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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시위
대전 시청 광장의 천막 앞에서
1인 시위자의 목청이 왕왕거린다
보상하라, 보상하라
저 사람은 분명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삼시 세끼도 굶었으리라
지주에게 헐값으로 땅을 빼앗겨
피 토하는 심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으리라
허허벌판에 혼자 세상과 싸우는
그 사람의 측은한 모습을 상상하다
천막 앞을 지나치는데
웬걸 사람은 없고
녹음기만 제 혼자 돌고 있었다
참, 요즘은 1인 시위도 편하게 하는 구나
앞길이 막막할 정도로 억울하다면
허허벌판이 대수랴
사내답지 않게 녹음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출타한
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랴
저 사람은 매미보다 못하다
매미처럼 가슴이 뜨거워야 사람들이 반응하는 법이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목소리에는 영혼이 없고
뜬 구름을 잡아보려는 속셈만이 엿보인다
거미
누가 저기에 덫을 내다 걸었을까
당신을 잡고자 하는 집착이
외로움으로 출렁대는 저녁
실족하여 허방에 빠진 풀벌레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저기에 빠지면 죽어야 해방되는 저곳을
여태까지 사랑의 함정으로 알고 세월 보냈으니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영혼들이었을까
거미줄을 튕기며 새벽이슬이 떨어질 때쯤에야
번데기처럼 말린 풀벌레 앞에
마른 꽃잎 한 장 조하처럼 사뿐히 걸려있었다
거미
집 나간 애인이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나는 밤나무 숲이 내려주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심심하면 헤어졌던 애인이 올라와
넋 놓고 쉬고 갔던 자리
거기에 탯줄 늘어진 밤꽃들이
사향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애인은 분명 이곳을 지나갔을 거야
얽히고설켜 어지러운 거미줄에
바람이 달라붙어 눈이 따가운데
애인의 눈도 벌겋게 달아올랐을 거야
나를 잊지 못해 쓰르라미처럼 찌그럭대다
노을빛에 젖어오는 고갯길을 넘어 사라졌을 거야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수백 번씩 말을 되풀이하면서
나의 그림자를 애타게 찾았을 당신
이제는 거미줄마저 사랑을 포획하는 덫처럼 느껴져
다시는 숲속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맹세를 한다
시린 달빛을 밟으며 내려가는 길이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줄처럼 어지러웠다
불청객
오래 비워둔 고향집에
불청객 한 놈 찾아들었다
괴나리봇짐을 머리맡에 벗어 두고
불안하게 잠을 자는 놈에게
한 여자 살며시 다가와 이불을 덮어준다
놀라지도 않고
천사의 마음으로
이불 덮어 준 여자는 도둑의 어머니
가출한 아들이
집에 찾아온 것만도 감사한 일
도둑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표정엔
안도의 웃음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꽃샘추위
달아나는 겨울이 미련이 남았는지
미친년이 퉁퉁 부은 눈으로 울고 있다
