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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문제
연결하기
우주는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이 하나의 논리로 모두 설명된다. 구조는 연결과 단절을 판정하는 의사결정 단위다. 연결할 것을 연결하고 단절할 것을 단절하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면 된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구조는 연결하거나 단절한다. 그런데 연결이 먼저다. 연결된 것을 단절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연결이든 단절이든 동력이 필요한데 그 동력은 연결에서 조달된다. 단절하여 동력이 끊기면 다시 연결할 수 없다.
연결된 상태에서 단절은 가능하다. 산 사람의 다리를 잘라낼 수 있다. 단절된 상태에서 연결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수술하는 것과 같아서 한 번 단절되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이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딜레마가 있다. 연결이 먼저인데 단절을 먼저 하게 된다. 단절이 더 쉽기 때문이다. 어려운 것은 어려워서 못 하고 쉬운 것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초반에 반짝 성적을 내지만 그것은 눈속임이다. 그 작업은 완결되지 않는다.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다. 어려운 것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쉬운 것은 초반에 잘 나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엎어진다. 이 문제의 정답은 어려운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1.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2. 연결을 먼저 하고 단절을 나중 한다.
3. 연결을 먼저 하려니 역부족으로 실패한다.
4. 단절을 먼저 하면 구조모순에 의해 결국 실패한다.
5. 최소한의 연결을 시도하고 실패의 경험에서 배워 재도전한다.
인간이 처음 시도하는 일은 대부분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친다. 집을 짓는다면 자재 조달은 쉽고 건축은 어렵다. 쉬운 자재 조달을 먼저 하고 본격적인 건축은 뒤로 미루자. 이건 눈가림이다. 정답은 먼저 작게 한 번 지어보고 문제점을 알아낸 다음 그 집을 부수고 다시 크게 늘려서 짓는 것이다. 초가집을 지어보고 때려 부순 후 기와집을 짓는다. 그 기와집을 부수고 다시 돌집을 짓는다.
처음부터 잘 가는 사람은 남이 닦아놓은 길을 가는 것이다. 시행착오 없이 되는 일이 없다. 인간들은 처음부터 무리하게 돌집을 짓겠다고 큰소리치다가 좌절하거나 아니면 자재만 모아놓고 집이 곧 완성된다고 거짓말한다. 정의당은 어려운 것에 도전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국힘당은 쉬운 것만 골라서 하는데 그게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올리는 일이다.
연결의 딜레마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연결은 언제나 외부의 도움에 의지한다. 단절이 내가 가진 진짜 권력이다. 그런데 이미 단절한 것과 또다시 단절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전에 최대한 연결해 두어야 한다. 내 권력은 신중하게 한 번만 사용해야 한다.
아기새는 첫 비행에 날아야 한다. 자전거를 배우든 수영을 배우든 처음부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친다. 자전거는 균형을 잡은 다음 전진하는 게 아니라 페달을 밟아 전진해야 균형이 잡힌다. 수영은 물에 뜬 다음에 전진하는 게 아니라 전진해야 물에 뜬다.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부분이 숙달된 다음 전체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움직여야 부분이 따라온다.
연결은 어렵고 단절은 쉽다. 가장 어려운 전체의 연결을 먼저 성공시켜야 한다. 방법은 난도를 낮추는 것이다. 자전거 초보는 안장을 낮추어 발이 땅에 닿게 해야 한다. 익숙해진 다음 높이를 조절하면 된다. 수영을 배우려면 처음부터 잠수해야 한다. 물속에 풍덩 빠져야 한다. 단 얕은 물에서 해야 한다. 안전을 확보한 다음 처음부터 어려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
연결도 문제가 있고 단절도 문제가 있다. 연결의 약점은 리스크도 함께 연결된다는 점이다. 내가 99를 연결해도 마지막 하나가 발목을 잡으면 실패하게 된다. 연결하면 연결할수록 발목 잡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난다. 아마추어 진보가 실패하는 이유다. 제대로 해보려고 했다가 제대로 발목을 잡힌다.
회로는 전부 연결되어야 한다. 한 곳이 끊어져도 시스템은 작동을 중지한다. 그러므로 연결은 원래 어렵다. 방법은 목표를 높이 잡고 크게 연결하는 것이다. 그냥 2층을 쌓으려고 하면 실패하지만, 큰 맘 먹고 3층에 도전하다가 2층에 주저앉는 일은 흔하다. 대통령 되려다가 장관 되고, 도지사 되려다가 군수 되는 격이다. 천하대란이 일어나면 마지막 한 명이 협력한다. 상부구조의 개입이다. 상부구조는 단순하므로 방해자가 없다. 윗선은 책임자가 한 명뿐이므로 방해자가 없다.
