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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길과 길
정수남
주영이가 올까.
집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입씨름은 중부고속도로를 벗어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남편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으나 나는 작년에도 왔고, 재작년에도 왔으니까 올해에도 틀림없이 올 거라고 우겼다. 물론 주영이가 혼자 올 수는 없었다. 늘 누군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런 까닭에 주영이가 오고 싶다고 해도 데려다주는 사람에게 사정이 생기면 못 올 수도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남편이 주장하는 근거도 그것이었다. 반드시, 틀림없이, 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게 그거였다.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남편은 기대했다가 내가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와야 하며, 또 올 것이라고 믿었다. 누구 핏줄인데……. 그래서 남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어젯밤 음식 또한 그만큼 정성을 다해 준비한 것 아니겠는가.
시대가 그런 걸 어떡하나.
남편은 일죽으로 빠지는 IC가 2킬로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나자 자동차를 2차선으로 붙이며 속도를 줄였다. 뒤에서 줄곧 우리 차를 따라오던 흰색 그랜저가 금방 멀어져갔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짐을 나설 때부터 떫은 감을 씹은 듯 인상을 쓰던 남편이 나를 힐끗 돌아보며 혀끝을 찼다. 왜 그럴까? 무슨 꿍꿍이속이 있나?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남편 역시 그 아이가 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날씨는 맑았으나 아침 기온은 차가웠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잠시 차창을 내렸던 나는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얼른 도로 올리고 말았다.
작년에 만났던 주영이는 중학생답게 제법 의젓한 데가 있었다. 아무 데서나 천방지축 까불어대던 철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몰라볼 만큼 키도 많이 자랐고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도 제법 어른스러웠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자신이 왜 거기에 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은 비록 남남이 되고 말았으나 며느리가 고맙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올 거라고 믿어.
그럼 오죽이나 좋아.
됐네, 그럼.
핸들을 장호원 방향으로 꺾으면서 남편은 피곤한 듯 눈을 두어 번 껌벅거렸다. 하긴 칠십 넘은 나이에 세 시간 가깝게 운전하고 왔다는 건 무리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어젯밤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당신이 받을 실망이 클까 봐서 그러는 거지.
장호원 시내를 벗어나 제천 방향으로 좌회전하면서 남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5월 중턱에 들어선 산자락은 어느새 연초록 천지였다.
나는 그사이에 혹시라도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열었다. 그게 소용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버릇이 되어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핸드폰에는 중앙방역대책본부에서 전송한 안전 안내 문자와 자치단체에서 보낸 확진 발생 문자가 두어 개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행복요양병원 방문자는 증상과 관계없이 가까운 보건소나 임시 검사소에 가셔서 반드시 검사받기 바랍니다…….’
아침부터 딸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나를 야단쳤다. 언제까지 그 망령 붙들고 살 거냐며, 이제는 그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라고 했다. 나는 대꾸하지 못한 채 듣고만 있었다. 딸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가위로 잘라내듯 싹둑,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식 먼저 보낸 어미 마음을 네가 아느냐고 대거리를 하려다가 다리 힘살이 풀려 그만 식탁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스크 꼭 챙겨 가지고 가. 휴게실 들어갈 땐 꼭 쓰고. 다행히 출근 시간에 쫓긴 듯 딸은 더 이상 긴 사설을 늘어놓지 않았다. 저녁에 잠시 들르라는 말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몰라, 몰라’ 하고는 먼저 끊었다. 나는 공연히 전화를 걸었다고 후회했다.
뭐래?
안방에 있던 남편이 나오며 물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벌써 대화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거 보란 듯, 입을 비죽 내밀고는 빈정거리는 투로 한 마디 던졌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그래. 우리끼리 그냥 조용히 다녀오자고 하지 않았어.
언제 챙긴 것일까, 남편의 손에는 어느새 하얀 마스크가 쥐어져 있었다.
