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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계종(羅繼從) 연보
나계종(羅繼從, 1339년 충숙왕 복위 8년 3월 9일~1415년 태종 15년 1월 9일; 향년 77세)
고려 시대 후기 절신(節臣)
성균관순유박사·예문관제학·제 전리판서 역임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성리학자
고려 시대의 충신(삼은각 추배 6인)
고려 시대의 시인(한시 86수)
영원한 이별(永訣)의 시인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관혼상제(冠婚喪祭) 관례(冠禮)를 대표하는 인물
금성(錦城) 나(羅) 씨 15세손 죽헌공파(竹軒公派) 중시조
나직(羅織)·김의서(金義緖) 사사
동료 정몽주(鄭夢周)‧후배 길재(吉再) 등과 교유
최초의 부여 회고시 작가 이곡(李穀)의 사위
본관 금성(錦城), 금성 나(羅) 씨
본명(초명, 아명) 나태석(羅台錫)
관례명 나계도(羅啓道)
자 술선(述先), 술현(述賢)
초호(初號) 송은(松隱), 호 죽헌(竹軒)
8대조 금성 나 씨 4세손 금성부원군 나수겸(羅守謙)
6대조 금성 나 씨 6세손 의종조 도첨의 금성부원군 나국영(羅國英)
5대조 금성 나 씨 7세손 한림학사 문절공 나인송(羅仁松)
고조부 충열왕조 영도첨의 금성부원군 나순(羅珣, 공양왕 사후 원주에서 서거)
백조부 감찰어사 나조(羅組)
백조모 정박(鄭博)의 여식
조부 충혜왕조 전법사 봉직랑 나개(羅凱)
조모 창녕(昌寧) 조(趙) 씨
부 봉선대부 선공부령·증 밀직부사 사재(思齋) 나직(羅織)
모 안동 김 씨 김재택(金在澤)의 여식 증 함안군대부인(贈咸安郡大夫人)
처 한산 이 씨 고려 시대 학자 이곡(李穀)의 셋째 여식
자녀 4남 1녀
1자 나백훈(羅伯勳, 1363년~1420년; 고향 송천 거주), 처 서춘길(徐春吉)의 여식
2자 나숙훈(羅叔勳, 1367년~1391년; 요절), 처 이종형(李宗馨)의 여식, 자 나우필(羅禹弼)
3자 나중훈(羅仲勳, 1371년~1440년), 처 조익주(曺翊周)의 여식
4자 나계훈(羅季勳, 1376년~몰 연도 미상; 나주 자산 거주), 처 안사검(安思儉)의
여식
1녀 나감(羅瑊)
1339년 충숙왕(忠肅王) 복위 8년 기묘(己卯)년 3월 9일 1세 경기도 고봉현(高峯縣) 송천동(松川洞) 출생(구 경기 고양 송천동, 현 서울시 강북구 송천동). 등에 6개의 점이 있고, 별과 같은 모습(台星)이라고 해서 초명을 태석(台錫)이라고 명명
1340년 충혜왕(忠惠王) 원년 경진(庚辰)년 6년 2세
1341년 신사(辛巳)년 원년 3세 1월 전염병이 돌자, 당시 소년이던 동악산인(東嶽山人)이 단약(丹藥) 3일 복용치를 주었다.
1342년 임오(壬午)년 2년 4세 아직 말을 못함; 미래의 장인이 될 찬성(贊成) 문효공(文孝公) 한주(韓州) 이(李) 씨 이곡(李穀)이 부친 사재를 방문해 매화나무 묘목 몇 그루를 얻어감.
1343년 계미(癸未)년 3년 5세 붓글씨 큰 글자 「정직」(正直)을 썼다.
1344년 갑신(甲申)년 4년 6세 말을 하기 시작. 『소학』(小學) 편 내규 암송
1345년 충목왕(忠穆王) 원년 을유(乙酉)년 5년 7세 부친 증 밀직부사‧선대부선공부령 사재(思齋) 나직(羅織)이 『소학』의 천자(千字)를 가르침.
1346년 병술(丙戌)년 6년 8세 봄부터 『소학』에 입문해 겨울에 학습 완료
1347년 정해(丁亥)년 7년 9세 부친 사재의 지시로 『소학』 복습; 9세작 오언 절구 한시 「영반석」(詠磐石) 작시; 시중 이능간(李凌幹)이 금성군(錦城君) 집안의 또 다른 명현(名賢)이 탄생했다고 탄복
1348년 무자(戊子)년 8년 10세 『논어』(論語)와 『사기』(史記)를 독서하며 효제(孝悌)와 예의(禮義) 학습
1349년 충정왕(忠定王) 1년 기축(己丑)년 9년 11세 부친 나직이 송악(松嶽) 송하동(松下洞)에 정사(精舍)를 짓고, 처사(處士) 김의서(金義緖)를 초빙해서 아들 나계종의 학업을 도왔으며, 승려 호연(浩然)이 백 년 후 송천동에 마땅히 명망 있는 선비가 수학하고 있을 터 귀한 과실이란 귀공자의 평론이라고 예언했다.
1350년 충정왕 2년 경인(庚寅)년 10년 12세 정사에서 과제 학습; 처사 김의서 상주(常駐)
1351년 충정왕 3년 신묘(辛卯)년 11년 13세 정사에서 과제 학습
1352년 공민왕(恭愍王) 1년 임진(壬辰)년 12년 14세 정사에서 과제 학습
1353년 공민왕 2년 계사(癸巳)년 13년 15세 나계종의 명성을 듣고 공민왕(恭愍王)이 사서 육경(四書六經) 전질 하사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년 14년 16세 봄 관례(冠禮)를 치르며 이름 계도(啓道), 자(字) 술현(述賢) 명명; 사재가 관료와 귀빈들을 불러 세 차례 관례 축하 행사를 치름; 정사에서 과제 학습
1355년 공민왕 4년 을미(乙未)년 15년 17세 봄 한주(韓州) 이(李) 씨 고(故) 찬성(贊成) 이곡(李穀)의 셋째 딸과 혼례
1356년 공민왕 5년 병신(丙申)년 16년 18세 정사에서 성리학 연구
1357년 공민왕 6년 정유(丁酉)년 17년 19세 정사에서 과제 학습; 여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중감시 과거 시험 보러 가는 길에 나계종의 집에 와서 수개월 함께 거주하며, 하늘과 인간은 하나의 이치(天人一理)이고, 하나의 이치가 만 가지로 나뉘며(理一分萬之妙),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에 이른다(縷縷至數百言)고 주장했다.