삼동에 모질게 대했으면 됐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또 지랄인가
꽃들은 필락 말락 눈치를 보는데
미친년이 죽비를 들어
사정없이 꽃나무를 후려친다
그럴수록 꽃봉오리는 악착스레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다
철로변에는 낙화가 핏물처럼 낭자하고
꽃잎을 짓이기며 달려가는
쇠바퀴에도 핏물이 흥건하다
미친년을 빨리 북향 열차에
태워 보냈으면 좋겠다
긴 머릴 풀고 개지랄을 뻗던
그녀도 눈시울을 붉히며
지친 나무들을 흔들고 있다
무단횡단
산성동 네거리
손수레를 끌던 노인이
갑자기 무단횡단을 한다
달려오던 차 깜짝 놀라
거친 비명소리를 바닥에 끌고 간다
이놈의 할멈 미쳤나
백발의 운전사 삿대질 하며 눈을 부라리고
그러건 말건 손수레는 탈탈거리며
도로를 가로 지른다
도열한 플라타너스 아래에는
할멈처럼 마른 낙엽들이 굴러다닌다
폐차
그가 만신창이가 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비탈길처럼 가파르게 올라가는 세월 탓이다
말이야 더해서 무엇하리
자고나면 다발처럼 쌓이는 대출이자
낙화처럼 날아드는 빛바랜 고지서
휴대폰에 찍히는 협박 문자들
그는 불면으로 지샌 눈알을 번득이며
길고 긴 한숨을 내뿜는다
를 쳐들고
와락와락 소리를 지르면
집안을 굳건히 떠 받쳤던 기둥이 흔들거린다
그는 착하고 이쁜 내 남매를 남겨두고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렸다
세월을 끌고 왔던 강철 가슴이
바위에 부딪혀 찌그러졌을 때
골짜기에 서성이던 안개가
그의 상처를 문지르며 지나갔다
물수제비
고요한 강변을 향해 짱돌이 날아간다
아이들 돌팔매질 하며 수제비 놀이를 한다
수제비를 뜨는데 꼴등을 하는 놈이
수제비를 사기로 했으니
짱돌은 손아귀를 벗어나 물 위를 나른다
스키 타듯 미끄러지는 짱돌이
봄 햇살을 싣고 철벅철벅 물 징검다리를 만든다
오지 마라, 한번 떠나면
머나먼 길이 그리움으로 반짝이나니
나도 언젠가는 물 징검다리를 건너며
먼 옛날 그대가 나에게 사준
수제비 한 그릇을 생각하나니
예초기
예초기가 잔디 속으로 길을 낸다
훤히 뚫어지는 홍해의 물길처럼
허리 잘린 풀들이 어지럽게 튕겨져 나온다
그때마다 화끈히 쏟아지는 풀내음,
연한 줄기 속에 오래 간직된 푸른 수액이
성난 물결처럼 넘쳐 오른다
제 집터를 지키던 불개미들은
예초기에 맞서 육탄전을 벌이지만
끝내는 온 몸 열 받아 뿔뿔이 흩어질 뿐,
삶을 잃고 떠도는 자들의 행로처럼
예초기는 하루 종일 잔디 속에 길을 낸다
푸른 고집
사랑을 잃고 금강 변에 앉아 있네
담배 한 개비 피워 물고
연기처럼 흩어진 사랑을 생각하네
백제의 흥망성쇠처럼
흥청망청 흐르는 강줄기를 굽어보다
치어처럼 팔딱거리는 강의 심장을 생각하네
제 몸 채찍질하면서도
기어코 서해까지 닿고야 마는
금강의 푸른 고집처럼
우리 다시 만나 부둥켜안으면
도망친 사랑도 다시 돌아오겠네
유장하게 굽이치는 강줄기처럼
사랑의 역사를 다시 쓰겠네
석류
얼마나 할 말이 많아
둥글게 입을 벌리고 있나
붉은 뺨이 입인 저것
둥근 입이 뺨인 저것
달빛 환한 봄부터
풀벌레 지글대는 가을까지
가슴속에 저며 둔 침묵이
화산처럼 폭발한 것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소리 없이 입만 벌리고 있을 뿐
풀벌레 우는 밤을
달처럼 흔들리고 있다
국수
장터에서 친구를 만나 국숫집으로 들어간다
바쁘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친구를 달래 의자에 앉았다
멸치국물에 뚝딱 말아 내놓는 메밀국수에
시간이 없다고 종종거리던 친구도 느긋해졌다
젓가락에 면발을 휘휘 감아
후루룩 들이키니 국물에 늘어져 있던 면발이 힘차게 콧등을 친다
마주 앉은 친구의 콧등에도 면발이 치고 달아나자
우리 많이 배 고팠지 하며 메밀꽃처럼 웃어넘긴다