딸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종배와 두 살 터울인 딸은 같이 자랄 때도 늘 그랬다. 하지만 수연이가 학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요즘 들어와서 그 증세가 더 심해진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회사 일로 늘 외국 출장이 잦은 수연이 아빠가 잠시 영국을 다녀온 뒤 두 주일 동안 감옥살이하듯 집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자가 격리를 하게 되자 신경은 더 날카로워졌다. 누구를 탓해, 세상이 온통 그런 걸……. 위로 삼아 내가 말을 건네도 딸은 누그러들 줄 몰랐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딸만이 아니었다. 단지 안의 301호 할머니, 202호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전까지도 눈만 뜨면 허물없이 드나들던 사이였는데 요즘은 도통 내왕이 없었다. 사흘 전에는 열무김치 통을 들고 301호 문을 두드렸으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돌아섰다. 고맙다고는 하면서도 문은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 앞에 그냥 플라스틱 통을 내려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202호는 그래도 301호보다는 좀 나은 편이었다. 마스크를 썼느냐고 물은 뒤 문은 열어주었다. 틀니까지 보이면서 활짝 웃는 모습에 서운한 마음이 조금은 가셨지만 그래도 집안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손 소독부터 하라는 강다짐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투덜거리는 나에게 202호 할머니는 오히려 종주먹을 들이대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냐고, 지청구를 던졌다.
새잎이 돋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공원묘지 주변은 벌써 여름이 온 것 같았다. 때늦은 바람이 가끔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그래도 오는 계절은 막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산소로 올라가면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왜, 하필이면 이렇듯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이러다가 더 늙으면 혼자 걸어서 찾아올 수도 없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손에 삽과 음식 꾸러미를 든 남편은 앞장서서 올라가고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를 흔들거리며 걷는 남편의 모습이 마치 잘 마른 삭정이 같았다.
산소는 변한 게 없었다. 작년 가을에 왔을 때 양쪽 화병에 꽂아두었던 흰 국화가 마르고 시든 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는 것뿐, 봉분도 비석도 상석도 모두 물로 씻은 듯 깨끗했다. 한숨을 길게 토해낸 나는 멀리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을 살펴보았다. 주차장에는 검은색 승용차와 흰색 승용차가 한 대, 그리고 빈 트럭이 한 대 누워있을 뿐 조용했다. 주영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산소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잡초를 뽑고 있는 남편의 얼굴에서는 그러나 초조한 빛 따위는 엿볼 수가 없었다.
주영이가 올까?
글쎄 기대하지 말라니까.
그래도 오늘은 꼭 와야지요. 다른 날은 몰라도.
나는 문득 주영이가 명절 때 오지 않은 게 언제부터였는지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작년 설에는 왔으나 추석에는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산소 주변을 한 바퀴 돌던 남편이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주영이는 주영이대로, 며느리는 또 며느리대로 사는 길이 있다니까.
남편의 손에는 어느새 잡초가 한 움큼 들려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남편은 그것을 내 앞으로 내밀며 혀를 찼다. 작년에 뿌리까지 샅샅이 뽑았는데도 또 이렇게 자랐어. 이놈들 생명력, 정말 끈질기지 않아?
나는 대꾸를 미룬 채 들고 온 철쭉 묘목을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남편은 그것을 묘역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석축 끝으로 가지고 갔다. 여기가 좋겠지? 삽을 든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것은 어제 내가 묘목가게에 가서 일부러 사 온 것이었다. 철이 철인지라 가격이 생각보다는 조금 비싼 듯했으나 나는 군말 없이 두 그루를 샀다. 철쭉이 산소 앞에서 해마다 피어나면 종배가 그래도 덜 외로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산소 주변에 꽃이 넘쳐나는데 뭘 또 사 왔냐고 남편이 못마땅한 듯 한마디 했지만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아들의 외로울 시간을 생각해봤냐고 대거리를 할까, 하다가 참았다.
됐어?
남편이 철쭉 묘목을 다 심고는 땅을 다지듯 운동화로 꾹꾹 밟으며 물었다.
그래요.
