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프다. 제주 4.3 그 슬픈 역사.
“...1946년 여름/28살에 맥아더사령부의 낙하산으로 서울에 들어와/해방 이후 남한의 모든 군사정책을 기획하고 결정한 그는/.../광복군을 배척하고 친일파 장교들만 발탁해/군사요직에 앉힌 그는/.../제주도의 빨갱이들을 모조리 유태인처럼/가스실로 처넣어야 한다고 이를 갈았던 그는/.../사형 직전의 박정희를 구해 먼 훗날/4.19혁명의 꽃을 꺾고 5.16구테타를 모의한 그는/한국전쟁 때 민간인 800여 명이 사망한/한강대교 폭파의 주범인 그는/.../전두환, 노태우의 뒷배이자 80년 광주학살을 조종하고/1981년 유유히 떠난 그는/한국현대사의 모든 암살과 학살의 기획자이자/‘한국 민주주의의 킬러’인 그는/한국의 모든 진보적 민주세력이 30여 년 동안/끝내 이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 그는/바로 미군장교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였다.”
이산하 시집 <한라산> 중 ‘수색에서 지다’에서 발췌 요약.
아무리 오랜 세월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금기의 역사라 해도, 몰라도 어찌 이리도 몰랐단 말인가. 한둘도 아니고 제주도사람 십 분지 일인 3만 명이 빨갱이로 몰려 7년 동안 섬 전체를 피로 물들인 빨간 섬 이야기. 그토록 끔찍하고 잔인한 역사를 모르고 관광지로 알았으니 어찌 한나라의 백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무엇 때문에 이 비극의 참상을 철저하게 입막음하고 지금까지 역사의 뒤로 숨겨왔다는 말인가.
“광복군을 배척하고 친일파 장교들만 발탁해/군사요직에 앉힌 그는/”
역사의 실타래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해방과 더불어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정읍 발언과 김구의 단독선거반대의 세력이 맞서다가 김구의 선거불참으로 급기야 한반도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이때 세력을 잡은 친일파는 경찰공무원 역시 친일파 출신이 80% 달했다. 일제 강점기에 앞잡이가 되어 양민을 억압하고 그토록 악랄했던 그들이 죽는 줄만 알았다가 다시 살아나고 권력까지 잡았으니 세상은 요지경이 된 것이다.
1947년 3월 1일. 마침내 제주도에 최초의 경찰발포사건이 벌어진다. 관덕정 앞에서 제 28주년 3.1운동 기념대회 평화가두시위를 벌이던 중, 그 광경을 지키던 기마경찰이 순찰 중 뛰어든 어린아이를 말발굽에 치여 사고가 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자, 이를 보다 못한 도민들이 도망치는 기마경찰에게 돌팔매를 하며 쫓아갔다. 이를 폭동으로 오인한 제주도경찰들이 발포를 해 구경하던 어린아이와 젖먹이 엄마 등을 포함해 6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이에 격분한 도민들의 책임자처벌을 요구하자 경찰은 기관총을 거치하며 발사 직전까지 치달았고, 사태의 위기감을 느낀 제주도 기자들의 중재로 간신히 수습되었지만 피맺힌 광란의 시대를 예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분노를 참지 못한 제주도민 대다수인 95%가 3월 10일 총파업에 돌입하며 이 소식이 중앙정부에 까지 보고되고 당시 중앙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이 제주도에 내려가 도청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제주도민을 싹쓸이하겠다.”
이런 자를 나는 오래전에 즐겨듣던 라디오 방송극 ‘광복 20년’을 통해 세뇌당한 탓인지 여태 애국자로 알고 있었다. 참 한심한일이다. 이어 해방 이후 1947년 좌익세력색출 명목으로 반공우익집단인 북한출신 건달들에게 경찰 완장을 달아주어 만든 서북청년단과 친일파 응원경찰들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제주도민 2천 5백 명 검거와 갖은 고문의 만행을 저지르게 하고 살해하며 탄압한다.
