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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에 앉을 오늘이란 의자
송원근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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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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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시인은 옛날을 떠올리며 마흔 살의 풍경을 구슬프게 노래하고 있다. 시린 바람이 부는 늦가을 오후 3시, 평상에 앉아 마르고 시든 갈대꽃과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바라본다. 옛날에는 눈부시게 하얀 염전과 소금창고가 있었다. 봄과 여름이 있었고, 아침과 정오의 햇빛이 있었다. 생기가 넘친 갈대는 소금처럼 하얀 꽃을 피워댔었다. 없는 것과 변한 것들, 사라진 것들을 하나 둘 기억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옛날과 오늘 사이의 간격이란 게 시간 탓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절망과 무력함을 나는 일찍이 초등학교 시절 체험했다. ’그 옛날에‘라는 동요를 눈물을 글썽이며 부르면서였다.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
나 언제나 즐거워라
동산에 올라가 함께 놀던
그 옛날의 친구들
먼 산에 진달래 곱게 피고
뻐꾸기 한나절 울어대는
그리운 옛날의 그 얘기를
다시 들려주세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슬픈 감성이 북받쳐 올랐다. 옛날 생각은 멜랑코리라는 우울한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오늘이라는 내 마음에 자라났다.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풍경을 상기하며 나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저 즐겁게 노래 부르던 철부지에서 생각하는 아이로 바뀐 것이다.
아마 정신적으로 불안했었나보다. 논산 시골에서 외할머니와 단 둘이 지내다가 입학과 더불어 맞이한 도시생활에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학교 주변의 가난한 일상은 어린 마음을 아프게 했고 불안케 했다. 애초 전쟁 피난민들의 자녀를 수용하기 위해 전쟁 중에 대전 변두리에 세워진 학교였다. 고아원, 공동묘지, 화장터, 나병환자 재활촌이 둘러싸고 있었다. 학생들은 철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속했다. 학교가 자리 잡은 동쪽 성남동은 가난하고 어두웠다. 어른들의 손찌검, 이어지는 앙칼진 아주머니 목소리와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판자촌 골목을 지날 때마다 들을 수 있었다. 서쪽 삼성동은 조용하고 밝았다. 반듯한 주택들이 질서 있게 자리 잡았고 선생님, 약사, 번듯한 시장 상점 주인들이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출근하였다. 나는 학교가 끝나는 대로 서둘러 철길을 건너 귀가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떤 두려운 생각도 철길을 건너 집까지 따라왔다. 만지기만 해도 전염된다는 나병에 대한 소문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내가 문둥병에 걸렸어요.“ 라고 울부짖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묻기에 오늘 봄맞이 가자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모든 아이들과 다 손을 만지며 돌았어요. 그들 중에는 문둥이촌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 후부터 내 손이 잘 펴지지 않아요.”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엉엉 울었다. 아버지는 “너는 걸리지도 않았거니와 설령 걸렸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아빠가 고쳐주마.” 그렇게 다독거려주었지만 그때뿐 학교는 여전히 무서운 곳이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한마디로 홀로 시골에서 지내던 아이가 우울한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 옛날에”라는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었다. 동요가 그려내는 그 옛날은 나의 도피처였고 유토피아였다.
선생님 풍금에 맞춰 개구리가 합창하듯이 60여명의 아이들이 다 같이 불렀을 것 같은 데 정확히 언제였을까? 이 글을 쓰면서 중고 교과서 사이트를 찾아 헤매었다. 4학년 음악책이 목줄을 한 흑인 노예처럼 헤진 옷을 입고 경매대에 올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교과서와 달리 가로보다 세로가 길고, 주황색 바탕에 호른이 그려져 있었다. 커버는 세월의 흔적으로 변색되고 헐었다. 가격은 20,000원, 시간을 견뎌낸 값이다. 표지를 넘기자 목차가 펼쳐졌다. ’봄바람‘으로 시작해 7번째 내가 찾던 ‘그 옛날에’가 있고 마지막 곡이 18번째 ‘기차 길 옆’이다. 4학년 시절에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것이다.