이번에도 나는 힘없이 머리로 대답했다. 왜 아직 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알아보고 싶어도 이제는 알 길이 없었다. 4년 전에 핸드폰 번호를 바꾼 며느리가 소식을 끊은 것은 그렇다 치고, 작년엔 주영이의 핸드폰 번호도 바뀌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추석 무렵이었다. 추석에 올 거냐고, 묻기 위해 버튼을 눌렀으나 매번 그런 번호가 없다는 신호음만 들려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묻는 나에게 딸은 콧방귀를 뀌며 서슴없이 쏘아붙였다. 엄마는 언제까지 그렇게 미련을 떨 거야? 그게 남남이 되겠다는 뜻이잖아. 그것도 눈치채지 못했어? 죽은 사람은 죽었으니까 이젠 잊어버리고, 산 사람은 자기들의 삶을 살겠다는데 왜 자꾸 치근덕거려, 볼썽사납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그게 그 뜻이었구나. 곁에서 듣고 있던 남편까지 그걸 몰랐느냐며 눈을 흘겼다.
공원묘지 관리사무소가 썩 잘 관리하고 있구먼. 우리가 나설 게 별로 없을 정도야. 봐, 잡초 몇 개가 고작이잖아? 이젠 자주 올 필요도 없겠어.
남편이 손을 툭툭, 털며 상석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또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은 여기 올 때마다 빠트리지 않고 늘 한마디씩 군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아침에, 부모가 아들 산소 벌초하러 다니는 집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는 말로 내 신경을 건드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여기도 자주 오지 말자는 얘기 아닌가. 면장갑을 벗는 남편의 등 뒤 숲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저것들도 짝을 찾는 모양이구나. 하긴, 그럴 때가 되었지. 나는 남편을 외면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잉크를 뿌려놓은 것 같은 파란 하늘엔 이따금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종배가 간 그날 오후도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아파트 단지 앞 할머니들이 잘 모이는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나가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모이면 대개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곤 하였는데 그날은 자식 자랑이 화두였다. 세 명의 아들을 둔 202호 할머니가 둘째 아들 자랑을 또 꺼내놓은 게 시작이었다. 뭘 자셨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전화하고는 어찌나 시시콜콜 물어대는지, 내가 아주 귀찮아 죽겠다니까. 202호 할머니는 그러나 싫지 않은 듯 말끝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히죽히죽 웃었다. 결론은 뻔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육군 장교 계급장을 단 그를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누구에게나 거수경례하는, 유난히 인사성이 밝은 젊은이였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소위 일류라고 지칭하는 여고 시절 이야기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또 지난번처럼 사돈 이야기로 발전하면 어쩌나 싶었다. 301호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번씩 들어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혼자 사는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아들 부부가 올 때마다 같이 살자고 하는 바람에 그걸 거절하느라 진이 다 빠진다는 거였다. 같이 살지 그래. 202호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투로 거들자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혼자 사는 것처럼 속 편한 게 어디 있다구. 나도 종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날 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종배의 자랑을 다 끝내지 못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남편이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팔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교통사고, 고속도로, 화물차가 덮쳤대. 나의 팔을 끌며 한발 앞선 남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아침에도 통화했는데? 나는 한동안 남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날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여기저기에 심어놓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벌써 6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종배를 잊은 적이 하루도 없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34살, 종배는 그날 이후 더 이상 나이가 들지 않은 채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숨을 쉬고 있었다. 그의 방에 들어서면 책상 위에 세워놓은 사진 속의 그는 여전히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가 덮었던 이부자리에서는 아직도 그의 체취가 풍겼다.
왜, 아직 오지 않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주차장 부근을 한동안 눈여겨보았으나 주영이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글쎄, 더 기다려봐야 헛일이야. 마음 접어. 남편의 채근을 견디지 못한 나는 상석 위에 가져온 음식을 진설해놓고는 봉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온 남편이 기도하자고 했으나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기도하는 중에도 신경이 자꾸만 주차장 쪽으로 갔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러나 내 귀에는 그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 안치실에서 마지막 본 종배의 얼굴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안된다는 것을 억지까지 써가며 가까스로 들어가 확인한 종배는, 종배가 아니었다. 흰 붕대로 칭칭 감은 머리 아래로 피범벅이 된 얼굴은 퉁퉁 붓고 푸르딩딩하게 변해 마치 다른 나라 사람 같았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아들을 상상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아니, 얘가 주영이 아빠 맞아요? 나는 남편에게 몇 번씩 되물었다. 남편도 충격을 받은 듯 머리는 주억거리고 있었으나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기도는 결국 남편 혼자 하고, 혼자 끝낸 셈이 되고 말았다. 십여 분 동안 혼자 중얼중얼 읊조리던 남편은 ‘아멘’, 하고 눈을 떴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아멘’했다. 그러나 주차장을 향한 시선은 돌리지 않았다. 남편은 내 시선이 주차장에 고정된 것을 목격하면서도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 듯 나무라지 않았다.
