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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회 정치구조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백종국(경상대학교)
1. 쇠퇴 일로의 한국 개신교회
한국의 개신교회는 현재 쇠퇴 일로에 있다.1) 이 징조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지만 신도 수의 감소라는 가장 확실한 지표가 이를 증명한다. 개신교파들이 정부 당국에 보고한 교세통계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인은 1995년의 1,450만명에서 2001년의 1,282만명으로 5년 동안 약 11.6%가 감소하고 있다.2) 정부의 인구 센서스 결과를 기준으로 볼 때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에 약 35%가 증가했었다는 사실과 뚜렷이 대조되는 경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회의 쇠퇴에 대한 우려는 이미 여러 차원에서 제기된 바 있다. 1993년에 출범한 「한국기독교개혁추진협의회」의 여러 활동이나, 1996년 10월에 나타난 「교회개혁열린포럼」의 “교회개혁 실천연대를 위한 선언”, 1999년 10월 한국기독청년협의회/한국기독학생총연맹 교회 청장년연대모임의 “교회개혁을 위한 평신도 선언”, 혹은 각 교단의 개혁 모임을 하나로 모은 「교회갱신협의회」의 출범을 예로 들 수 있다. 1998년 10월에는 「한국교회개혁선언위원회」가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98 선언문(이하 「교회개혁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세상의 소금이어야할 한국 교회의 상당수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3)
개 교회 수준에의 개혁운동도 과거와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형태를 띄고 나타나고 있었다.4) 과거에도 개 교회 차원의 비리 시정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부패와 비리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적 청산 위주였으며 이조차도 성공하는 예가 드물었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관련하여 소위 “교회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교사모)”들이 조직되면서 평신도들의 교회 개혁 활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연대적인 운동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들이 제기하는 주제들은 주로 담임목사의 세습 중지나 교회 재정의 투명성 보장, 목회자의 윤리성 회복, 등 매우 상식적이면서 그러나 한국 교회 내에서는 구조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집중적으로 논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한국 교회 내에 편만한 사제주의적 권위주의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이유들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다음으로 본 논문은 헌법의 개정, 특히 개교회의 “모범정관갖기운동“을 이러한 권위주의 청산의 제도적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 척결에는 다양한 해결책이 있을 수 있다. 구조개혁을 강조할 수도 있고 의식개혁을 강조할 수도 있다. 본 논문은 제도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제도는 좋은 데 의식이 따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5) 이 논문은 실제로 한국 교회의 제도가 얼마나 개혁주의의 교의에서 벗어나 있느냐를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한국 교회의 현행 헌법들과 이 헌법들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교회법학자들의 견해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분석할 것이다.
2. 한국 교회 정치의 문제점 : 사제주의적 권위주의 체제
1) 교회 정치의 일반적 성격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아니하는 교회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하지 1980, 11) 보이지 않은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이미 모였고, 지금 모이고 있으며, 장차 모일 택한 백성들의 총체이다. 보이는 교회는 모든 세대에 모든 가능한 장소에서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성된 결사체를 의미한다. 후자의 경우에 각 교회는 비록 동일한 계시 안에 있으나 각각의 역사성에 비추어 각기 적절한 방식으로 체제를 선택하거나 수정하고 있다.
역사상 교회가 취한 정치체제를 보면 대체적으로 감독정치, 장로정치, 회중정치로 분류할 수 있다.(김득룡 1984, 231-240)6) 감독정치는 왕정의 형식을 가진 교회 정체로서 역사적인 감독직의 우월성을 인정하며 성직자들의 서열을 중시한다. 감독직의 연속을 통해 사도적 권위가 계승된다는 주장이 이 체제의 기초적 원리이나 오늘날에 와서 이 주장을 하지 않은 감독 교회들도 있다. 초기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 및 미국의 감리교회가 취하는 감독 정체와 중세 이후의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가 취하는 교황 정체, 혹은 모라비아 교회, 복음교회, 루터교회 등이 이 체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박병진 1993, 33)
장로정치는 신도들이 선출한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를 맡아 보는 공화정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치리만 하는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가 회무의 중심이나 모든 직분은 항상 평등하다. 장로정치의 초기에는 없었으나 점차 장로정치를 채택한 교회들이 늘어남에 따라 지교회가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광대회의(廣大會議)들을 설치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와 그의 전통을 이어받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화란의 개혁파 교회, 불란서의 유그노, 미국의 장로교회를 비롯한 각국의 장로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회중정치는 신도들의 주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직분자들의 권한을 최소화하고 때로 광대회의(廣大會議)를 결성하지 않는 일종의 직접민주정적인 체제이다. 회중교회, 독립교회, 침례교회, 조합교회, 그리스도 제자 교회 등 형식이나 명칭에 따라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때로 직분자들을 아예 세우지 않으므로서 교회의 조직적 형태를 취하지 않는 무교회주의를 표방하기도 한다. 교세로서는 가장 적은 파에 속한다.
어떤 교회의 정치체제가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7) 단지 어느 체제가 더 성서적이냐 하는 입장의 차이로 체제의 선택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윌리암슨은 “교황마다 적그리스도적인 이 제도를 대표했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으로 적그리스도였다. 그리고 교황 제도는 마지막 ‘불법의 사람’이 실제적인 자기 신격화(self-deification)의 최종 단계를 취하여 일어나게 될 역사적인 체제로 등장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윌리암슨 1980, 315) 그러나, 한스 큉은 이러한 이해 방식이 서로 다른 역사성 위에서 형성된 각자의 특색을 무시하므로서 “획일의 위협”과 “분열의 위협”을 동시에 발생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큉 1997, 123-125) 그는 로마 카톨릭도 “에클레시아, 즉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이다. 그리고 따라서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다”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큉 1997, 161) 문제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인 교황의 수위권과 무오류성에 대한 이해인데 이 개념도 교회 정치의 제도적․권력적 차원이 아니라 직분의 고귀함에 대한 신학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개신교의 교리와 충돌할 이유가 없다고 큉은 주장하고 있다.(큉 1997, 192-194) 이러한 주장들을 어떻게 수용하느냐는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달려있으나 우리에게 요청되는 최소한의 의무는 신학적 입장 이전에 먼저 진실을 파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정치체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만으로 체제의 유효성이 동시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오류의 가능성들, 큉이 말한 바 “죄 많은 교회”의 속성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박득훈은 한국 교회가 “모든 신학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담임목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교회 머리가 되어 있고 개교회의 물량적 성장에 몰입되어 있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비참하게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뉴스앤조이」 2002.7.29.) 이창승 또한 “한국 장로회 교단들은 2부성 제도의 구조악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종교개혁자들이 떨쳐버린 로마 교회의 2부성 제도의 산물인 그것으로 복귀를 꾀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월간 목회 1994, 126) 무엇이 어떻게 오도되거나 왜곡되고 있다는 것인가?