1358년 공민왕 7년 무술(戊戌)년 18년 20세 정사에서 과제 학습; 처사 김의서가 노환으로 귀향
1359년 공민왕 8년 기해(己亥)년 19년 21세 정사에서 학문 연구; 부친 사재가 과거 시험 준비를 지시함에 따라 육경의 의(義)와 사서의 의(疑)를 시문으로 해석 및 설명하고, 시(詩), 부(賦), 송(頌), 책(策) 등 수백여 편 작성; 진사 최수강(崔壽崗)이 나계종에게는 과거 시험의 시문이 있고 이치로 수사를 압도한다고 높이 찬사
1360년 공민왕 9년 경자(庚子)년 20년 22세 정사에서 학문 연구; 국자감(國子監)에서 수학하고, 9월 고려 사마 중시 국자감시 진사시 장원(제9인, 어사대부 이교(李嶠) 주관)
1361년 신축(辛丑)년 21년 23세 겨울 조정에 가는 길에 안화문(安和門) 밖에서 청백리 전 어사 김응상(金應商)이 처자의 7일상을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삼베와 무명 각 십 필씩 부의로 보냈다.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이 지나는 길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예를 어떻게 치르느냐는 질문에 나계종이 예를 베풀지 않는다고 답해 이강의 칭찬을 받았다.
1362년 공민왕 11년 임인(壬寅)년 22년 24세 10월 문과 시부(詩賦) 시험 급제(중시 제17인; 우시중 홍언박(洪彦博) 지공거, 지도첨의 유숙(柳淑) 동지공거 주관); 춘추관검열, 수찬 역임
1363년 공민왕 12년 계묘(癸卯)년 23년 25세 봄 설사병을 앓다가 동악산인(東嶽山人)이 와서 단약(丹藥)을 주어 7일간 복용; 11월 장남 백훈(伯勳) 출생
1364년 공민왕 13년 갑진(甲辰)년 24년 26세 1월 부친상을 당해 고봉현(高峯縣) 갈산(葛山)에 안장하고 3년상을 치름.
1365년 공민왕 14년 을사(乙巳)년 25년 27세 임시 움막에서 3년상 시묘살이
1366년 공민왕 15년 병오(丙午)년 26년 28세 봄 3년상 시묘살이를 마치고, 정사에서 학문 연구
1367년 공민왕 16년 정미(丁未)년 27년 29세 2월 보통사랑 선임, 춘추관검열 역임, 8월 징사랑수찬(修撰) 승진, 9월 차남 숙훈(叔勳) 출생
1368년 공민왕 17년 무신(戊申)년 홍무 원년 30세 1월 선덕랑감찰사규정 겸 성균관순유박사를 제수받고 성균관에 머물며 경전 강론, 봉승랑 전보, 전리좌랑 겸 예문관공봉, 「경제책」(經濟策) 16조 제진(製進), 9월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이 신돈(辛旽)에 의해 교살되자 글로 애도
1369년 공민왕 18년 기유(己酉)년 2년 31세 2월 문하우정언, 「천경록」(天警錄)을 제진하고 덕이 제사에 이르는 수양을 청함; 9월 조봉랑 사헌부시사(侍史) 승진, 신돈의 개혁 정치 당시 귀향해서 노모 봉양
1370년 공민왕 19년 경술(庚戌)년 3년 32세 1월 송천동 귀환, 가을에 갈산(葛山) 부친 사재 묘역 수리
1371년 공민왕 20년 신해(辛亥)년 4년 33세 5월 정언 이존오(李存吾) 사망, 9월 새벽에 삼남 중훈(仲勳) 출생, 출생 기념으로 시 3수 작시(「감군은가」(感君恩歌) 9장 등)
1372년 공민왕 21년 임자(壬子)년 5년 34세 봄 나주 선산 묘역을 방문하고 묘각 아래에서 글을 씀.
1373년 공민왕 22년 계축(癸丑)년 6년 35세 봄 집의 내당을 과학(課學), 외당을 수학(修學)이라 분가해서, 수재들을 모아 강학하고 벗들을 모아 학문 연구; 의리(義理)를 39조로 정리; 『송천우견』(松川愚見) 저술
1374년 공민왕 23년 갑인(甲寅)년 7년 36세 2월 정몽주의 경상도 출장으로 공석이 나자, 전리정랑 김의로(金宜輅)의 추천으로 통직랑 문하기거사인 임명, 3월 천봉선대부, 소부사소윤, 7월 중정대부 좌사의대부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임명, 8월 진정순대부 좌상시 예문관제학 제수; 공민왕이 이름 계종(繼從)과 호 죽헌(竹軒)을 하사하고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얼을 계승할 것을 당부; 자 술선(述先)으로 개칭; 10월 공민왕 시해 후, 좌상시 예문관제학을 사퇴하고 송천에서 은거하며 자호(自號) 송은(松隱)을 명명하고, 그 후로 매년 1월 공민왕 현릉(玄陵;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 소재) 참배
1375년 우왕(禑王) 1년 을묘(乙卯)년 8년 37세 2월 송천 학등곡(鶴藤谷)에 소택을 건축하고 시 「학등곡」(鶴藤谷) 작시, 10월 정몽주의 언양(彦陽) 유배를 술로써 전별(餞別), 12월 우왕이 복직을 부름.
