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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의 위기와 생명의 시[오생근 서울대교수]
마음으로 읽는 시/언론과 문학지 서평
2005-12-28 22:04:35
한 시인의 시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이렇게 시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려는 해설의 자리에서 대상이 되는 시인의 삶과 문학적 이력을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과 이력에 대한 정보가 그야말로 전무한 상태에서 단지 출간될 시집의 교정쇄로 되어있는 작품들만을 읽고 어떤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자니 문득 난감한 느낌이 앞선다. 이 난감함은 그의 시가 어렵다거나 요즈음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어떤 종잡을 수 없는 시적 흐름의 생소함에 기인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쉽고 평명하다. 그러나 그 평이한 서술은 오랜 시적 훈련에서 성취된 일정한 높이를 동반하고 있다. 그는 신인인 것 같지만, 신인다운 서툴고 난삽한 시어를 구사하지 않고 삶에 대한 미숙한 모험심이 앞서지도 않으며, 오히려 삶을 바라보고 언어를 다루는데 깊고 성숙한 눈길과 솜씨를 보여준다. 유진택이란 시인은 누구일까? 그가 신인이 아니라면 이전에 쓴 시집은 어떤 것일까? 이처럼 단순한 일차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쉽게 의존할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데도, 구태여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주어진 작품만으로 그의 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당위감이 앞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편견없이 그에 관한 관심을 온당하게 표명하는 길이며 또한 그에 대한 올바른 시적 자리매김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가 농촌에서 성장한 사람이며 현재는 농촌과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는 교사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짐작이 구체적인 자료로 짐작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농촌과 자연을 대상으로 한 그의 풍부하고 안정되어 있는 순정한 서정성의 세계를 설명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시가 얼마나 새롭고 개성적인 세계를 보여주는가의 문제는 접어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일단 그의 시는 신인다운 생소함보다 신인답지 않는 성숙함과 친숙함을 보여준다 말할수 있다. 이런 느낌을 엉뚱하게 놀라움이나 난감한 같은 감정과 연결시키게 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감정적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일단, 그의 한 특징적인 시로 간주되는 「가난이 이 밟고 간 길」을 시적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가난한 세월이 밟고 간 길 위에는
가난한 상표가 찍혀있다
낡은 필름처럼 옛 추억을 되돌려보면
누런 보리밭 이랑을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떠밀려 산비탈을 넘는 등 굽은 황소
질척이는 울음은 멍에에 매달려 먼 옛날을 부른다
가난을 감추려고
32인치 초대형 텔레비전을 사고
요술 같은 컴퓨터를 들여놓아도
내 책상머리에 꽂힌 시집은
토장국의 구수한 냄새만 풍긴다
읽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시골길과
등 굽은 황소의 그늘진 울음,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목말라하는 가난의 그리움이다
__「가난이 밟고 간 길」
이 시에서 그리움의 감정으로 환기되는 옛추억의 풍경은 "누런 보리밭" "등굽은 황소,""시골길"이 있는, 가난했던 농촌의 정경이다. 그 추억의 풍경과는 다른 오늘의 변화한 농촌의 세목들은 여기서 벌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화자가 그 옛날의 풍경을 그리워하는 현실은 "32인치 초대형 텔레비젼"과 "요술같은 컴퓨터"의 현대식 기계가 갖춰진 집이다. 이 집에서 화자가 애독하는 시집은 "토장국의 구수한 냄새만" 풍기는 토속적 세계, 가난했지만 질박하고 공동체적인 정서가 있던 과거의 농촌 풍경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유진택이 꿈꾸고 지향하는 시적세계는 오늘의 변화한 농촌 현실이 아니라 과거의 농촌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의 정서임을 알수 있다. 물론 그것에 대한 그리움의 어조는 탄식이나 회환, 체념의 비애감이 아니라 과거와 추억을 현재화 시키면서 시대적 상실감을 넘어서려는 성숙한 건강성이다. 과거의 농촌에 대한 건강한 그리움은 "소"를 주제로 한 여러 시에서도 뱔견된다.