2) 교회 정치 개념의 혼란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룬 문헌들 사이에는 바벨탑적 수준의 개념 혼란이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바벨탑적 수준의 개념 혼란을 정리하려면 먼저 정리의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만일 어떤 개념이 사물에 대한 서술이라고 할 때 동일한 사물에 대한 서술은 동일한 언어로 묘사되는 것이 건전하다. 둘째, 만일 어떤 개념의 정의(定義)가 그 개념의 내포를 명료하게 하고 외연을 확정하는 서술일 경우에 단일한 개념에는 최대한 유사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만일 정의의 내용이 매우 다를 경우에는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셋째, 만일 그 개념이 오로지 교회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라면 먼저 이의 타당성을 충분히 검토하고 정의한 다음 적어도 같은 논지 내에서는 일관되게 사용되어야 한다.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루는 문헌들 사이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관한 것이다. 임택진은 “장로교회의 정치는 주권이 교황이나 감독에게 있지 않고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이다. 다만 그 주권 행사는 주권자인 교인에 의해 선출된 장로들을 통해 조직되는 치리회에 의해 다스리는 대의정치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임택진 1994, 29) 그러나, 박병진은 민주정치와 공화정치를 대조적으로 사용하면서 민주정치를 “즉 진리 보다도 다수를 절대시하는 헛점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며, 숫자이면 진리도 비진리로 바꾸어 놓는다고 하는 다수의 횡포를 배제하기 어려운 정치체제”로 정의하면서 장로회정치는 공화정치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박병진 1993, 36)
민주정체를 이해하려면 이미 언급한 세 종류의 교회정치체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치체제 분류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따르면, 지배자의 수에 따라 왕정과 귀족정 및 민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왕정은 한 명, 귀족정은 약간 명, 민주정은 다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8) 그는 이 체제들이 타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럴 경우에 왕정은 폭군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중우정(衆愚政)으로 악화된다고 보았다. ‘민주정’에 대한 박병진의 오해는 이 민주정체가 타락하였을 경우에 나타나는 ‘중우정(衆愚政)’과 개념을 혼동한 데서 출발한다.
입헌군주정과 주권의 개념이 발달함에 따라 민주정은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한 모든 체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다“는 주장이 정당하다면 이 기초 위에 세운 모든 교회 정치 체제는 민주정이라고 할 수 있다.9) 반면에 이 주권을 부정하거나 이를 실질적으로 찬탈한 체제가 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정도에 따라 독재정치(dictatorship) 혹은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 authoritarian) 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정치체제에 대한 박병진의 오해는 민주정과 공화정을 대치시키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가 밝히는 바처럼 민주정은 공화정과 대조되는 정체가 아니다. 공화정의 경쟁자는 왕정이다. 공화정은 왕을 두지 않고 시민들끼리 의논하여 체제를 운영한다는 뜻인 바 민주적 공화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귀족적 공화정이 있을 수도 있다. 흥미있게도 박병진은 민주정치를 거부하는 같은 책에서 “이 정치(장로회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케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고 정의하고 있다.(박병진 1993, 32) 이러한 점이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루는 학자들의 혼란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루는 글들에서 나타나는 두 번 째의 기초적 혼란은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cracy)에 관한 것이다. 김삼환은 그의 칼럼에서 교회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신정주의(神政主義)“라고 주장하고 있다.(「국민일보」 2000.12.26.)10) 손병호는 이보다 훨씬 노골적이어서 ”교회는 공화적으로 통치자를 뽑는 곳이 아니며, 모든 것을 민주적으로 대의정치를 하는 곳도 아니다. 교회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교회가 민주적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성경도 다시 쓰게 되고 하나님도 다시 뽑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들기 좋아하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손병호 1991, 4)
신정정치(神政政治)는 세속정치(世俗政治)의 대조어로서 신의 대리인을 통한 신의 직접적인 통치를 의미한다. 물론 신의 대리인을 주장하는 자나 계층이 있다고 해서 신정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럴 경우에는 중세의 모든 정치체제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유럽의 절대왕정은 모두 신정정치라고 해야하기 때문이다.11) 신정정치의 특징은 신의 직접적인 계시의 존재 여부에 달려있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에 이러한 신정(神政)의 기간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기나 사사기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사장 혹은 선지자가 매사에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백성들은 이대로 행하든지 거부하든지 하였다.12) 따라서 이 시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신의 직접적인 계시와 이를 중보할 수 있는 제사장의 존재가 신정정치의 두 가지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한국 교회가 신정정치를 주장하려면 이 두 가지 전제를 충족해야 한다. 먼저 교회의 모든 정치적 행위-직원의 선출, 재정의 출납, 회의의 소집과 권징 등-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계시를 담임목사가 직접 중계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 두개의 주장은 개혁교회 내에서 모두 거부되는 것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을 이제는 중단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다.(윌리암슨 1980, 9) 일반계시를 제외하면 성경만이 신약시대의 유일한 특별계시이다. 또한 개혁교회는 목사만이 성경 해석의 유일한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주장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시대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시대에 있었던 실례들을 통하여 경고받는 바, 즉 그것은 진리는 언제나 목회자들의 품안에서 양육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완전은 그들의 상태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칼빈 1988, 356)
교회를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교회정치는 신정정치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루터주의가 교회적 신학적 성격에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하여 칼빈주의는 교회 안팎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경배를 추구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정성구 1995, 189-198) 칼빈주의는 성과 속,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 만일 교회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주장하면 더 이상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국의 개혁교회들은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
한국 교회 중 다수가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 달리 구태여 교회 정치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데는 세속화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된 이래로 민주주의는 독재를 추구하는 지배층에게 부패와 무능과 분열의 상징으로 왜곡되거나 오용되고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체계적으로 거부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전반적 몰이해는 한국 교회의 정치를 다루는 많은 문헌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고 있다. 특히,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 혹은 “유신” 등의 용어로 혼란을 야기시켰듯이 “신정정치” 혹은 “신주주의” 등의 용어가 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3) 사제주의의 위험
목사의 사제화는 한국 교회의 쇠락을 초래하는 가장 위험한 징조이다. 사제주의란 공동체의 종교적 지도자를 “성직자”라고 부르고 이들을 특별히 구별된 신분 계급으로 삼는 이교도적․유대교도적 관념을 일컫는다.(큉 1997, 160) 스스로 혹은 공동체적 합의에 의해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은 역사상으로 신정 체제에서 흔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곧 타락한다. 사제주의에 물들은 로마 카톨릭의 종교지도자들이 보여준 타락과 참상은 16세기 종교개혁의 발생이 잘 증명하고 있다. 종교지도자들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매개자로 인정하는 행위는 유일한 중개자요 대사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찬탈하는 행위로서 개혁적 신조를 대변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제25장 6항은 이를 “적그리스도요, 죄악의 사람이며,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의 입장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교인들이 다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른 인간으로 매개자를 삼는 행위는 자체의 모순으로 소멸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매개의 변증법은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매개적 존재들이 어떻게 해서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소외를 증가시키며 결국에는 자기 모순으로 쇠락하고 마는 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백종국 1994b) 로마 카톨릭에 대한 칼 맑스의 분석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바라는 인간 사이를 예수 그리스도가 매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를 교회가 매개하고, 그 교회와 인간 사이를 성직자가 매개한다. 이 결과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극대화하여 마침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모순이 극대화되면 이제는 자신의 모순으로 몰락하는 운명만이 기다릴 뿐이다.(Marx 1973, 332) 만일 한국 교회가 사제주의에 빠지고 있다면 이는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신학적으로 금하고 있으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목사를 “기름부은 받은 자” 혹은 “성직자”로 표현하고 그 지위를 모세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은 이미 보편화되어있다.13) 많은 교회에서 목사에 대한 권고와 비판은 성직자에 대한 도전이며 결과적으로 성스러운 교회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설교되고 있다. 목사의 잘못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기름부은 받은 자를 대적하면 천벌이 내린다는 저주를 서슴지 않고 있다. 기름 부은 받은 사울왕을 직접 해치지 않으려 했던 다윗의 행동과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에게 내린 문둥병이 즐겨 인용되는 성경적 사례이다. 때때로 서울신학교의 이종일 학장 처럼 목사의 “성직권”을 주장하는 경우 까지 생겨나고 있다.(이종일 1996, 46)
목사를 기름 부은 자 혹은 성직자로 표현하는 일은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확실히 이단적인 주장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에 대해 “그들은 추첨으로, 혹은 주께로 부터 말미암은 추첨으로 뽑혔기 때문에, 혹은 주님의 추첨 때문에, 혹은 하나님을 분배자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라고 한다. 그러나 온 교회가 가져야 할 이 명칭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 이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선언했다.(칼빈 1988, 303) 루터는 이보다 훨씬 더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소리치고 있다.