그 옛날 봉평의 메밀밭에서 술렁거리던 메밀꽃 향기가
내 마음까지 스며들어 우리 사이 메밀국수처럼 향기도 깊었다
꽃싸움
활짝 핀 진달래꽃 속에서 수술 두 개를 뽑는다
긴 속눈썹 뽑듯이 수술 뽑아 전장에 내 보낸다
세상은 훈훈한 봄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얕볼 일 아니다
봄맛에 취한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상대방과 샅바 걸어 싸우다 보면
허리춤 꺾이지 않으려고 잔꾀와 술수를 동원한다
그러다가 한쪽 허리춤 동강나면
승리에 취해 울부짖는 세상 얼마나 잔인한가
진달래 수술 뽑아 꽃싸움 할 때
전쟁터에 내려앉은 황혼이
한데 뒤엉켜 피 터지는 소리를 낸다
애기똥풀
강둑을 걷는데
어디선가 애기 울음소리 들려온다
금방 손주와 놀고 나온 길이라 환청이 들렸나
혹시 버려진 아기 있을 것 같아
강둑 풀숲 헤젓는데
노란 고깔 쓴 아기 하나 그 속에서 울고 있네
엄마 어디로 돈 벌러 갔나
이웃집에 볼일 보러 갔나
달빛이 아가를 감싸 앉았지만
아가는 기저귀에 똥 범벅된 채 울고 있네
달빛이 희미해질 때까지
강 물결 찰랑이는 소리로 울고 있네
옛날 신작로
30년 전의 국도는 가냘프게 흔들리던 코스모스의 심사를 알고 있을까
지금은 포장이 되었지만 뿌연 먼지 날리던 신작로
미군 지프차를 따라가며 먹을 것을 달라 손 벌리던 창피한 기억을 누가 알고 있을까
코쟁이가 던져주던 깐수메와 초콜릿을 주워 먹고 노까땜을 외치던 아이들 뒤에서 왜 코스모스는 화려하게 춤만 추었을까
아니다 지금 보니 춤을 춘 게 아니라 아이들 처지 애처로워 어깨 들썩이며 흐느꼈던 것이다
낮인데도 꽁지에 빨간 불 켜들고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의 행로에서 불현듯 30년 전의 추억이 넘실거린다
오후의 쟁기질
한 해를 묵혔더니
밭은 흙 알갱이를 쓸어 모아 어깨를 걸고 있다
장막처럼 견고한 땅에 쟁기를 댄다
결연한 의지가 무슨 소용 있으랴
흙은 어깨를 풀고 쟁기의 압력에 순응한다
뙤약볕에 독 오른 둑새풀도 소용없다
아웅다웅 싸움질하더니 쟁깃날에 뚝뚝 끊겨 짓이겨진다
힘찬 쟁깃날이 미끄러지듯 흙길 열어젖힐 때
지퍼를 열 듯 고랑이 시원하게 갈라진다
흙 알갱이 한겨울 내내 굳어진 습성으로
앙가슴처럼 단단한 줄 알았는데
갈아놓고 보니 넓은 가슴이구나
세상의 모든 것들 포용할 줄 아는 확 트인 가슴을 지녔구나
이제 내일이면 밭고랑에 마늘쪽을 심을 것이다
갓난아기처럼 종 주먹 쥔 놈들을 한 줄씩 고랑에 꽂고선
지독히 매운 냄새 풍길 그 날 기다릴 것이다
봄비
나는 지금 봄꿈을 꾸고 있는가
누군가 뒤꿈치 들고
마당을 밟고 가는 소리 들려 대문을 나서니
골목 끝 목련나무 가지에
주먹만 한 꽃송이 화들짝 터뜨렸다
엊저녁 하늘도 울음을 삼켰는지
꽃송이엔 말라붙은 빗자국 얼룩지고
쓸쓸한 내 가슴 목련나무 가지에 잠시 걸어 놓을 때
하얀 꽃송이 조등처럼 부풀어 올라
골목에 무거운 그림자를 내려놓는다
짱돌 지퍼
폭염 들끓는 하늘아래
저수지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지난밤의 폭풍에 뒤척이던 포말은
낮잠에 빠져 잠잠해지고
버드나무 휘어진 그늘아래
아이들 몇 물수제비를 뜬다
잠 한 숨 늘어진 물을 깨우려는 것일까
이마빡 납작한 짱돌이
잔잔한 물위를 찰방찰방 뛰어 간다
영락없다, 저 짱돌
낮잠이 훤히 열어놓은 아랫도리를
지퍼로 차르르 잠그는 모습이다
의자의 일생
대로변에 방치했다고 무시하지 마라
꼴은 저래도 예전에는 온 산자락 위압하는 고목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다 재수 없어 음식 냄새 질펀한 식당으로 끌려와
뭇사람들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팔자가 되었지만