기도를 마친 남편이 허탈한 듯 손을 툭툭, 털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젠 그만 내려가야지?
남편은 오래 머무르는 것조차 맘에 차지 않는 듯했다.
벌써?
나는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다 어쩌나. 이젠 중학생이 되었으니까 예전처럼 깨작거리지 않을 거라 짐작하고 많이 준비한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만들지나 말 것을……. 나는 나도 모르게 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남편도 아까운 모양이었다. 한참 내려다보던 남편이 손을 뻗어 대구전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끼리 먹으면 되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주영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영이가 없는 판국에 아니 된다고 손사래 칠 수도 없었다. 전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던 남편이 이번엔 그것을 집어 나에게도 권했다.
싫어.
싫긴, 먹어둬. 또 한참 올라가야 해.
나는 눈을 흘겼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눈치는 있는 걸까. 내 마음을 알고 있을 텐데도 모르는 척 대구전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남편이 밉살스러웠다. 43년을 함께 산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한 남편은 입맛까지 다시면서 이번엔 김밥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수병을 왼손에 들고는 나무젓가락을 찢어 겉절이도 잡채도 가오리무침도 헤집어 놓았다.
끌탕 하지 말고 먹어. 배곯으면 자기만 손해야.
겉절이를 씹으며 남편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따금 주차장에 새 차가 들어와 정차할 때마다 긴장하곤 하였으나 주영이가 내리는 모습은 여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장의 버스가 한 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승용차들이 몇 대 줄을 이어 들어와 멈췄다. 두건을 쓰고, 까만 상복을 입은 남자들이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흰 마스크를 쓰고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이런 애가 아닌데……. 나는 가슴이 바짝바짝 탔다. 이런 생각은 부정 탄다고 꺼린다지만, 정말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다. 경험해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걸렸던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이 허다하다고 날마다 언론매체가 떠들지 않는가. 정말 그렇다면 키만 컸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인데 얼마나 고생할까. 가슴이 무너졌다. 재혼한 며느리의 상대가 어떤 인품을 지닌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전염시킬까 철저히 격리하고, 죄인처럼 괄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혹시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닐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남편은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데면데면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것보다는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올라갈 게 걱정된다는 듯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보았다. 휘 휘, 삐 삐 삐이, 숲속 어디선가 다시 새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자칫 퇴근 시간과 맞물리면 고생해.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남편의 빗발치는 채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지 않는 주영이를 더 이상 기다린다는 게 문득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한숨을 길게 뱉어낸 나는 결국 일어나 풀어놓았던 음식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입을 대지 않은 것은 집으로 가져갈 요량이었고, 남편이 먹다가 남긴 것은 늘 해왔던 대로 내려가다가 묘지관리사무소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릴 셈이었다.
앞서 걷는 남편 뒤를 따라 돌계단을 내려서자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내 등을 슬그머니 떠밀었다.
주영이는 끝내 볼 수가 없었다.
빨리 타지 않고 뭘 해.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재게 트렁크에 실은 남편이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탑승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처럼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제 가면 한동안은 찾지 못할 터인데……. 나는 공원묘지 C-8 구역 꼭대기에 누워있는 종배 산소 쪽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그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승용차들이 버스 뒤로 길게 줄지어 엎드려있었다.
결국 내가 남편의 재촉에 견디지 못하고 차에 오른 것은 다시 장의 버스 한 대가 주차장에 들어온 뒤였다. 장의차 문이 열리자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채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는 사람, 관리사무소로 들어가는 사람, 피곤한 듯 서서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담배를 부쳐 무는 사람들로 잠시 주차장이 장터같이 부산스러워졌을 때 우리는 그들을 차창 밖으로 흘리면서 공원묘지 출입구를 빠져나왔다.