“교황, 주교들, 사제들 및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아무도 여기에 놀라서는 안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챤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루터 1993, 23)
특히 목사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거나 목사를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역시 이단적인 주장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이 신성을 가장하기 위한 형식으로서 채택한 도유법(塗油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서품받는 사제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서 이를 통해 그가 성별되고 그에게 영적 은사가 임했다는 카톨릭의 주장에 대해 칼빈은 기름과 영혼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제로 성별된 사람들은 모두 말이었다가 나귀로 변하고, 바보이었다가 미치광이로 변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여실히 알 수 있다”고 비꼬고 있다.(칼빈 1998, 316) 루터는 성직자가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파면할 수 없다는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대해 이 말은 한 것은 “악마의 왕 자신”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루터 1993, 28)
① 직분의 포괄적 정의
한국 교회에서 목사의 직분이 이처럼 사제화하는 데에는 직분의 포괄적 정의와 계급구조 형성, 과도한 권한 부여 및 통제장치의 부재를 용인하는 교회의 정치구조가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행 헌법들의 구조는 목사를 성직으로 인식하게 하는 직분의 정의로 가득 차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하 예장합동)의 헌법은 제4장 제1조 ‘목사의 의의’에서 목사를 “목자”, “그리스도의 종”, “장로”, “하나님의 사자”, “복음의 사신”, “교사”, “전도인”, “하나님의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하 예장통합)의 헌법은 제24조에서 목사를 “목자”, “그리스도의 종”, “장로”, “전도인”, “청지기”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이하 예장고신)의 헌법에서는 “감독”, “목자”, “장로”,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사자”, “그리스도의 사신”, “교사”, “전도자”, “청지기”라고 칭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헌법은 제18조에서 목사를 “감독”, “목자”, “주의 종”, “장로”, “하나님의 사자”, “청지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 중에서 이처럼 그 의의가 부각된 직분은 목사뿐이다.
비록 웨스터민스터정치조례와 미국장로교헌법을 그대로 차용하였다고는 하나, 목사라는 직분을 이처럼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경향은 한국 교회에서 목사의 직분을 신성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교회의 조직을 중시하는 태도는 제세례파의 회중주의적 태도를 경계하고 있는 칼빈주의의 교회 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문서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목사의 명칭은 직분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결코 교회 내에서 목사의 구별된 직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는 이에 대해 “이는 계급을 가리킴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르쳐 칭하는 것뿐이다”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하지 1980, 43) 흥미있게도 이러한 웨스트민스터정치조례의 단서조차도 예장통합과 예장고신의 헌법에서는 삭제되었다.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칭한 헌법의 표현은 한국 사회의 대중에게 샤만적(shaman)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영어로 “하나님의 사자(ambassador of God)"라고 하면 확실히 문학적 표현으로 간주되지만 한국어의 ”사자(使者)“는 한국 사회 전통 내에서 아직 깊이 뿌리박고 있는 샤먼적 감정으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이점에 대해 박윤선도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여기에 열거된 직명들이 지배자, 또는 명령자의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그 사역의 목적을 말할 뿐, 사역의 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박윤선 1983, 38) 예컨대 목사를 목자라 하고 교인들을 양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칼빈은 동의하지 않았다.14) 역사상 많은 개혁교회들은 목사의 사제화를 두려워하여 거룩함을 가장하는 특별한 가운이나 의상을 걸치는 것 조차도 금지하였다. 최근 한국의 목사들이 좀 더 거룩하게 보이는 가운을 걸치거나 강대상을 턱없이 화려하고 높게 만드는 행위는 모두 개혁주의와 위배되는 것들이다.
② 목사직의 계급화
한국 교회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사제주의 현상은 목사직의 계급화이다. 한국 교회에서 위의 표현들은 실제로 각 교회를 위임 맡은 위임목사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교회 헌법들은 위임 목사를 비롯하여, 임시 목사, 부목사, 원로목사, 무임목사, 전도목사, 교단기관목사, 종군목사, 교육목사, 선교사, 은퇴목사 등 대략 10내지 11종류의 목사직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사들은 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위임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계급 피라밋의 하부를 형성하고 있다.
위임목사와 부목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위임목사는 공동의회의 3분의 2 의결로 초청을 받는 데 비해 부목사는 당회의 의결 (때로는 제직회의 동의)을 거쳐 청빙한다. 위임목사의 임기는 종신인데 반하여 부목사의 임기는 1년이다. 위임목사는 교회의 행정을 총괄하는 당회의 장이 되나 부목사는 참석조차 할 수 없다.15) 장로정치의 3대 원리 중 하나로 간주되는 ”교직의 평등“에 대해 임택진은 ”목사, 장로, 집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상 동등하다“고 설명하고 있다.(임택진 1994, 27) 그렇다면 장로나 집사 직분은 말할 것도 없이 목사라는 직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불평등은 왜 발생하였을까?
박병진은 이 목사직의 불평등이 주권재민의 원칙에 의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로회정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정치이므로 양무리를 다스리는 권세도 형식상 양무리에게서 나오며”라고 말하고 있다.(박병진 1993, 220) 위임목사는 공동의회에서 부목사는 당회에서 선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박병진이 지속적으로 장로회정치가 민주적일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한 바와 배치될 뿐만 아니라 법적 타당성도 없다.16) 부목사의 초빙 기관 문제는 부목사의 지위 문제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시무하는 모든 목사들이 다 동등하다고 여긴다면 모든 목사가 당연히 공동의회를 통해 초빙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정치조례는 “공동목사(co-Pastor)"를 두어 당회장을 돌아가며 맡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하지 1980, 49) 이 입장에 따르면 ”부목사(Pastors Assistant)“는 목사라기 보다는 소위 ”조사(助師)“라고 부르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공동목사“는 사라졌고 부목사는 하나의 하위 계급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목사직의 계급 조성은 많은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다. 위임목사들은 교회내의 독점적 귄위와 수입을 누리고 있다. 종신직인데다 당회장과 제직회장, 공동의회의장 등을 당연직으로 맡고 있으며 갖가지 명목으로 교회 재정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17) 반면에 대다수의 부목사들은 매년 갱신되어야 하는 신분상의 불안정과 더불어 낮은 금전적 보수에 시달리고 있다. 교세 통계는 이 상황이 매우 위험한 수준에 달했음 보여주고 있다. 2001년 2월을 기준으로 17개 주요 개신교단이 제시한 교세 통계를 보면 교회 수는 39,412개인데 목사 수는 73,678명이었다. 목사 수가 교회 수 보다 1.86배 많은 셈이며 개 교회당 1명의 위임목사만 있다고 가정했을 때 34,266명의 목사들이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에 노출되어 있다. 극히 소수인 대교회의 위임목사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 그리고 개혁주의적 신조와는 달리 목사직에 과도하게 존경을 표하는 경향은 목사의 공급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유인이 되고 있으나 목사의 과도한 공급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낮은 평균 소득은 불가피하게 다수의 목사들을 생활고에 허덕이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 교직의 독점현상이 초래하는 구조적 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Smith 1976, 148)
③ 목사의 과도한 권한
한국 교회는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므로 목사의 사제화를 촉진하고 있다. 북한의 권력체제가 잘 보여주듯이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는 반드시 권력자의 신성화가 진행된다. 한국 교회정치의 특징은 위임목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한국 교회에서 위임목사는 당회와 제직회, 공동의회의 장을 당연직으로 맡게되어 있다. 이차적으로 노회와 총회 등 지교회를 돕는 광대회의(廣大會議)의 장도 목사들이 당연히 맡게 되어있다.18)
더욱 놀라운 일은 한국 교회가 위임목사에게 당회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서의 독재권을 부여한 일이다. 독재권이란 지배자의 의사와 다른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권한을 말한다. 한국 교회는 목사가 각종 회의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안건에 대해 가부를 묻지 않으므로서 그 안건을 묵살시킬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당회가 모든 행정적 권한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당회에서의 독재권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 교회 헌법은 묘하게도, 공동의회나 제직회의 경우와 달리, 당회의 의결정족수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회의 항목은 대개 조직과 폐지, 성수, 당회장, 직무, 권한, 회집, 회록 등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의결절차와 정족수는 빠져있다. 예장고신 헌법만이 제79조 ‘치리회 회장의 직권’ 항목에서 “각 치리회 회장은 그 회의 규칙에 따라 회의를 소집하여 개회와 폐회를 주관하고 회무의 질서를 유지하며, 의안을 적정하고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일체의 권한을 갖는다”고 하여 당회장에게 전권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단들은 헌법에 이를 명시하기 보다 노회의 재판 등을 통해 하나의 관행을 정착시키고 있다. 즉 의안의 가결 여부는 당회장이 결정한다는 관행이다. 이에 대해 박병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목사가 판단하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안들의) 동의와 재청은 묵살해야 하고, 묵살할 권리가 당회장에게 있다. ....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목사들은 그 의안이 가부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신념이 있을 경우에만 가부를 물어야 한다. 악한 장로들의 협박 공갈에 굴하지 아니해야 한다.”(박병진 1993, 81)