단절은 쉽다. 발목 잡는 방해자 한 명을 미리 제거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아진다. 단절을 계속하면 결국 자기 팔과 다리를 자르게 된다. 국힘당은 북한을 자르고, 호남을 자르고, 여성을 잘랐다. 다음은 20대 남성을 자른다. 단절로 일시적 성공은 가능하지만 점점 체급이 낮아져서 외부에서 센 놈이 오면 한 방에 넘어간다.
언제나 협력자가 방해자다. 방해자의 제거는 미래의 자기편을 자르는 것이다. 팔다리를 잃고 체급이 낮아져서 주도권을 뺏기고 점차 수동적으로 된다. 단절로 남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빼먹을 수는 있어도 제 손으로 밥상을 차릴 수는 없다. 결국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으면 한 방향으로 계속 떠밀려 간다. 진실은 계속 연결해야 살고 거짓은 계속 단절해야 산다. 창조론과 어긋나는 과학적 성과가 나오면 종교인은 어떻게 할까? 과학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다. 성경에 허점이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 허점은 내가 메워주마.’ 하고 덤비는 신천지 부류 사이비들로 난리가 난다. 신도가 성직자 머리꼭지 위로 기어오른다. 결국 단절하게 된다. 신도는 신도의 위치를 지키게 하고 목사는 목사의 위치를 지키게 된다. 하나를 단절하려고 하다가 모든 것을 단절하게 된다. 그 방향으로 쭉 미끄러진다. 종교는 첫 단추를 잘못 채웠기 때문에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진실도 마찬가지다. 99가 옳아도 나머지 1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다. 발목 잡는 사람을 제압하려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거짓과 싸워야 한다. 세상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한다.
연결하는 사람은 더 크게 윗선과 연결해야 살고 단절하는 사람은 더 많이 단절해야 산다. 양극화된다. 부자는 더 많이 연결해서 더 부자가 되고 빈자는 더 많이 단절해서 더 힘들어진다. 범죄단은 재물을 훔친 다음 자기편을 하나씩 자른다. 동료를 다 자르고 마지막 한 명이 수익을 독차지한다. 동료와 나눠 먹으면 그 돈을 들고 술집에 가는 자 때문에 결국 경찰에 꼬리를 잡힌다.
연결이든 단절이든 상황에 맞게 판단해야 하지만 큰 틀에서는 연결이 우선이다. 단절은 더 큰 연결로 가는 여정에서 방해자의 단절이라야 한다. 연결의 타이밍을 맞추는 단절이라야 한다. 끝까지 가면 연결이 이긴다. 단절 지향의 닫힌 사고를 버리고 연결 지향의 열린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
단절하는 사람은 더 이상 단절할 것이 없을 때 죽고 연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연결할 것이 없을 때 이긴다. 문명이 진보하므로 결국은 연결이 이긴다.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미디어와 생산력의 혁신이 외부에서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외부의 혁신과 연결하는 사람이 이긴다. 단절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호남이라는 이유로 단절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좋은 것이 와도 그것을 받을 손발이 없다. 결국 말라 죽는다.
사유의 빌드업
연결해야 산다. 그런데 연결하기 어렵다. 기둥에 묶으려고 해도 기둥이 없다. 바다에 떠다니는 빈 보트와 같다. 연결하려면 대지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튼튼한 기둥을 세워야 한다. 빌드업 축구와 같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게임을 풀어가야 한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거짓이 더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나쁜 짓이 더 비용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이건 심리학 이전에 물리학이다. 인간에게는 숨은 의도나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있는 것이다.
줄을 자르기는 쉽고 잇기는 어렵다. 흩어지기는 쉽고 모이기는 어렵다. 사람은 그저 움직이기 쉬운 쪽으로 움직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짓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못 하니 나쁜 일을 한다.
비트코인은 정보를 공유하여 진실이 이기는 구조를 만들었다. 모두 연결해 놓으면 진실이 이기고 거짓이 진다. 비트코인도 시스템의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적어도 끝까지 가면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증명한다.
진실은 하나도 틀리지 말아야 하므로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 거짓은 포장지만 그럴듯하면 된다. 만화를 그려도 사실적인 그림체로 가자면 진입장벽이 높다. 소설을 써도 리얼리즘으로 가자면 사전 조사를 많이 해야 한다. 진실은 빌드업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사건의 방향성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에너지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성질 때문이다. 인간은 첫걸음을 잘못 뗀다. 인생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진입장벽을 피하여 쉬운 방향을 선택한다.