아무도 의자의 출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주정꾼들이 막무가내 의자를 던지며 소동을 벌일 때
예전 칼바람 맞으며 한겨울을 버티던 오기 불끈 치솟아
상대방의 등을 내려칠 때도 있었다
제발 가만히 놔두라고 소리치지만
세상은 아예 묵묵부답이다
산비탈에 외다리로 서있을 때보다도
처참하게 내던져진 현실이 더 서글프다
가끔 식당 앞으로 날아와 우짖다 가는 딱새의 울음 속에서
의자의 과거가 푸른 활엽으로 술렁이던 고목이란 걸 안다
그러나 아쉬워하지 말아라
과거는 과거일 뿐
다시 태어나 이 땅에 던져지면 운명 완전히 뒤바뀌는 수가 있다
그 옛날 딱새를 받아주던 아량으로
뭇사람들의 엉덩이를 받아준다면
삐걱거리는 의자의 울음도 즐거운 새소리로 들릴 때 있다
별이 되고 싶어
개똥벌레가 가을 하늘을 높게 나는 것은
밤하늘을 채색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석 같은 별빛을 흉내 내고 싶어서다
산골짝 가시나무에 긁히면서도 하늘을 나는 것이다
애초에 별이 저렇게 반짝이지 않았다면
개똥벌레도 날개를 접고
풀섶에 묻혀 밤이슬로 매달려 있었을 것을
아이야, 뜰채로 개똥벌레를 잡지 마라
그것은 별을 따는 것이다
해탈
물속에 반쯤 넘어진 덩치를 보면
한 천년을 살았을 법도 하다
물떼처럼 이끼 차오르는 왕버들
쿵 쓰러졌던 그때의 소리가
천둥 번개로 살아나듯
수면을 줄기차게 때리는 빗방울 소리로 그득하다
물뿌리개처럼 수면을 쓸고 가는 빗방울들이
쓰러진 왕버들을 줄기차게 때린다
이제 왕버들은 해탈에 들 것이다
푸른 머리칼 풀어헤친 그늘 아래
사랑을 나누었던 청춘의 애무 소리를
이끼 낀 덩치 속에 저장할 것이다
찰랑이는 물결소리를 자장가 삼아
싱그러운 봄꿈을 꿀 것이다
이별 냄새
둑방 위 가지런한 고무신에서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
묵은 들풀 냄새 솔솔 피어오르듯
알 수 없는 이별 냄새가 피어오른다
풀벌레가 신발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어미 새가 제 집처럼 둥지 튼 걸 보면
아마도 신발의 임자는 오래전에 가출했을 농부였을 것이다
형사들이 밤낮 며칠 저수지를 뒤졌지만
아직도 익사체는 찾지 못했다
저수지가 주범 같지만 물증이 없어
버드나무도 답답하다고 술렁거렸다
아마도 주인은 둑에 신발 한 짝 고이 모셔놓고
생전처럼 쟁기로 뭉게구름을 갈고 있을지 모른다
들풀
난 아마 전생에 들풀이었는지 모른다
사시사철 몸에서 들풀 냄새가 난다
만약 내가 들풀이었다면 꽃도 피울 수 있을까
눈앞이 온통 절망이라면
마음속에 수없이 꽃을 피워 희망처럼 길 밝혀줄 수 있을까
제비
제비가 집단 이주를 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둥지를 철거한 뒤부터 그랬다
내 무관심 탓이었다
그때 관심만 있었어도 둥지의 철거를 맨몸으로 막을 수 있었을 것을
미안하다 제비여
처마에 나 있는 희미한 둥지 자국을 바라보며
개나리꽃처럼 주둥이 쫙쫙 벌리던 새끼들을 추억한다
새끼들이 어른이 되어 불안한 날개를 떨며 강남 길을 떠날 때
다음엔 농촌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제비들아
미안하다, 제비여
너의 둥지를 철거했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농촌을 용서하고
개나리꽃 같은 노란 주둥이 짝짝 벌리던 새끼들이
날아오르던 들판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예순살
벌써 내 얼굴이 리아스식 해안처럼 변했다
예순 살에 온 굴곡을 누가 아름답다 하겠는가
소싯적에는 과수원 길 따라 똥지게 나르고
흰나비보다 앞서 걸었지만
예순 살의 무게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주먹만 한 사과 툭 떨어지는 것처럼