이러한 목사의 독재권을 인정하는 이유로 “장로회주의의 균등원리”가 자주 원용되고 있다. 김득룡은 장로회주의가 “성직자의 치리권과 평신도의 기본권”을 서로 동등하게 대우하여 서로 견제케 하므로써 교회의 건전한 발전과 부흥을 조화롭게 초래하는 제도라고 소개하고 있다.(김득룡 1984, 299) 그는 치리권이란 바로 신성유지권과 질서유지권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교회의 자유와 치리권은 성직자의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김득룡 1984, 300) 임택진도 이와 같은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평신도의 기본교권과 성직자의 치리교권을 동등하게 대우하므로써 독재정치와 중우정치를 동시에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임택진 1994, 30) 박병진은 이보다 훨씬 강경한 입장에서 교회의 권세가 두갈래로 갈라졌으니 곧 평신도의 기본교권과 성직자의 치리교권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박병진 1993, 38)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본교권은 장로가 대표하고 치리교권은 목사가 가지므로 균등의 원리에 의해 “그런 고로 목사 1인의 치리교권은 장로 전원의 기본교권과도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박병진 1993, 80) 따라서 당회에서 장로 전부와 목사 1인의 견해가 서로 대립될 때 누구의 의사를 따라야할까? 박병진의 판단으로는 물론 목사의 견해이다. 목사에게 거부권을 부여하므로 교회의 결정은 항상 당회장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19) 그리고 그는 이것이 “양심의 자유”에 합당한 체제라고 믿고 있다.(박병진 1993, 81)
한국의 주요 교회법학자들이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를 이런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랄 만 하다. 이들이 원용하는 한국 교회 헌법의 첫번째 정치원리인 양심의 자유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각자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며 타인이 이를 침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헌법의 제2조는 교회의 자유인데 어떤 교회든지 마치 개인에게 양심의 자유가 주어진 것처럼 각자의 정치조직을 설정할 자유가 있다는 선언이다. 이 두 가지 원리가 나타났던 역사적 배경과 그 발달 경로를 보면, 한국교회법학자들의 견해와는 전혀 반대로, 성직자 혹은 성직자 조직의 의사가 교회를 장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원리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임이 명백하다.
장로는 세속적 의사를 대변하고 목사는 성스러운 의사를 대변한다는 식의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박윤선은 이 균등의 원리(parity of ministry)란 “장로가 각 치리회에서 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모든 사무를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박윤선 1983, 72) 목사의 양심이나 장로의 양심이나 다 동등하다. 물론, 큰 교회의 자유나 작은 교회의 자유도 다 동등하다. 이 두 가지 개혁정치의 원리가 어떻게 해서 “성직자의 치리교권”, 한국 교회 식으로 말하자면 “당회장의 독재권”을 의미하는 데까지 흘러갈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④ 통제장치의 부재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을 허락하면서도 통제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목사의 사제화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 통제장치의 부재를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는 권고사면의 노회 장악이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는 노회에 소속되어 있다. 따라서 지교회가 목사를 청빙하려면 노회에 청원해야하고 노회가 이를 파송한다. 한 번 위임목사가 되면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70세 정년까지 시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있다. 문제는 목사와 교회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경우이다. 박윤선은 “교회가 목사를 배척하는 난관인가? 이 난제에 있어서 목사는 사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박윤선 1983, 65) 배척하는 자들이 교인의 다수일 때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배척하는 자들의 수효가 소수일찌라도 그들의 이유가 타당하고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판단되면 목사가 스스로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실제에 있어서 교회가 목사를 배척하게 되는 경우 목사가 스스로 사임하는 사례는 한국 교회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도리어 많은 경우에 교인의 다수가 목사의 사임을 원하는 데도 불구하고 목사가 끝까지 버티므로서 온 교회가 큰 시험에 빠져들고 있다. 이미 각종 언론에 보도된 “교사모”운동들이 그러한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목사의 자질로 환원하는 태도는 개혁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목사라고 해서 인간적 욕망을 다른 성도들 보다 더 잘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구별된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도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해 안정적인 삶과 소득을 원하며 사회적 존경을 얻고 싶어한다. 교회의 배척을 당하여 움직이는 경우에 다른 교회의 청빙을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각 교단의 교세 통계로 밝혀진 바 있다. 따라서 배척받아 교회를 떠나게 되면 힘들더라도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직위를 유지하고픈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경향이다. 문제는 이 욕망을 통제할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의 헌법들은 목사에 반대하는 성도들의 의견을 노회에 반영할 정상적인 통로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정상적인 통로는 당회의 의결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처럼 장로 전원이 목사의 권고사면을 원한다할지라도 당사자인 목사 1인이 반대하면 이를 당회에서 의결할 수 없다. 장로들이 당회의 회집을 강제할 수는 있으나 의결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분규의 국면으로 들어가야만 노회의 관심 대상이 된다. 이럴 경우에 노회는 전권위원을 파송하여 공동의회를 소집하게 된다. 그러나, 공동의회의 과반수 혹은 3분의 2 의결이 있다할지라도 목사를 권고사면시키는 권한은 여전히 노회에 있다. 현실적으로 목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노회가 목사에게 불리한 결정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역으로 목사들은 교회에 충성하는 것 보다 노회 혹은 노회를 장악한 지도적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자신의 지위 보장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통제장치의 부재는 곧 제척사유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다. 대개 일반법에서는 공공적 결정과정에서 사적 이익이 연관되어 있는 자는 제척되게 되어있다. 장로나 집사의 권고사직은 당회에서 의결하기 때문에 제척사유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목사에 대한 권고사면은 당사자가 당회와 공동의회를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독재권을 관례적으로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제척사유를 명시하지 않는 이상 합법적 해결이 어렵다. 만일 웨스트민스터정치조례처럼 위임목사의 수를 복수로 할 수 있게 했다면 이 제척사유의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위임목사를 단수화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헌법이 갈등을 해결하는 합법적 통로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이 한국 교회의 쇠락을 예고하고 있다. 일찌기 맹자는 나쁜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현상을 “백성을 그물질한다(罔民)”고 표현한 바 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사제주의로 빠져드는 것은 자신의 지위와 소득과 위신을 보다 공고히 하려는 목사들의 노력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교회헌법을 목사 중심으로 권위주의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직분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므로서 목사의 성직화를 꾀하고, 위임목사를 중심으로하는 목사의 계급구조를 형성하고,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 부여하면서도 통제장치는 만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들과 타협하여 자신들의 위신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일부 장로들의 협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0) 이와 같은 현상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BC 600년경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3.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 완화를 위한 제도적 대안
1) 개혁주의 교회의 정치 원리에 대한 재 고찰
