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는 아직도 아프다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로, 한자어로 조령(鳥嶺)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나는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예로부터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로, 아직도 상흔이 남아 있어 무수한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은 죽령, 추풍령, 문경새재가 있는데, 죽령은 미끄러져 낙방하고, 추풍령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문경새재는 새처럼 비상하여 높은 벼슬을 얻는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선비가 문경새재 고갯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는 속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에 출장을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조령원터를 비롯해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이 있고, 조령관문은 소백산맥 중에서 1,017m 높이의 길목인 고갯길로 옛길의 향수가 지금도 남아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지만,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의 세력이 성대하니 그 예봉을 조령 협곡에서 꺾자는 제장들의 건의에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당시 정예 기병은 1기도 없었다) 출신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로 짓밟아버리듯이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면서 기어이,
새재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지 않고, 요소요소에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 계략에 왜군이 속아 넘어가기를 바랐지만, 아뿔싸, 허수아비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허장성세였음을 간파한, 조총으로 무장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만8500명은 험한 새재를 무사히 넘었다.
그럼 신립 장군은 누구인가. 선조 16년(1583) 함경북도 온성 부사로 재직 시, 침입해 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으나, 왜적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니 아예 수군을 폐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순신은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 데는 수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폐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한바 있다.
신립 장군은 기병을 다루는 능력은 당대 최고지만, 대국을 읽고 전략을 짜는 최고 사령관으로서는, 지략과 계획성이 부족한 인물이었다는 비판을 군사 전문가들로부터 받고 있다. 사실 전장에서 승패의 차이는 정신과 무기로 결정되므로, 끝없이 전투훈련을 쌓고,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인식, 새로운 의식과 무기가 선결과제이긴 한데,
참고로 징비록과 김성한의 소설 7년 전쟁에 의하면 조령을 버린 이유에 대해,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에 진을 쳤는데, 이날 밤 다수의 병사들이 사라지자, 평지에서도 이 정도인데 조령에 진을 쳤다면 더욱 많은 병사들이 도망갔을 것이라며, 평지에서 적을 맞기로 결정한 것이 맞다. 라는 묘사가 있다.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 장군의 작전은 무엇일까?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이 아니라 코에도 귀에도 걸칠 수 없는, 이미 어깻죽지에 힘이 빠진 상태로, 이기는 전투를 위해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닌가 한다.
전투 당일(1592년 4월 28일) 이틀 전에 한양에서 몇 백 명의 관군으로 충주에 도착(4월26일)하여 수천의 일반 농민을 급히 모집하여서 전투군대로 운용하기에는 아무리 조령이 일당백의 요새인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1만8500의 정예군을 오합지졸 8천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지레 겁을 먹고 몰래 탈영하는 농민군의 통제가 최우선이었기에, 무모한 작전의 배수진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즉필생의 배수진은 왜군과 싸우기 위한 배수진이 아니라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궁여지책에 불과했지 않았나? 한다. 한마디로 정신을 찰지게 엉켜 붙게 하려고 했을 것이지만 결과론 적으론......,
나라를 지키다 초개처럼 순절한 신립 장군과 김여물 장수 외 8천명의 군사에 대해 예를 갖추어 큰 절 올린다. 우리는 유일한 분단국가다. 전쟁사를 탐독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자. 어제의 전쟁보다 미래의 전쟁에 대비해서 더 나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자. 평화의 시간이 길수록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깔아놓은 똥밭에 처박힐 수가 있다. 그래서 새재는 아직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