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
우리 죽산사 1946년 병술년 지금부터 80년전 세워진 사당 서원으로써 필문 선재 다섯째 아들 성심당 죽계공파 성심당 형원, 호산공 달선, 참판공 수의제 백호, 대입 조부님 음력 9월 20일 유림들과 종인들이 봉사하다가 이제는 죽청 문중에서 제위를 모시고 있다. 죽산사 하면 회대기 대부님 고 학휴님 조부 존암은 을호이시다. 이 학자님은 고종 00년에 과거에 응시하셨고 나주 도 일원에서 후학도를 양성 하신 그 당시 학자요 유명한 스승님이셨다.
또한 병관 병채 조부님 승원은 능주 향교 등 유림에 출입하시고 고종 2년에 알성 급제에 응시하셨다. 또한 전라도 남북 호남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 하셨다. 수동 큰 배성님과 같이 능주 일원에서 후학도를 남기시었는데 죽청리 부촌아저씨 찬식님 저의 3종 숙께서 제자 이시고 풍수 지리학 학자이셨다. 이 두분다 풍수지리학을 우리 조부님께서 수학하신분이다 아울러 죽산사는 우리 조부님이 설계하셨고 이 모든 절차를 진두 지휘 하셨다고 고 이찬식님께서 손주인 나에게 알려 주셨다. 아울러 이사당을 준공후 우리 조부님은 풍수 지리학적으로 종계산 정기를 받아 그 찬란한 서광이 용암산에 반사되고 또다시 우리 죽산사에 Revlve 되어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정경이라고 풍수 자리학적으로 역설 하셨고 정의 하셨다고 이찬식 일곡 숙부님은 나에게 알려 주신바 있다.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인 예지몽은 우리 조부님께서 꾸셨다고 한다. 꿈에 죽산사 섯가레에 박이 주렁 주렁 12개가 열렸고 조랑박이 수없이 열렸다고 한다. 이는 훗날에 후손들이 번성할 꿈으로 훌륭한 인재 들이 태어 날 것을 예언하는 꿈으로 여겼다. 그 당시 용모리대부 인식님 조부님, 죽모리 대부 인필 관휴자님 경만 부친, 현재 아랫마을 사시는 봉기님, 찬식 부촌 아저씨는 가끔 말씀하셨다.
2. 광산이씨 시조에 대한 이야기
우리 광산이씨는 1856녀 철종 00년에 광주 중심사 선당에서 병진 대동보를 상서공 한림공 재학공파개 최초로 합의하여 이정을 시조로 합의했다. 한림공파 화해공이 계화공 1856년보다 50년 앞에 마치 가공인물 종금을 시조로 주장했다. 그런데 필문 선조님이 고려사를 재간할 때 고려사나 그 어느 문헌에도 종금이 시조라는 근거를 찾지 못해서 한발 물러 났다.
종금 시조론은 1970년 전후 한림공파의 의견을 듣고 금남 이달휴 님이 다시 여러 문헌을 찾던 중 신라김씨 대동보에서 그 실마리를찾게 되었고 종금으로 다시 논의를 했다. 이때 이찬식님과 달휴님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품평대부님 순휴 부친은 하늘을 보며 허허 시조를 바꾸다니 한탄하셨다고 한다. 품평 대부님은 양판사가 고시 합격 전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시전을 읽으셨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학식이 높으셨고 당시 죽청리에서는 학자로 통했다. 우리 조부님과 회대기 대부 모두 이정을 시조로 주장했다. 반면에 손자인 고 이학휴님은 종자금이 시조라고 주장하셨다. 나는 지금도 학휴 님이 학자이신 자신의 조부님의 말씀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유를 이해 할 수가 없다.
나는 종금이나 이정 누가 시조가 되어도 상관 없지만 상서공과 한림공이 서로 싸우는 것이 안타깝다. 이태교씨 이병학씨는 종금 비석을 다가네로 따내고 거기에 이정이라고 바꾸어 놓은 것은 꼴 볼견이다. 어서 3파가 합의 하여 통일된 시조가되었으면 한다.
다음과 같이 위의 저의 문자 내용은 우리 문중의 전성기를 이루워 내셨고 다음으로 금남 이달휴님과 인필 아저씨 경만 부친 생전에 우리 문중의 경영이 최고도 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서공 한림공 재학공 3파가 모여 광주 중심사에서 합의한 시조를 이정이라고 정의한 조선 팔도에 총 7권인 병진 대동보를 소유하고 있다. 이 보물이요 귀중한 문헌은 우리 조부님이 소유하시다 운명 하시기전 일곡 아저씨 찬식님께 전달되었다가 조부님 유언에 따라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전해들은 조부님의 유언에 의하면 이 족보는 우리문중으로는 이 국보급 보물이요 귀중한 문헌이니 꼭 우리손주 몽치에게 전해주리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조부님께서 운명하신후 우리 삼종 숙리신 판식님께 전에 받았다. 우리 조부님과 찬식님은 우리 광산이씨 시조는 이정이라고 정의 하셨고 1970 죽청 파보인 경술보에 이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성심당 죽청파와 청심당 나주파가 100년 싸움에 너는 밀양이씨 너는 가짜 광산이씨라고 싸울 때 우리 조부님은 나주파가 400년을 광산이씨 했는데 이제 밀양이씨가 되겠는가 서로 합의하여 같이 살자고 설득하셨다. 훗날 천식님은 도계 이봉기님과 논의한 결과 우리 조부님 유언대로 청심당과 성심당으로 합의 화해했다고 한다. 그후 공인 백호 선조님을 우리 문산에 이장 하게 된 것이다. 우리 문원님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카페지기 생각입니다.〉
현재를 살고 계시는 몽치 병관 아저씨께서 어려서부터 듣고 경험하신 이야기를 단톡방에 보내오셨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살아있는 역사라는 생각으로 오탈자와 약간의 문맥만 교정하여 그대로 올렸습니다. 7순 후반의 연세에 휴대폰으로 이런 긴 글을 쓰신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라는 생각에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만이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놓으면 후대에서는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우리 함께 마을과 관련하여 모든 이야기를 모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도록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주신 내용은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올리겠습니다.
몽치 병관 아저씨의 마무리 하시는 아래의 말씀 속에서 우리 문중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마음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종금이나 이정 누가 시조가 되어도 상관 없지만 상서공과 한림공이 서로 싸우는 것이 안타깝다. 이태교씨 이병학씨는 종금 비석을 다가네로 따내고 거기에 이정이라고 바꾸어 놓은 것은 꼴 볼견이다. 어서 3파가 합의하여 통일된 시조가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