보편적 교회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며 그의 법도를 순종하는 모든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다. 박윤선은 이 보편적 교회의 특징으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박윤선 1983, 29)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점이다. 물론 개인으로서 택함을 받지만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둘째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는 건전하지 못하다. 셋째 개 교회도 보편적 교회의 지체이다. 노회나 총회와 같은 광대회의(廣大會議)는 이러한 점에서 유익하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편적 교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개혁주의 교회는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김득룡 1984, 241-243) 첫째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통치하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교회의 머리를 주장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모든 활동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교인은 여기에 복종하여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어느 개인도 치리의 권세를 주장할 수 없으며 단지 교회 내에서 맡은 직분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이 직분은 교인의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것이다. 넷째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지교회가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각급 광대회의(廣大會議)에 참여하여 협조해야 하지만 교회의 모든 권리는 본질적으로 지교회에 속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에 대해 한국의 교회법학자들 사이에서는 대체적으로 이견이 없어 보이지만, 개혁파 교회정치의 특징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미국 장로교의 뉴욕총회(1788년)가 의결하고 한국 교회가 받아들인 교회정치의 원리는 8가지이니 곧 양심의 자유, 교회의 자유,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진리(신앙)와 행위의 연락, 교회 직원의 자격, 교회의 직원 선거권, 치리권 및 권징이다.(박윤선 1983, 19-27) 그러나, 이 8가지는 원리라고 부르기에 부적합하다. 원리에 해당하지 않은 요소들, 예컨대 교회 직원에 관한 항목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김득룡과 임택진과 박병진은 장로회주의의 3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가 조금씩 다르다. 김득룡은 장로들에 의한 치리, 성직의 평등, 장로회주의의 균등원리를 말하고 있다.(김득룡 1984, 295-304) 그러나, 임택진은 장로들에 의한 치리, 교직의 평등,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을 3원칙으로 말하고 “장로교회의 정치적 특성“으로서 “대의정치“와 “기본권과 치리권“을 따로 언급하고 있다. 박병진도 ”기본교권“과 ”치리교권“이 장로회정치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교)권은 장로에게, 치리(교)권은 목사에게 귀속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균형의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디에서 이러한 논지가 시작되었지는 찾기 힘들지만, 위의 세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권과 치리권의 분리와 귀속“은 개혁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선 용어의 혼란이 발견된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국민의 기본권이란 평등권, 참정권, 자유권, 생존권, 청구권, 등 주권자인 국민들이 당연히 누려야하며 본질적이어서 통치자에게 위임할 수 없는 권한을 의미한다.(헌법재판소 1995, 15) 통치권 혹은 치리권이란 대의제적 선거를 통해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은 통치자들에게 당연히 귀속된다. 이럴 경우에 그 권한들은 통치자와 피치자가 설정한 각종 계약에 의해 그 한계가 정해지게 된다. 예컨대, 이 한계가 침범당했을 경우에 기본권을 지닌 피치자들은 통치자들을 합법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 이것이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해되는 균형의 원리이다. 한국 교회 정치의 혼란은 이러한 상식을 부정하고 이미 치리권을 위임받은 장로들에게 구태여 기본권을 귀속시키고 치리권은 성직자로 명명한 목사에게 귀속시킴으로 발생하고 있다. 치리 장로라고 부르면서 치리권이 부여되어있지 않다는 이상한 논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이 주장은 일차적으로 용어 자체를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부적 구성에 있어서도 모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째 모순은 만일 기본권이 장로들에게 귀속된다면 장로들을 선출한 성도들에게는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대의제적 정치형태를 갖추었다면 마땅히 치리를 담당한 장로에게는 치리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장로들을 선택할 수 있는 선거권 혹은 참정권으로서의 기본권은 여전히 교회 정치에서 주권자로 간주되는 성도들에게 남아있어야 한다.
둘째 모순은 목사도 장로의 하나로 간주하는 개혁교리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 토론을 통해 자명해진 바처럼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헌법은 “항존직“ 항목에서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가르치는 자는 마땅히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타인의 모범이 되는 성결함과 영성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영적인 권위를 누릴 수 있으며 이 권위의 한계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치리교권을 목사에게 귀속시키며 그 결과로 목사에게 당회 내의 독재권을 부여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치리는 장로와 목사가 협의하여 결정해야 하며 개혁교회 내의 치리교권은 마땅히 장로와 목사에게 공동으로 귀속된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교회 정치의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개혁교리를 위반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목사직의 사제화를 부추기고 이를 위해 개혁교회의 제도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논리를 개발하는 데 열중해온 것이다. 본 논문에서 이미 분석된 바처럼, 비교적 개혁교의에 충실했던 박윤선의 헌법해설부터 시작하여 점차 목사중심적 해석이 강화되어 가는 김득룡, 임택진, 박병진의 헌법 해설들이 그러한 경향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법학자들의 식견이 모자랐다기 보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형성된 권위주의적 편향이 교회에 침투한 결과로 보여진다. 민주주의를 꺼려하고 권위주의의 효율성을 신봉하는 경향은 단지 일반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교인인 동시에 시민이었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깊숙이 침투되고 있었다.
2) 헌법개정과 모범정관의 채택
어떤 법 체계는 그 시대의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 체제의 유효성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하게 되어있다. 예컨대, 고대 왕정 시대의 방법과 근대 민주정 시대의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성경이 왕정을 비유로 사용한다고 해서 민주정을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참으로 유치한 일이다. 한국 교회에서 발생한 유감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1910년대의 한국 교회 정치가 그 시대에 가장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것이었으나, 2002년의 한국 교회 정치는 그 시대에 가장 후진적인 권위주의 체제로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한국 교회정치는 사회가 본받아야할 모델이었지만 이제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은 한국 교회의 나태로 말미암아 전도의 문이 닫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 체제는 당연히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미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이를 확인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를 추가로 들 수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부족하기 때문에 공화적으로 지혜를 모으는 게 현명한 일이다. 둘째, 자칫하면 교회 지도자가-목사든 장로든-하나님을 대신하는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갈수록 회중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과거처럼 구태여 교회의 특정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근본적으로 사회가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부문에 다 통달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 여섯째, 민주화할수록 교인들의 자발적 헌신과 참여를 높일 수 있다.
기존의 헌법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교단 헌법의 개정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건강교회운동본부는 2001년부터 이러한 관점에서 헌법개정운동을 해오고 있다. 이 기관은 한국교회의 헌법에서 비성경적이고 비민주적이고 비상식적인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뉴스앤조이」 2002.7.30.) 물론 법조항의 오류나 모호성, 그리고 법 해석의 자의성과 판단착오도 흔히 발견된다고 보고 있다.21)
① 교단헌법개정의 원칙과 주요 내용
교단 헌법의 개정 작업에는 다음 몇 가지 원칙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개혁교회정치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모순되고 왜곡된 구조를 과감히 척결하고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교단헌법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이를 교회 일치의 기회로 이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분리는 신앙적 입장의 차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이루어졌다. 셋째는 새로운 상황이 초래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체제를 채택해야 한다. 임시목사 논쟁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과거의 체제는 농촌교회나 개척교회 혹은 목회자가 필요한 기관의 입장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 하에서 새로운 헌법에 명시될 내용을 고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우선 교회정치의 3대 원리이다. 미국장로교헌법의 8대 원리는 원리로서 부실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점에서 개혁주의의 원리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교회의 주권 혹은 교회의 자유이다. 교회의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다는 점이 명백히 선언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양심의 자유이다. 모든 교인은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고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셋째는 복음적 분업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동등하며 단지 그 맡은 바 직분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는 점이 명시되어야 한다.
