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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金殷鎬, 1892~1979]
2013. 11. 29. 6:17
김은호 [金殷鎬, 1892.6.24 ~ 1979.2.7]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의 작품세계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이당(以堂), 다른 이름은 양은(良殷)이다.
1892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晋)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御眞畵家)를 지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제미전(帝美展)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심사위원을 맡아 화필보국(畵筆報國)·회화봉공(繪畵奉公)에 입각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그밖에 조선남화연맹전(194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1), 조선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7) 등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도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한유동(韓維東) 등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림은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중심 영역은 무엇보다 인물에 있었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 이래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線描)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단순한 전통 화법의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화를 통해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산수풍경, 문인화(文人畵)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간성(看星)》《향로》《군리도(群鯉圖)》《춘향초상》《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두산백과]
김은호는 친일활동의 명성에 걸맞게 한국 근현대 채색화에 왜색풍을 수용하여 유포시켰고 제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친일파로서 김은호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려니와 폭 넓은 일본 채색화풍 수용과 제자 배출은 우리 현대회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식민잔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김은호는 인천의 부농 집안 출신으로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07)를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이다.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쳤고(1908),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김은호는 어려서부터 보여온 그림에 대한 능력과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하였고,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쳤다(1912∼17). 그의 입학은 영풍서관에서 만난 서예가 현채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등에게서 전통서화를 익혔고,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이'(以)는 주역의 24괘 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그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었다(1915, 1928). 초상화가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 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 경력은 김은호가 친? 1ff8 軀? 화가로 전락하는 서막인 셈이다.
서화미술회 졸업 후 김은호는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서화협회'(1918년 발족, 1921년에 첫 협회전 가짐)전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까지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화가로서 그림에만 전념하는데, 특히 일본식 채색화 기교에 치중하면서 그나마 지녔던 민족의식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1922년 이후의 작품 경향과 '선전' 참여 활동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 대부호 김용문의 도움으로 다녀온 3년여의 일본 유학(1925∼28)은 자신의 전통적 기법에 기초한 화풍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정식으로 습득한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의 청강생으로 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받았다.
유키 소메이는 서양화의 사생기법과 접목시켜 자연사생 중심의 새로운 일본 풍경화풍을 일으킨 화가이다. 김은호가 귀국하여 제7회 '선전'(1928)에 출품한 [늦은 봄의 아침](暮春の朝) 이후 섬세한 채색화에는 그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사실 김은호는 인물화나 화조화에서 그 이전부터 이미 장식적인 일본 채색화풍에 물들어 있었다. 선전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심사위원의 구미에 맞는 형식을 구사해야 했기 때문인데, 김은호는 1회 '선전'에 [미인승무]로 4등상, 3회 때 [부활 후]로 3등상, 7회 때 [북경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하였다.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전'(제국미술원전람회)의 일본화부에 입선하기도 하였고 '동양회화전'에서는 [단풍]으로 1등상을 받았다(1928). 이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풍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제8회 '선전'(1929) 때 출품작이 입선에 그치자 출품을 중단하였고, 한때 발길을 끊었던 서화협회전에 다시 참여하였다. 이 행동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 같은 미술인의 전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는 허백련과 2인전을 갖거나 김용문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혔고, 특히 후진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8년 만인 제16회 '선전'(1937) 때부터 '참여'작가로 선정되는데, 바로 그 해 가을 앞서 설명한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김은호는 자신의 출세욕에 따라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화단의 자리를 굳혔다. 그러니 주변에는 자연히 많은 사회 저명인사 애호가와 화가 지망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김은호 자신도 후배양성에 관심이 많았고, 한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지칭되듯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화실 낙청헌(絡靑軒)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이묵회'(以墨會)라는 서화연구회를 꾸렸고, 이들 중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조중현, 이유태 등은 따로이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1936년부터 정기전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박광진, 김복진과 함께 체계적인 미술교육기관으로 '조선미술원'을 개설하였으나 시도로 그쳤다.