세월에 닳은 소의 마른 무릎이나
쇠발통같은 발굽에서 힘이 솟는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소발굽이 땅바닥에 도장처럼 찍히고
푸른 물줄기 사정없이 꺾이면 거나한 울음소리
밭머리 좁은 골짜기에 가득 짠다
___「코뚜레」
박아놓은 쇠말뚝을 뺄 수가 없다
간간이 고삐를 당겨서 둥글게 원을 그려보지만
최대한 볼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된 시야뿐이다
찰랑이는 저수지 너머 푸른 들판이 보여도
겁 많은 눈동자 속에는 아른대는 그리움만 가득하다
그 옛날의 등짐이 무거워 털썩 주저앉으면
우물대는 되새김질,
푸른 풀 같은 꿈을 씹으며
산너머 구름발에 걸린 먼 옛날을 기대해 본다
___「쇠말뚝」
자유가 박탈당한채 온작 사역과 부림만을 당하다가 늙게 되면 도수장에 끌려가는 한국소의 모습은 우리의 농촌풍경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물론 소의 운명이란 대체로 비참하게 생각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농촌의 풀밭이나 들길과 함께 연상되는 소의 형태가 늘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믿음직하고, 힘세고, 순하고, 참을성있고, 부지런한 소의 모습은 농촌의 풍경뿐 아니라 한국인의 심성과 정서에 잘 부합되는 이미지를 갖는다. 소는 그런 점에서 친숙하고 정겨운 우리의 황토빛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맟닿아 있다. 「코뚜레」에서 표현된 소의 건강하고 힘찬 외양의 묘사나, 「쇠말뚝」에서 "겁많은 눈동자 속"에 "아른대는 그리움만 가득"한 소의 묘사는 농촌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건 아니건 누구나 공감할수 있는 소에 대한 한국인의 오랜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 더욱이 소가 보여주는 "느림"의 성격은 현대사회의 파괴적인 "빠름"의 양적시간이 지배하는 시간에서 올바른 생태적 리듬의 가치로서 오히려 그 "빠름"의 의미를 반성하는 효과를 갖는다. "느린" 소의 모습은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가는 우리의 삶에서 그것자체로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론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소의 코뚜레가 괴롭게 뚫리고 말뚝에 묶이거나 외양간에 갇히는 괴로운 운명이라 하더라도, 소는 바쁜 농사철이 아니라면 산과 들, 풀밭에서 한가로운 해방감을 누리며 되새김질할 자유가 있었다. 구속이건 자유건 그런 모습으로 농사에 동원되고, 농민들의소중한 재산ㅁ혹록 1호로 손꼽히던 소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천규석씨의 진단에 의하면 한 마을의 "예순 남짓한 농사집마다 두 마리 이상으로 모두 백여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지만, 길들여져 부릴수 있는 농우는 다섯 마리가 채 안되어" 전통의 우리의 소는 멸종되어 가는 형편이며, 대부분의 소는"다만 살찌워 잡아먹기 위한, 품종도 계통도 모르는 수입 잡종소"라는 것이다.
