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 기 이 름 |
자 케 |
거 문 고 |
비 나 |
1 |
줄수 |
3줄 |
6줄 |
7줄 |
2 |
선율 연주 줄 |
2줄 |
2줄 |
2줄 |
3 |
선율 연주줄 조율 |
완전 4도 |
완전 4도 |
완전 4도 |
4 |
괘 위의 줄 |
3줄 |
4줄 |
4줄 |
5 |
괘 |
13괘 |
16괘 |
22-24괘 |
6 |
괘의 성질 |
붙박이 괘 |
붙박이괘 |
붙박이 괘 |
7 |
지속음 줄 수 |
1줄 |
4줄 |
5줄 |
8 |
지속음 조율
|
완전 8도
|
완전 1도 완전 4도 완전 5도 완전 8도 |
완전 1도 완전 4도 완전 5도 완전 8도 |
9 |
연주 도구 |
막대 사용 |
술대 사용 |
쇠고리 |
10 |
상징 동물
|
공작(옛날) 악어(현대) |
검은 학 봉황 용 |
봉황(옛날) 용(현대) |
2) 장구의 수용
장구는 양면이 가죽으로 메워져 있으며 양면을 잇는 줄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를 조정함으로써 음정을 조절하는
타악기이다. 장구의 수용을 알아보기 위하여 진양(陳陽)의 ꡔ악서ꡕ(樂書)에 나오는 장구 종류와 돈황 석굴의
장구와, 인도의 장구, 그리고 한국의 장구를 비교하여 보겠다.
(1) 진양(陳陽) ꡔ악서ꡕ(樂書)의 장구
진양의 ꡔ악서ꡕ 권12511)에 장구의 한 종류인 중동고(中銅鼓)가 ‘남만의 천축에서 나왔다’(出於南蠻天竺)라는
기록이 있다.
ꡔ악서ꡕ에는 모두 13가지의 장구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동고(中銅鼓)는 권 125에 소개되어 있다. 중동고 앞에 대동고가 있으나 그림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남만의
천축(南蠻天竺)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면 이 악기가 인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12)
소동고(小銅鼓)는 ꡔ당서ꡕ(唐書)에 전해 오기는 천축부에서 쓴다고 하였고 정원중에 표국(驃國, 현재의 미얀마)에서 온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13)
갈고(羯鼓)는 구자(龜玆)기․고창(高昌)기․소륵(疎勒)기․천축(天竺)기의 음악에 쓰는데, 대 위에 놓고 두 개의 채를
쳐서 그 소리가 초쇄명렬(焦殺鳴烈)함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였다.14) 이는 일본의 갈고 타법을 연상하게 한다.
일본의 갈고는 작으며 대(臺) 위에 놓고 두개의 채[兩杖]로 빠르게[鳴烈] 친다.
ꡔ구당서ꡕ(舊唐書)에 ‘두손으로 치며 갈중(羯中)에서 나온 까닭으로 갈고라 하였는데 양장고(兩杖鼓)라고 한다.’고
하였고 ꡔ태평어람ꡕ(太平御覽)에 ‘갈고는 외이(外夷)에서 나왔고 융갈(戎羯))의 북이라 해서 갈고라 한다’고
하였다.15) 구자기, 고창기, 소륵기, 천축기 등에서 사용하였다.