1376년 우왕 2년 병진(丙辰)년 9년 38세 송천동 체류, 여름에 전리판서(6부 정3품) 제수, 가을 학등곡 화재, 12월 사남 계훈(季勳) 출생
1377년 우왕 3년 정사(丁巳)년 10년 39세 송천동 서원(西園) 별재(別齋) 건축; 세자가 경서를 왕명으로 하사
1378년 우왕 4년 무오(戊午)년 11년 40세 7월 정몽주가 일본에서 귀국; 시 두루마리를 보고 우왕이 산수를 기록한 맑고 청렴한 시라며 찬사
1379년 우왕 5년 기미(己未)년 12년 41세 송천동 별재 체류, 윤달 5월 설사병
1380년 우왕 6년 경신(庚申)년 13년 42세 봄과 여름에 왜군 오랑캐가 출몰해 농민들이 산골로 달아나자, 송은이 직접 송천동 부근 땅의 농사를 관리; 10월 모친상을 당해 12월 장례를 치르고 부친 사재 묘역에 합장
1381년 우왕 7년 신유(辛酉)년 43세 10월 움막에 머물며 3년상 시묘살이
1382년 우왕 8년 임술(壬戌)년 15년 44세 움막에 머물며 3년상 시묘살이
1383년 우왕 9년 계해(癸亥)년 16년 45세 3년상을 마치고 나주 선산 묘역 참배
1384년 우왕 10년 갑자(甲子)년 17년 46세 7월 밀직우대언 제수, 「진경부」(秦京賦) 작성, 현직을 맡아 의견을 피력
1385년 우왕 11년 을축(乙丑)년 18년 47세
1386년 우왕 12년 병인(丙寅)년 19년 48세 9월 1일 소부판사(종3품) 제수; 길에서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말에서 내렸지만 바른 예도가 아니라고 해서 은율(殷栗)현감 좌천; 「애송경」(哀松京) 작성
1387년 우왕 13년 정묘(丁卯)년 20년 49세 전라도 유생 이성묵(李誠默) 등의 상소로 논쟁 끝에 고향 마을 귀향 허가
1388년 우왕 14년 무진(戊辰)년 21년 50세 송천동 별재 체류
1389년 공양왕(恭讓王) 원년 기사(己巳)년 22년 51세
1390년 공양왕 2년 경오(庚午)년 23년 52세 12월 은율현감 유배 해제, 좌상시 예문관제학(정3품) 복직; 풍을 앓았지만, 공양왕이 벼슬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
1391년 공양왕 3년 신미(辛未)년 24년 53세 1월 풍 때문에 벼슬을 사직하고 송천 귀향; 『야사통회』(野史通會) 20권 완성; 12월 차남 숙훈(叔勳) 사망
1392년 조선 태조 1년 임신(壬申)년 25년 54세 1월 공민왕 현릉에 간 사이에 간당(奸黨)이 무인(武人) 최형도(崔衡道)를 시켜 별재의 서적을 불태웠고, 동서로 4동의 건물이 불타면서 많은 저술 자료 소실; 사관 이견(李蠲)을 시켜 국사에서 관련 내용을 삭제할 것을 송은에게 지시; 4월 정몽주 순절, 예문관제학 사직, 7월 고려 왕조 멸망, 10월 1일 현릉을 방문해 곡을 한 후, 나주 동삼방(東三坊) 석간동(石澗洞)으로 가족을 데리고 낙향해 집 주위에 송죽(松竹)을 심고 호를 죽헌(竹軒)으로 칭하며, 나주를 말년의 거주지로 삼았다. 수백 권의 경전들을 집에 보유했다고 한다.
1393년 태조 2년 계유(癸酉)년 26년 55세 1월 현릉을 방문하고 곡을 하고, 송천동 고향 방문; 조선 태조가 불렀지만, 권근(權瑾)의 출사 권고를 거절; 「과두문동」(過杜門洞), 「술회부」(述懷賦), 「사회부」(瀉懷賦), 「애시부」(哀時賦) 등 저술
1394년 태조 3년 갑술(甲戌)년 27년 56세 1월 자제에 경학 당부, 「구현찬송」(九贒贊頌) 저술, 3월 풍악(楓嶽) 유람
1395년 태조 4년 을해(乙亥)년 28년 57세
1396년 태조 5년 병자(丙子)년 29년 58세 음력 3월 16일 나주 석간동 부근에서 고려 유신 이홍점(李鴻漸), 이대재(李大載), 최행수(崔行修), 함좌은(咸佐隱)과 오로회(五老會) 조직
1397년 태조 6년 정축(丁丑)년 30년 59세 2월 이홍점과 금성산(錦城山)을 등반하며 두견(杜鵑) 소리를 듣고 두견시(杜鵑詩) 작시
1398년 태조 7년 무인(戊寅)년 31년 60세 9월 전 검열 언양(彦陽) 출신 이준(李遵) 방문
1399년 정종 원년 기묘(己卯)년 61세 2월 갈산과 현릉 방문
1400년 정종 2년 경진(庚辰)년 62세 10월 동악산인(東嶽山人) 방문
1401년 태종 1년 신사(辛巳)년 3년 63세 봄 여러 달 병을 앓고 길재(吉再)의 문병을 받아 길재가 한 달여 나계종의 집에 머물며 「봉위죽헌선생」(奉爲竹軒先生) 저술; 길재의 칠언 율시 1수 원운시(「적요춘주엄시경」(寂寥春晝掩柴扃))와 나계종의 사언 절구 화운시(「조세동지」(早歲同志)) 1수를 주고받음.
1402년 태종 2년 임오(壬午)년 4년 64세 8월 보름 진사 김원이(金元履)가 방문해 거문고를 연주하며 자손을 위해 조선에 협력할 것을 설득
1403년 태종 3년 계미(癸未)년 원년 65세 1월 현릉 알현; 말을 타고 천안을 지나는 길에 어느 기생이 「감군은곡」(感君恩曲)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속감은곡」(續感恩曲) 3장(三章)을 지음.
1404년 태종 4년 갑신(甲申)년 2년 66세 2월
1405년 태종 5년 을유(乙酉)년 3년 67세 3월 나주 석간동에 체류하면서 저서 편찬과 서신 왕래 등 호남의 원로로 활동
1406년 태종 6년 병술(丙戌)년 4년 68세 저서 편찬을 다행스런 사업이라고 자평
1407년 태종 7년 정해(丁亥)년 5년 69세 송나라와 우리나라 제현의 오륜실행(五倫實行)을 기록해 책 3권을 저술했고, 덕룡산(德龍山) 스님 청묵(淸默)이 이를 보고 윤리성에 감화를 받고 울며 승직을 포기했으며 이십여 승려 무리들이 같이 환속했다.
1408년 태종 8년 무자(戊子)년 6년 70세 가을 고려 시대 전 정랑 영동 출신 이경안(李景顔)이 누추한 차림으로 방문
1409년 태종 9년 기축(己丑)년 7년 71세 제자 중에 과거 시험에 임했으나 고려인이라며 시험에서 제외되는 사례가 있었다.
1410년 태종 10년 경인(庚寅)년 8년 72세 고려인과 조선인 선비들이 서로 교통하지 않고 절연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고려 5백년의 명족(名族)이라고 자부
1411년 태종 11년 신묘(辛卯)년 9년 73세 명나라 선비가 나주로 표류해 와서 송은을 성리학에 통달한 해동의 제현 유학자라고 칭송
1412년 태종 12년 임진(壬辰)년 10년 74세 7월 7일 부인 이(李) 씨 상, 나주 동북 자산(紫山)에 안장하고 송은이 제문과 긴 만시(挽詩) 등 기록.
1413년 태종 13년 계사(癸巳)년 11년 75세 2월 현릉을 알현하면서 몸이 쇠약해져 글로써 영원한 이별(永訣)을 고하고, 능 아래에서 십여 일 체류하며 칠언 절구 10수 애도사를 지음; 갈산 부친 사재 묘역에서도 작별을 고하고 축문(祝文)을 지었으며 한 달여를 체류하고, 「영회시」(詠懷詩) 오언 율시 50구 작시; 나주 귀향 후 매년 초에 현릉과 갈산을 참배했지만, 이후에는 다시는 방문하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했다.