그 소들은 "시멘트 외양간에 갇혀서 산과 들의 풀대신 시판 농우 사료를 시멘트 구유에 담아주는 대로 먹고 플라스틱 코뚜레를 꿰고, 때로 소가 목졸려 죽을만큼 질기디질긴 나일론 이까리에 묶여 사역대신 사육되어 비명 횡사당하게 됐다"(천규석, 「한국소의 팔자와 농민」)한우의 이러한 몰락과 멸종의 위기는 오늘날 농촌과 농민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한우에 대한 토속적 정서를 환기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는, 한우의 운명이 오늘날에도 변함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변화하면 할수록 전통적인 한우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고 그것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의 주장이 완강해진다는 뜻의 반영으로 보인다. 농촌의 생활과 풍속의 변화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농현상도 그러한 도시화의 결과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농촌의 공동화 현상은 그러므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다
맨드라미가 빈집을 지키고 잇다
독오른 장닭의 벼슬처럼
맨드라미의 성난 얼굴에 울컥 핏물이 솟는다
아무런 이유 없이 떠난 사람들,
돌밭을 일구던 뚝심만을 믿고
도시로 몰려간 사람들의 소문이
차디찬 북서풍에 젖는다
농사꾼이란 얼마나 빛나는 훈장인가
일벌레는 일만 해야 되는 법인데
세상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바람이 더욱 세차다
맨드라미가 휘청 허리를 꺾는다
간혹 우체부가 빈집에 꿈처럼 들렀다간다
__「폐가에서」
황량하고 쓸쓸한 농촌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이 시는 농사짓던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떠난 폐가의 정경이 참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아무런 이유없이" 떠난 것일까?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이유없이" 자기가 살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사람들이란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시의 화자가 이런 표현을 삽입한 까닭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게 될 상황이 아무리 절박한 것이라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납득할만한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농사꾼은 농촌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돌밭을 일구던 뚝심만을 믿고/도시로 몰려간 사람들"이란 표현에서는, 그들의 도시로의 이주가 성급한 결정이거나 무모한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화자의 비판적 시각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신경림의 시가 그렇듯이 고향마을을 떠난 사람들의 울분과 불만 혹은 분노와 원한을 직설적으로 대변하는 위치에 서있지 않다. 그는 "농사꾼"이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농사꾼"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집을 지키고" 있는 "맨드라미의 성난 얼굴은" 농사꾼이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사회 현실을 향해서라기 보다 "아무런 이유없이 떠난 사람들"의 조급한 결정과 행동에 대한 분노의 표정으로 읽힌다. 이것은 농촌현실에 대한 시인의 몰이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이나 고향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애정이 그만큼 강렬해 있다는 증거이다. "안화리" 라는 마을을 제목으로 삼은 일련의 연작시에서도 시인의 농촌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혹은 심정적 의존심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화자의 관점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현실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화리1」부터 모두 7편으로 구성된 작품들에서의 농촌은 농민들의 궁벽하거나 고달픈 삶의 생활상이 그려진 농촌이 아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회상의 주제 혹은 중심적인 묘사의 대상에 주목해 볼 때 그 점은 쉽게 확인된다. 둑방의 버드나무, 쇠줄에 묶여있는 소, 푸른 저수지, 둠벙 퍼는 아이들, 도망치는 미꾸라지, 무성한 아카시아, 산 주인, 무덤에 묻힌 조상들, 개울물의 자잘한 고기때들, 덤불콩, 밭머리의 펄쩍뛰는 벌레들, 강머리의 미루나무등, 안화리 연작시에서 주로 언급되는 이러한 대상들은 설사 그것들이 현재의 생생한 풍경이더라도 오늘날 농촌에서 심각하게 논의대는 주제들은 아니다. 여기에는 현실의 농민들이 등장하지 않을뿐 아니라 농약에 의해 자연의 생태계가 파괴된 환경문제가 제시되어 있지도 않다. 시인의 관심은 농촌의 한복판에서 농촌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논의하기보다 농촌을 대상으로 한 개인의 꿈과 서정적 세계 혹은 농촌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는데 있다. 이것은 시인이 오늘의 농촌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농촌에 대한 꿈과 그리움이 다른 현실적 관심보다 그만큼 앞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연작시에서 필자에게 가장 이끌리는 작품은 「안화리1」과 「안화리 7」이다.