목사와 장로 및 집사를 포함하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임기제를 적용하는 일이다. 미국장로교의 헌법은 목사에게 임기제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PCUSA 2002) 그러나, 미국장로교가 목사에게 임기제를 적용하지 않은 이유는 언제든지 교인들의 총의로 목사를 권고사임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도 한국처럼 목사가 교인들의 총의를 거부하고 노회가 이의 처리를 꺼려한다면 임기제의 채택은 시간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제도가 다 그러하듯이 임기제도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직분의 효율성과 책임성이 높아지고, 직분의 경직성과 분규 가능성을 차단하며, 성도의 참여가 증대된다는 점이다. 단점은 목사들의 직업적 안정성이 약화되고, 장기 프로젝트의 안정성 역시 저하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 보아 임기제 채택은 불가피하다.
각 사역자들의 직분 영역을 명백히 하고 합동사역을 권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복수위임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목사들이 당회장직을 번갈아 맡는 게 좋다. 목사에게 제척사유가 생겼거나 교회내 회의체의 합의가 있을 경우에 장로가 당회장을 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물론 목사의 사제주의화를 유도하는 “목사의 의의“ 조문은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혁주의적 원칙에 따른 직분의 역할을 명료하게 하고 임기 동안에는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목사는 목사답게, 장로는 장로답게, 집사는 집사답게“ 봉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교회가 주권의 실체라는 점을 명백히 하는 회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교회의 주권은 지교회가 관장한다는 점이 명백해져야 한다. 장로나 목사는 모두 지교회 소속이어야 하며 단지 목사의 경우에 노회나 총회가 그 자질을 검토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 면 된다. 현재 한국 교회의 당회는 개혁주의적 원칙에서 매우 멀리 나가있다. 김동호의 주장 처럼, 집행위원회 격인 당회가 교회내의 모든 권한, 즉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김동호 1999) 예컨대, 최고회의인 공동의회 조차도 당회가 허락하지 않으면 열릴 수 없고 특히 당회장인 목사가 거부하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미 심하게 오염된 당회 보다는 공동의회 산하에 사역자회의 또는 운영위원회를 두어 목사와 장로 및 각 부서를 맡고 있는 장들이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경우에 제직회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22)
당회-노회-총회 라는 민주적 3심제도도 한국 교회 내에서는 세속화에 심히 오염되어 있다. 칼빈주의 신학자인 벌코프(L. Berkhof)나 보우만(H. Bouwman)은 노회와 총회가 결코 지교회의 상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23) 이들은 보편적 교회를 이루기 위해 지교회와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광대회의(廣大會議)로 간주된다. 또한 권징의 사례가 있을 경우에 피차의 덕을 세우고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서는 노회가 지교회를 지배하는 상회이다. 노회를 장악하고 있는 정치꾼들 때문에 많은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전도의 문이 막힌다는 원성이 자자하지만 이를 헌법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법학자들은 노회가 장로회정치의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선택의 문제이다. 사실상 칼빈은 노회 보다 당회(presbyterium, consistoire, 혹은 senatus ecclesiae라고 호칭)를 더 중시하였다.(베버 2001, 39) 제네바 교회 헌법에는 물론 노회라는 것이 없었고 「기독교강요」에 그 이름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또 칼빈은 사도행전의 사도회의를 노회의 원형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노회는 교리의 차이를 조정하는 보조기관이었다. 노회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당회의 상회로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스코틀란드의 개혁교회가 처음이었다.(맥그레고 1997, 182) 장로교회의 전통에서 때로 노회는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진리를 수호하며 연합의 일을 도모하는 데 매우 유익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노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개교회주의는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도리어 노회가 지교회의 발전에 장애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제네바 교회의 원칙으로 돌아가 노회가 아니라 지교회 회의를 기초적 단위(presbytery)로 삼고 노회와 총회는 원래의 조정 기능만을 맡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헌법 내에 재정의 투명성을 증가시키는 조항들이 필요하다. 1980년대 이래로 한국 교회는 천민자본주의라는 세속적 영향을 많이 받아들였다.(백종국 2002)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이 천민자본주의적 세속화를 털어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재정의 사용에 있어서 공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목사의 비용을 교회의 비용으로 전가시키는 식의 분식회계를 제거해야 한다. 재정 공개를 의무화하고 감사의 절차를 확립해야 한다. 목사의 비용에 대해서는 호봉제(영락교회), 기본급제(영동교회), 혹은 연봉제(주님의 교회) 등을 각 교회의 형편에 알맞게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교회간 재정의 연합을 통해 구조적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있는 분야의 봉사자들을 위해 피차 균등하게 하는 노력이 명시되어야 한다.
② 모범정관 채택의 의미
헌법개정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점은 이미 이 체제에 익숙해 있는 목사나 장로들이 쉽게 체제의 개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체제를 왜곡시켰는데 어떻게 다시 주님의 이름으로 체제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자기 모순에 빠지는 길이다. 더구나 개혁을 통해 직업적 안정성이나 사회적 위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많은 장로나 목사들로 하여금 기득권자로 화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를 더욱 개발하고 필요하다면 교권을 발동해서라도 이를 지키려고 들 것이다. 실제로 교단헌법의 개혁적 개정은 그 절차가 목사들의 자기강화적 구조에 의해 묶여있다는 점에서 가망이 없어 보인다.
모범정관을 만들고 각 교회별로 이를 채택하는 방식으로 한국 교회의 개혁을 진척시킬 수 있다. 현재 소수의 교회들만이 각자의 정관을 만들거나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의 교회들은 교단의 헌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각 교회는 정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첫째, 보편적 교회를 향한 연합이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연합“ 보다는 “교회의 자유“가 우선 해야 된다는 원칙을 상기해야 한다. 광대회의(廣大會議)들이 사제주의에 물들어 개혁교회의 원칙들을 무시한다면 더 이상 지교회는 이 회의들이 채택한 바 교의에 어긋난 원칙을 채용할 필요가 없다. 노회나 총회가 당회의 상회가 아닌 것처럼 교단헌법도 교회정관의 상위법이 아니다. 교단헌법은 공동의 신앙고백과 질서를 위한 일종의 협정문이다. 흥미있게도 각 교단의 헌법은 각급 치리회가 헌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자체의 규정을 제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예장통합 제63조; 예장고신 제77조; 기장 제43조)24) 이 규정의 활용 폭을 각 교단이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지에 따라 교회정관을 둘러싼 다양성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단이냐 그리스도냐를 결정해야한다면 개혁적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후자를 택해야 한다.25)
둘째, 일반적 법규범으로 보아도 지교회가 비법인당사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대법원 판례는 교회헌법을 교회 분규 해결의 기준으로 중시하고 있다. 특히 목사의 자격 혹은 이단 심판 등에 있어서 교회헌법의 역할은 매우 크다.(1972.11.14. 선고 72다1330 판결;1999.6.8. 선고 99도1543 판결) 그러나, 현행의 민사소송법 제52조에 대한 판례는 개 교회가 소송의 당사자로 취급됨을 명시하고 있다. 예컨대, 지교회의 재산 처분 등에 관한 권한은 지교회 총회에 부과하고 있다. 아직 교회정관과 총회헌법과의 충돌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판결은 보이지 않고 있으나, 지교회가 정관을 구비하는 경우에 이 규범이 교단 헌법과 상치된다해도 그 효력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판례가 있다.26)
지교회들이 공동의 모범정관을 만들고 이를 채택하는 작업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헌법을 은혜스럽게 개정하고 헌법 개정을 둘러싼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며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방법이다. 물론 개교회주의라는 악습이 이를 계기로 더욱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헌법은 가급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폭넓은 구조로 발달되어야 하고 이러한 점에서 개교회가 가지는 정관의 다양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같은 신앙, 같은 분별력이면 누구든 연합하는 훈련이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 만일 현재의 헌법이 유용하다고 믿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면 무리하게 모범정관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 최근 분규를 겪고 새로운 개혁적 체제를 모색하는 교회들끼리 먼저 모범정관을 채택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4. 결론
개혁주의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 멈추는 순간 고이게 되고, 고이는 순간 썩게 된다. 그러나, 사회개혁이 과거의 것을 버리는 작업이라면 교회개혁은 진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서 성경중심과 하나님중심이라는 개혁주의의 신앙원리는 더욱 순수하게 고양되어야 한다.
