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찌르레기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05-12-25 16:07:02
개미와 찌르레기 눈발이 무릎 깊이 쌓이고 찬바람이 몰아치자 들판은 고요했습니다. 숲이 무성한 산자락이라 그 아래 보리밭은 물론 사람들 몇 명이 오가던 마음 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럴 땐 찌르레기가 큰 걱정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노래만 부르다가 겨울을 맞는 찌르레기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렇지만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풀밭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기 때문입니다. 찌르레기가 어느 쪽에 살고 있는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큰일이에요. 찌르레기가 혹시 굶어 죽지나 않았는지” “왜 할 일없이 그런 녀석 생각을 해” 개미 할머니의 걱정에 개미 할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렇지만 인정이 어디 그래요. 매일 한 가족처럼 얼굴을 대했는데” “참 걱정도 팔자네. 할 일 없으면 낮잠이나 자요” 개미 할아버지는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큰일이야. 왜 이 마을에는 놀고먹는 아이들이 그리 많은지” “찌르레기 말고 또 누구 있어요” “베짱이와 귀뚜라미, 그리고 매미” “놀고먹기는요. 저들도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겠지요”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는데 무슨 방법이 있어” “그래도 전 노래 소리가 듣기 좋은 걸요” “당신도 큰일이야. 벌써 물이 들었어” 개미 할아버지가 불만을 터뜨리는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를 때마다 개미 할아버지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찌르레기는 풀잎 위에 올라앉아 할 일없이 노래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개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먹잇감을 밀고 당기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찌르르 노래만 불러댔던 것입니다. 그 꼴이 얼마나 보기 싫었던지 개미 할아버지는 찌르레기를 향해 듣기 민망할 정도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놈아, 우리 좀 도와 줘. 노래만 부르지 말고” “힘드시죠. 전 할아버지, 할머니를 돕고 있는 걸요. 제 노래만 들어도 힘이 솟지 않으세요” “예끼, 버릇없는 놈. 그렇게 게을러서 어찌 겨울을 나려고 그래” “걱정 마세요. 전 이미 겨우살이 준비를 다 마쳤어요” 찌르레기도 뒤질세라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올 여름, 이미 겨울에 먹을 식량을 미리 모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풀숲 마을의 어린 풀벌레를 모아 놓고 공연을 열었던 것입니다. 목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별난 찌르레기의 공연이 열리자 풀벌레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마을 앞 공터에 마른풀로 엮어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구름과 별을 벗 삼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밤이 깊어가도 노랫소리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풀숲 마을의 친구들도 모두 찌르레기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오고 별들이 깜박깜박 졸음을 이길 때까지 풀벌레의 노래는 계속되었습니다. 귀청이 따가웠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풀벌레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 소리는 금방 눈물이 되어 졸고 있는 별들을 깨우곤 했습니다. 공연이 끝날 시간에는 풀벌레들이 물어다 준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맛있는 벌레나, 구수한 알들이 무대 아래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래서 찌르레기는 겨우살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개미 할아버지는 찌르레기가 빈둥거리며 노래만 부르는 걸로 알았던 것입니다.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너 앞날이 걱정이구나. 올 겨울에 우리 집에 찾아와 구걸할 생각하지 말거라. 작년에는 베짱이가 찾아왔지만 먹을 것 하나 주지 않고 쫓아 버렸지. 그 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더구나. 모두 제 책임이니 누굴 탓 하겠어” “걱정 마세요. 저는 베짱이하고 달라요. 베짱이는 순진하고 어리석어서 힘들게 노래만 불러주고도 구걸만 하고 다녀요. 식량 구하는 법을 모르는 바보예요” “두고 봐 네 놈도 결국엔 베짱이 신세가 될 테니까” 개미 할아버지의 말에 찌르레기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베짱이와 비교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노래를 부르는 베짱이와는 달리 찌르레기는 자신이 어린 풀벌레들이 좋아하는 신세대 가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개미 할아버지의 충고가 찌르레기의 마음을 움직일 리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개미 할아버지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처럼 끙끙 일만해야 배불리 먹을 식량을 얻는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스한 집안에 들어 앉아 개미 할머니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개미 할아버지는 찌르레기를 생각하며 “휴~” 하고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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