'후소회'는 김은호의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의 섬약한 일본식 채색화풍을 전수한 모임으로서 일본 남화풍이 가미된 산수계열의 이상범 문하 '청전화숙', 전통적 남종화풍을 고수한 허백련의 광주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3대 후진양성 통로였다.
이러한 세 유형의 화가 모임 가운데 특히 '후소회'의 활동이 가장 돋보여 해방 후 국전 운영과 화단까지 주도하는 정치력을 갖게 된다. 여섯 번의 정기전(1936∼43) 외에도 후소회원들은 '선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1934년부터 김은호가 지도한 백윤문, 한유동, 장운봉(장덕), 김기창, 장우성 등이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였고, 제21회 '선전'(1942) 때에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21점이 회원작품이었으며, 또 2점이 특선하여 세상의 관심을 끈 바도 있다({매일신보}, 1942. 5). 뿐만 아니라 회원의 주축을 이룬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은 최고상과 특선 등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주변의 시샘과 방해공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기창이 16회부터 19회까지(1937∼40) 연속 4회 특선으로 김은호의 제자 중 첫 작가로 선정되는데, 19회 특선 때의 일화가 그 한 사례이다. 심사중 특선후보 작품 속에서 일인 심사위원이 김기창 작품을 치워 놓자 안면 있는 다른 심사위원에게 간청하여 재심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심사위원이 김은호의 제자사랑에 감복하여 무감사 특선으로 밀어 주었다고 하며, 김은호는 답례로 자신이 아끼던 고려청자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청각장애자인 제자를 생각하는 김은호의 '인정미'와 심사원 자격으로 '참여'한 정치력을 한껏 과시한 것이다.
이 일화는 이후 화단에 친일파 화가의 대량배출, 인맥에 의한 파벌 조성과 왜색조의 채색화풍을 풍미하게 한 요인이 되었음을 적절히 시사해 준다. 이런 현상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하며 해방 후 화단에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관변을 맴돌며 친일행각은 철저히 감춰지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온 김은호는 일제에 부역한 탓에 결국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했다.
그러나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내지 득세에 편승, '인정미'로 기른 제자들의 옹호 속에서 다시금 화단의 총수로 떠오르게 된다. '미협'(대한미술협회)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주도적 참여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제도권 미술계의 가장 거대한 파벌로서 일제 강점기에 이어 지속적으로 정치력을 키워 갔다. 해방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정심한 필치와 채색의 인물화 분야의 일인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주한미국 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는 화풍도 그러하려니와 일제 때 어용화사에서 시작되어 관변에서 맴돌며 살아간 흔적의 좋은 사례들이다.
이에 힘입어 김은호는 군사정부 아래서 서울시 문화상, 5월 문예상 미술부문 심사위원과 8·15 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이상 1962),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1965) 및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66)과 예술원상(1968), 제11회 5·16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1976)을 받는 등 다른 친일인사와 마찬가지로 친일화가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에 못지 않게 김은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도 존경과 찬사로 일관된다. 이은상은 팔순기념으로 김은호를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솔거 가신 뒤에 천오백 년 긴세월을 동방화단에 누구누구 해옵던고 화선을 만나려거든 이묵헌을 찾으시오 붓끝에 새가 울고 먹 뿌리면 꽃이 피고 산수인물이 조화 속에 나타나고 담소로 팔십평생에 늙을 줄을 모르네 빼어나 고운 모습 학수(鶴壽)를 사오리다 수정같이 맑으신 뜻 석수(石壽)를 사오리다 문생들 화통을 이어 백대장생 하오리다." (畵仙以堂頌, 1971. 8)
또한 김은호에 대한 기존 미술 1ff8 계의 회화사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로 '근대·현대 한국화단에 새로운 채색화 계파를 형성시킨 유일한 존재'(이구열, 1990)라거나 '극채세화(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논평되고 있다.
