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요즘 내 가방에 사춘기가 왔다
나이 열아홉 살인 채
잡동사니들이 덜컹거린다
가방을 열어보면
연립방정식은 안 보이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화장품들이
마구 섞여 있다
지퍼를 열면
피아노 악보는 아니고
누군가에게 쓰다만 편지 비슷한 문장들이
꽃망울로 뒹굴고 있다
먼 길 돌아서 물어물어 찾아간
도서관 시인학교에서
시치미 뚝 떼고 여고생인 채
가만히 앉아 있다
단풍
가을은 세상의 모든 애인이
물 드는 계절
삼십 년 만에 애인을 만나러 설악산을 갔다
맨 처음 두근거림 그대로 돌아가면
잎사귀 같은 애인들이
이산 저산 연기 한 줄 없이
타닥타닥 잘도 탄다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헤어질 용기는 없다
달아오른 애인의 뺨에 살 비비며
그저 눈으로나 안아보고 돌아와서
불륜 행각 숨기려고
잎사귀만 한 애인을 책갈피에 숨겨두고
슬그머니 꿈만 꾼다
거울
좋다는 건 일단 아껴두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했다
딸이 사준 옷가지들이
서랍장에서 접혀서 제철을 놓치고
엄마를 따라 헤지고 늙어간다
포장도 뜯지 않은 박스에
잠들어 있는 전기밥솥도
엄마와 나란히 유행에서 한 참 멀어진 채
잠자코 숨어 있다가
딸 시집가는 날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나이를 따라 잡아가는 나에게
아끼지 말고 입으시라고
푸념할 때면
거울 앞에서 엄마를 보는 것만 같다
엄마를 너무 늦게 알아 봤다
시를 읽다
시를 쓰겠다고 북한산에 오르고
한강을 건너기도 했다
시가 다니는 길목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저녁 새 울음, 샛강의 울음이
노래로 들려왔다
햇빛도 나무도 숲도 꽃도 잎사귀도
눈으로 바라보고 손으로 만져지는데
보일 듯 말듯 손에 잡히지 않는
앙큼한 여자 같은 시,
그런 시를 읽으려고 한강을 건너고
밤새 뒷골목을 뒤적이며
허우적거리다 돌아온 저녁
생각해 보면 목마름 견디며
참 많이도 걸었다 싶은데
아무려면 어떤가, 지루하고 심심하고
그지없이 아리송해도
어쩌다 난잎 같은 시 한 줄 주워서
책갈피에 끼우다 보면
내 몸에 꽃망울 맺힌다고,
그런 시를 읽다가 잠든 밤
햇빛 가리고 있는 구름도 용서가 되고
아무리 목말라도 견딜 것만 같다
삼각 김밥
우리 집 밥상은 편의점이다
도시락과 찰떡궁합이라는 둥근 김밥도
이산가족으로 만나는 밥상
토스트의 생은 유효 기간 때문에
입에 물리고
삼각 김밥을 입에 넣으면
쓸쓸해서 싫다
초임 강사 시절
내 손에 즐겨 들려 있던 삼각 김밥,
왜 하필 삼각형으로 오려 놓았는지,
곰곰 생각하면서
삼각지역을 막 지날 때
왜 나만 배가 고픈지,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밥상에 흑백사진 몇 줄 올려놓는다
피날레
십일월 첫 주 일요일 오후
불광동 구기터널 방향
북한산 둘레길 입구 공원에서
자연염색 의상 쇼가 막을 올렸다
눈이 부시게 설쳐대는 팔등신 모델들이
먼 줄을 세워가며 붉으락푸르락 단풍을 달았다
노란색 재킷과 빨간 기모 바지를 나란히 차려입은
중년의 남녀 한 쌍이
인증사진을 뿌려대느라 한눈파는 사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가 덩달아 옷을 갈아입는다
황금 카펫 레드카펫 위로
모델들이 걸어간 뒤를 이어
그녀도 스타가 되어 온갖 폼을 다 잡아본다
화려했던 의상들 훌훌 벗어 던져놓고
맨몸으로 긴 잠자리에 들려는데
마지막 열정을 다해보겠다고
가을빛 몇 줄 창문에 어른거린다
감나무와 어머니
버스를 기다리는데
감나무 가지에 어머님이 오셨다
신혼 시절 어머니와 나 사이는
앙증맞은 감꽃 같다가
설익은 감처럼 떫은 관계였다
이따금 먹구름 우르르 울고 가면
잎사귀 사이로 비치던 햇살,
그 햇살 아래서 울먹이던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감꽃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하얀 노래,
자동차 소음 같은 잔소리에도
대꾸 없이 서 있는 감나무는
비바람에 꺾이고 부러지면서도
잘도 버텨주고 있는데
내가 누구의 어머니가 되고 나서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진짜 감나무로 보인다
저녁의 USB
무언가 주워 담을 게 없는 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고 지붕에 올라갔다
달 없는 세상은 주머니 속까지 캄캄했다
마침 건너편 피시방이 있는 건물 상자가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저 불빛은 어떤 재미있는 신종 게임을
벌이고 있는가
나는 저 많은 불빛 상자들이 주워 담아온
게임 파일의 이름들을
무얼로 작명할까, 곰곰 생각해 보다가
내 심심한 주머니 파일에는 또 어떤 게임들을
저장해야 하는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서쪽 하늘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았다
마침내 주머니에 불이 켜지고
바이러스에 걸린 관절이 삐꺽이는 소리가 났다
그저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내 몸에서
끼릭끼릭 무언가 저장되고 있었다
듦과 빔 사이
깡통은
텅 비어있을 때 아름답고
텅 비어있을 때 비로소 자유롭다
그 속에 더 많은 먹물 가득 채울 수 있어서
온몸으로 구르고 찌그러지면서
차이는 발길에도 파열음 안내고
높은 화음으로 탱탱 노래한다
그동안 발로 차고 밟아 뭉개며
매일 죽여 없애버린 깡통시간들
흔적도 그림자조차도 없지만
그래도 퍽퍽 속 찬 불안한 흔들림보다
텅 빈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내 안에 고요를 부스러뜨리는
탱 탱 소리,
사람으로 안겨 오는 빈 울림이 좋다
속물
강물이 나이를 물었다
내 나이 아직도 졸졸 흐르는 팔십이라고
대답했다
팔십이 맞냐고, 되물었다
정말 팔십이 바르다고, 말했다
사람 나이 팔십에 바랄 게 뭐 있냐고, 물었다
몸속에 강물을 흘려보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돈도 모르고 병도 모르고
딱 이대로 졸졸 흘러갔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강물이 배꼽을 비틀면서 자지러졌다
그래, 네 몸속에도 강이 흐르고 있는 거야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예술시대 7편
지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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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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