이 원리가 고양되는 방법은 각 시대의 역사성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성이다. 예컨대 1902년대의 한국 교회라면 통일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가질 필요가 없었겠지만, 2002년의 한국 교회가 통일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무시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왕정시대에 쓰여진 성경이 왕정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비유로 사용한다고 해서 성경이 민주정 보다 왕정을 지지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무지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수치와 무지에 물들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체제가 다 유한하고 죄 중에 있는 것처럼, 교회의 정치체제도 어떤 것을 택하든지 간에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현명한 것과 덜 현명한 것, 성경의 가르침에 보다 가까운 것과 덜 가까운 것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 교회의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제도의 역사성이 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의 축적 과정에 매개의 변증법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논문에서 다룬 바처럼 한국 교회의 헌법들은 꾸준히 목사의 사제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고 해석되어왔다. 전통은 아름답고 권위있는 것이지만 성경과 비교할 수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모름지기 전통보다는 성경을 택해야한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목사의 권위이다. 설교단 위에서 권위있는 말씀의 가르침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그러나, 목사의 권위는 영적일수록 바람직하다. 대체적으로 영적 권위를 갖춘 목사들은 제도적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반대로 영적 권위가 떨어질수록 그 목사는 제도적 권위로 보호를 받고 싶어한다. 영적 권위의 한계는 무한하지만 제도적 권위를 추구할수록 그 목사는 성경에서 멀어지게 되어있다. 칼빈의 제네바 통치는 때로 가혹했다. 그러나 칼빈이 어떠한 직위를 기반으로 그러한 통치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칼빈은 가르쳤고 시민들은 복종하였다. 한국의 목사들은 칼빈을 본받는 게 바람직하다.
목사직의 사제화에 대한 비판은 이 경향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진실한 목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일부는 이들의 지도력 하에서 매우 아름답고 역동적인 결실을 맺고 있다. 그러나, 비록 자신의 의에 대해서는 나무랄 바가 없지만, 한국 교회 때문에 이들이 가슴아파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한 유기체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런 교회의 면모를 사심없는 눈으로 주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회복할 수 있는 데도 그것을 등한히 하고 모든 잔학상을 간과한다면, 그들은 잔인하고 사악한 사람들인 것이다.”(칼빈 1988, 315) 진실한 목사들이라면 그가 형제들을 돌보지 못한 죄에 대해 애통해 해야한다.
본 논문에서 주장된 바가 다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차적으로 기본 문서들에 대한 독해가 빠져있고, 이차적으로 각 입장들에 대한 심도있는 비교가 역시 생략되어 있다. 하나의 논문에 다 포함되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필자의 역량과도 관계가 있다. 논지는 대체적으로 상식적 수준에서 전개되었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만일 한국 교회가 자신들만의 독특한 논리와 개념과 주장으로 게토(ghetto)화한다면 이 또한 개혁주의적 원리-이 세상과 구별되었으나 이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음-를 배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살아 움직이는 힘이어서 한국 교회가 아무리 발버둥친다해도 교회의 개혁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 교회의 모범정관 갖기 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계기를 앞당기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교회헌법비교
비교항목 |
합동 |
통합 |
고신 |
기장 |
감리교 |
성결교 |
주님의교회 |
구성 |
신조 요리문답 정치 헌법적규칙 권징조례 예배모범 부록 |
교리 정치 권징 예배와 예식 |
교리표준 -신앙고백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관리표준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지침 헌법적규칙 십이신조 |
신조 신앙고백서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
교리 헌법 조직과 행정 의회 교회경제 교역자은급법 재판법 감독회장 및 감독선거법 연회경계 과정 |
헌법 -교리 -예배규범 -생활규범 -지교회 -치리회 -포상/징계 헌법시행세칙 관련법 |
교리 헌법 권징조례 예배모범 (*장로교와 같음) |
정치조항 |
122조 |
103조 |
122조 |
80조 |
29조 |
92조 |
29조 |
정치원리 |
8조 |
6조 |
8조 |
8조 |
× |
× |
6조 |
교회 성원 |
장년신자 15인 이상 |
세례교인 20인 이상 |
장년교인 20인 이상 |
성인 15인 이상 |
입교인 15인 이상 |
성년교인 10인 이상 |
성년교인 15인 이상 |
항존직 |
목사 장로 집사 |
목사 장로 집사 권사 |
목사 장로 집사 |
목사 장로 집사 |
감독 감리사 담임자(회원) 전도사 집사 권사 장로 |
교역자 -목사 -전도사 교직자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 |
목사 장로 집사 |
임시직 |
전도사 전도인 권사 서리집사 강도사 (권찰) |
전도사 서리집사 |
전도사 권사 서리집사 강도사 (전도인) (권찰) |
준목 전도사 권사 |
심방전도사 교육사 속장 |
|
(개 교회의 사정에 따라 자유로이) 전도사 직원 |
임기제 |
× (장로/집사의 경우 7년마다 신임투표 가능함) |
× |
× |
집사-1년 |
× |
× |
3년 |
피선거년령 |
목사-30세 장로-35세 |
목사-30세 장로-40세 전도사-25세 집사-30세 권사-30세 서리집사-25세 |
장로-30세 집사-30세 권사-45세 |
권사-50세 |
집사-21세 권사-30세 장로-35세 감독-55세 |
집사-22세 안수집사-35세 권사-45세 장로-35세 목사-28세 |
장로-30세 집사-30세 |
성별제한 |
○ |
○ |
○ |
× |
× |
○ |
× |
정년제한 |
70세 |
70세 |
70세 |
70세 |
70세 |
70세 |
× |
치리회 종류 |
당회 노회 대회 총회 |
당회 노회 총회 |
당회 노회 총회 |
당회 노회 총회 |
당회 구역회 지방회 연회 총회 |
당회 지방회 지역총회 총회 |
공동의회 사역자회의 노회 총회 |
각종 회의 |
공동의회 제직회 |
공동의회 제직회 |
공동의회 제직회
|
공동의회 제직회
|
임원회 기획위원회 입법의회 |
직원회 사무총회 |
목사회 장로회 집사회 |
1) 본 논문의 주요 분석 대상은 개신교회, 개혁교회 혹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교회”는 개신교회를 의미한다.
2) 정부당국에 보고된 개신교의 교세통계를 보면 1975년에 401만명, 1984년에 534만명, 1994년에 1,450만명, 그리고 2001년에는 1,282만명이었다.(문광부의 년도별 자료 참조) 교세통계와 인구센서스통계는 크게 다르다. 1985년 인구 센서스의 개신교인수는 649만명 정도있었는데, 1995년에는 876만명 정도이었다. 1995년의 비율을 기준으로 한다면 2001년의 실제 개신교인 수는 774만명이다. 교세 통계는 다양한 이유로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는 ꡔ기독신문ꡕ 2000.4.26. “정직캠페인<14> 교회 안의 거짓말” 참조.
