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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사야 제14강
메시야의 잔치
말씀/ 이사야 54,55장
요절/ 이사야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세상에는 여러 가지 초청이 있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은 온전히 우리 인생들을 위한 것입니다. 헛된 것을 쫓아다니다 목마른 인생들을 아무 조건 없이 살리고자 하시는 생명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을 떠나 목말라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풍성한 은혜의 잔치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네 장막터를 넓히라 (54장)
1a절을 보십시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잉태하지 못한 자, 출산하지 못한 자로 비유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출산하지 못한 여인은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여자로서의 존재의미를 잃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된 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재의미를 잃은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너는 노래할지어다.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기쁨으로 인해 함성을 지르듯 노래하라는 말입니다. 보통 노래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기쁜 노래는 고사하고 한풀이 노래를 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현재 이스라엘도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기뻐 노래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b절입니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이는 장차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자식들이 바벨론의 자식들보다 더 많아질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은 죄로 인해 강대국에 포로로 끌려가 나라 잃은 백성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장차 연단이 끝난 후에는 열방의 어떤 나라보다도 더 강하고 영향력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기에 기쁨으로 노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소망을 붙든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고대 근동의 유목민들은 그들의 거처로 장막을 사용했습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장막은 대들보가 부착되어 있지 않아 필요한 만큼의 기둥과 밧줄, 말뚝을 이용해서 임의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부모처자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종살이하면서 심한 멸시와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의 신분을 완전히 잃고 겨우 자기 몸 하나 찬바람 피할 수 있는 장막을 치고 웅크려 앉아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동정과 위로의 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라!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라!”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달픈 포로생활 동안 모든 생각이 자기중심적이 되었습니다. 민족이고 하나님의 역사고 뒷전이었습니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까? 자기 연민에 빠져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일 뿐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우주만물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우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이 생겨났습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잘 알고 계십니다. 식민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의 처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장막터를 넓히라!”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종살이 생활로 피곤하고 지쳐 아무런 비전과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장막터를 넓히라니요! 위로는 못해줄망정 해도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장막터를 넓히라 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잉태하지 못해 2평짜리 원룸장막만 있어도 될 여인에게 장막터를 넓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연약한 순과 같은 우리를 통해, 민들레 홀씨와 같은 우리를 통해 울창한 숲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주십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은퇴목사인 조용기 목사님은 처음 교회를 시작하면서 20명의 성도들을 놓고 500명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그렇게 줄기차게 했을 때 70만의 성도들을 섬기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라!” 1792년 스코틀랜드에 한 구두 수선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문 2,3절 말씀을 영접했습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그는 비록 비천한 구두 수선공이었지만 위대하게 쓰실 하나님, 비전 가운데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1년 후, 하나님은 그를 인도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입니다. 그가 선교현장에서 보낸 편지들은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수많은 선교회를 창설하게 했으며 수많은 영국 대학생들을 세계선교에 동원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을 통해 영국과 미국을 폭력과 도덕적 타락에서 구원하는 영적각성운동의 불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우리에게도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비전이 있습니까? 이 크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면 장막터를 넓힐 수 있을 텐데 기름지지 못한 이 땅의 장막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지요? 현재의 상황과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비전을 굳게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비전을 담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기도의 줄을 길게 하고 말씀 속에 말뚝을 견고히 박으라. 장막터를 넓혀 거대한 텐트를 치는 데는 줄을 길게 하고 말뚝을 견고히 박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여기서 ‘줄’은 기도의 줄을, ‘말뚝’은 말씀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신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다른 동역자와 양들, 더 나아가 한국과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깊이 있는 성경묵상과 연구를 통해 어떤 영혼이라도 먹일 수 있는 빼어난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장막터를 넓힐 때 얻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좌우로 퍼지며, 열방을 얻으며’ 이 말씀은 이 땅의 무수한 이방인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로 그들 공동체에 함께 할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황폐한 성읍이 사람 살만한 곳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축복하시는 것은 열방을 섬기는 목자의 나라로 쓰기 위함입니다.
우리 진주센터는 경상대 개척을 시작한 지 만5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양들이 센터를 들며날며 관계성을 맺고 말씀공부를 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제목인 한 명의 아브라함과 사라를 세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동역자들은 적고 캠퍼스 양들은 취직문제에 매이고 하나님을 몰라 목자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어려운 현실과 한계상황 속에서 장막터를 넓히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장막터를 넓히기보다는 있는 장막에 안주하며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금 크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들을 기대합시다. 그래서 좌우로 퍼지며 열방을 얻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그들의 젊었을 때’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 없이 육신의 소욕과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육신의 만족만을 위해 사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들의 과부 때’는 바벨론 포로생활 때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거룩한 열매를 맺어야 할 판에 그들은 오히려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과부로 사는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님 없이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엡2:3). 이런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구원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부르심의 은혜를 감당치 못하고 물질주의, 쾌락주의, 인본주의로 흘러 하나님을 분노케 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이로 인해 연단 받고 절망하면서 목자 생활이 실패한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젊었을 때의 수치와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을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그들을 아내로 택하셨지만 그들은 이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상과 짝하여 간음을 행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시 그들을 버렸으나 큰 긍휼로 다시 모을 것이요(7), 넘치는 진노로 잠시 얼굴을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 하십니다(8).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10).