1414년 태종 14년 갑오(甲午)년 12년 76세 평일에는 아침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책을 펼쳤으며, 늦게까지 불을 켜고 학문을 연구했으며, 밤늦게 취침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상례와 제례를 그치지 않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2월 집안의 책과 토지와 재산을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415년 태종 15년 을미(乙未)년 13년 77세 1월 9일 서거, 3월 나주 자산(紫山) 안장, 좌측 이(李) 부인 묘; 4남 의(義), 숙(肅), 무(茂), 철(哲)을 두었고, 3녀 이재삼(李載三)의 처, 김휴건(金休謇)의 처, 신제(申悌)의 처를 둠; 고려의 후배 충신 야은 길재가 추모사와 행장을 쓰고 장례 진행; 향년 77세
1416년 태종 16년 병신(丙申)년 3월 나주 석간동 초당, 유적지, 고양 송천동 갈산 묘각과 화상(畫像) 등 화재
1418년 태종 18년 무술년 2월 문인 이소인(李小因), 김양익(金良翼)이 문집 초간본 목판본 발행; 고려종사랑 문하주서 길재가 행장과 「죽헌 나선생 기적비문」(竹軒 羅先生 紀績碑文) 저술; 전남 나주 송제리 부근에 소재한 죽헌사(竹軒詞)는 죽헌 나계종을 모시는 사당으로, 주변에 고려예문제학 죽헌 나선생 기적비가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1458년 조선 시대 전기 세조 때 세조가 충남 공주 동학사를 방문하고, 1455년 단종 폐위와 1456년 사육신 참수 사건으로 죽은 280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각 건축
1468년경 조선 시대 전기 세조 때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삼은(三隱)을 모신 사당 삼은각(三隱閣)에 유방택, 도은 이숭인과 함께 송은 나계종 등 6인을 추배하고 제사를 모심.
1650년 효종(孝宗) 원년 8세손 나치학(羅致學)이 처부 이덕수(李德秀)의 도움으로 문집 『죽헌유집』 활자본 중간본 간행
1728년 영조 4년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삼은각 전소
1827년 순조 27년 삼은각 재건
1833년 14세손 나대윤(羅大潤)이 나주목사 박내겸의 발문을 받음.
1834년 14세손 나대윤이 이곡의 외손 이병규의 발문을 받음.
1847년 조선 시대 헌종 13년 14세손 나행윤(羅行潤)이 나주에서 『죽헌유집』 목활자 삼간본 간행(국립중앙도서관, 이화여대중앙도서관 소장)
1868년 조선 시대 고종 5년 사당 봉강사(鳳岡祠)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
1904년 고종 41년 경신년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개칭
1919년 송철헌(宋哲憲)의 서문, 발문, 묘갈명(墓碣銘)을 받음.
1920년 경신년(庚申年) 후손 나상문(羅相文), 나집형(羅潗炯), 나길형(羅佶炯) 등이 『죽헌선생유집』(竹軒先生遺集) 삼간본을 2권 2책 증보 사간본으로 간행(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등 소장); 이승욱(李承旭)의 유사, 후손 나집형·나상문·나길형의 발문, 길재 찬 행장, 나치학·박내겸·이병규·나행윤 찬 중인발, 송철헌 찬 사간본 묘갈명, 나집형·나상문·나길형 찬 사간본 중간발, 이익성의 1649년 중인서 수록; 사간본 2권 2책은 상권에 시(詩), 찬(贊), 서(書)가 수록되었고, 하권에 부록이 수록되었다.
1924년 대한민국(大韓民國) 6년 사당 봉강사 복원; 삼은각을 재건해서 나계종, 이숭인, 유방택의 위패를 추가해 6인 배향
1940년 저술 「가정선생화상찬」(稼亭先生畵像贊)이 처부(妻父) 이곡의 『가정집』(稼亭集) 오간본에 추가 수록
1950년 한국전 때 삼은각 소실
1951년 한국전 당시 사당 봉강사 증축
1960년경 삼은각 중건
1984년 2월 29일 나계종의 제사를 모신 사당인 봉강사(鳳岡祠)가 전남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 5월 17일 나계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삼은각(三隱閣)이 충남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
1993년 3월 죽헌 나계종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2005년 민족문화추진위 간행 영인본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단행본 개인 저자로 나계종의 저서 영인
2022년 12월 5일 『나계종 한시집』(나계종 원작, 나종혁 편역) 발행
배향지
나주 죽헌사 배향
충남 공주 동학사 삼은각 배향
나주 봉강사 배향
나주 문평 경모사(景慕祠) 배향
경기 파주 고려통일대전 배향
저서
『죽헌유집』(竹軒遺集) 2집
「가정선생화상찬」(稼亭先生畵像贊)
『야사통회』(野史通會) 20권(소실)
경력
성균관순유박사 겸임 당시 경전의 강론과 해석에 기여했고, 전리좌랑 재임 당시 경제책(經濟策)을 제진했으며, 원나라 당시 6부 편제 후 정3품 예문관제학과 전리판서 그리고 종3품 소부판사를 제수받았다.
* 시문학(詩文學): 고려 시대 후기 한시 87수를 창작하고, 성리학을 논한 서간 여러 편을 썼으며, 한시 가운데 오언 절구와 칠언 율시에 빼어났다고 한다. 1347년 정해(丁亥)년 7년 9세 때 9세작 오언 절구 한시 「영반석」(詠磐石)을 처음 썼고, 시중 이능간(李凌幹)이 그의 시를 보고 금성군(錦城君) 집안에 또다시 명현(名賢)이 탄생했다고 탄복했다는 일화가 있다. 1401년 태종 1년 신사(辛巳)년 3년 63세 봄 여러 달 병을 앓고 길재(吉再)의 문병을 받아, 길재가 한 달여 나계종의 집에 머물며 「봉위죽헌선생」(奉爲竹軒先生)을 저술하고, 길재의 칠언 율시 1수 원운시(「적요춘주엄시경」(寂寥春晝掩柴扃))와 나계종의 사언 절구 화운시(「조세동지」(早歲同志)) 1수를 서로 주고받았다. 송은 나계종의 모든 결과물은 결국 비평이고 평론이며 논이라고 하더라도, 송은의 “영원한 이별”은 잊혀지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 별과 같은 우리나라 시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사(言辭)임도 사실이다.