당시 최희준의 하숙생이 인기 유행가였다. 대학교 다니는 삼촌이 ‘정일랑 두지 말라, 미련일랑 두지말자.“ 구절을 부를 때 마다 나는 정이라는 식모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나이 어린 여자애들이 식모라는 이름 아래 이집 저집 떠돌아 다녔다. 정이라는 이름의 식모가 멍청하고 미련하기에 집에 두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조만간 쫓겨나 나그네가 될 정이가 불쌍했다. 4학년 어린아이가 정과 미련이라는 두 단어 사이를 추론한 인과관계였다. 그런 단어력으로 ’그 옛날에‘라는 동요에 감동했다니 혹 하숙생처럼 곡해하지는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가사를 파악하고 멜로디의 감성을 제대로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옛날이 언제이고 어디인지 의문을 품으며 들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지내던 입학 전 시기이고 논산 양촌이라고 생각하면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친구도 없이 외로웠다. 친구가 없었으니 당연히 동산에 함께 놀러 간 기억이 있을 리 없다. 혼자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매일이 외로움이었다. 그 옛날, 시골에 진달래가 곱게 피고, 뻐꾸기가 봄부터 여름까지 한 나절이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울어댔다. 그것이 오히려 시골생활을 더욱 지루하고 지겹게 했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가 있는 대전이 그리웠다. 외할머니가 화장을 하거나 옷치장을 하면 어데 멀리 가는가보다, 혹 대전에? 할머니 곁에 바짝 붙어 따라다녔다. 그러면 할머니는 쌀 한가마 1년 새경을 받는 애꾸눈 할머니와 합심하여 나를 다락방에 가두고 애경사가 있는 이웃집으로 떠났다. 다락방 문을 울며 두둘기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 그런 시골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나 스스로를 달랬지만 옛 생각은 달콤하게 찾아왔다. 나라는 존재가 시간의 노스탤지아와 마주한 실존적 존재임을 생애 처음으로 자각한 것이다.
’ 그 옛날에‘라는 동요를 알고 난 후 1년이 지나 그러니까 5학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봄날이 여름으로 넘어가던 춥지도 덥지도 아니한, 아마 5월이나 6월 어느 날이 아닌가 싶다. 방과 후 집에 가지 못한 채 빈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반장이나 부반장이었기에, 아니면 청소 책임자였기 때문인지 확실치 않다. 이씨 성을 가진 같은 반 친구가 옆 교실에서 5학년 선생들에게 둘러싸여 윽박지름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다. 아이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비록 나를 가르친 적도 없는 조용하고 무표정한 그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니 기억의 매카니즘이란 게 참 요상하다. 이 친구가 교장을 찾아가 방과 후 자습, 그러니까 과외공부 ( 60여명의 학생중 15명 정도 담임 선생님 지도 아래 학교 밖에서 발행한 문제지를 풀며 공부했었고 대부분은 철길 서쪽 삼성동 아이들이었다)가 불의하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옆 교실에서 5학년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겁박하고 있었다. 다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청소를 마쳤으니 집에 가겠다고 담임 선생님께 말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친구에 대한 걱정과 호기심에 그랬는지 복도에서 유리창 너머 교실 안을 힐끔 보았는데 그 친구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선생님 몇 분은 서서, 몇 분은 앉은 채 이 친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이는 꼿꼿이 상체를 세우고 항변하고 있었다. 한 선생님은 고함을 내지르며 친구의 뺨에 손찌검을 했고, 한 선생님은 기가 막힌 듯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같은 동료선생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난감해 하는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의 학생이 자기 반에 속해서였기에, 아니면 총각 선생으로 이런 일 자체를 챙피하게 생각했기에 그랬을까. 아무튼 나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내 의자에 다시 돌아와 앉았다. 그냥 가버리기에는 책임감이 가로 막았고, 혼자 남아 있기에는 우울했고 무섭고 슬펐다. 교실은 적막했지만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창문 너머 남쪽 보문산 쪽으로 고개를 올려보았다. 책상 서랍에서 청소담당으로서 받은 강냉이 빵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지만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그 옛날에‘ 라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이 역시 위로가 되지 못했다. 친구처럼 나 역시 무언가에 윽박지름을 당하는 아픔을 느꼈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를 표시해두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훗날 이 자리에 다시 앉아서 오늘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못을 꺼내 움켜쥐었다. 당시 우리들은 여러 개의 못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못을 철길 위에 올려놓아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기차가 지나가면 못은 철길 주변 어딘가에 튕겨져 있었다. 아침 운동장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기차를 위험에 빠트리는 그런 짓을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납작해진 작은 못을 칼이라고 생각하며 만화 속의 전사 로봇처럼 운동장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내달렸다.