내 인생 하루아침에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나 굴곡진 얼굴을 보며 세월을 탓하지는 않았다
고산준령에서 굽어본 리아스식 해안의 굴곡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톱날 같은 굴곡은 살을 벨까 섬뜩하지만
세월이 만든 굴곡은 비경이다
굴곡은 세월이 제 살을 깎고
무두질해 만든 것이라 눈물 나게 정이 갔다
엄마
난 엄마에 대해 문외한이다
늘 엄마를 생각하며
육순이 되었지만 엄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아는 것이라곤 엄마의 이름뿐
엄마가 어디서 태어나 물결처럼 흘러왔는지를 모른다
엄마가 고향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엄마의 혈연은 없는 줄 알았고
저승꽃은 짙푸르기에 엄마의 세월이 거칠다는 것만 안다
엄마는 갑자기 공중에서 뚝 떨어진 줄 알았다
엄마가 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먼 오일장에 가고
물 단지를 이고 비탈길을 오르내려도
힘이 들지 않는 줄 알았다
한 번도 맘 놓고 쉰 날이 없어 그런 줄 알았다
엄마가 침묵할 동안 허리는 논두렁처럼 굽어 있었다
땅에 입을 맞출 듯 걷는 엄마의 눈길은
곧 엄마가 묻힐 장지를 찾으러 가는 여정 같았다
자작나무에게 1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울컥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자작나무가 옛 애인의 살결처럼 희어서 그럴까
흰 등피에 얼굴 파묻고 있다
마을로 내려온 소녀 생각이 나서 그럴까
자작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할머니 무릎에 얼굴 파묻고 듣던
옛이야기 숨어 있을 것 같고
내 팔목을 휘어잡던 여인과
하룻밤 불사를 마음이
자작자작 피어오를 것 같았다
그때 흰 비둘기들이 자작나무 숲길을 날아
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
자작나무에게 2
언제나 하늘을 이고 있는
너의 모습을 사랑한다
하늘에 무엇인가 갈구하는 자세로 서서
바람이 잎을 스치며 지나가기를 바라던 너의 소원
그때는 틀림없이 그녀가 온다고 했었지
나를 만나고 싶어 안달을 하던 여자
흰 살결을 가진 여자
여자는 오지 않고 자작나무만 남아
높은 산마루 위로 안개바람 쓸어 넘길 때
여자는 자작나무 흰 둥치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울었다
둥치를 타고 내리는 빗물이 눈물처럼
병들고 아픈 가슴을 타고 내린 적은 없었다
훈련병처럼 차렷 자세로 서서
안개처럼 풀어진 사랑을 기다리는
흰 살결을 가진 여자
자작나무에게 3
흰 살결을 가진 그들을 보면
자작자작 춤을 출 것만 같다
나비의 날갯짓에도 쓰러질 것 같은
가벼운 몸매를 가졌지만
종일 차렷 자세로 서서 거수경례를 한다
아예 흐트러짐도 없다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질서가
얼음처럼 서늘하다
밑에서 쳐다보면 아득한 끄트머리
까치집도 지을 수 없는 고공이지만
대충 짐작으로는 알겠다
뭉게구름 온 몸 부풀려
자작나무 끝을 찌르며 가고
새 한 마리 위험하게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자작자작 타들어 가는 노을이 좋아
자작나무 온종일 그 자리를 뜨지 못한다
갈치 앞에서
거친 포말을 해쳐가던 날들은 지나갔다
칼 같았던 몸뚱이도 시장 바닥에선 무력하다
그들은 바다에서만 강자였다
죄 없는 물고기들을 사정한다고
