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현감의 순국
신길원 현감은 4월 26일 왜군이 문경에 쳐들어오자 관병 수십 명을 이끌고 관아를 지키며 결사적으로 최후까지 항전하다 온몸에 부상을 입고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도 굽히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마침내 사지四肢를 절단당하여 장렬히 순국하였다.
순국사실도 모르는 경상도감찰사 김수는 개령현감 이희급, 선산부사 정경달 상주목사 김해 판관 권길 문경현감 신길원이 도망가 숨어 적의 동태를 치보하지 않는다고 장계를 올렸다
장계 때문인지 이튿날 비변사도 같은 내용으로 이희급, 정경달 김해 권길 신길원 사근찰방 金宗民이 임지에서 도망한 죄가 가볍지 않지만 속히 나와서 임무를 다하도록 하니 상주 판관 권길, 사근찰방 김종무는 상주 북천 전투에서 순국하고 신길원 현감도 임지에서 4월에 순국했는데 도망한 수령으로 잘못 알고 있다
신길원[申吉元 1548(명종 3)~1592(선조 25)]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경초慶初로 아버지는 진사시와 문과시에 급제하여 단양군수를 역임한 국량國梁이다. 29세인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입격하고 선조 23년(1590)에 문경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임란 때 지방관으로 임지에서 순국한 그 충절을 나라에서는 좌승지로 증직贈職하여 기렸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신길원申吉元 현감의 충절이 실려 널리 선양宣揚하게 하였다. 숙종 32년(1706)에 그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신길원 현감 충렬비는 1981년 4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45호로 지정됐다. 비신碑身 전면에는 해서楷書로 ‘縣監申吉元忠烈碑현감신길원충렬비’라고 쓰고 이면裏面에는 소자小字로 행장行狀을 기록하였다. 문경읍 상리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던 것을 1976년에 문경 제1관문 안에 옮겼다가 1981년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충렬사는 1826년(순조 26)에 현감 홍노영洪魯榮과 유림儒林이 문경읍 교촌리 문경향교 앞에 건립하여 나라를 위해 순직한 신길원 현감을 배향配享했다. 1857년(철종 8)에 중수했으나 고종 때 훼철되었다가 복원하여 1981년 중수重修를 거쳐 1999년에 주흘관 안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대구광역시 북구 지묘동 표충사에 배향配享되었고 신길원 현감과 관련한 내용과 신길원 현감을 배향하는 충렬사에 관한 기록을 담아 2권 1책으로 충렬사지(20×29㎝)를 1982년에 발간했다. 신길원 현감의 살신호국殺身護國의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儒林에서 매년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신길원 현감이 전사한 후 5개월이 지난 9월에 변혼(卞渾)이 34세의 젊은 나이에 가수령(假守令)이 되었다가 얼마 후 정식 임명 되었다 변혼은 1951년 무과에 급제한후 임란이 일어나자 사인士人 전우全雨와 함게 초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김면金沔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전공을 세웠다 그 공이 인정되어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에 의해 임시로 문경현감에 차임 되었다가 장계를 올려 왕의 정식 승인을 거처 임명 되었다 문경현감 변혼(卞渾)은 부임했으나 임지를 수복하지 못해 양산사(현제 봉암사)에 있으면서 왜적이 절에까지 쳐들어오자 화살을 퍼부어 막아낸 적이 있다 백성들은 왜적의 침탈뿐만 아니라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길에 잇달았으나 관량官糧도 없어 소나무 껍
질을 벗겨 콩과 죽을 쑤어 백성을 구휼하고자 노력했다
전라우도의 의병 참모를 수행한 홍함(洪函)은 도임시기를 알수 없으나 1598년 11월 명군을 맞이한 기록이 있다
왜군은 조선 점령지를 8도군분법八道軍分法으로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光 군사가 경상도를 맡아 대구 청도 1500명, 개령 10,000명 선산 1500명 상주 4000명 문경 200명이 점거하여 후방의 보급로 확보와 함께 노략질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