서쪽에서 세 번째 교실, 5학년 3반 교실. 내가 앉은 의자 바로 그 아래, 반질반질한 송판 마루에서 시작하였다. 복도에 이르러서는 교실 창문 아래 하얗게 회칠한 벽을 따라 화살표를 그리며 긁어갔다. 남향으로 앉은 이층 건물이었다. 서쪽으로 남학생 1-5반, 동쪽으로 여학생 6-10반. 각 방향에 출입문이 있었고 가운데 계단으로 내려가면 교무실과 정문이 있었다. 화살표는 내가 드나드는 서쪽 문으로 향했다. 이층에서 계단 벽을 내려와 서쪽 출입문 앞에서 화살 표시를 끝냈다. 먼 훗날 원래 앉았던 자리에 돌아가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들었다.
이 화살표를 다시 찾은 때는 10여년이 지난 대학시절이 끝나는 즈음이었다. 나의 젊음은 ’소금창고‘ 시인과는 달리 햇빛이 들지 않았고 반짝이지도 아니했다. 연애, 취직, 군대 등 불확실한 문제들로인하여 젊음은 인생의 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이었다. 그 무거움으로 인해 제대로 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이 청춘이 서둘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간과 불공정한 게임을 한다고 느꼈다. 공정한 게임을 위해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그래야 시간에 짓눌린 나의 젊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옆구리에 끼고 다녔던 이재옥 토플이라는 책 끝 페이지 빈 공간에 그날 끄적거린 메모는 지금 서랍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다. ’슬프다, 이 가을이, 마치 병처럼. 고통스러운 이 가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아마 성심당 맞은편 지하다방 가배에서 썼을 것이다. 괴로운 마음의 무늬를 화폭에 그리고나서 맨 끄트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예술가의 심정이 이 같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이름 대신 날짜를 기입했었다. 81년 10월 10일.
대학입학으로 시작하여 졸업 즈음까지 서울은 낯설었다. 늘 대전에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대전에 오더라도 여전히 외롭고 어딘가가 그리웠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컴컴한 다방 한 구석에서 다시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하다가 불현듯 국민학교 시절, 5학년 어느 날 내가 긁었던 화살표를 떠올리고 그 의자로 돌아가 앉고 싶었다. 괴롭고 지루한 오늘, 날짜와 함께 내 심정을 메모를 했듯이 어린 나도 그렇게 화살표를 그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년과 미소녀를 잡아먹는 미노타우루스라는 괴물을 찾아나서는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의 비장함이 그러했을까? 나는 어린아이를 잡아먹고 젊은이를 내뱉은 시간이라는 괴물을 찾아 나섰다.
10월, 가을색이 완연한 오후, 국민학교는 그 누구도 없이 한적했다. 정문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생각보다 그러니까 기억보다 완만하다고 느꼈다. 학교에서 내려다보니 공동묘지와 화장터 자리에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고속도로로 이어진 터미날에 버스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모래와 사금파리로 반짝이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서쪽 출입구로 향했다. 이층의 본관 빨간 벽돌 건물은 그새 한층 올라 3층이 되면서 모든 게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미닫이 유리창 문은 여닫이 철문으로 바뀌어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쇠창살로 가지런히 막은 유리창 너머 복도와 계단을 올려보았다. 그토록 정성스레 긁어낸 표식, 화살표를 찾을 수 없었다. 손대면 묻어나던 흰가루 회칠 대신에 하얀 페인트로 매끈하게 칠해져 있었다. 허전했다. 옛날 내가 그은 화살표는 미래에서 과거로 가는 시간의 방향 표시며 내가 시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끈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소금창고 자리를 바라보던 시인의 마음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창살 너머 계단 벽을 바라보았다. 과거는 그냥 과거였고 나는 그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었다. 다시 컴컴한 지하동굴 가배다방으로 돌아와 내 앞에 차려진 허구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40대에 이르러 일본 헤이안 시대를 살아간 후지와라 기요스케(藤原清輔, 1104 - 1177)의 와카를 만났다. 1인 한수씩 100개의 시를 뽑아 편집했다는 백인일수의 84번째 시였다.