* 관례와 혼례: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년 14년 16세에 봄에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이름을 계도(啓道), 자(字)를 술현(述賢)이라고 명명했다. 부친 사재 나직(羅織)이 고려의 관료들과 귀빈들을 한 데 모아 세 차례나 관례 축하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다음 해인 1355년에는 공민왕 4년 을미(乙未)년 15년 17세 때 봄에 한주(韓州) 이(李) 씨 찬성(贊成) 이곡(李穀)의 셋째 딸과 혼례를 치르기도 했다.
* 성리학자의 탄생: 송은 나계종은 고려 시대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이다. 1343년 5세에 붓으로 큰 글씨를 썼으며, 1344년 6세에 『소학』(小學) 편 내규를 암송했고, 관례 5~6장에도 매우 숙달했다. 1345년 7세에 부친 사재 나직이 『소학』에서 천자를 모아 가르쳤고, 1346년 8세에 봄에 『소학』에 입문해서 겨울에 완성했다. 1347년 9세에 『소학』을 복습했으며, 효제(孝悌)와 예의(禮義)를 유학의 이상으로 학문에 입문했다. 어려서는 학문 입문을 위한 과제를 학습했고, 성장해서는 성리학을 학문으로 닦고 연구했다. 9세작 한시 「영반석」(詠磐石)을 포함한 여러 편의 길고 짧은 시들을 지었다. 1348년 10세에 『논어』(論語)와 『사기』(史記)를 읽었고, 승려 호연(浩然)은 백 년 후 송천동에 명망 있는 선비가 귀공자다운 평론을 쓸 것이라고 예언했다. 문학(文學)으로 흥했던 처사(處士) 김의서(金義緖)를 우대해서 집안의 상주 선생으로 삼았고, 1358년 그가 늙어 노환이 들어서야 귀향했다. 1353년 15세에 공민왕이 나계종의 빼어남에 대해 소문을 듣고 사서 육경(四書六經) 각 한 질을 하사했다. 1356년 18세에 성리학에 몰두해 연구했으며, 1357년 동료 포은 정몽주가 그의 집에 방문에 3개월여 머물며 천인(天人)이 하나의 이치임을 논했다. 1359년 부친 사재가 본격 과거 시험을 준비토록 지시했으며, 육경의 의(義)와 사서의 의(疑)를 시문을 해석 및 설명하고, 시와 부와 송과 책을 수백 편 지었다. 진사 최수강(崔壽崗)이 나계종은 시문(詩文)이 있으며, 이치가 수사를 압도한다고 높이 칭찬했다. 1360년 과제를 학습하고, 학문을 연구해서, 국자감에서 수학한 후, 국자감시에서 제9인으로 과거 급제했다. 1362년 시부 시험에서 중시 제17인으로 과거 급제했다. 1364년 부친 사재 나직의 3년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했다. 1367년 2월 보통사랑에 선임되고 춘추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368년 성균관순유박사로 성균관에서 경전을 강론했고, 많은 책들을 주해, 주석했다. 전리좌랑 예문관공봉으로 「경제책」(經濟策) 16조를 제진했고,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완전한 지식에 이른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정치와 경제의 통치 원리로 삼았다. 1369년 문하우정언에 임명되어 「천경록」(天警錄)을 제진하고 덕이 제사에 이르도록 수양을 청했다. 1371년 셋째 아들 중훈(仲勳)이 태어난 해에는 「감군은가」(感君恩歌) 9장을 지었다. 1372년 나주 선산 묘역을 방문해 참배했으며, 1373년에는 송천동 집을 내외당으로 분가해서 내당에는 수재들을 모아 가르치고 외당에는 벗들을 모아 토론했다. 의리(義理)를 39조로 정리했고, 선비의 지조와 기개를 강조했다. 1374년 정몽주가 출장을 가고 공석에 전리정랑 김의로(金宜輅)가 나계종을 추천했으며, 통직랑 문하기거사인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의 생질이 와서 축하의 말을 전했고, 송은은 영원한 이별에 대해 언급했다. 같은 해 지제교와 예문관제학 정3품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송은의 선조 문절공(文節公)을 이어받아 가문의 유훈을 계승하고 위대한 열조를 따르라고 말하며, 이름 계종(繼從)과 호 죽헌(竹軒)을 하사했다. 1376년 전리판서 6조 정3품에 제수되었고, 1377년 세자가 왕명으로 경전을 하사했다. 1380년 모친상으로 3년상을 치렀고, 1383년 나주 선산 묘역에 가는 길에 금강(錦江)을 지나는 길에서 어부들이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목격하고 더러운 물에서는 고기잡이를 삼갈 것이며, 어린 물고기는 잡지 않는다는 어부의 인(仁)에 대해서 말했고, 어부들이 감동하고 그물을 거두어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1386년 소부판사 정3품에 제수되어, 상을 당한 사람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가 예의가 아니라는 지적으로 은율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음 해 전라도 유생의 상소로 은율 귀양에서 풀려 고양 송천동으로 귀향했다. 1390년 좌상시 예문관제학 정3품에 복직되었고, 1392년 정몽주가 순교하고 7월에 고려 왕조가 멸망했다. 나주 석간동(石澗洞)으로 낙향할 때는 수백 권의 경전을 보유했다. 1401년 후배 관료 야은(野隱) 길재(吉再)가 나주에 방문해 송은과 야은이 칠언 율시 원운시와 사언 절구 화운시를 주고받았다. 1404년 김상현(金相顯)은 송은 나계종을 고려의 명족 관료로 자취를 남겼고 선조의 훈업을 이어받았으며 간당 무리들의 난리에도 가문의 기록과 편찬 사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1406년 송은은 시와 노래가 제아무리 화합하더라도, 지금 이름도 없고 벼슬에 연루되지도 않는 기묘한 일일 뿐이며, 지조와 기개를 펼쳐 나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 명나라의 선비는 송은을 해동의 제현 유학자라고 칭송했다. 송은은 마지막까지 상례와 제례를 지켰고, 젊어서는 선산 묘역에 참배했으며, 늙어서는 사당에 참배하며, 효제와 예의를 중시하는 고려의 대표적인 사대부 선비로 일생을 살았다.
