 엎었습니다.
어느 잔디가 물이 가장 빨리 흡수가 되었을까요? 우리 생각에 뭐가 제일 빨리 흡수할 것 같아요?
바짝 마른 거 제일 물을 흡수를 못했습니다.
물이 제일 잘 흡수가 된 것은 촉촉한 잔디였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목사님의 설교 여러분 거식증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영어로는 아노렉시아라고 하는 건데 여러분 모델들 유명한 영화 배우들 다이어트 심하게 해 가지고 속에서부터 음식을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뼈만 남은 바싹 마른 사람이 그 음식을 주면 토해냅니다.
이게 거식증이에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일주일 동안 말씀 하나도 안 본 사람이 안식일에 딱 앉으면 말씀을 쫙 빨아들일 것 같지만 절대로요.
내가 평소에 말씀을 잘 읽는 사람이 뭐예요? 하나님 말씀 잘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6일간의 삶은 그 6일간의 삶이 어떠하는지에 따라서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잊지 마셔요. 그래서 오늘 우리 찬양이 감동적이지 않으면 내 6일간의 삶에서 하나님 만나는 감동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드리는 찬양이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거는 예배를 점검할 게 아니고 6일의 삶을 점검하셔야 돼.
내가 6일 동안에 찬양을 감동적으로 부르고 사는 삶을 살고 있는지
거기에서 6일 동안의 하나님을 만난 삶이 있는지 그래야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왔을 때 그 6일 동안에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할 거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이 하나도 없는데 찬양을 기쁨으로 부른다 그런 일 거의 없습니다.
여기 빨간 글자만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 읽습니다.
시작.
여러분 부모로서 자녀가 막 콧노래를 부르면서 지내는 걸 보면 어때요? 기쁘죠? 자녀가 막 우거지상하고 있는 것보다 노래를 막 부르면서 막 즐겁게 있는 모습을 보면 부모가 얼마나 기쁘겠어요 하나님도 그럴까요? 하나님도 우리의 삶에서 찬양을 막 부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 그거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우리를 위해서 심령이 감사로 벅찰 만큼 일을 하셨는데도 우리가 찬양을 그처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슬퍼하신다는 거예요.
어거스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찬양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분이 아니며 당신이 비난한다고 해서 더 못해지는 분도 아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 당신이 더 나아지고 비난하면 당신이 더 못해진다.
여러분 태양 앞에 촛불 키면 태양빛이 좀 밝아질까요?
태양 앞에 촛불 아무리 켜봐요. 태양빛에 아무런 영향을 못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엄청 높아질까요?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 안 해도 그분 자체가 존귀한 분이에요.
근데 그 하나님을 찬양하면 우리가 어떻게 돼요? 우리가 가장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찬양은 우리를 위해서 하라는 거예요.
물론 그분의 그 사랑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도 흐뭇하시겠죠 그래서 우리가 찬양을 하면 우리가 더 나아지고 우리가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면 우리가 더 초라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그렇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오늘 아침에 제가 동방박사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뭐도 나와야 돼요? 우리의 예물도 함께 나와야 되지 그걸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예배를 위한 실질적인 제안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거 빨게 읽고 넘어갑니다. 예배 전에 어떤 실제적인 제한이 좀 있으면 좋겠는지 여러분 안식일에 예비일에 좀 준비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그 진리 횃불 교회에서는
오후 3시가 되면 문자가 뜹니다. 혹시 이게 진리 횃불 교회 카톡이 앱이 이렇게 돼 있는 분 오후 3시가 딱 되면 문자가 뜹니다.
이제 안식일 시작할 시간이 되어 갑니다.
준비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떠요.
뭐 그런 것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사이에 한 주 동안 내가 지은 죄가 있다면 죄를 고백하고 아무개와 사람 사이에 서먹서먹한 관계가 있다면 예배드리러 가기 전에 전화도 하고 그렇게
회복하는 그런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도 하고 음식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준비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안식일에 들어가는 마음의 자세는 다릅니다.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안식일 아침에 늦잠을 자지 마시면 좋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너무 피곤하다가 안식일 아침이나 좀 자자.
그래서 안식일 아침에 꼭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고 예배에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안식일 아침에 가족과 싸우지 마셔요.
저는요 안식일 아침에 집사람하고 싸워가지고 그날 안식일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제가 남아공에 있을 때 그날도 잊지를 못해요.
그날은
2007년 12월 22일이었습니다. 제 큰아이 생일이었어요.
제가 그 케이프타운에서 스다사라고 대학 팀들과 그 오비 팀들이 3천 명이 넘어서 한 대학 캠퍼스에서 모이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제가 연락해가지고 안실학교 시간을 15분을 프리젠테이션 시간을 얻었어요.
저희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근데 집사람이 빨리빨리 안 움직였습니다.
걔가 다퉜어요. 급해가지고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 났습니다.
차가 폐체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가지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사단은요 안식일 아침에 특별히 더 하나님 믿는 사람들 다투게 만듭니다.
짜증 나게 만들고 사소한 일에 화나게 만들고 여러분 성질 한번 부리고 예배 와봐요.