일죽 I⁃C를 벗어나기 직전 남편은 커피나 한 잔씩 하자면서 도로변에 걸린 간판이 유난히 큰 휴게소로 핸들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따뜻한 아메리카노 생각이 간절했던 나는 토를 달지 않았다. 휴게소는 한산했다. 가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경계하듯 지나갈 뿐 휴게실 주차장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휴게실 계단 위에 있는 야외테이블에 앉았다. 커피는 남편이 주문했다. 잠시 뒤 검은색 머그잔을 양손에 들고 다가온 남편이 앉으면서 작정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젠 보내주자구.
뭘? 벌써 보내줬잖아?
나는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되물었다.
아니, 우리 맘에서도, 아주…….
남편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나를 외면하고 있는 남편의 옆얼굴을 건너다보면서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엔 어느새 짙은 구름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딸아이 말이 하나도 그른 데가 없어. 그게 우리가 살아갈 길이라는……. 하긴, 우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남편은 혼잣말처럼 아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메리카노 맛이 왠지 씁쓸했다. 이 집 맛이 그런가. 아님, 내 입맛이 변했나,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바람이 주차장 주변의 나뭇가지를 이따금 흔들고 지나갔다.
남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때?
나는 대꾸를 미룬 채 남편을 쏘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차장 바깥 도로 위로 짐을 가득 길은 트럭이 매연가스를 내뿜으며 힘겹게 가고, 그 뒤를 승용차들이 길게 늘어서서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날마다 보내자고 다짐하곤 해. 근데, 어떻게 보내? 아직도 내 가슴에는 종배가 살아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또 그게 내 유일한 위로이기도 했다.
오늘 올라가는 대로 책상 위에 있는 사진부터 치워, 가족사진도 내려놓고. 눈에 보이는 그 아이의 흔적을 우리 주변에서 아주 싹, 전부 없애자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조금씩 멀어지지 않겠어? 그게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야. 그 아이 방도 딸아이 말대로 이젠 깨끗이 청소하고, 이부자리도 버리자구.
그런다고 걔가 정말 내 가슴에서 지워질까?
물론 금방 싹, 지워지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노력하자는 거 아니야.
그게 수학 문제 풀듯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거라고 봐요?
나는 남편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나는 노력하면 안 될 것도 없다고 봐.
다시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린 남편이 한숨을 길게 뱉어내었다. 오죽 답답하면 저런 말을 할까. 나는 남편을 이해했다. 그도 종배를 가슴에 묻고 늘 아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건 나한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남편 말대로, 열심히 살면 이룰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악착같이 살아왔지만, 그래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절반쯤은 이뤘다고 자부했지만, 그 문제와 이 문제는 근본부터 다르지 않은가.
노력해야지, 어쩌겠어. 딸아이 말대로 다른 길이 없잖아.
남편은 여전히 길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의 시선이 머문 산자락에는 나무들 사이로 붉게 피어 있는 철쭉 몇 떨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미지근했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물론 어렵다는 건 나도 알아.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나는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차장으로 내려선 내가 잠시 멈칫거리자 커피 머그잔을 반납하고 온 남편이 차에 오르면서 다시 나를 재촉했다. 얼마나 컸을까. 작년엔 내 코에 닿을 만큼 자랐는데……. 나는 한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정말 궁금했다. 안타까웠다.
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중부고속도로에 우리가 막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누구를 닮아서 그런지 이번에도 딸은 앞뒤 없이 바로 본말로 치고 들어왔다.
왔어?
안 왔어.
나는 그래도 딸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았다.
그거 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나는 힘이 빠졌다. 위로는커녕 뒤이어 또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을까,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거 보라면서 혀끝을 찬 딸은 그러니까 이젠 헛물켜지 말고 속 차리라고 다그쳤다. 그리고는 늘 입만 열면 되뇌던 것, 애면글면 끌탕 하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뒷말도 잊지 않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야.