참고로, 예문관제학·전리판서·소부판사 송은 나계종은 부 증 밀직부사‧선대부선공부령 사재(思齋) 나직(羅織)과 모 안동 김 씨 김재택(金在澤)의 여식 증 함안군대부인(贈咸安郡大夫人)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처 한주(韓州) 이 씨 고려의 학자 이곡(李穀)의 셋째 여식과 혼인했다. 어려서는 숙부와 부친 사재 나직으로부터 직접 『천자문』과 『소학』을 학습했으며, 처사(處士) 김의서(金義緖)의 사사를 받았다. 공민왕으로부터 사서 육경을 하사받았으며, 전리정랑 김의로(金宜輅)의 관직 재등용 추천을 받았다. 동료 포은 정몽주로부터 하늘과 인간이 하나의 이치라는 주장을 나누었고, 후배 야은 길재로부터 가야 할 자기 자신의 길에 대한 우려를 들었다. 1404년 김상현(金相顯)으로부터 고려 명족의 훈업(勳業)을 받아 면면히 사대부의 시문과 행적을 기록했다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 고려의 절신(絶信): 6세에 『소학』을 암송하고 장안에 소문이 나자, 15세에 공민왕이 사서 육경 전질을 하사했고, 22세에 국자감시에 장원 급제했다. 춘추관, 사헌부, 예문관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며, 전리판서와 소부판사를 제수받았다. 스스로 송은(松隱)이라고 자호를 짓고 공민왕에 대한 절의를 지켜 삼은각에 배향된 고려 시대의 충신이다. 조선 개국 후에도 조선 태조의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 처부 이곡(李穀): 17세에 최초의 부여 회고시로 알려진 고려 학자 이곡의 셋째 딸과 결혼했으나 처부 이곡은 이미 고인이 된 후였다고 한다. 이곡의 화상찬을 저술해서 자신의 『죽헌유집』과 이곡의 『가정집』에 수록되었다. 1342년 처부 이곡은 나계종의 어린 시절 4세 때 찬성(贊成) 문효공(文孝公) 신분으로 나계종의 집을 방문했었다. 임오(壬午)년 2년 4세 때 나계종은 아직 말을 못했으며, 미래의 장인이 될 찬성(贊成) 문효공(文孝公) 한주(韓州) 이(李) 씨 이곡(李穀)이 겨울에 부친 사재를 방문해 매화나무 묘목 몇 그루를 얻어가면서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355년 공민왕 4년 을미(乙未)년 15년 나계종 나이 17세 때 봄에 한주(韓州) 이(李) 씨 고(故) 찬성(贊成) 이곡(李穀)의 셋째 딸과 혼례를 치렀다.
* 나계종 연보(年譜): 나계종의 연혁과 연보는 야은 길재의 행장(行狀) 그리고 나치학, 박내겸, 이병규, 나행윤 등의 발문에 기재되어 있다. 나계종에 대한 기록은 그의 후배 충신 야은 길재가 추모사, 기적비문, 행장 등을 썼고, 길재의 행장을 기초로 나계종 연보가 작성되었다.
* 간당(奸黨)들의 방화: 저서 『야사』는 고려 말기 당시의 사건을 상세히 기술했으나 나계종의 별당이 간당들의 방화로 불타면서 소실되었고, 나계종 서거 후에도 그 다음 해에 나주와 송천에 동시에 화재가 발생해 집과 묘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야사』의 기록 중 일부 내용을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자, 간당의 반발로 사적 저술이 불태워지고, 다른 사서 기록에서 삭제되는 불운을 겪었다.
* 『죽헌유집』: 저서 『죽헌유집』은 1650년 조선 시대에 간행된 고려 시대 문신 나계종의 시문집으로 한시 85수 등의 시가와 산문이 수록되었으며, 2권 2책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50년 조선 시대 효종 1년 나계종의 후손 나치학(羅致學)과 이덕수(李德秀)가 편집 및 간행했으며, 1847년 조선 시대 헌종 13년 나계종의 후손 나행윤 편 중간본에서 이익성의 서문, 후손 나치학과 후손 나행윤 그리고 박내겸과 이병규의 발문이 수록되었다. 책의 구성은 전 2권의 권1에서 시 85수, 찬 10편, 서(書) 11편이 수록되었고, 권2에서 연보 1편, 묘지 1편, 행장 1편 등이 수록되었다. 여러 시들을 통해서 음양학과 성리학의 주장을 논했다고 하며, 특히 나계종의 서(書) 가운데 「답포은서」(答圃隱書)는 정몽주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인(仁)과 시(詩)에 대해서 논하면서, 시는 자연의 발출로 공자도 취택했으나 권선징악의 의의가 없으면 아무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인은 도(道)의 대강이며 칠정(七情)의 발로로서 사랑(愛)이며 사랑의 으뜸은 효제이고 효제가 인의 근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시들은 연대순으로 배열되었다고 한다. 「답권양촌서」(答權陽村書)에서는 권근(權近)의 조선조 벼슬 권유를 정중히 거절했다고 하며, 「중계백훈등서」(重戒伯勳等書)에서는 1392년 임신년 7월 조선 건국을 기준으로, 이전 출생자와 이후 출생자의 조선 등재를 분리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죽헌유집」, 『민족대백과』 인터넷 참조).
한편, 동일 내용의 다른 제목인 『죽헌선생유집』(竹軒先生遺集)은 나계종 찬 목활자본으로 1920년 경신(庚申)년 2권 1책으로 발행되었으며, 발행지와 발행처는 미상이다. 이 책은 1649년 을축(乙丑)년 이익성(李瀷成) 중인서, 1650년 경인(庚寅)년 자손 나치학 중인발, 1833년 계사(癸巳)년 박내겸(朴內謙) 중인발, 1847년 정미(丁未)년 후손 나행윤(羅行潤) 중인발, 1884년 갑오(甲午)년 이병규(李秉圭) 중인발, 1919년 을미(乙未)년 송철헌(宋哲憲) 중간서, 1920년 경신(庚申)년 14세 손 나집형(羅潗炯) 중간발과 후손 나상문(羅相文) 중간발 그리고 후손 나길형(羅佶炯) 중간발이 추가 수록되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계종의 서(書)는 총 12편이 있으며, 정몽주, 장예(張輗), 이집(李集), 권근, 이대재(李大載), 아들 나백훈 등에게 쓴 편지이다. 『유집』의 부록에는 연보, 묘지(墓誌), 그리고 1418년 길재 찬 행장이 있다. 발문은 1650년 8세손 나치학의 발문, 1833년 박내겸의 발문, 1834년 이병규의 발문, 1847년 14세손 나행윤의 발문이 있다(김진옥, 「한국문집총간 죽헌유집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2006년 참조).
* 「가정선생화상찬」(稼亭先生畵像贊): 저술 「가정선생화상찬」(稼亭先生畵像贊)은 1940년 이곡의 『가정집』(稼亭集) 오간본에서 추가 수록되었으며, 연활자본으로 충남 예산에서 간행된 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정집」, 『민족대백과』 참조). 나계종은 이외에도 여러 화상찬을 썼고, 총 10인의 화상찬이 『죽헌선생유집』에 수록되어 있다. 화상찬은 그림 화상(畵像)에 찬(贊)을 덧붙인 글이다. 『죽헌선생유집』 상의 찬에는 이곡(李穀), 정설재(鄭雪齋), 박위(朴衛), 최홍암(崔弘庵), 선조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 이존오(李存吾), 나공언(羅公彦, 1346년 생~몰 연도 미상), 조송헌(趙松軒), 이퇴암(李退庵), 임회재(林檜齋) 등 총 10인이다.