목사님 뭐라고 이야기해도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화날 일이 있더라도 뭐예 그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거라고 기도하시고 참으셔요.
하나님 뒷말을 안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 절대로 지각하지 마시오.
제가 한번 서울 영어학원 교회에 있을 때 제가 9시 전에 한 8시 반쯤에 교회를 가는데 그날따라요 3040 일찍 교회에 오라고 그래도 잘 안 오는 사람들이 더 일찍 왔더라고요.
그날 제가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날 자기 애들 순서예요.
어린이반 순서 어린이반 순수하니까 아버지들이 다 일찍 와가지고 캠코드부터 시작해서 앞에 쫙 진열해서 다 장치를 해놨어요.
자기 애들 하는 거 찍으려고 여러분 사랑하는 대상 사랑하는 데는 마음이 가요.
자기 아이들이 순수할 때는 그렇게 일찍 오는데 자기 아이들이 순수 안 하면 일찍 안 와.
그리고 하나님은 도대체 뭐냐는 거지 그러면 여러분 교회 지각하지 마셔요.
그리고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으셔요. 좋은 거는 앞자리는 늘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늦게 오면 저 뒤에 교회를 교회로 출발하기 전에 꼭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대하셔야 여러분 영화 보기 전에 기대해요
솔직히 하세요. 보잖아요 영화 보기 전에 뭐 어떤 영화 나왔다더라 보자 기대해요 안 해요 여러분 예배 때도 기대해요.
오늘 이창섭 목사님 무슨 설교하실까 기대해요.
기대하셔야 돼 기대하시고 기도하셔야 돼요.
교회에 들어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말씀을 듣는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잘 붙잡을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돼요.
다릅니다. 여러분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예배와 자세와 이 기도를 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자의 자세는 달라요.
말씀을 전할 설교자와 듣는 청중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예배를 위해서 우리가 준비할 게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이 임지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느낌으로 아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거하겠다고 하는 그분의 약속에 의해서 믿는 것입니다.
예배에 집중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모두 제거하십시오.
하늘과의 연결을 위해 잠시 세상과의 연결을 꺼놓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장로님은 아예 휴대폰을 안식일에 쓰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이 아니고 그분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아예 휴대폰을 꺼버려요.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한테 연락하려면 안식일 전에 해야 돼 전에 하거나 안식일 끝난 뒤에 해야 돼 그분은 안 킵니다.
물론 그걸 제가 잘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분은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집중하기 위해서 세상과 좀 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그 마음은 존중합니다.
어쨌든 간에 여러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죠? 다른 사람하고 안식일 해야 될 게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적어도 여러분 아까 말씀드렸처럼 우리가 대통령 앞에 갈 때 대통령 만나서 막 이야기하고 있는데 잠깐만요.
휴대폰 막 쫓아들고 가서 얘 이렇게 안 한단 말이죠.
근데 우리 제가 이렇게 보고 있으면 교회에서 그렇게 막 쫓아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평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되면 좋겠습니다.
찬양대가 우리 예루살렘 찬양대라고 그러는데 찬양대가 딱 준비를 했을 때 하면 뭐야 오늘 좀 하네.
그러니까 여러분 찬양대가 찬양하는 것은 회중을 대표해서 찬양의 달란트가 있고 그 시간을 헌신하여서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회중이 그 시간에 같이 찬양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교회는 찬양대를 찬양대가 청중을 보고 찬양대 하지 않습니다.
앞을 보고 해요. 찬양대 좌석이 그렇게 돼 있어요.
이 찬양을 받으시는 분은 누구다?
하나님이다. 이 청중한테 지금 설교하기 전에 뭔가 막간에 노래 서비스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근데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해 목사님 설교 중에 노래 서비스하는 것처럼 그래서 찬양을 잘했니 못했니 평가합니다.
굉장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때 그 찬양대가 찬양하는 시간에 나도 함께 찬양을 해야 돼요.
마음으로 동참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도 마찬가지예요.
예배를 평가하지 마시고 예배를 참여하는 자가 되십시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을 듣는 자가 되지 마시고 찬양을 하는 자가 되시고요.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옆 사람하고 이야기하거나 졸지 마십시오.
근데 여러분 이거 졸지 만다는 제가 이야기 좀 드릴게요.
어떤 한 아가씨가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는 아가씨예요.
근데 이 아가씨는 금요일 저녁에 나이트 근무를 한 거예요.
대부분 뭐 하고 싶어요? 집에 가서 자고 싶지.
근데 이 아가씨는 졸음을 쫓고 예배드리러 온 거야.
근데 목사님의 설교가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고 예배 시간에 졸았어요.
교회 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와서 존다고 엄청나게 나무랐어요.
그 아가씨 상처 엄청 받았어요.
자기가 집에 가서 어제 저녁에 밤에 근무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집에 가서 잘 수도 있는데 내가 그거 졸음을 쫓고 예배드리러 왔는데 그래서 잠깐 졸았는데 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존다고 그래서 여러분 예배 시간에 주는 분 너무 뭐라 하지 마셔요.
그분이 그 밤에 진짜 어떻게 하고 온지 몰라요.