나는 딸이 다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쩌면 남편만 쏙 빼닮았을까, 섭섭한 마음이 치밀어올랐다. 세상의 딸들은 모두 엄마 편이라는데, 우리 집 딸은 예외였다. 딸은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내뱉고는 퇴근하는 길에 잠깐 들르겠다는 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일방적이었다. 나는 버릇이 없다고 혀를 차면서도 차라리 그게 속 편했다.
또 핀잔만 들었군.
철근을 잔뜩 실은 화물차를 피해 차선을 변경한 남편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뿐, 졸리면 눈 좀 붙이라는 말을 건넨 남편은 이천이 10킬로미터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날 때까지 앞만 주시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남편은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까. 그렇다고 말막음까지 하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이따금 차창 밖으로 비껴가는 풍경을 내다보면서 심심풀이 삼아 혼자 묻고 혼자 대꾸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테면 이런 식이었다. 산소에 심은 철쭉이 잘 자랄까 묻고는, 혼자 잘 자랄 거야,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내년에 찾아왔을 땐 정말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때였다. 남편의 옆얼굴을 곁눈질하던 나는 문득,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주영이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왜 진작 그 같은 궁리를 하지 못했는지, 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래, 그거야.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나는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남편의 말문이 열린 것은 내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정말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니겠지?
…….
내가 찾아가 확인해야겠어.
어딜?
이때였다. 남편이 놀란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방배동이라고 했나, 서초동이라고 했나?
누구를 말하는 거야?
누군 누구야, 며느리 친정엄마네 집이지.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젠 남편이 뭐라고 하든지 딸이 뭐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당장 수소문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영이가 누군가. 내 손자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걱정과 궁금증을 할머니가 알아야 한다는 건 도리이며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볼 때 그 문제를 풀어갈 출발점은 며느리의 친정이었다. 우리 집에는 발을 끊었지만, 거기는 왕래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찾는 방법은 있었다. 언젠가 202호 할머니가 일류여고 운운하면서 며느리의 친정엄마가 동창이라고 자랑하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고 시절부터 제법 친하게 지냈다는데, 설마하니 주소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모른다고 발뺌하면 여고 동창명부를 뒤져서라도 알아봐 달라고 사정할 생각이었다. 친정엄마를 만나면 다른 건 묻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 새끼, 주영이의 근황과 핸드폰 번호만 가르쳐달라고 간청할 생각이었다.
거긴, 왜 가려고?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은 할아버지라면서 주영이가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나도 모르게 톡, 쏘아붙였다. 남편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이맛살을 찡그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주영이가 왜 오늘 오지 못했는지, 알아는 봐야 할 것 아니야.
나는 남편을 다그쳤다. 한참 뒤 남편은 결심한 듯 이맛살을 찡그린 채 며느리의 친정은 방배동이라고 일러주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선선히 그 집의 번지와 연락번호도 수첩에 적어놨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된 까닭에 이사 가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번호를 그냥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게 어디 있어?
집에.
근데, 그걸 가지고 있으면서 왜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어?
내가 얘기했잖아, 이젠 남남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영이가 남이야? 걔가 지금은 비록 그쪽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지만, 걔는 엄연히 경주 정씨 양경공파, 우리 핏줄이야. 그것은 세상이 몇백 년 흘러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근데, 왜 모르는 척했어? 누구 속 까맣게 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랬어?
남편은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앞을 주시한 채 마른 입맛만 몇 번 다셨다.
며느리가 개가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야속하고 섭섭한 마음에 하룻밤에도 몇 번씩 깨어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종배가 더 안쓰럽고, 그리웠다. 왜 일찍 떠나서 내 가슴에 대못을 박느냐고, 캄캄한 거실에 앉아 혼자 훌쩍거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터널처럼 어둡고 원망스러운 시간이 어느 만큼 지나자 야속했던 마음, 섭섭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생에서의 인연의 끈이 끊어지면 또 다른 인연의 끈을 찾아 맺을 수도 있지 않은가. 더구나 요즘은 서로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며느리는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 나이였다. 나는 다만 주영이를 잘 키워주기 바랐다. 종배와의 인연이야 거기까지라고 해도 그 아이는 어쨌든 자기 배 아파하면서 낳은 새끼니까……. 그러면서도 내심 꿍꿍이속이 따로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핏줄이야 어디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더라도 자라고 나면 틀림없이 자기 발로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일마다 잊지 않고 공원묘지에 데려다주는 며느리 쪽을 고맙게 여긴 것이었다.