나성군(羅城君) 저헌 나공언은 나주 나 씨 직장공파 7세손이며, 자는 중현(仲賢)이다. 조부는 사온서직장 나원(羅源)이며, 부는 공조전서 겸 양광도 순무사·자헌대부 나진(羅璡)이다. 나공언(羅公彦, 1346년~몰 연도 미상) 화상찬(畵像讚)은 고려 시대 충렬왕조 대장군 저헌(樗軒) 나공언이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쌓고 왕명으로 신하 정진성(鄭眞誠)이 상(像)을 그렸으며, 자손들이 보기에도 기린각(麒麟閣) 화상보다 낫다고 평했다. 이 그림이 오래되어 단청이 변하고 뒤틀려 나공언의 손자 백안(伯安) 나자강(羅自康)이 새 그림을 그려 족자에 담았고, 나계종(羅繼從)이 화상찬을 썼다. 이재경(李再卿)에 따르면, 저헌 나공언은 어린 시절 중국 추나라와 노나라에 유학했으며, 성절사 최숙(崔璹)을 따라 중국에 갔었다. 진사가 된 후, 충열왕이 병서(兵書)를 권했다고 한다. 영강(永康)현감과 신은(新恩)현감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그를 위해 선정비를 건립했다. 평해(平海)현감 당시에는 주민 중 유생이 20호도 안 되어 학사를 건립하고 6경 4서를 비치했으며 문고를 설치하고 향시를 치러 인재들을 발굴하고 유학을 숭상케 했다고 한다. 토지 측량 문제로 토호들과 갈등을 일으켜 사직하고 금호(錦湖, 나주)로 귀향했다.
고려 시대 우왕(禹王) 7년 왜구가 무등산에 출몰했을 때 오랑캐와 왜구를 물리친 공로로 중현대부 전농시정에 임명되었고 나성군에 봉해졌다. 묘지는 전남 나주 장흥동에 소재하며, 자녀는 첫째 아들 도강감무 나설(羅設), 둘째 아들 식목도감 녹사 나집(羅諿)을 두었다. 손자로는, 나공언의 새 화상을 그린 나집의 아들 무안현감·의주부윤 나자강(羅自康)과 나설의 세 딸 직장 임첨(林襜)의 처, 판관 홍맹신(洪孟信)의 처 등을 두었다.
* 죽헌사(竹軒祠): 죽헌사는 현재 전남 나주시 세지면 송제리 부근에 소재하며, 죽헌 나계종을 모시는 사당으로, 주변에 「고려예문제학 죽헌 나선생 기적비」가 비석으로 세워져 있으며, 고려종사랑 문하주서 길재가 「죽헌 나선생 기적비문」(竹軒 羅先生 紀績碑文)을 썼다. 본래는 금성(錦城) 나(羅) 씨 제실로 사용되다가 필요할 때 초등학교 야외 수업 등 공공장소로도 쓰였으며, 후에 죽헌사로 개칭되어 나계종 사당이 되었다.
* 봉강사(鳳岡祠): 봉강사는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553-2번지에 소재하며, 금성 나 씨 사당으로 고려 시대 문신 나문규(羅文奎; 1312년~1355년)와 나계종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나계종은 예문관제학 재임 중 정몽주의 죽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나주에 초가집을 짓고 낙향하여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1812년경 조선 시대 순조 12년 서해도안렴사 송와 나문규와 예문관제학 죽헌 나계종을 모신 금성 나 씨 사당으로 최초 건립되었으며, 1868년 조선 시대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다가, 1924년 갑자년 학습용 강당 영수재가 증축되었고, 1951년경 한국전 당시 겹처마의 건물 구조로 2층으로 지붕 공사를 하는 등 증축되었다. 경내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과 공부하는 강당 영수재가 위치해 있고, 길을 사이에 두고 나대용(羅大用; 1556년 생~1612년 몰) 생가가 위치해 있다. 현재 이곳은 금성 나 씨 종친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계종이 직접 심은 주변 고목이 자연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전라남도 문화재자료 봉강사」, 「봉강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참조).
* 삼은각(三隱閣): 삼은각(三隱閣)은 고려 시대 말기 고려 충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삼은의 위패를 모셨으며, 조선 시대 전기 세조 때 송은 나계종과 함께 도은 이숭인(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 말 삼은의 한 사람), 금헌 유방택을 추배해 6인의 위패와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소재하며, 1984년 5월 17일 충남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삼은각은 1394년 조선 시대 태조 3년 충남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경내에 숙모전(肅慕殿)을 세우고,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 3개 사당에 신라, 고려, 조선의 충신들의 위패를 모셨다. 1394년 조선 시대 태조 3년 신라 박제상 위패를 모신 동계사 옆에 고려 유신 목은 길재가 새로 단을 쌓고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 조선 시대 정종 원년 고려 유신 류방백과 그의 아들 류백유와 류백순이 길재의 단에 정몽주와 이색을 추배했다. 1400년 유백유가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호를 따서 양은각(兩隱閣)을 짓기 시작해, 공주목사 이정간이 완공했다. 1421년 조선 시대 세종 3년 류백순이 1419년 사망한 길재를 추배하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호를 따서 삼은각이라 칭했다. 1468년경 조선 시대 세조 때 류방택, 도은 이숭인, 송은 나계종의 위패를 추가했다.
1455년 단종 폐위와 1456년 사육신 참수를 거쳐, 1458년 조선 세조가 충남 공주 동학사를 방문하고, 단종 폐위와 사육신 사건 관련 280명의 넋을 위로하는 초혼각을 건축했다. 1904년 고종 41년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개칭하고, 숙모전에 단종과 단종 비 정순왕후의 위패를 모셨고, 동무에 엄홍도 외 47위, 서무에 사육신 외 47위를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5일 봄 제사 춘향(春享)으로 김시습이 단종의 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고, 매년 음력 10월 24일 겨울 제사 동향(冬享)으로 단종이 유배지에서 사사된 날 제사를 지냈다.
1728년 영조 4년 신천영의 난으로 삼은각이 전소되었고, 1827년 순조 27년 재건되었으며, 1916년 삼은각 1칸을 재건해, 정몽주, 이색, 길재 3인의 위패를 모셨다. 1924년 유방택, 이숭인, 나계종의 위패를 추가해 6인 배향되었고, 1950년경 한국전 때 소실되었다가, 1960년경 중건되었다.