둑방에는 아직도 버드나무가 있다
눈부신 머리를 풀고 수시로 허리를 꺾는 나무,
그 옆에 서 있으면 춘향의 살 냄새가 난다
어쩌다가 쇠줄에 묶여
가녀린 허리춤에 생살도 벗겨지지만
무던히도 싸놓은 생똥의 흔적에도
소들은 짐짓 태연한 표정이다
삶이란 다 저런 것인가
무심히 술렁이는 물살을 바라보면
금빛으로 내려앉는 황혼,
소들의 울음이 푸른 저수지에 꽉 찬다
___「안화리 1」
해거름 깔리는 저녁에
미루나무 목메이게 강둑에 줄지어 선다
알에 지친 황소의 눈망울 별빛에 닿을 때
별빛도 반짝 위안을 준다
아직도 잠들지 않는 들풀들은
내 발목 붙잡으며 쉬어가라 안달을 하고
그때마다 멍에에 매어 우는 속울음
텅 빈 마을 산자락 힘없이 흔든다
삶이란 어차피 정해진 길이 있고
황소는 그 길 따라 부지런히 걷는데
멍에에 묶인 자유 퓰어질 기미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더한 자갈밭 뚝심으로 갈고
주인의 회초리에 맞아 가슴속 깊이 멍이 들어도
미루나무 목메에게 선 강둑을 걸을 때는 즐거워라
말뚝처럼 깊고 슬프게 서있는 미루나무
하늘의 희망을 딸 욕심으로 더 높이 솟아도
별들은 그 키만큼 더 높이 솟아오르고
차라리 희망은 없는 것인가
그렇게 해거름 깔리는 저녁에
뚜벅뚜벅 걷는 황소의 눈망울에
갖은 고뇌의 풍경들이 영상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___ 「안화리 7」
우연히 뽑아서 인용한 시들인데, 모두가 소를 대상화한 작품들이어서
흥미롭다. 「안화리 1」에서는 주어가 무엇인지 모를 모호한 문장의부
분들이 간혹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둑방의
풍경은 한가롭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안화리 7」에서의
화자는 감추어져 있고 시적 흐름의 주어는 황소라는 점이 주목된다.
화자의 관점은 대체로 황소와 일치해 있다. "삶이란 어차피 정해진
길이 있고/황소는 그길따라 밤낮으로 부지런히 걷는데/멍에에 묶인
자유 풀어질 기미 보이지 않는다/갈수록 더한 자갈밭 뚝심으로 갈고
/주인의 회초리에 맞아 가슴속 깊이 멍이 들어도/미루나무 목메이
게 선 강둑을 걸을때는 즐거워라" 와 같은 구절은 화자와 항소의 시
점이 일치하면서 황소의 고달프고 즐거운 시간과 우리들 삶의 시간
이 뒤섞여져 구별되지 않는 공감의 인식으로 확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황소를 주제로 삼은 시라기 보다 황소를 통해서 인
간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인간이 겪는 고난과 희망의 역정을 전체적
으로 성찰해 볼 수 있게 한다. 시인은 농촌의 풍경 속에서 황소의
존재를 중심적으로 끌어들여 이러한 풍경이 비현실적이 아니라 현실
적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살아있는 상징의 효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의 시적 서술의 대상이 농촌이건 동물이건, 자연
의 한 부분이건, 이러한 서술의 태도는 거의 비슷화게 표명되어 있다.
유진택의 시에서 농촌의 현실보다 그 현실을 넘어선 추억과 서정이
중시되는 것처럼, 자연의 세계에 대한 많은 관심은 자연환경의 파과나
오염에 초점이 맞추어 지기보다 자연과의 교감이나 내면적 대화 혹은
인간의 삶에 대한 상징적이고 교훈적인 의미에 기울어 있다. 시의
이러한 자연관은 무엇보다 자연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의 삶이란 공허하
고 무의미한 것을 일깨우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순리와 질서
를 무시하고 자연을 이용과 파괴의 대상으로 삼아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 인간의 욕망이 어떤 파멸과 불행을 초래하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오늘날 겪는 온작 공해의 피해에서 너무도 잘 알수 있게 된 사
실이다. 자연에 대한 파괴와 약탈행위는 결국 자원의 고갈은 물론 인
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공멸현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이제서
야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사람들은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소리높
여 강조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 철저하게 문제를 의
식하고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두
운 미래의 괘도를 수정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논밭은
농약으로 황폐해지고 물은 계속 오염되어 가며, 숲도 온갖 계발의 명
분으로 벌목과 파괴가 도처에서 자행된다. 그러므로 벌목장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시인에게 그 장면은 인간의 이성이 살아 있지 않는 광
기의 현장으로 보인다. 「벌목장, 그 광란의 숲속에서」라는 제목의 시
가 주장하는 내용은 바로 그것이다.
