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 3 영생은 - 요 17: 5 창세 전에 가졌던
요 17: 3 영생은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사는 것이 영적 사망이며 그를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
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 유일하신 참 하나님
유일하신 참 하나님(movnon 모노스) "유일한, 하나의"는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요소이다. 이 말은 유 1: 4에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같은 용법으로는 사 37: 16, "이스라엘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막 12: 29,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요 5: 44,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딤전 1: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용어를 주장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하느님"이나 단순히 "천부"라고 할 때는 유일신 "하나님"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하늘의 사상'이 있는 동양철학과 어울려져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하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셨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 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 24)고 했다.
(2)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예언된 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예정대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 마 1: 18, 20, 23 –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엡 3: 11 -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3) 안다
'안다'(*, 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 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언한다(Lenski).
이 용어는 현재시재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어 하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며 앞으로도 지속될 영원성을 갖는다.
* 마 25: 46 -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전에 알고 있었거나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있는 것은 이 용어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된다.
* 요 11: 25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행 3: 15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기도 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 (Godet).
Ⓒ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다. (Westcott, Hegnstenberg).
예수에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
* 요일 1: 3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요일 2: 22 -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요일 4: 3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요일 5: 20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 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2] 영생은 무엇인가? (요 17: 1-3)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느냐? 이 문제는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많은 사람에게 크나큰 관심을 가져 온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인간들에게 명쾌하게 풀어준 사람은 없었다. 다만 예수님만이 이 문제의 해답자로 성경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인간들은 영생을 가지고 그 영생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올 외면하므로 자신들이 간절히 갈망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스스로 거절하고 있다.
(1) 영생이란?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죽음이 없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 생명은 육신적인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생명이다. 육신적인 죽음은 육에 속한 생명이지만 영생이란 육신과는 관계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적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참 생명은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해 있다. 영생은 영의 존재를 믿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11: 25-26) 하신 말씀에서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한 부활로 다시 사는 생명을 가리키고 있으며,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안에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영원한 영적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
(2)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인간사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죄인은 죄값으로 죽음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겔 18: 4) 하신 말씀은 범죄한 사람 곧 죄인의 영혼은 결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둘째 사망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영원한 형벌 곧 멸망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 계 20: 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①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유일하시다는 말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체는 오직 하나이시다. 그러나 그 한 본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루고 있다.
② 참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참이란 진리나 진실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진실하심을 그의 말씀과 그의 언약에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직 그의 말씀과 그의 언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③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헛된 우상으로 섬기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한다.
* 롬 1: 21-23 –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 호 6: 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섬기는 자체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께 배움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 45).
(3) 영생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아는 것으로 되지 아니한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알아야 한다.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란 말로 이 말의 뜻은 지각한다, 깨닫는다, 인식한다,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배워서 아는 구체적인 지식을 말한다.
* 롬 10: 17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하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으심으로 죽으셨고 죽은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사실을 아는 지식이어야 한다.
예수의 대속의 죽으심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일 수가 없다.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영생은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아들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아버지께로 가며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영생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아들 안에는 죄인들이 영생 얻기에 합당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 17: 4 하라고 주신 일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을 이루셨고 다 이루실 것이며 이제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1]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는 아직 그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수하였노라고 고백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이미 승리를 보증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 말씀은 타당하다. 이는 시간적인 성취의 의미보다는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는 차원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1) 아버지
예수께서 그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보내신 자' 또는 '일을 맡겨 주신 자'로 등장한다.
* 요 3: 35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 요 4: 3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요 5: 36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상의 질서를 나타냄과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동시에 강조한다(L. Morris).
* 요 10: 30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2) 하라고 주신 일
'일'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가 행하신 모든 교훈과 사역이며 그것은 인간을 '심판하는 일'과 '생명을 주는 일'로 요약된다. (H. R. Reynolds).
(3) 이루어
'이루어'(*, 텔레이오사스)는 뒤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19: 30)라는 선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에 단 한 번도 주저하는 일이 없으신 예수는 그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C.K. Barrett).
요 17: 5 창세 전에 가졌던 -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그는 탄생하기 전에 선재(先在)하셨던 자, 아니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다. 그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다.
1]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본서의 기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기록했다.
* 요 1: 2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본 절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두 차례 사용하였는데, 이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하는 동시에 지금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첫번째 '함께'라는 말은 성육신 이전 상태로서의 하늘 영광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이며(Lenski) 두번째 '함께'는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얻게 될 영광을 지시한다.
세상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계셨던(1:1;8:58;16:28) 아들의 신성과 영광은 성육신을 통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 비하(卑下)되었다.
그는 하늘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서 완전한 인성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2]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 영광은 신적 영광이다.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에 아들을 사랑하셨다(24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나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적 영광을 다시 얻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