그의 친일 협조에 따른 반민족 행위와 왜색조에 물든 회화세계에 대하여는 '아쉽다'라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그가 이룬 사실주의나 제자 육성의 공적에 비하면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왜색풍은 마치 '엔가'풍의 트롯트 뽕짝이 '전통가요'로 둔갑한 현실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현대화단의 숙제로 남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김은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은호(金殷鎬, 호는 以堂 1892-1979),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1912년(21세)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 등의 지도아래 관념산수,중국미인도,화보를 모사하거나 사생을 통해 그림공부를 함. 그해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려 기량을 인정받았다.
어용화사로 명성을 얻어 윤덕영,윤택영,이희원등 당시의 세도가와 최제우, 김연국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1913년 덕수궁 어전휘호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동학의 분파 시천교侍天敎의 대도주大道主 김연국이 김은호에게 교조敎祖 최제우와 2세 교주 최시형의 영정 및 자신의 초상을 동일한 크기의 전신좌상으로 그리게 했다.
당시 24살 때인 이당은 순종 어진 제작이 잠시 중지되었을 때 시천교侍天敎의 대례사大禮師 김연국의 청으로 <최제우 초상 崔濟愚 肖像>과 <김연국 초상 金演局 肖像>을 동일한 크기로 그렸다.
“동학교조 최제우의 근대적 석상과 최제우” (p.97~110) (....) 영정들이 완성된 직후의 일이었다. 구암이 당시 온양의 허씨 집안에 출가해 살고 있던 수운의 따님을 오게 하여 여러 사람의 증언대로그린 고귀한 모습의 ‘수운영정’을 보이자, 따님은 “아버님이 환생하신 듯이 모습이 꼭 같다.”고 큰절을 하며 대성통곡을 하더라는 일화가 구암의 증언으로 전해진다.
구암도 물론 세 영정에 크게 만족했다. 구암은 이당에게 폐백(그림사례)얘기를 꺼내다가 빈한한 셋방살이를 면해주겠다며 당장 집을 보러 나가자고 앞장을 서더니, 그 날로 원서동 131번지의 여덟 칸 반짜리 초가집을 계약해 주었다.
그 집 값이 그때 돈으로 정확히 236원이었음을 이당은 평생 잊지 않고 있었다.처음으로 내 집을 갖게 해준 감격스런 큰돈의 그림 값이었기 때문이다. (...)
[출처] :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이구열 지음, 돌베개, 200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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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승무도 >, 비단에 채색, 43.5 cm × 59.5cm
그림은 속세와 해탈의 경계에서 번민하는 비구니(여자 승려) 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당의 [승무도] 역시 조지훈의 시에서 처럼 승무를 추고 있는 여승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그림 속 여승은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는 투명한 고깔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북채를 들고 양팔을 뻗어 승무의 한 동작을 연출하고 있다.
팔과 어깨를 흘러내리는 장삼자락은 약간 날리는 모습인데 이는 춤의 동작이 느리고 조용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승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번뇌하듯 눈의 묘사가 흐리게 되어 있어 마치 눈물이 글썽이는 듯이 보인다.