아름드리 생나무의 밑동을 쓸어낸다
전기톱이 돌아갈 때 울리는 저 강렬한 떨림,
나무는 아픔의 전율로 우수수 낙엽을 떨어낸다
무더기로 생살이 튄다
전기톱의 억센 이빨은
단번에 수십 그루의 나무들을 토막내 버린다
___「벌목장, 그 광란의 숲속에서」
지금은 도끼나 톱으로 나무를 베는 시대가 아니다. 나무를 빨리 베지
않으면 시간을 줄일 수 없다는 인간의 조급함으로 전기톱이 개발된 후
다량의 나무들의 생살은 이처럼 기계음 속에서 무참히 절단된다. 시인
은 죽어가는 나무들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고통스런 공
감을 나타낸다. 물론 자연의 부분들에 대해서 갖는 시인의 공감이 어
디 고통 뿐일 것인가. 시인의 눈빛과 마음은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에
동참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경이로움의 체험으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뿌리의 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경건한 마음
가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어떤 지식이나 과학적
사고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무심한 마음으로
생명체인 자연의 존재와 흐름에 동참하며 깨닫는 겸허함을 보인다. 자
연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교훈을 이끌어내고, 현실의 공화와 절망을 회
복하는 힘을 발견하면서 자아의 상실혹은 자아의 불균형이나 욕망의
허구성을 반성하게 되는 일은 그러므로 자연스럽다. 두편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예를 검토해보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문득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앙상한 가지 끝에서 몸부림치다
어차피 떨어져야 할 운명임을 안다
낙엽이 온 몸 붉게 물드는 것은
세상을 하직하기 위한 이별의 노래를 부르기 위함이요
다음을 위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슬픔에 젖이 않는다
낙엽은 낙엽대로 더 깊은 노래를 마음속에 새겼기에
온 산속을 저리 가볍게 뒹굴고 있는 것이다
마저 붙은 낙엽이 다 떨어질 때까지
나무는 부동의 자세로 서있고
낙엽은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오직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__「낙엽에 대하여___살아남는 법」
화자는 낙엽을 바라며 삶의 허무나 슬픔, 쓸쓸함을 생각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가을의 낙엽과 삶의 조락 혹은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던가. 이런 점에서 "낙엽을 보며 문득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는
첫 구절의 표현은 아주 신선하고 새롭게 보인다. 물론" 낙엽이 온 몸
붉게 물드는 것은""이별의 노래를 부르기 위한 것"이라는 투의 시적
서술은 낙엽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정서나 인식과는 크게 다를바가 없
는 것이겠지만, "다음을 위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라는 진술
은 예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부제로 덧붙여 있는 "살아남는 법"
외에도 본몬에서 "살아 남는 법"은 세 번(1행, 5행, 12행)이나 반복되어
씌어지는데, 그것의 문맥과 의미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
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의"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주체는 낙엽인 것이
다. 이것은 낙엽을 바라보는 화자의 인식이 어느새 의인화된 낙엽의
인식으로 교묘하게 전환되면서, 화자와 낙엽이 빈틈없는 일체성을 보
여준 예이다. 낙엽은 때가 되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지만, 그 낙엽
의 떨어짐은 한 순간의 덧없는 소멸이 아니라 자연의 영속과 순환의
리듬속에 참여하는 것이자 지혜롭고 여유있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삶에 대한 패배적 태도가 아닌, 삶을 적극적
으로 이해하고 명상의 체험을 깊게 한 인간이 터득할 수 있는 지혜의
인식일 것이다. 이것과 비슷하게 두 번째로 인용해볼 수 있는 시는 다
음과 같다.