칼날 휘두를 때가 제 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좌판대에 반쯤 눈 깔고 누워 있다
사람들은 좌판대 앞에 걸음을 멈추고
요리조리 칼날을 뒤집으며 싱싱한 옛날을 생각하지만
이제 무딘 몸 시퍼런 바다 속을 헤엄치던
광기어린 정의는 찾을 수 없었다
산골 움막집 여자 1
여자는 풀 치솟은 산길 내려와 개밥그릇을 내쏟았다
퀴퀴한 비린내가 들끓는 파리 떼처럼 날아다녔다
한 번도 풀길에 예초기를 돌리지 않아
상엿집 앞에만 자라는 도깨비풀이 까만 씨앗을 달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여자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투덜거리며 씨앗을 털었다
힘 빠진 태양이 산언덕에 반쯤 혓바닥을 내밀고 어둠을 기다렸다
밤이 무서운지 축사의 소들이 병 나팔을 불듯이 울어댔다
개밥그릇을 들고 산길을 올라가는 여자의 뒷덜미가 희고 가늘었으나
달아오르는 노을에 흰 옷이 붉게 변했다
벌촛날
무덤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왕왕거렸다
새벽을 쳐내는 소리 날카로워서 벌초가 힘들었다
무덤이 풀들로 채워지는 동안 풀줄기도 실해졌다
터 잡지 못하고 떠도는 씨앗들이 밭머리로 날아다녔다
질긴 풀줄기에 치여 예초기는 소화불량에 걸렸다
풀들을 먹어 치우다 지쳐 울컥울컥 성질부리기도 하고
아예 곡소리를 끊고 드러눕기도 했다
예초기를 끈 채 이빨에 박힌 풀 찌꺼기들을 뽑아주었다
등을 흘러내리는 땀에 작업복 윗도리가 흠뻑 젖었다
무덤 앞길을 지나가는 차주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손을 흔들었다
예초기 소리 살아나자 풀줄기들이
메뚜기 떼처럼 곰살스럽게 튀어 올랐다
산골 움막집 여자 2
처음으로 산골 움막집에 온 손자는 겁에 질려 울었다
들풀이 칼 가는 산길 따라 내려온 산그늘이
목쉰 짐승의 울음을 싣고 먹물처럼 번져갔다
목화송이 구름은 적막하게 하늘을 떠돌았다
움막집 입구에는 낡은 개집이 있었고
흰털이 꼬깃꼬깃한 개가 누런 눈을 치뜨고
땅에 박혀 있는 쇠말뚝을 뽑으려고 발악을 했다
목화송이 한 다래끼를 따온 엄마가
울고 있는 손자를 달래며 개의 뒷다리를 냅다 걷어찼다
그 바람에 개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개집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둑길
풀이 아우성치는 유등천 둑길을 지나간다
한참 가다보면 그이가 잠든 무덤이 나오겠지
태양이 언덕 위로 불쑥 솟아올라도
수양버들은 새벽안개를 털어내지 않았고
반짝이는 물비늘이 강변을 점령하고 있었다
수양버들 밑에서 낚시를 하던 사내가
담배를 꼬나물고 강의 심장 쪽으로 힘차게 낚싯대를 던졌다
사내는 지금 꿈을 꾸고 있겠지
조금 있으면 낚시에 걸려 올라올
팔뚝만한 가물치의 몸부림을 생각하고 있겠지
지금쯤 그이의 무덤에 서성거리는 새벽안개가 걷히지 않았겠지
유등천의 새벽안개가 풀을 쓸어 넘길 때
사내가 뿜어대는 담배 연기가
증기기관차의 굴뚝 연기처럼 파랗게 피어올랐다
노인과 리어카
노인이 낡은 리어카에다
비닐 뭉치를 쑤셔 넣었다
몇 끼를 굶었는지
노인의 배가 훌쭉 꺼져 있었다
비닐 뭉치가 고봉밥처럼
플라타너스 주위를 휘감고 부풀어 올랐다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열 들끓는 도로를 건너갔다
죽음의 전주곡처럼
차들이 숨 가쁘게 경적을 울려댔다
삐걱거리는 리어카 바퀴와
노인의 발이 쿵작이 되어
느릿느릿 도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노인과 리어카가 점령한 도로가
한참동안 무방비상태였다
선녀 집 오동나무
어둠타고 들려오는 방울소리에 잠을 깼다
골목 꺾어 들어간 첫 집