남편의 예상대로 이천을 지나자 차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도로는 편도 4차선으로 넓어졌으나 연결된 다른 도로에서 들어오는 차들이 갑자기 늘어난 게 원인인 듯했다. 2차선에서 서행하던 남편이 나를 흘끗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 들어 봤지?
남편의 목소리는 느리고 나지막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인데?
나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은 마음, 그거 당신만 있는 것 같아? 당신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그 아이 얼굴을 떠올리면서 밤잠을 설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아니,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나섰어야지.
길이 다른 걸 어떻게 해. 내가 나서서 들쑤셔봐.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주영이는 주영이대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또 보내겠어. 그렇지 않아도 아픈 상처를 안고 사는 아이들인데. 그러니까 아물 때까지는 아파도 서로 모르는 척 눈감아야지.
길게 한숨을 토해낸 남편이 뒷말을 이었다.
그래서 얘기한 거야, 잊지는 못하겠지만 억지로라도 잊도록 노력하자고……. 왜냐하면 그게 서로 살아갈 길이거든.
남편은 딸이 하던 말을 다시 꺼냈다. 남편은 늘 그런 식이었다. 답변이 궁색하거나 자기 말이 통하지 않으면 딸을 앞세웠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두 사람과 걷는 길이 달랐다. 소극적인 남편의 뜻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스스로 찾아가 만나고, 밥도 사주고, 용돈도 건네줄 생각이었다.
서행하던 앞차가 멎자 남편도 적당한 간격을 두고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렸다. 차가 멎자 세상이 갑자기 정지된 느낌이었다.
마음속에 길 하나 품고 살자. 우리, 이젠.
그건 당신 생각이야. 내 감정까지 억지로 가두려고 하지 마. 그렇게 되어서 그 감정이 다시 풀리면 제맛 나겠어?
나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작년에 봤던 주영이의 웃는 얼굴이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쩜 웃는 모습까지 제 아비를 똑 닮았을까. 나는 다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삶에서 그리움을 뺀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삭막할까. 그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머잖아 우리도 갈 텐데, 뭘.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무리 남편이 그렇게 말해도 며느리의 친정집을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접을 수가 없었다. 물론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남편의 일방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일 따름이었다.
앞 자동차 꼬리를 물고 올라가는 서행이었지만, 그래서 답답한 건 사실이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우리는 하남과 광주를 지났고, 마침내 중부고속도로의 마지막 관문인 동서울 게이트도 벗어났다. 그러나 길은 여전히 외길이었다.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순환도로로 접어드는 게 빠르다고 했으나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올림픽 도로를 선택했다. 나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나 저쪽으로 가나, 가는 길은 결국 집으로 통하게 마련이니까…….
잠실 운동경기장, 육삼빌딩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를 거친 차가 자유로로 접어들자 내 눈앞에는 어느새 낯익은 길이 펼쳐졌다. 일산의 고층 아파트들이 우측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비로소 내 집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
약력 정수남
19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접목’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집으로 『분실시대』『별은 한낮에 빛나지 않는다』『타성의 새』『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시계탑이 있는 풍경』『길에서, 길을 보다」『앉지 못하는 새』『아주 이상한 가출기』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행복아파트 사람들』 시집으로『병상일기』『너, 지금 어디 있니?』 산문집으로『시 한 잔의 추억(1)(2)』과 어린이 글짓기 책으로『소설가 정수남 선생과 함께 떠나는 365일 글짓기 여행(1)(2)』이 있다. 자유문학상과 대한민국 장애인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전영택문학상, 경기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는 일산문학학교와 파주문예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한국소설가협회 감사와 창작21작가회 상임고문, 한솔문학 고문, 고양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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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문단 소설분야 원로이신 정수남 선생님께서 소설을 송고해주셨습니다 나이들어 가는 사람들의 가슴따뜻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