11,12절을 보십시오. 처음 결혼할 때는 신랑 신부가 서로 아름다운 보석을 교환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서약합니다. 그런데 간음하여 버렸던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면서 청옥, 홍보석, 석류석 등(루비, 사파이어) 이렇게 진귀한 보석을 선물하는 남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맞이하면서 처음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신방을 꾸미십니다. 이는 돌아올 이스라엘의 본래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자비와 변함없는 사랑으로 회복시켜주실 하나님을 굳게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55장)
1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우리는 목마름의 고통을 잘 압니다. 특히 형제들이라면 뜨거운 뙤약볕에서 축구를 하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고통을 한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그 때 냉수를 사다 들이키거나 수박 한통을 쪼개 먹을 때면 그것처럼 기분 좋은 것이 없습니다. 목마른 것도 문제지만 만약 이 때 돈이 없어 사먹지 못한다면 한없이 서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목마른 자들에게 물로 나아오라, 또 돈 없는 자도 그냥 오라고 하십니다. 1절을 영어로 보면, come, come, come, come, ‘오라’는 단어가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Come, all you who are thirsty, come to the waters; and you who have no money, come, buy and eat! Come, buy wine and milk without money and without cost.”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당신에게 나아오길 원하시는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헛된 것을 쫓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안타까운 심정으로 애타게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목마른 자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이는 당시 바벨론 밑에서 노예처럼 살다가 지친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동시에 삶의 무거운 굴레에 눌려 지치고 피곤한 현대인들을 말합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랑 혹은 쾌락에 목마르고 돈과 권력에 목마릅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천하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혼의 갈증입니다. 사람은 영혼을 소유했기 때문에 영혼의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어떤 기쁨도 만족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인생들을 향해 “Come!”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단순히 나아가기만 하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주시고 영혼의 만족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디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2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선진문화에서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바벨론의 찬란한 문화를 부러워하다가 그들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찬란한 문화가 겉은 화려할지라도 ‘속 빈 강정’처럼 영혼의 만족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그럼, 어디에 만족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만족시킵니다.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통 사람들은 TV에 유명 연예인이 나와서 한마디 하면 귀를 솔깃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귀를 막습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들을 때 그 영혼이 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미 다윗에게도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인류의 구원자, 즉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메시야를 통해서 영적인 나라가 세워집니다(5). 이 나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나아가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우리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풍성한 은혜의 잔치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초청 앞에 우리는 언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까? 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세상일처럼 ‘때’가 중요합니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자꾸만 뒤로 미루면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한 순간의 결단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도 하고 멀어지게도 합니다. 주일에 늦잠 자다가 예배를 한두 번 놓치다 보면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늦출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할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천국, 혼자 갈 순 없잖아요」라는 책을 쓴 김길복 집사에게 전도의 불쏘시개가 됐던 것은 옆집 새댁 아저씨의 갑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아저씨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뜸을 드렸습니다. 밥도 나눠먹고, 김치도 나눠먹고 같이 교제의 시간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특히 며칠 전에 “교회 한 번 나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가슴에 바늘이 찔리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면서도 “예수 믿으세요.”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또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 믿으세요.”를 최우선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개성과는 다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길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죄입니다. 죄는 버려야지 가지고 있으면 암처럼 퍼져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하나님도 자기도 다 가지려 하면 모두 다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돌아오는 자는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 품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난 너무 죄가 많아 도저히 소망이 없어!’하며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자 합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8,9).”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동네에 신부와 창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부러워했습니다. 신부는 창녀의 자유로움을, 창녀는 신부의 거룩함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가서 보니 창녀는 보이고 신부는 보이지 않아 창녀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디에 계시지요?”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신부는 겉만 거룩했지 속은 너보다 더 못해서 여기에 오지 못했구나.” 우리는 사람의 겉만 보지 속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어느 누구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너그럽게 용서받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밖을 보면 단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는 나무들을 적셔서 꽃망울을 터뜨리도록 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비는 땅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모두 다 흘러버린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콩나물은 먹음직스럽게 자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겉으로 보면 별 신통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그 날에 사람들은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산들과 언덕들이 우리 앞에서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 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온 세상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나아갈 때 용서해주시고 풍성한 은혜의 잔치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심령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출산하지 못하고 홀로 된 여인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외쳐 노래해야겠습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복음의 장막터를 넓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 주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