팔과 어깨, 북채, 장삼자락 등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유려한 선이 돋보인다. 아름다운 얼굴은 세속의 세계, 이와 대비된 삭발한 머리는 초월(종교)의 세계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족두리
인물화에 특히 잘 그렸던 김은호는 궁중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인물화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이 <간성>은 1927년 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작품으로 시원한 방안에 앉아서 화투놀이를 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곱게 차리고 않아 화투졸이를 하는 못흡이나 피우다 둔 담배등으로 보아 여염집 여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인의 무료함 만큼이나 시든 꽃, 생기없는 댓잎, 새장에 갇힌 앵무새 등이 여인의 심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1925년 일본에 건너가 3년간 체류하면서 신일본화풍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척 화사한 느낌의 밝은 채색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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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정(帶湖亭), 128 cm X 96 cm, 絹本水墨淡彩, 個人所藏 | 이당 김은호 방야독서. 비단에 수묵담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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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노안도>,
두방지에 수묵담채, 37x 45cm, 1977
십장생
/10첩 병풍/비단에 채색/210*552.3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궁중회화는 도화서, 자비대령화원 제도가 폐지되면서 우리 미술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사라졌다. 물론 이것은 일제의 의도가 깊숙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창덕궁 재건 벽화는 궁중회화가 몰락하고 현대미술이 시작되는 중간 지점에 있다. 전통을 수용했지만 일본과 서구 화풍을 도입했고 작품제작의 주체가 도화서라는 조직에서 탁월한 개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비교의 기준은 장생도, 해학반도도의 형식이다.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장생도와 창덕궁 재건 벽화를 비교하는 일은 흥미롭다. 이 과정을 통해 궁중회화의 완성된 형식이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 과정을 역으로 추적하면 제대로 된 궁중회화, 민화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지도 모른다.
일단 장생도의 전형이 될 만한 그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핵심적인 부분은 시점의 변화이다. 즉 여러 시점을 사용하는지 아니면 단일 시점의 사용인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화면의 구성과 원근법의 사용하고도 관련이 있다.
시점의 변화는 곧 관점, 가치관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기준이 되는 장생도의 특화된 그림인 ‘해학반도도’는 4차원적인 공간에 여러 시점이 결합되고 각각은 사물은 정형화되고 상징화 되어있다.
사물은 누구나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 사실과는 다르다. 명암법과 원근법은 사용되지 않았고 선묘로 형태를 만들고 색칠도 한 공간에 한 가지 색만 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무엇보다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들에 의해 집단적, 조직적으로 창작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 두 그림은 쌍으로 기획된 것이다. 대조전 동쪽에는 ‘봉황도’, 서쪽에는 ‘백학도’를 배치했다. 각각은 독립적인 그림이지만 해와 달을 분리해서 장생도를 둘로 쪼갠 효과를 냈다
이당((以堂) 김은호는 안중식에게 사사 받았으며 구한말 어진화가로 유명한 화가이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했으며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고 심사위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 영정, 논개 영정, 신사임당 영정을 그렸다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친일행적 때문에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화가이다.
김은호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백학도’는 해학반도도의 변형으로 보인다. 육지와 바다, 괴석과 학, 소나무, 영지, 대나무 따위는 해학반도도와 다를 바 없지만 해 대신에 달을 그렸고, 모란을 첨가했으며 거대하게 보이는 16마리의 학을 특화시켰다.
그림 자체만 보자면 굉장히 정교하고 잘 그려졌다. 소나무, 학, 모란은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반해 괴석이나 구름 따위는 궁중회화 전통의 청록산수 기법과 상징법을 사용했다. 사실적인 묘사는 보기에는 좋아도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정형화된 그림을 해체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존의 전통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첫째, 공간이 뒤틀어져있다.
우측의 바다와 좌측의 육지의 구분이 어설프다. 바다는 넓은 공간은 만들고 있는데 이와 어울리지 않게 육지는 지나치게 근접된 공간이다. 그러니까 좌우측 공간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둘째, 학이 지나치게 크게 느껴진다.
16마리의 학의 숫자는 별 문제가 아니다. 전통그림에서도 학의 숫자는 대략 4마리부터 16마리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화면의 중심에 배치한 경우는 드물다. 보통의 경우 장생도의 나오는 사물은 일정한 크기와 역할이 있다. 그래서 사슴이든 학이든, 거북이든 전체 화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특정 사물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이렇게 학이 크게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 화면구성에서 학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학의 크기는 대략 1m 내외를 차지하는데 이 정도 크기의 학이 16마리나 들어가게 되면 당연하게 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간의 상대성 때문이다. 우측 바다의 공간은 넓게 표현되어 있는데 좌측에 비해 학이 상대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학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감상자의 시선이 따라 움직이는 점을 고려한다면 넓은 공간에서 크게 인식된 학은 정상인 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크게 느껴진다.