갈고중(羯鼓中)은 양장고(兩杖鼓)라 하여 두 개의 채로 치고, 틀 위에 얹어 놓고 치도록 되어 있다. 장안(長安)에서
‘밤에 갈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유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16)
도담고(都擔鼓)는 부남(扶南, 현재의 타이와 캄보디아), 천축의 악기이고 그 모양은 요고를 작게 만든 것이고
작은 망치로 치는 악기였다.17)
요고는 목부의 악기로서 나무로 만든 것이다. 요고는 나무로 만들어야지 흙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18)
(2) 돈황벽화의 장구
돈황(敦煌)은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서남쪽으로 삼위산(三危山)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천산남로(天山南路)를 들어갈 때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으로 한당(漢唐) 사이에 동서교통의 요충지로서
서방문화가 동쪽으로 들어온 첫 번째 관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지방에 처음으로 나타난 지방 특유의 음악은 양주(凉州)를 점령하고 후량(後凉)을 세운 여광(呂光)이 서역을
정벌한 후 만든 구자악이다. 즉 구자악이 장안에 소개된 것은 서기 383년 전진의 표기장군(驃騎將軍) 여광이 황제
부견(符堅)의 명을 받아 서역을 평정 한 이후이다. 여광은 이 때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중원에 가지고 왔다. 하나는
구자국의 명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을 데리고 와 많은 불경을 한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르시아나 인도 등 서방에서 전래된 음악을 흡수하여 구자악을 음악을 들여온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서역악기가 전래되었는데 공후․
오현비파․피리․요고․갈고 등이 이 때 수입되었다.19)
수많은 돈황화 중 중요한 음악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각종의 정토변상도(淨土變相圖) 중에 나타나는 불전
무악회(佛前舞樂會)의 그림이다. 이 불전무악회의 그림은 일정한 형식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다. 변상도의 주체라
할 중앙에 자리잡은 주불(主佛)을 중심으로 여러 부처가 나란히 앞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앞으로 춤추는
대(舞臺)가 있는데 대에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여자가 춤추고 있고, 좌우의 대에 두 사람 내지 7~8인의 사람이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 전형적인 것이다. 따라서 돈황화에 나타나는 음악 자료의 대부분은 이 불전
무악회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에 허공의 천음(天音)을 나타내는 것이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제불(諸佛)의 위쪽, 즉 그림의 면 위쪽
부분이다. 또 중앙 불상의 주위에는 광배(光背)에 주악천녀(奏樂天女)를 나타내는 그림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비파가 압도적으로 많고 세요고(細腰鼓)․방향(方響)․생(笙) 등이 보인다.
돈황화 중에 음악 자료를 포함하고 것은 모두 120매인데 대부분은 당대(唐代)대의 것이고 당 초기의 것과 송(宋)
초기의 것, 원대(元代)의 것도 몇 장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돈황화는 거의 전부가 공개되었는데 출판된 책에 나타난 사진이 선명치 못하여 악기의 판별이 곤란한 것이
대단히 많다. 이 중에 무슨 악기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약 400정도이고 알아볼 수 없는 것이 180정도이다.
이 중에서 우리들의 관심사인 장구 종류의 악기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요고(細腰鼓)는 돈황 제98굴 오대(五代) 호선무(胡旋舞)를 그린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흐리기는 하지만,
세요고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ꡔ악학궤범ꡕ 권7의 것과 일치한다. 연주자가 한 손에
채를 들고 한 손은 맨손으로 아무것도 잡지 않고 치는 것은 진양 ꡔ악서ꡕ(樂書)의 해설과 일치한다. ꡔ악서ꡕ
권127에 의하면 세요고는 정고(正鼓)와 화고(和鼓)의 두 가지가 있어서 이를 제일고(第一鼓), 제이고(第二鼓)라
불렀다.
다음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갈고(羯鼓)이다. 이 악기는 보통 작을 대(台)를 만들고 그 위에 북을 올려 놓고
2개의 채로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돈황화에는 대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다음에는 도담고(都擔鼓)와 계루고(鷄婁鼓)가 있다. 갈고보다 북면은 크고 통은 짧아서 작은 채와 맨손으로
치는 것이 도담고이다. 또 도담고보다 큰 채로 치는 것을 계루고라 한다.
불전무악회의 그림에는 앞줄에 여러 사람이 앉고 뒤로 두 줄 혹은 세 줄로 연주자들이 앉은 경우가 많다.
이 때에는 앞줄의 악기는 알 수 있지만 뒷줄의 악기는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연주자세로 악기를 상상
해야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북 종류의 것은 바닥에 놓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서 뒷줄에 놓이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갈고․세요고․계루고 등은 반드시 앞부분에 그려져 있기에 판별하기가 쉬운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3) 인도의 장구 종류
중동고(中銅鼓)가 천축 즉 인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진양(陳陽)의 ꡔ악서ꡕ(樂書) 권125의 기록에 의거, 인도에
존재하는 장구 종류를 살피는 것은 진양 ꡔ악서ꡕ의 기록에 담긴 장구가 지금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인도의 장구형 악기로는 다마루(Damaroo)와 다이루(Dairoo)가 있다. 다마루는 사라쉬트라(Saurashtra)지방의
악기이고 다이루는 라자스탄(Rajasthan)지방의 악기이다. 다마루를 더 작게 만들면 후둑(Huduk)이라 하고 마디야
파라데쉬(Madhya Paradesh) 사람들은 안트라(Antra)라 한다. 이 악기는 아주 작아 주먹 안에 들어간다.