이로 인해 운명의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어둠 속에 봉화가 타오르며 제주 4.3사건이 발생한다. 무장봉기를 한 이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통일정부수립을 내세우며 경찰과 맞선다. 급기야 전쟁발발 위기에 처한 정부는 조선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에게 제주진압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경찰과 주민들 사이에 마찰로 벌어진 사건에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평화적 해결을 제시한다. 이윽고 그의 노력으로 인해 좌익무장단체 총책 김달삼과 극적인 평화협상 합의를 이룬다. 헌데 5월1일 우익청년들에 의해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하여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이름하여 ‘제주읍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황당한 것은 이때 하늘엔 미군군용기가 항공촬영을 하고 있었다는데, 지금까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방화사건의 배후로 의심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군이 대토벌작전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고, 그곳을 찾은 미군정의 딘 장군은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모는 조병옥의 편에 서서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한다.
이어서 1948년 5월10일 최초 국회의원선거실시 당일 제주도에서는 사회주의세력에 의해 선거당일 두 군데 투표소 방화사건이 난다. 이로 인해 제주도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히며 비극은 더 깊어만 간다.
그 길로 미군정의 시대는 끝나고 이승만의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대적인 군대동원토벌작전에 본격 돌입한다. 이를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에 명령하자 동족을 살상할 수 없다며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수립반대와 미군철수 등을 주장하며 여수, 순천을 점령하며 항거한다. 일명 ‘여순 사건’이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선포하고 경찰과 서북청년단, 9연대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산악지대 무허가통행을 금지하고,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한다. 이는 무장대의 가담과 보급로 차단을 위한 조치이며 그에 따라 집단이주 명령을 내리고 마을까지 불태운다.
이러한 초토화 작전을 하는 동안 4.3 희생자의 7~80%가 무차별 학살당한 것이다. 더불어 그해 11월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 계엄령 불법논란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학살된 주민들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이승만 독재정권은 4.19혁명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던 대한민국의 운명은 또한번 질곡의 역사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5.16 군사쿠데타. 박정희는 반공과 친미를 외치며 군부정권을 잡는다. 이후 미국이 깊이 연루된 제주 4.3사건은 금기의 역사가 되고 모든 이들의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비밀이 된다.
그 암흑의 시대에 처음으로 제주4.3 양민학살의 비밀을 밝힌 이가 있었으니 1978년 발표된 소설가 현기영의 중편<순이삼촌>이다. 그 즉시 그는 용공분자로 몰려 갖은 고문을 당한다. 이후 이 글 상단에 실린 ‘수색에서 지다’의 이산하 시인 역시 4.3항쟁을 담은 시집 <한라산>으로 인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의 필화사건은 아직도 유죄로 남아 있어 재심청구를 생각하고 있다한다.
이 암울한 시대는 김영삼 정권 때까지 침묵하다가 마침내 김대중 정부에 들어 ‘4.3 제주특별법’이 통과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직접 사과하며 세상에 공표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왜 제주 4.3은 그토록 역사의 뒤로 숨은 채 70여 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명명된 이름조차 없이 신음하고 있었는지. 결정적인 원인은 친미를 외치며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 기인한다. 그로인해 마땅히 밝혀졌어야 할 제주 4,3의 진실이 그대로 묻혀버렸다. 또한 이산하 시인이 밝혔듯이 ‘제주 4.3학살의 종착지는 미국이다’. 그의 말처럼 미국은 세계 모든 악의 씨앗임에도 아직 까지 국제법상 단 한번도 전범재판을 받는 적이 없다. 그들이 이처럼 여전히 군림하고 있기에 그들이 저지른 제주 4.3은 역사 속에 묻히고 현대사의 아픔으로 남아 오래도록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네 역사의 수레바퀴는 참 딱하고 어이없게도 굴러왔다. 제주 4.3을 묻어버린 박정희는 지방색을 조장해 영호남을 갈라놓더니, 그의 딸인 박근혜는 태극기와 촛불로 우리나라를 갈라놓고 지금 법의 심판 앞에 서 있다.
어쨌거나 잘못된 역사나 비극의 역사는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고 한다. 이유야 어떠하든 제주 4.3에 대해 멍청할 정도로 무지했던 내 자신이 참 많이 부끄러웠다. 그래서인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새기듯 자료를 찾아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