ながらへば
またこのごろや しのばれむ
憂うれいしと見みるし世よぞ
今いまは恋こいしき
오래 살다보면
지금 이때도 그리워하게 될까?
괴롭다 여긴 옛날의 일도
지금은 그리워지듯.
천 년 전, 일본인과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 내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구나, 연민의 공유 그러니까 동병상련이었다. 시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각각의 시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소금창고‘가 과거와 현재만을 다루는 데에 반하여 와카는 현재를 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현재가 언젠가 옛날이 되어 그리워진다면 현재의 고통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고통은 시간의 맥락에서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보여주는 요술을 이리도 짧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대학시절 불면으로 고통받는 나에게 " 공부만 하면 되지 무슨 고민이 있느냐, 아빠야 네 등록금 챙기랴 이런저런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이제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되어 옛 나를 그리움으로 돌아본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옛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앉았던 자리를 표시하고, 대학시절 날짜와 함께 메모를 남긴 의도도 시인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내 나이 사십은 IMF 외환위기의 때였다. 젊음의 꿈은 사라지고 샐러리맨으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었다. 사회적으로 모두가 불안정했다. 나 역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을 제대로 부양할 수 있을까, 자다가 여러 번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오늘의 나뿐 아니라 이십년 후의 나까지를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의 옛 고향으로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옛날에‘ 노래가 보여주듯이 진달래 피고 뻐꾸기 우는 소리를 한가하게 들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단, 아이들 다 키우고 은퇴 후에 돌아갈 것이다. 그때 한가하게 농촌 평상에 앉아 잿빛 건물 사이로 가방을 들고 분주히 돌아다니던 직장인이며 생활인인 40대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런 기대로 고향 땅을 구입했다. 미래의 관점에서 고통스런 오늘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와카 덕분이기도 했다.
소금창고의 시인은 마흔 살의 설음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오늘의 슬픔은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면 절대적 그리움으로 바뀐다는 것을, 그래서 절대적 그리움의 토대가 되는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소금창고가 사라짐을 애닯게 노래한 시인은 먼 훗날 후지와라 기요스키가 말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그 자리에 선다면 마흔에 느낀 절망이 얼마나 터무니없으며 왜 희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후회할 지도 모른다. 더욱이 앉아 바다를 보았던 평상도 사라지고 그 앞에 바다로 이어진 길도 높다란 아파트로 시선이 막힌다면 그 옛날 마흔 살에 보았던 빛바랜 갈대꽃과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가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다.
나이 육십이 너머 어린 날을 보낸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 '그 옛날에'의 그 고향인가? 돌아 온 고향에는 외할머니를 비롯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옛 고향이 아니었고, 단지 봄이면 진달래 지천으로 피고, 뻐꾸기가 종일 울어 변함없는 옛 고향이었다. 지나간 시절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니 더욱 그립다. 그러나 오늘은 먼 훗 날 과거가 되기에 역시 귀중한 시간이다.
봄 날 농장을 꾸미려고 묘목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사람은 ”언제 열매를 보겠느냐?“ 핀잔을 준다. ”내 나이가 어때서?“ 반문하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죽음에 임하는 미래 어느 날 묘목을 심는 오늘을 얼마나 그리워할지 알기 때문이다.
첫댓글 '그 옛날에' 정말 그 옛날입니다. 저희가 당시 부르던 가사는-
"앞날의 희망을 바라보며~♪
~으로 기억됩니다. 풍금으로 치기도 가장 쉬웠구요.
성남 초교도 열악 했지만, 저희 학교는 교실이 부족하여
군용 텐트 속에서 일 년 반 동안 수업 했던 피난 학교 수준이었지요.
아쉬움이 되는 오늘, 옛날이 되어갑니다. 옛날을 그리워 하며 지금의 고통을 아름답게...
송샘의 글 자체가 아름다움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