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토왕폭 등반
좋아하는 연인도 그렇고 암벽도 빙벽도 그렇다.
처음 대했을 때가 가장 설레였던 심정일게다.
물론 좋은 대상일 수록 계속 만나고 싶고 계속 소유하고 싶은 심정은 있지만 '처음 그 느낌' 의 짜릿함, 설레임, 불면 .... 이런 것들은 점차 퇴색해지기 마련 아닐까.
그런 조사결과도 있다던데 사람이 이성상대를 만나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 감정이 이어져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평생을 함께 하기도 하는데 그 좋아하는 감정의 주기를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처음 만나 사랑의 감정에 빠졌을 때가 최고조이고 그 뒤 조금씩
그래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토왕폭은 그래서 처음 사랑에 빠지고 난 뒤 항상 그리워하고 마음 설레고 아쉬워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토왕폭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처음 연애할 때의 감정 그래프보다 지금이 높다고 할 수 는 없을 것같다.
그렇지만 토왕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슴 벅찬 상대다.
그것은 토왕폭이 가진 독보적인 상징성외에 길고 힘든 어프로치, 높은 산 능선 함지덕에서 흘러내린 군계일학적인 자태, 자연빙장이면서도 등반길이 200미터가 넘는 대왕폭포의 위용 등 비교와 경쟁에서 상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매 겨울 오르고 싶은 대상지이지만 바쁘고 때론 서글픈 주말클라이머의 일상이라는 변명으로 매년 찾을 수 없는 현실 역시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토왕폭을 찾은 것이 2012년 2월이었으니 벌써 햇수로 5년 째다.
세월이 그렇게 빨리 흘렀나.
그 이야기를 하니 함께 동행한 김점숙은 자신은 토왕폭을 등반한지 10년이 넘었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위안이 되는 것은 왜일까.
김점숙은 1995년 토왕폭을 여성 최초로 자일없이 단독등반했던 간덩이 부은 클라이머였다.
그런 그 녀도 사실 토왕폭을 그렇게 많이 등반한 것은 아니라고 하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고개가 갸우뚱해진 것은 팩트와 고정관념의 차이때문이다.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이 많은가 ...
난 지난 2012년 토왕폭 등반 당시 가장 혹독한 날씨에서 등반한 댓가로 발가락과 손가락에 동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상당한 고생을 했었다.
당시 C지구 숙소에서 등반을 위해 베낭을 메고 나섰을 때, 현관에 매달려있는 온도계의 수은주가 영하 1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드물게 추운 날씨였다.
거기에 강풍이 불었고 산으로 올라갈 수록 낮아지는 온도와 협곡에서의 돌풍과 상승기류는 끝없는 스노우샤워를 만들어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는 되지 않았을까.
당시 바로 옆 개토왕폭에서 등반 중이던 지성이가 추락해서 발목이 부러졌는데 얼음이 워낙 강빙이었기 때문에 추락한 것이라고 했다.
강추위와 강풍, 스노우샤워는 이렇듯 등반의 많은 요소들을 변화시켜 등반행위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그 때 하단폭 등반을 마치고 확보지점에서 벌벌떨며 후등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데 올라온 등반자의 모습에 나 자신의 모습도 저러하지 않은가? 라는 놀라움을 가졌었다.
북극탐사대원처럼 하얗게 얼어버린 속눈썹, 파랗게 굳어버린 얼굴. 머리와 목덜미에 뒤집어 쓴 스노우샤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라는 소설책에 그런 대목이 나오지 않던가.
굴뚝 청소를 마치고 나온 상대방의 얼굴에 묻은 검은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상상하는...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듯 신체조건이 다 다른법.
난 다른 사람보다 손발이 차다. 이걸 의학용어로 수족냉증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겨울만 되면 그것때문에 상당한 고생을 한다.
그럼에도 겨울을 기다리고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는 심정은 무엇일까.