선녀 집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붉은 기 꽂아놓은 담벼락
쪽문 열고 고개 쑤셔 박고 무당 불러 봐도 대답이 없어
마당에 일렁이는 넓은 그림자 올려다보니
거기 숨 막히게 거대한 오동나무 서 있었다
덩치만큼 점잖은 오동나무
비좁은 마당 뒤덮었던 보랏빛 꽃들 다 지고
꽃 진 자리에 방울방울 열매들 뭉쳐 있었다
오동나무는 무당의 방울 흉내 내듯
바람결 따라 꿈꾸듯 딱딱한 열매를 흔들었다
서당 개 삼년에 풍월 읊는다고
무당나무 삼년에 오동나무 열매를 흔들었다
선녀가 없는데도 방울 소리는 골목을 빠져 나와
아련히 달밤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장마
참고 참았던 비가 야무지게 내린다
바람 난 남편 때문에 속 다 뭉개진 여편네처럼
뭉개지며 내리던 비는 그래도 참을 수 없었는지
끝장 보자는 듯 칼춤을 추면서
한바탕 마당을 휘젓는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울음소리가 마당을 흘러넘친다
골목이 넘치고 근처의 강까지 흘러넘쳐 도시를 위협한다
왜 저 빗방울은 아내처럼 앙가슴 때리고 있나
어떤 분노를 가슴에 묻고 있나
속 다 뭉개져 부엌에서 엎어져 우는 여편네처럼
소나기는 앙칼지게 빗방울을 내리쏟는다
장마
하느님은 넓은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숨겨 놓았는지
종일토록 울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 눈물 강을 이룰 때까지 그치지 않아
얼마나 많은 세간들이
휩쓸려 내려가야 정신을 차릴는지
하느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풀잎이 쓰러지고 제 보금자리 잃어
앙가슴 치던 풀벌레들이
눈물 닦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
뭉게구름은 언제 밀려올지 기약이 없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들이닥쳐
온 세상 기고만장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소나기가
실은 내 가슴속을 촉촉이 적셔주었던
사랑 비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마
며칠 동안 바깥에 나갈 수 없었다
집 앞 개울에는 물이 불어
어른조차 건너갈 수 없어 징검다리도 소용없었다
어저께는 여자 아이가 치마를 걷어붙이고 걷다가 물에 떠내려갔다
저녁까지 실종된 여자 아이를 찾지 못한 엄마가 거센 물살처럼 울부짖었다
책임은 구청에 있다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지쳐 일어난
엄마의 엉덩이엔 달맞이꽃 노란 피가 묻어있었다
엄마의 성난 얼굴에 뻘건 실핏줄이 퍼져 있었다
개울 끝에서 먹구름이 성난 군중처럼 몰려오자
둑의 풀들이 머리를 풀고 미친년처럼 날뛰다 까무러치곤 했다
장마
여름비가 마루로 들이닥친다
참고 참았던 갈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마루는 흥건히 고인 물을
스펀지처럼 빨아 당긴다
고향 들판의 무밭을 쓸고 왔는지
빗줄기 푸른 잎처럼 너풀거리고
고향 저수지를 스쳐왔는지
수양버들처럼 출렁거린다
여름비는 바쁘게 달려간다
푸른 치맛자락 늘어뜨리고
험한 협곡을 따라
수직으로 서서 달려간다
석류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모두가 침묵하는 시기에
입 닫고 있으면 복장 터진다는 듯
입 딱 벌리고 있는 붉은 턱
벌어진 입 속에는 피 묻은 이빨이 가득
의기투합한 턱에
누가 주먹을 날렸을까
침묵하라, 침묵하라