셋째, 시점이 모호하다.
전통그림에서는 여러 시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그림의 시점은 엄밀하게 말하면 단일시점이다. 단지 단일시점처럼 보이지 않도록, 정말 교묘하게 화면을 구성하고 처리한 것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구도가 전통그림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이 그림의 모든 시점은 1인칭, 눈높이를 가지고 있다. 좌측의 소나무나 흐르는 물, 모란, 앉아 있는 학의 모습은 현대 풍경화와 다르지 않다.
또한 우측의 괴석과 바다도 1인칭, 눈높이 시점인 것은 같으나 그 공간감에 비해 학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임으로써 마치 위에서 아래로 본 느낌이 드는 것이다. 좌측과 우측의 공간감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착시현상이 마치 여러 시점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김은호. <백학도 >, 비단에 채색. 1920년. 197 cm X 579 cm .
대조전 서쪽. 이 그림은 대조전 서쪽 벽면에 있는 벽화이다. 그런데 벽화라고 하지 않고 비단에 채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단에 그림을 완성시킨 다음 벽에 부착했다는 의미이다.
넷째, 태점(胎點)이 무시되거나 일본식 이끼로 보인다.
전통그림에서 태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림 속에 찍혀있는 무수한 점은 생명이 시작되는 점, 생명이 잉태하는 부분을 뜻하는 태점이다. 태점은 소나무 이파리에도, 모란 이파리, 나무 몸통과 가지, 바위, 땅 할 것 없이 어디든 나타나고 마치 별빛처럼 보이기도 하고 새싹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학도’에서의 태점은 조금 모호할뿐더러 이끼처럼 보인다. 소나무 이파리로 연결되는 부분에 있어야 할 태점이 없고, 소나무 몸통의 태점은 누가 봐도 이끼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다섯째, 달의 등장과 파도의 표현이 이상하다.
일월오봉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얀색은 달, 빨간색은 해를 표현한 것이다. 우측 상단에 둥글고 하얗게 그려진 것이 달이다. 처음에는 해의 또 다른 표현인가 유심히 보았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가 달과 해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장생도에서는 해를 그리지 달은 그리지 않는다. 해를 단독으로 그리거나 해와 달이 함께 있는 그림은 있어도 달만 그리는 경우는 처음 본다. 그러니까 이 ‘백학도’에 달만 그린 것은 대조전 동쪽 벽화인 ‘봉황도’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동쪽 벽화인 ‘봉황도’에는 붉은 해만 그려져 있고, 서쪽에는 밤 풍경, 즉 달만 그려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완결된 그림인 ‘장생도’ 혹은 ‘해학반도도’를 둘로 쪼개어 분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파격이고 전통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파도의 표현이 일본식이다. 둥근 물결부분에 너울을 그려 넣은 것도 그렇고,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도 기존의 그림과 달리 양식이 무너지고 있다.
이당 김은호의 [백학도]는 개인 작가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된 그림이다. 꼼꼼한 필지와 사실적인 묘사는 이전의 장생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기술과 기법적인 면만 보면 장생도보다는 [백학도]에 시선이 끌리기 마련이다. 그만큼 시선을 흡수하는 표현 기량은 놀랍다.
형식은 곧 내용을 담는 그릇인데 형식이 변한다는 것은 내용이 변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장생도는 조선 500여 년의 회화적 전통과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홍도도 바꾸지 못하고 정선도 바꾸지 못한다. 오랜 세월 동안 기존의 전통과 현재의 변주가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다.
[백학도]는 사실적인 묘사, 학의 큰 움직임과 공간의 교묘한 배치로 역동적인 화면을 창조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장생도의 탄탄한 형식을 무너트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