당시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등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원정등반같은 중요 일정도 아님에도 (예약을 취소하거나 등반을 연기해도 되는 단순한 것인데) 후배 김팔봉과의 약속때문이었고, 암장을 운영하는 팔봉의 스케쥴상 유일하게 시간이 비는 날이 바로 그 예약날이었기 때문이다.
팔봉과 줄을 묶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은 감수해야 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날씨가 도와줬다.
아니 우연히 예약한 날짜의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속초시의 온도가 영하 3도. 토왕폭은 영하 10도 이상이었을 것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우리 앞에 등반팀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었고 Y계곡에 도착해서 장비를 착용하고 있을 때 4명의 등반자가 도착을 하고 있었다.
서둘러 장비를 착용하고 가장 먼저 토왕폭 하단으로 올라붙었다.
자일 끝을 묶어 벨트에 메고 진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씩씩하고 싹싹한 진아는 토왕폭 등반을 해보았다고 하나 하단폭 등반의 경험만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하단은 내가 먼저 등반을 하기로 하고 남들이 오기 전에 가장 먼저 들이댔다.
약간의 물이 흘렀지만 등반하기에 가장 양호한 좌측벽으로 올라붙었다.
토왕폭 올 때마다 항상 등반자가 있어 등반이 무난한 좌측벽에서 등반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만큼은 이게 왠 떡이냐 하는 심정이었다.
스크류 6개를 챙긴 줄 알았는데 4개를 설치하고 완경사 종료지점에서 보니 남은 스크류가 1개 뿐이다.
할 수 없이 바일 두 자루에 퀵드로우를 연결하고 스크류와 이퀄라이징을 하였다.
뒤따라온 김점숙에게 남은 스크류가 있어 보강을 하였다.
효율적 등반을 위해 김점숙은 내가 오른 루트를 뒤따라 선등으로 올랐다.
우리팀 4명이 두 명씩 팀을 이뤄 등반에 나섰으니 4명이 한 줄로 붙은 다른 팀에게 추월당할 걱정은 없었다.
원래 작전은 김점숙이 상단을 먼저 오르면 진아가 그 뒤를 오르면서 김점숙의 스크류를 사용하자는 것이었는데 마음 급한 내가 먼저 들이대는 바람에 순서가 바뀌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진아가 상단 가장 먼저 등반을 시작하게 되었다.
진아는 토왕폭 상단 등반 경험이 없지만 등반에 관해서는 근력도 좋고 테크닉도 좋다.
드라이툴링(Dry Tooling)이 주전공이라 왠만한 남자클라이머보다 툴링테크닉과 과감성이 대단하다.
진아의 비장의 무기는 바일인데 블랙다이아몬드의 구형 퓨전이다.
지금은 단종되어 없어진 무기인데, 한 때 드라이툴링 대회에서 가장 각광받던 병기였다.
진아 역시 암장에서 툴링연습용으로 쓰고 가래비 등지에서 믹스등반할 때 쓰는 장비였는데 지난 밤에 숙소에서 피크 끝을 예리하게 튜닝하였다.
자신은 노믹보다 이 장비가 더 손에 맞고 타격이나 타격 후의 당기는 느낌도 좋다고 했다.
무거운 바일을 쓰지 않고 헤드와 무거운 추를 없애고 피크 끝을 예리하게 튜닝하면 적은 손목의 힘으로
낙빙없이 효율적인 타격이 가능하다.
바일 뿐 아니라 크램폰도 마찬가지다.
프론트 포인트의 끝을 날카롭게 튜닝하면 무릎아래 발목 스윙의 힘으로 충분히 프론트 포인팅 기술이 가능하다.
이러한 빙벽의 테크닉은 정승권교장이 개발한 N바디 등반동작과 함께 핵심적인 빙벽기술이며 대회와 실전등반에서 그 위력을 입증하였다.
그래서 정승권에게 빙벽을 배운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장비를 튜닝을 하고 N바디 동작을 구현하며 과감하게 선등에 나설 수 있다.