3) 손봉호 외, ꡔ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98 선언문 해설 자료집-ꡕ (서울: 기윤실, 1998)의 “선언문” 참조.
4) 「뉴스앤조이」 2002.7.29.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5) 예컨대, 어느 교차로에서 교통사고가 빈번하면 긴급구난행위와 더불어 의식개혁과 제도개선이 동시에 필요하다. 입장에 따라 어느 것을 더 강조하느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빈번히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어떤 특정한 수단만이 해결책이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6) 박병진(1993)은 교황정치, 감독정치, 조합정치, 자유정치, 장로회정치의 5분류를, 임택진(1994)은 교황제도, 감독제도, 회중제도, 대의제도, 무교직 제도 등의 5분류를 주장하고 있다. 대개의 교단헌법은 정치체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흥미있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 만이 총론에서 박병진의 분류를 적시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보아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는 같은 맥락이며, 회중정치나 자유정치 혹은 무교직제도는 같은 맥락이기 때문에 김득룡의 분류가 훨씬 타당하다.
7)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 제181문은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장로회정치만이 완전하냐?” 이에 대해 정치조례는 “장로회정치만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의 법에 복종할 것을 고백하는 자면 곧 유형교회의 회원이니, 저희가 고백하는 신앙과 복종하는 정치가 완전치 못하여도 유형교회의 회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하지 1980, 93)
8) 세 종류의 교회정치체제를 대입시키면 감독정치는 왕정에 준하고 장로정치와 회중정치는 민주주의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9) 박윤선도 그의 ꡔ헌법주석ꡕ에서 “장로회 정치의 정신은 한 마디로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다는 교리이다. 이 사실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교회헌법 주석가들이 지적하는 바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박윤선 1983, 5-6)
10) 신정(神政) 혹은 신정정치(神政政治)라고 알려져있는 체제를 김삼환이 구태여 신정주의(神政主義)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명료치 않다. 아마도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대조되는 말로 신주주의(神主主義)라는 말을 쓰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아마도 신본주의(神本主義)라는 신학용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의 대조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임종만은 교회정치를 “신본 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임종만 1974, 69)
11) 가끔씩 칼빈의 제네바 공화국을 신정정치체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김득룡 1984, 355) 칼빈주의의 후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오토 베버는 이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카이퍼 1987, 88-89; 베버 2001, 82) 이러한 오해가 발생한 이유는 1555년 이래로 제네바가 거의 완벽히 칼빈의 권위하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점과 이 체제가 다분히 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다음 두가지 점에서 칼빈의 제네바 통치는 신정이었다고 할 수 없다. 1)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2) 칼빈의 지도력은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다. 도리어 일반 영주들 조차 거의 신정적 권한-예컨대 파문(excommunication)의 권한-을 사용하던 16세기 중반 유럽에서 칼빈의 제네바가 교회의 일과 국가의 일을 구분하려 노력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2) 근대에 이르러 이슬람 근본주의를 채택하는 몇몇 나라에서 예외적으로 이와 유사한 체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체제들도 알라의 직접적 계시를 강조하기 보다는 코란의 해석에 대한 성직자의 독점권을 강조하는 정도이다. 단지 성직자가 세속적 권력자의 상위에 서서 체제의 운영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신정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13) 물론 이러한 관념은 일반 성도들이 훨씬 더 개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02년 1월 16일에서 28일 사이에 실시한 “성직자와 평신도”란 네티즌 설문조사에는 국내외의 네티즌 13,599명(남 7,521명/여 6,078명)이 참여하였다. 이 설문에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실질적으로 목사들), 안수받은 목사, 복음전파와 구제사역의 전임사역자, 목회자와 교회제직들, 모든 기독교인, 중 누가 “성직자”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30.7%가 목사들, 29.1%가 전임사역자, 24.2%가 모든 기독교인이라고 답변하였다. 반면에 네티즌이 보기에 한국 교회 일반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였을 때 목사가 60.2%, 안수받은 목사가 21.0%를 차지하고 있었다. ꡔ뉴스앤조이ꡕ 2002.2.8.
14)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주께서 내가 이 단 위에서 교인들 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바랍니까? 아닙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것으로 자신에게 복종케하기 위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다른 양과 마찬가지로 양떼 중의 한 마리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정성구 1995, 371)
15) 예장통합에서만 당회에 참석할 수 있다.
16) 이미 지적한 바 처럼 박병진은 그의 저술들에서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다. “민주주의 척도를 가지고서 장로회정치를 헤아린다고 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박병진 1993, 37)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그의 신학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군사독재의 권위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17) 자양교회 사례를 보면 위임목사의 두 자녀 유학자금이 영수증도 없이 5년간 1억 2천만원이나 지출되었다고 한다. 「뉴스앤조이」 2001.12.27.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납부한 십일조를 기준으로 조 목사의 1년 소득을 추정하면 약 11억원을 받는다는 기사도 흥미있다. 「뉴스앤조이」 2001.5.30. (물론 이러한 추정은 조 목사가 교단에 대한 자신의 열성 때문에 십일조를 진실과 다르게 납부하지 않았을 때만 적용된다.)
18) 현재 각 교단에서는 총회장을 장로에게도 개방하는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다.
19)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이 초래한 또 하나의 문제는 장로들의 목사 종속이다. 장로의 권고사직은 당회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어떤 장로가 다른 장로들에 의해 권고사직의 충고를 받았을 경우 목사는 당회장의 권한을 사용하여 이의 의결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의사결정구조는 자연히 당회의 권력을 목사에게 집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0) 교회의 초기에는 필수였던 장로의 임기제가 점차 사라진 과정도 흥미 있다.(박윤선 1983, 75) 이 점에 관하여 박병진은 “꼭같은 종신직원이요, 위임 직원인 목사에게 대해서는 이같은 조항이 없는 데 왜 굳이 장로 집사만 임기제한 조항으로 묶어야 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목사와 같이 처리하여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박병진 1993, 582) 박병진의 균형감각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 방향이 개악(改惡) 쪽으로 흘렀다는 점이 안타깝다.
21)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2002년 7월에 사법연수생의 사회봉사활동 일환으로 「교단헌법개정안연구」를 실시하였다. 기윤실의 「한국기독교교단헌법개정연구(초안)」 2002.8.26. 참조.
22)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국 교회의 정치 구조를 개혁할 것이냐는 문제에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있을 수 있다. 본 논문은 부록에서 그 예 중 하나로 「주님의 교회 정관」을 여타 교단들의 헌법과 대조하고 있다.
23) “당회는 회중 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노회도 당회에 대하여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를 인용한 박윤선은 “우리가 장로교의 치리회들에 대하여 상회나 하회란 명칭을 즐겨 사용하지 않아야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박윤선 1983, 120)
24) 예장합동은 이 점을 명료하게 하지 않고 다만 제8장 2조에 “각 회가 다 노회적 성질이 있으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정치조례를 답습한 것으로서 사실상 당회의 자립적 성격을 반영하는 표현이나 박병진은 이 조항에 대해 도리어 지극히 모호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 박병진이 이 조항을 모호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노회가 당회의 상회라는 그의 인식에 모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하회의 결정을 번안 교정하는 상회가 없는 지교회는 장로회정치 하의 교회일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박병진 1993, 347)
25) 이 점에 대해 링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장로교)교리로 양육받은 남자나 여자는 견인(堅忍)에 대한 불안한 생각과 피곤을 모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양심(良心)의 주“라고 믿고 있다.“(링글 1992, 157)
26) “원고교회가 사단의 실질을 구비한 이상 그 조직과 활동을 규률하는 규범이 상부단체인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정의 교리와 장정이 있다하여 사단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1960. 2. 25. 4291민상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