늙어죽어도 너는 원이 없겠다
누군가가 베어간 자리, 그 자리마다 어린 죽순이 한창이다
아비의 뜻을 따라
새끼가 그 삶을 잇는 나무,
대나무의 줏대 있는 삶이 더욱 창창하다
그렇지만 밤이면 달빛에 취해 흔들리는 나무
간혹 대피리를 불기도 하고
긴 손가락 잎새를 흔들어 문풍지 소리를 내기도 한다
.........
거친 비바람과 죽음의 눈발을 무릅쓰고
죽창처럼 하늘을 찌르던 기상
어린 죽순도 너를 많이도 닮아간다
꺾이지 않는 그 허리폭
띄엄띄엄 돌려 감은 뼈마디 사이
딱 부러지는 절개로 움트는 맛을 안다
___「대밭에서」
대나무를 바라보며 시인은 대나무가 상징하는 "줏대있는 삶"이나 "절
개의 표상"만을 반복하지 않는다. 이 시의 남다른 점은 대나무의 베
어낸 자리에도 어린 죽순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움트고 자라 앞서 죽
은 줄기를 닮은 모습으로 계승한다는 식물적 영속성의 신비로움과
"밤이면 달빛에 취해 흐느끼는"대나무의 울음소리를 표현한데 있다.
이로한 표현을 하게 된 시인의 자아는 개체서으로 좁 혀져 있는 자아가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는 차원으로 확대된 자아이다. 이시인의 이런한 자아의 확대는, 자
연과 대화할뿐 아니라 자연과함께 살고 더 나아가 자연과 인간이 원
래 한 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지닐 수 있는 체험이다.
산길 오르는 사람들은 안개 같은 여린 마음을
나무에 던져주고 잇다
나무는 복에 겨워 흔들거리고
그 아래 그늘에서
윙크하는 꽃들의 얼굴이 계집아이처럼 붉다
수줍어 얼굴 가리고 싶어하는 꽃들,
마음이 통한 산새들이 그 작은 날갯죽지로
꽃들의 얼굴을 가린다
___「꽃들도 윙크한다」
여기서 "사람"과 "나무"와 "꽃"과 "산새"들은 구별되고 대립되는 존
재들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로운 세계에서 공존하고, 대화하며, 소통
하는 관계로 맺어진다. 그러므로 나무와 꽃과 산새들은 인간이나 다
름없는 표정을 짓고 몸짓을 하기도 하며, 그 앞에서 사람들은 안개
같은 여린 마음을 나무에 보내기도 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
가 터무니없는 비현실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것을 찾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세계라
는 점이다.
유진택의 시는 현실의 고통이나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깊은 산
이나 자연, 혹은 농민이 없는 농촌의 풍경으로 한가롭게 독자를 유
도하는 시가 아니다. 그것은 오염되고 훼손된 자연과 농촌의 한 복
판에서 그 자연과 농촌의 젖줄을 잃어버려 파멸해가는 인간의 정수
리를 날카롭게 겨냥해 씌어진 시이다. 시인은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
이 하나가 된 삶을 추구함으로써 모든 생명체와 자연환경이 공생하
는 유기체라는 관점을 다양한 서정적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공생적 세계관에서 그가 꿈꾸고 그리워 하는 삶이 우리가 돌
아가기 어렵고, 도달하기도 힘든 과거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오늘의
현실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한다면, 그것의 가치는 보다 적극
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자연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의 삶이 공허하고, 자연파괴적 문명의 현란함속에서 인간은 병
들어가고 있을 뿐임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진정한 삶을 역설하는 환
경 운동적 차원의 시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