이 작은 시도가 우리나라 빙벽등반의 흐름을 조금씩 바꾸었는데 세월이 20년 가까이 흐르면서 지금은 우리 빙벽등반의 메가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등반 패러다임의 큰 변화이다.
그렇게 튜닝한 진아의 바일은 진아가 바일을 휘두를 때마다 낙빙없이 얼음 속으로 견고하게 박혔고 상단 테라스까지 거침없이 돌진하였다.
흡사 삼국지에서 관우가 언월도를 휘둘러 적진의 장수 목을 손쉽게 따오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적군의 대표 장수가 나와 싸움을 걸면 관우는 술 한 잔이 식기 전에 나가서 적 장수의 목을 취해오곤 했다.
군더더기 없는 병기의 사용으로 그렇게 효율적인 개별전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진아의 피켈질은 관우의 언월도와 같았다.
여러번 찍지 않고 단 한 번의 스냅으로 낙빙없이 깊이 박혔다.
후등으로 오르면서 보니 얼음은 예상보다 강빙이었고 타격포인트는 꽤 있었으나 프론트 포인팅을 하다보니 발끝이 얼음 위에서 튀었다.
물론 포인트 끝을 예리하게 갈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진아의 뒤를 김점숙이 이어 선등으로 올랐고 진아의 후등은 나, 김점숙의 후등은 철이형이다.
상단 70미터 지점에서 피치를 끊고 거기에서 모인 우리들은 다시 등반에 나선다.
진아가 역시 거침없이 낙빙 하나 없이 2피치를 마무리한다.
등반을 마치니 11시 30분.
토왕폭 등반을 오전내에 마치기는 처음이다. 여러가지 변수들이 우리 편이었다.
무릎이 안좋은 두 여인을 위해 하산은 천천히 아주 여유있게 한다.
그렇다보니 주차장에서 짐을 정리하고 의정부를 향해 출발한 시간이 오후 4시경.
집에와서 샤워하고 빨래하고 누워 생각하니 하루가 참 길었구나 하는 생각이다.
하루종일 찬바람을 맞은 탓으로 얼굴이 벌겋고 입술이 따끔거린다.
이런 얼굴로 내일 아침에 사무실에 나타나면 직원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년차휴가 내고 평일에 토왕폭 등반 하고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주위 몇 명 산사람들 뿐인데. 예전 일본 산악소설 '빙벽'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산에 가기위해 휴가를 신청하고 급여 가불을 하고 상사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산으로 등반하러 떠나는 장면들이 생각난다.
책으로 읽으면 그런 장면들이 멋있게 보이고 주인공이 상사를 설득하는 그런 모습조차 당당하고 멋진 산악인의 표상처럼 보였었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보여질까?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클라이머들이 삶에서는 인생에서는 먹고 살기위해 출근하고 눈치보고 스트레스 받고 내일을 걱정하는 샐러리맨 인데 ...
그래도 주말골퍼보다는 주말클라이머가, 주말 클라이머의 삶이 훨씬 더 낭만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인생과 삶에 충실해 보이고 순수해보이므로
누군가 그랬다.
신은 인간의 인생의 배치를 잘 못했다고,
청춘시절에는 사랑할 정열은 있으나
사랑할 방법을 모르고
나이를 먹고나서야
사랑하는 방법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같은데
사랑할 정열이 없고...
그러니 인생의 배치를
청년기 뒤에 노년기를 둘 것이 아니라
노년기 뒤에 청년기를 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 삶의 노래 -
세상에 저항하는 것은 좋으나
삶에는 저항하지 말라
세상은 거칠고 무서워도
삶은 그 사이를 바람처럼 달린다.
세상이 벽을 만들면
삶은 바람이 되어 벽을 넘는다.
세상이 강을 만들면
삶은 다리를 놓아 다시 손을 잡는다.
세상이 아무리 무거워도
아무리 차가워도
삶은 언제나 그것보다 가볍고 따뜻하다.
그리고 은밀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