몽골인은 나무를 닥치는 대로 뽑아버린다. 몽골인의 뛰어난 시력으로 항상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데 나무가 시야를 가리면 말 도둑이 숨어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숲의 민족은 나무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초원의 유목민이 침략해오면 숨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들은 궁궐에 많은 방을 만들어 자신이 어느 방에서 자는지 모르게 했다. 루이 14세는 귀족을 베르사유로 불러 모아 자신의 사생활을 모두 공개했다. 루이 14세가 연결로 먹는 공격수 포지션이라면 중국 황제는 단절로 먹는 수비수 포지션이다.
로마인은 도로가 없으면 불안하고 게르만족은 도로가 보이면 불안하다. 로마인은 도로가 있어야 군단병을 불러와서 공격할 수 있고, 게르만족은 도로가 없어야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방어할 수 있다. 공격수냐, 수비수냐 포지션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인간은 사회를 향해 첫걸음을 떼며 방향을 정한다. 연결 지향이냐, 단절 지향이냐. 거기서 정한 포지션을 바꾸지 못한다. 몽골과 로마와 루이 14세는 공격수의 연결 지향을 선택했고, 숲의 민족과 게르만족과 중국 황제는 수비수의 단절 지향을 선택했다.
역사는 항해술과 말을 이용하여 이동기술을 발전시킨 연결 지향의 개방주의 세력이 산악과 성곽에 숨은 단절 지향의 고립주의 세력을 이겨온 역사다. 때로는 단절도 필요하지만, 연결이 먼저다. 회복되지 않는 남북관계처럼 한 번 단절하면 영원히 단절된다.
사유의 빌드업이 필요하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서 모두 연결해야 한다. 가운데 큰 기둥을 세워야 한다. 애초에 연결지향, 개방주의, 열린 사고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인생 전체의 포지션을 바꾸어야 한다. 이왕이면 수비수보다 공격수를 맡아야 한다.
수동보다 능동, 변칙보다 원칙, 꼼수보다 정공법, 실용보다 합리, 이원론보다 일원론, 개인기보다 팀플레이, 부분보다 전체, 단기전보다 장기전, 국지전보다 전면전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바꾸어야 한다.
사유의 리얼리즘
리얼리즘은 연결하고 판타지는 단절한다. 일본 망가는 이세계물이 판을 치고 미국 만화시장은 히어로물만 남아 있다. 도처에서 리얼리즘이 깨지고 있다. 연결된 현실의 세계와 단절된 상상의 세계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없앤다면 인간의 사유는 협량해지고 사회는 왜소해져서 본래의 풍성함을 잃는다.
리얼리즘은 쉽지 않다. 심리묘사를 해야 한다. 사건만 나열하는 외부 관찰자 시선을 버리고 주인공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기초부터 꼼꼼하게 빌드업해야 한다. 영화 식스센스가 마지막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사전에 복선을 스무 가지는 깔아야 하듯이 말이다. 느닷없는 반전은 느낌이 살지 않는다.
전통 소설은 천일야화처럼 독자와 작가 사이에 밀당이 있다. 이야기가 느슨해지면 셰에라자드는 죽는다. 리얼리즘은 밑바닥부터 빌드업하므로 건축 자체의 결을 따른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긴장이 없는 대신 1층과 2층 사이에 긴장이 있다. 애초에 관객을 작품에 집중하게 하는 긴장감의 조달방식이 다르다.
음악과 미술과 건축과 문학과 패션을 관통하는 것은 인간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인간을 흥분시키고 깜짝 놀라게 하여 강한 인상을 준다. 좋은 작품의 특징은 그 긴장이 객체 내부의 질서에서 조달되는 것이다. 반면 졸작은 작가의 자기소개가 된다. 예컨대 그림이 좋으면 '이 화가는 기술이 좋구먼.' 이렇게 된다.
작가의 기량에 주목하게 되면 망한 거다. 밥 로스는 기술이 좋지만 그게 장기자랑 하는 거다. 개념미술은 제작을 공장에 맡기므로 작가의 기량이 아예 없는데 말이다. 삼국지라면 나관중에는 관심이 없고 '유비가 낫냐, 조조가 낫냐.' 이걸로 논쟁하기 마련이다. 객체 내부에 독자의 긴장을 조달하는 장치가 있다.
각종 음모론부터 괴력난신에 외계인, 초능력, 사차원, 텔레파시, 초고대 문명설, 환빠, UFO, 사이비는 그게 일종의 천일야화다. 매일 새로운 거짓말을 하나씩 투입한다. 셰에라자드가 살려면 1,001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작품 내부의 긴장이 유지되지 않으므로 김성모 만화처럼 계속 새로운 인물을 투입한다.
