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승단 체계 속에서 수계·수학 등 전통 계승
신분 높은 여성이 의지할 남성 없어져 출가한 사례 적지 않아
연산군 10년 이후 후궁들 출가에 부정적이고 견제도 심해져
사자상승 관계 엄연…독자적 영역서 종교적 실천·수행 충실
해주 정씨 집안의 정순왕후 관련 고문서 일부.
(탁효정, ‘15~16세기 정업원의 운영실태’, ‘조선시대사학보’ 82, 2017, 43쪽, 사진 1 참조)
조선시대의 여성 특히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의지할 남성을 잃었을 때 출가의 길이 고려되었던 것은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현재까지 정업원의 주지로서 그 신상이
알려진 인물은 전술했던
고려 공민왕의 후궁 혜화궁주 이씨(1대 주지)와
이방번의 처 심씨(2대 주지) 외에도, 정종의 처형 김씨(1411년 경 재임),
세조 때 문신인 유자환의 처 윤씨(1473년 경 재임),
세종과 혜빈 양씨의 며느리 정씨(1482년 경 재임),
연산군의 후궁 숙의 곽씨(1522년 경 재임) 등이 있다.
선왕의 사후 후궁들이 출가하는 일도 조선 전기에는 일종의 관행처럼 행해졌었다.
세종 4년(1422) 상왕인 태종이 사망하자
그 후궁인 의빈 권씨와 신녕궁주 신씨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일은 세종에게도 보고되지 않은 채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의 출가가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범패에 필요한 기물을 구비하고 아침저녁으로 작법을 하였다[備梵唄之具, 晨夕作法]”고
할 정도로 종교적인 실천 특히 추선의례에 충실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세종실록’ 16권, 4년 5월20일.)
세종의 경우에도 그가 사망한 당일 저녁에 후궁 10여명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며,
조정에서는 불화와 불상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문종실록’ 1권, 즉위년 2월27일).
이후 문종과 세조, 그리고 성종의 후궁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는데
(‘단종실록’ 1권, 즉위년 5월18일 ; ‘연산군일기’ 55권, 10년 9월4일 ; ‘연산군일기’ 56권, 10년 11월13일),
다만 후대로 갈수록 선왕 후궁의 출가에 대하여 야박한 평가와 견제가 심해지는 점이 눈에 뜨인다.
그런 와중에 연산군 10년(1504)의 다음 기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구니[尼僧] 2인을 이미 궐문 밖에 잡아왔으니 당직청에서 고문하라.
이 비구니들은 일찍이 성종의 후궁의 머리를 깎았었다. 선왕의 후궁은 마땅히 몸을 지켜야 할 뿐인데,
어찌 반드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사도(邪道)를 따라야 하는가.…
이 비구니들은 비록 독립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 무리[黨類]가 있을 것이다.…
”(‘연산군일기’ 56권, 10년 11월13일.)
인용문은 이 무렵 후궁의 출가를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된 조정의 인식 변화를 배경으로,
기존 출가 사례에서 조력자가 되었던 특정인의 적발과 처벌을 명한 임금의 전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이 비구니들이 일찍이 성종의 후궁의 출가를 집전했다는 것.
둘째, 그들은 비록 독립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 무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이는 조선 전기의 한국불교에 독자적인 비구니 승단이 존재했음과 그 속에서 비구니들끼리의
사자상승(師資相承) 관계가 엄연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의 원당과 정업원 연구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어온 탁효정 선생이
해주 정씨 가문에서 보관되어 온 단종 비(노산군부인) 정순왕후 송씨의 분재기(分財記) 등을
분석한 논고
(‘15~16세기 정업원의 운영실태’, ‘조선시대사학보’ 82, 2017. 이하 고문서의 인용은 탁효정의 논고를 참조함)에 따르면, 정순왕후는 정업원 주지 이씨라는 이를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였고, 또 다른 정업원 주지 윤씨와는 같은 스승 밑에서 사형사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509년에 씌어진 ‘노산군부인 송씨 허여문기’에 “전에 사형(師兄) 윤씨에게서 전해 얻은 가옥을 철거한 뒤에,
(임금이) 하사한 재목을 가지고 다시 고쳐 조성한 동부 인창방의 가옥과 전지를 함께 전득(傳得)하였다”는
기록은 정순왕후가 윤씨라는 이를 사형으로 두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1489년에 씌어진
‘전 정업원 주지 윤씨 허여문기’에는 “…
사제(師弟) 혜은(慧誾)에게 문서를 만들어주는 일. 사존(師尊) 정업원 주지 이씨께서 사실(師室) 구씨의 기일과
명절 제사를 봉행하도록 동부 인창방에 소재한 가사(家舍)와 채전(菜田) 및 여러 곳에 사둔 전지(田地)를
함께 친급(親給)하셨다”는 기록이 있어, 정순왕후가 사형이라고 했던 윤씨가 이 윤씨와 동일 인물이고,
정순왕후는 혜은이라는 법명으로 불렸으며, 그들이 함께 스승으로 모신 인물이
또 다른 전 정업원 주지 이씨인 것으로 확인된다.
즉 전 정업원 주지 이씨 밑에서 동문수학한 또 다른 정업원 주지 윤씨와 정순왕후 송씨 즉 혜은은
사형과 사제로서, 스승 이씨로부터 동부 인창방 소재의 가옥과 전답을 차례로 상속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재산은 또 이씨의 사실(師室)이라고 명기된 구씨의 기일과 제사를 봉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므로 윤씨와 송씨의 스승인 이씨는 구씨의 제자였음이 추가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이들은 구씨에서 이씨로, 다시 그 아래에 윤씨와 송씨로 이어지는 사자상승 관계의 문중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재산 상속의 권리가 인정되어 비구니 승단의 재정도 이를 통해
승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씨로부터 비롯된 이 문중은 3대를 거쳐 오는 동안 2명의 정업원 주지를 배출할 정도였으므로,
아마도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을 조선 전기 비구니 승단이 모두 이들에게 귀속되어 있거나
적어도 전체 비구니 승단에서 매우 핵심적인 그룹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첨언하자면 정순왕후 송씨의 사형인 윤씨는 이 글의 도입에서 소개한 역대 정업원 주지 중
유자환의 처 윤씨일 가능성이 높다. 유자환의 처 윤씨가 정업원 주지 직을 재임한 시기가
성종 4년(1473)경임을 감안할 때, 정순왕후 송씨와 동년배의 인물이면서 ‘전 정업원 주지 윤씨
허여문기’가 씌어진 1489년에 ‘전 정업원 주지’라고 불리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계와 재정에서 독자적인 영역과 권한을 지녔던 조선 전기의 비구니 승단이 적어도
왕실과 사족 출신 여성들의 출가에서 주된 역할을 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왕실 후궁들의 출가는 얼핏 형식적이고 관행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이들을 포함한 조선 전기 비구니 승단은 종교적 실천과 수행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종교의 조직에 있어서도 승단이라는 갖추어진 체계 속에서 수계(受戒)의 전통과
수학(受學)의 본분을 받들어갔던 것이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