* 금성(錦城) 나(羅) 씨: 금성(錦城) 나(羅) 씨는 본관이 금성(옛 백제 시대 발라현(發羅縣), 신라 시대 금성읍, 고려 시대 나주목, 조선 시대 나주읍, 대한민국 시대 금성시 이후 현 나주시)이며, 역사는 통일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그리고 대한민국 시대까지 천년여에 이른다. 시조의 유래는 가락국 왕조 구언왕(仇彦王) 일파가 통일 신라로 흡수되면서 통일 신라의 왕이 신라의 국명에서 라(羅) 성을 하사했다고 알려져 있고, 시조는 이름을 총례(聰禮)라고 명명해서 나총례(羅聰禮)가 되었다는 시조설이 있다. 현재 금성 나 씨 시조설은 시조 나총례가 고려 시대 전기 태조 때 삼한벽상일등공신 금성부원군을 역임했다고 한다. 본관이 금성읍으로 정해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금성 나 씨의 선조 당 상서좌복야 신라 좌승상 나지강(羅至强) 장군이 중국 당나라 태종 때 당의 고구려 원정을 반대하고 망명해서 신라 효공왕 때 후손 나경(羅璥)이 나주사찬에 책봉되면서 금성읍(백제 발라현)에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이 금성 지역을 정벌하면서 금성 지역 호족 종례(宗禮)에게 금성 나 씨를 하사했다는 설도 있다. 시조 나총례 시묘가 전남 진도군 군내면 세등리 뒷산에 있었다는 설이 있어 종중이 방문해 답사했으나 확인되지 않았고 실전 묘역으로 보류되었다.
금성은 백제 시대 발라군이었고, 757년 신라 시대 경덕왕 16년 이후 금성군(錦城郡)이었으며, 940년 고려 태조 23년 나주가 지명이 변경되어 983년 고려 시대 성종 2년 나주목이 되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전남 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 조선 시대 고종 32년 나주부가 되었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되어 금성시가 되었으며,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고,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나주시로 통합되었다.
금성 나 씨의 시조는 나총례이며, 나지강은 선조의 한 사람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정랑 나무송(羅茂松)의 후손 나경언(羅景彦)은 부산 동래부로 입향한 부산의 입향조이다. 주요 인물은 고려 시대 제주부사•형부상서 나득황, 예문관제학·전리판서 나계종, 조선 시대 성균관대사성•대사헌·증 이조판서 나세찬, 장군 나대용,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독립운동가 독립선언 33인 나용환, 독립운동가 나석주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현대의 인물들이 있다. 금성 나 씨 사당 봉강사(鳳岡祠)는 전남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시조 삼한공신 금성부원군 나총례의 11세손은 충절공익희파(忠節公益禧派), 부호군공언파(副護軍公彦派), 영도첨의공순파(領都僉議公珣派) 등으로 분파되었고, 11세손 나천서의 후손이 안정 나 씨로, 나문서(羅文瑞)의 후손이 군위 나 씨로 분파되었으며, 15세손 나광우(羅光佑)의 후손은 수성 나 씨로 분파되었다.
* 금성(錦城) 나(羅) 씨 죽헌공파(竹軒公派): 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전리판서를 제수받은 금성 나 씨 15세손 죽헌공(竹軒公) 나계종(羅繼從)은 16세손 아들 나중훈(羅仲勳)에게서 금성 나 씨 죽헌공파(竹軒公派)로 분파되었으며, 송은(松隱) 나계종(羅繼從)은 금성 나 씨 죽헌공파 중시조이다. 금성 나 씨 죽헌공파 세계도(世系圖)는 다음과 같다. 시조 나총례(羅聰禮), 2세 나사고(羅思誥), 3세 나함헌(羅含憲), 4세 나성좌(羅成佐), 5세 나연서(羅延胥), 6세 나국영(羅國英), 7세 나인잠(羅仁譧), 나수잠(羅守譧), 8세 나선(羅宣), 나극효(羅克孝), 9세 나문일(羅文逸), 10세 나인송(羅仁松), 11세 나순(羅珣), 12세 나득방(羅得逄), 13세 나신(羅頣), 나덕중(羅德中), 나개(羅凱), 14세 나선(羅線, 부 나신), 나서(羅緖, 부 나덕중), 나조(羅組, 부 나개), 나직(羅織, 부 나개), 15세 죽헌공 나계종(羅繼從, 부 나직), 나귀동(羅龜東, 부 나서), 나인주(羅仁柱, 부 나선), 16세 나백훈(羅伯勳, 부 나계종, 고양통천연천파), 나숙훈(羅叔勳, 부 나계종, 고양통천연천파), 나중훈(羅仲勳, 부 나계종, 죽헌공파), 나계훈(羅季勳, 부 나계종), 나득춘(羅得春, 부 나귀동, 평안도성천(成川)파), 나귀만(羅貴萬, 부 나인주, 평안도영상(永桑)박천(愽川)파), 나귀적(羅貴積, 부 나인주, 평안도안천(安川)파), 나귀정(羅貴禎, 부 나인주, 평안도안천파), 17세 나웅호(羅雄虎, 부 나중훈), 18세 나문후(羅文厚, 부 나웅호), 19세 나언전(羅彦絟, 부 나문후), 나언서(羅彦緖, 부 나문후), 나언순(羅彦純, 부 나문후), 나언경(羅彦經, 부 나문후), 20세 나덕인(羅德仁, 부 나언전), 나덕의(羅德義, 부 나언전), 나덕소(羅德邵, 부 나언전), 나덕랑(羅德良, 부 나언전), 21세 나수용(羅秀龍, 부 나덕의), 나명용(羅命龍, 부 나덕의), 나견용(羅見龍, 부 나덕의), 나우룡(羅禹龍, 부 나덕의), 22세 나두빈(羅斗彬, 부 나우룡), 나두진(羅斗軫, 부 나우룡), 23세 나경서(羅景瑞, 부 나두진), 나경항(羅景恒, 부 나두진), 24세 나성구(羅聖耈, 부 나경항), 나성기(羅聖耆, 부 나경항), 나성질(羅聖耋, 부 나경항), 나성걸(羅聖傑, 부 나경항), 나성결(羅聖契, 부 나경항). <끝> <작성자: 나종혁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세손>
* 참고 자료: 「연보」, 『죽헌유집』(竹軒遺集) 하(下) 「부록」; 「나계종」,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김진옥, 「한국문집총간 죽헌유집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봉강사」, 「봉강사」 등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그 외 인터넷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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