빌드업이 있는 사실주의 문학은 초반에 느슨하게 시작하지만, 한 방향으로 계속 조여가는 맛이 있다. 작가가 짓고 있는 건물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독자의 긴장이 고조된다. 초반에 배치해 둔 떡밥과 설정이 뒤로 갈수록 힘을 발휘한다. 인간이 사유도 마찬가지다. 사유의 기초공사라 할 빌드업 과정이 보여야 한다.
맥락 없이 던져지는 생각은 가짜다. 괴력난신, 음모론. 초능력, 사차원, 외계인, UFO, 사이비 종교의 공통점은 사람을 겁준다는 점이다. 왜? 독자를 긴장시키기 위해서다. 주목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빌드업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겁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거짓말이다.
조선시대에 누가 5층짜리 건물을 지어놓았다면 다들 지나가며 한 번씩 쳐다볼 것이다. 겁을 주지 않고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다들 쳐다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작품 내부에 숨은 질서를 쳐다봐야 한다. 김어준 얼굴을 쳐다보지 말고 그가 주도하는 게임의 빌드업 과정을 쳐다봐야 한다.
연결지상주의
옛날에 아프리카에 가서 난로 팔고 에스키모에게 냉장고 판다는 사람이 있었다. 신뢰를 잃으면 망하는 것은 백 퍼센트다. 문제는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더 끔찍하다. 아프리카와 에스키모는 우리와 단절된 다른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잔꾀를 내는 것이다. 사고방식이 비뚤어져 있다. 먹고 튀면 그만이라는 단절 지상주의 사고다.
연결 아니면 단절인데 다들 단절로 달려간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부터 단절의 아이디어다. 두 방향이 있는데 집단 전체가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다. 적은 육지로도 올 수 있고 바다로도 올 수 있는데 다들 육지만 방어하고 있는 위태로움이다. 세상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문명 차원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인류는 단절문명에서 연결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바둑을 두어도 '모르면 일단 잇고 보자.'가 아니라 '모르면 일단 끊고 보자.'로 나오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눈이 둘인데 그중 하나만 사용하니 어리석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집단을 이루면 한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그게 심리적 비용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쪽수에 치여 의사결정하기 편한 쪽으로 의사결정한다. 개인은 인지부조화로 도피하고 집단은 집단사고와 확증편향으로 도피한다. 그리스 때는 국토가 잘게 쪼개져 있어서 자유로운 사고가 있었는데 중세에 와서는 쪽수에 치어 일제히 바보가 되었다. 춘추전국 시절만 해도 식객들은 떠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했는데 진시황 이후 바보가 되었다.
혼자 있을 때는 합리적인 사람이 둘만 모이면 '메뉴는 짜장으로 통일.'하고 다른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리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는 레밍효과와 같고 스프링벅 현상과도 같다. 늑대 무리에 쫓기면서 직진만 고집하는 사슴처럼 인간은 집단의 무의식에 쫓기며 경직된다. 중국처럼 쪽수가 많거나 한국처럼 지리적으로 고립된 변방에서 더하다.
경찰은 되도록 넓고 평평한 곳에서 조목조목 따져보자고 하고, 도둑은 되도록 좁고 복잡한 지형에 숨으려고 한다. 경찰은 잘 드러내는 사람이 승진하고, 도둑은 잘 감추는 사람이 성공한다. 집단의 무의식에 의해 사회 전체가 단절하고 감추고 숨는 방향으로 동조화되면 도둑이 경찰을 이기는 사회가 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실패한 국가들의 공통점이 그렇다.
예로부터 극소수의 강철심장들이 전통의 벽을 허물고 리얼리즘의 신세계로 나아가서 세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연결과 연결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세상이 찬란해졌다. 다른 분야는 사실주의가 있는데 생각은 리얼리즘이 없다. 우리는 많은 거짓말 속에 숨는 두더지의 사고를 버리고 모두 연결하여 하나의 통짜 덩어리를 만드는 일원론의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
인간의 실패는 일단 밥부터 먹고 나중에 요리하자는 식이다. 요리와 식사는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부속품들이므로 속일 수 없다. 요리사는 요리만 하고 고객은 먹기만 한다는 식으로 역할을 나누어 서로 단절되면 벌써 헷갈리기 시작한다. 연결되면 못 속이는데 단절되면 속인다. 상부구조로 올라가서 보다 큰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하여 보면 답은 명백해진다.
컴퓨터라도 전기의 연결이 아니면 단절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더 엄밀하게 따지면 우주 안에 오직 연결이 있을 뿐이다. 유는 있고 무는 없다. 무는 유의 변화를 설명하는 말일 뿐 유의 맞은 편에 무가 별도로 존재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연결지상주의에 일원론의 열린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 단 연결하여 끝까지 가야 한다. 가다가 멈추면 단절보다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