시대는 그렇게 협박해도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정의를 부르짖는 붉은 턱
냉장고는 매춘부처럼 운다
그녀가 수상하다
시골 며칠 다녀온 내 발치 끝에 상한 냄새가 밟힌다
놀라 옷을 펼쳐보니 얼싸안은 냄새가
가슴속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녀는 빈집에서 자살이라도 꿈꾸었던 것일까
겉은 동안처럼 팔팔하게 보여도 서른 살의 늙은 나이
황혼의 나이로 험한 세월 견딘 것이 힘들어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닐까
거친 숨 몰아쉬다가도 목을 추슬러
새벽을 맞이하던 그녀의 가슴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얼음 발 성성하게 박혀 있던 가슴속조차 허해져서
젊고 푸른 옛 시절이 그리워 질질 눈물 흘린다
정신 차리라고 몇 번이나 주먹으로 등짝을 내리쳐도
어깨 들썩이며 흐느낄 뿐
그렇다고 마음 떠난 여자를 붙잡을 생각은 없다
고민 끝에 그녀보다 더 싱싱한 여자를 들여놓았다
집에 놀러온 친구들이 엄청난 화대에 놀라지만
심심하면 그녀의 가슴속을 주무르며 세월 보내는
홀아비의 노후를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다
장미다방 앞에서
장미다방 담벼락에 오토바이가 기대 있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쉬는 줄 알았지만
낡은 몸체 위엔 먼지가 더깨로 앉아 있다
어깨만큼 넓은 손잡이는 부러져 있고
타이어는 터져 내장이 널브러져 있다
지금까지 달려 왔던 길을 기억하기 싫다는 듯
타이어의 지문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아마도 장미다방의 레지를 싣고 달렸을 오토바이
운전대를 잡은 노랑머리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강변도로나 들판 길을 달릴 때
타올랐을 저녁놀처럼 담벼락은 온통 피칠갑이다
장미는 넝쿨을 뻗어 노랑머리의 허리를 끌어안듯
오토바이를 끌어안고 있다
오토바이는 저런 모습으로
길을 달려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바람처럼 사라진 레지를 그리워하듯
장미는 오토바이를 휘감으며 저녁놀처럼 달아오르고 있다
노모의 금고
문맹인 노모도 금고 하나쯤 꿰차고 있었다
금고가 열리는 날은 노모의 생일이나 명절날
이 때 손주들이 오면 노모는 기다렸다는 듯
긴 치마 훌렁 걷어 부치고
속곳을 열어 옛다
손주들이 배춧잎 한 장씩 쥐고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때
자식들은 궁금증이 더해갔다
아무리 돈이 탐이 나도 훔칠 수 없고
아이디나 비밀번호 없어도
노모의 기분에 따라
금고가 척척 열리고 닫히기에
스위스 비밀계좌보다 더 안전하다
자식들이 떠나면서
노모에게 배춧잎 몇 장을 쥐어주었다
노모는 치마 속 금고를 열어
방금 자식들에게서
받은 지폐 몇 장을 입금시켰다
귀
내 귀는 소라껍질처럼 두꺼웠다
모래바닥에 모로 누운 소라껍질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어
세상의 소음을 빨아들였다
귀를 쫑긋 세우면
소리는 선명하게 귓속을 열고 들어가
파도처럼 내 귓속을 마구 때렸다
장마
여름비는 몸이 무겁다
빗방울 하나에도
나뭇가지가 휘청 휘어진다
방금 앉았던 잠자리도 놀라
멀리 달아난 뒤에도
빗방울은 나뭇가지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미련이 강할수록
꽃은 진저리치며 피어나고
빗방울은 제 속을 투명하게 열어
방금 핀 꽃망울을 숨겨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