그래라도 온 것도 감사하잖아요. 그죠? 그렇지만 본인은 노력해야 돼.
본인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 오든지 물을 마시든지 어쨌든 간에 아니면 뒤에 서서 듣든지
그러면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려고 애를 써야 돼요.
설교를 기록하는 건 좋은 습관입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어느 누구에게도 아닌 자신에게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듣고 있다가 아무개 집사가 이 설교 꼭 들어야 되는데 우리 남편이 이 설교를 들었어야 되는데 여러분 그 남편과 아무개 집사에게도 그 말씀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1차적으로 누구한테 필요한 거예요? 나한테 잊지 마셔요.
예배 끝난 후에 생명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오전에 들은 말씀이 안식일 오후에 쓸데없는 농담과 잡담 때문에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지난 안식일에 이창섭 목사님 설교했습니까? 안식일 예배 때 설교 제목 기억하십니까?
기억나셔요? 안 나죠 왜냐면 생각 안 하거든요.
지난주에 이창섭 목사님이 안식일에 설교한 설교 내용을 주중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분 주중에 여러분 이게 우리 현실이에요.
목사님 설교 아무리 감동적으로 해도 예배드릴 때 문 떠날 때 식당 가기 전에 다 까먹어버려요.
식당 가서 무슨 이야기하느냐 지난주에 야 너 머리 까마인 거 괜찮았다 오늘 정말 예쁘다 화사하다.
여러분 식당에서 그거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 안식일 교인들 설교 듣고 나가지고 그리고 그 목사님이 안식일에 설교했던 설교를 주중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그 목사님이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준비한 말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면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적용시켜보지 않아요.
그러니까 설교는 언제 그로 끝나는가 하면 딱 문 목사님하고 인사하고 문 떠나는 순간, 식당 가는 순간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아 단 한 번도.
여러분 그래서 천교도들은 안식일 오후에 목사님이 하신 설교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적어 와가지고 자녀들하고 이번 일주일 동안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천교들은 연구했습니다.
그게 청교도들이 예배를 드린 후에 안식일 1월 오후에 하는 습관이었습니다.
우리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요 여러분 우리가 적어도 목사님이 지나는 시기에 뭐 설교했지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내가 그럼 일주일 후에 돌아오는 삶에서 이걸 적용하고 살지 여러분 생각해 보셔야 돼요.
이게 설교 예배드린 후에 삶이에요. 가능하면 안식일 후에 설교를 복습하십시오.
안식일에 들은 말씀을 다음 한 주 살아갈 동안에 계속해서 기억하고 자신의 삶에서 적용할 것을 찾아서 실천해 보십시오.
어떤 삶의 변화가 있는지 적어도 목사님은 그걸 기대하고 설교할 거 아니겠습니까? 6일 동안의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묵상하면서 삶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삶의 예배를 잘 드리면 그게 안식일의 시간 속으로 들어옵니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된 예배를 잘 드리고 이 구별된 예배를 잘 드려서 그 감동을 기억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주중으로 들어가면 6일간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그래서 6 1과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가 상호 연관이 되어서 함께 힘을 주어야 되지.
안식일 예배는 6일에 힘을 주고 6일의 삶은 안식일에 힘을 주어서 함께 예배를 올바로 삶에서의 예배와
예배로서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죠 이번 태계원 교회 잘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처럼 여러분 이거 그냥 설교 어떻게 들어야 될 것인지는 앞에 내용하고 비슷합니다.
읽어보십시오. 다만 꼭 기억하실 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가 준비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설교하는 분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준비 많이 할까요?
얼마나 많이 하는 줄 몰라 그러면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예배하는 사람도 준비해야 될까요? 여러분 기도 맡아봐요.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를 경건하고 잘하기 위해서 기도 준비하죠 해요.
해야 됩니다. 짧게 해야 되고 그렇게 예배에 등장하여서 예배 순서를 맡은 사람이 준비하는 것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도 준비하셔야 돼요.
그 준비가 함께 맞물려야지 예배는 더 경건하고 올바르게 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위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시간 좀 오바돼서 죄송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우리 토의 주제를 좀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재림 신자로 불러주셔서 예배하는 자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어떻게 예배하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 날짜는 잘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6일간의 삶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잘 드려왔는지 하나님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가 늘 익숙하여서 편에서 늘 드리던 예배이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려오지 않았는지 마음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6일간의 삶이 안식일의 예배로 영향을 미치게 하시고
안식일에 거룩하게 드린 예배가 6일간의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을 얻는 그런 상호 보완되는 삶의 예배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드리는 삶의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고 저희가 큰 용기와 힘을 얻는 예배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clovanote.naver.com
첫댓글 예배적 인간
"인간은 무엇인가를 향해 예배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쇼핑센터에서 예배하며, TV 드라마 앞에서, 스포츠 경기장에서, 그리고 정치권력을 향해 예배한다. 소비적 욕망에 빠진 인간은 상품을 예배한다. 물신 숭배에 끌려 다니는 소비적 인간은 예배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 내가 열망하는 모든 것은 예배의 대상이 되며, 우리는 그것을 예배하고 있다." (김동춘, 성공회 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