왼손 주먹 안에 이 악기를 쥐고 오른손으로 두드리는 악기이다. 왼손으로 잡을 때 꽉 잡으면 줄이 당겨져서 음이
올라가고, 놓으면 느슨해져서 음이 내려간다. 춤출 때 쓰고 유랑악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악기이다.20)
(4) 우리 나라의 장구
우리 나라의 장구에 관한 자료 중 가장 오랜 것은 석상자료이며, 그 중에서 다음의 계유명 아미타불 삼존사면석상
(癸酉銘 阿彌陀佛 三尊四面石像)은 석상자료 중 유일한 것이다.21)
이것은 1960년 9월에 충남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의 비암사에 서 있는 석상이다. 이 석상의 앞면에 삼존불이 조각
되어 있고, 그 아래쪽에 각행 4자로 12행의 명문이 새겨 있는데 여기에 계유년이 나온다. 이 석상은 뒷면에 4단을
이루어 각단에 5구식(五軀式)의 좌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왼쪽과 오른쪽에 아래 위 2단으로 각각 넷의 악기가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악기를 살펴보면 왼쪽으로 요고(腰鼓)․쟁(箏)․통소(洞簫)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한 개와
오른쪽에는 소(簫)․횡적(橫笛)․생(笙)․비파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장구는 무릎에 얹혀 있고 작은 모양이어서
이대로는 장구가 흘러내려 연주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에는 안나타나지만 끈으로 어깨에 메고 연주하였을 것이다.
다음에는 범종비천(梵鍾飛天)의 주악도(奏樂圖)에 나오는 장구를 살펴보겠다. 범종 비천에 장구가 나오는 것 중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는 7가지인데 모두 남북국시대의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는
남북국시대인 서기 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鍾)의 비천(飛天)이다. 이 종은 725년 (성덕왕 24년)에 만들어진 종으로 한국식 종 특징의 하나인 음관(音管)이 원통형(圓筒形)인 것으로 국보로 지정한 종이다.
이 종은 신라 통일기에 우수한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현재 남아 있는 종으로는 가장 오래된 종이다.22) 이 종의
중앙에는 공후와 생(笙)이 새겨 있고, 상대(上帶)에는 요고(腰鼓?)․箏․橫笛 그리고 종류를 알 수 없는 악기가 나오고,
하대(下帶)에는 요고․피리(?)․횡적(橫笛?)․곡경비파(曲頸琵琶)가 나온다.23) 이 그림의 요고도 무릎에 얹혀 있는
것으로 작게 표현되고 있는데 끈으로 어깨에 메고 연주한 악기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운수사종(雲樹寺鍾, 상원사동종(A.D.725)과 같은 시기) 종이 있다. 이것은 일본 鳥根縣 安來市 淸井町
운수사(雲樹寺)에 보관 중이다. 이 종은 2척이 채 못되는 작은 종이지만 각 부분의 무늬가 아름다워 상원사종을 작게
만든 느낌이 드는 훌륭한 종이다. 그래서 시대도 상원사 종의 전후 시대인 8세기로 보고 있다. 즉 월정사의 상원사에
있는 종이 서기 576년(성덕왕 24년)에 조성되었는데 이를 참고로 한다면 매우 오래된 종임을 알 수 있다. 이 종에는
횡적과 요고의 주악이 나온다.24)
다음에는 문헌에 나오는 장구를 살펴보겠다.
이 장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려 문종 30년(1056)에 장구업사(杖鼓業師)가 있었다는 기록이 ꡔ고려사ꡕ에
전한다.25) 이를 보면 장구는 생(笙)․당적(唐笛)․향당비파(鄕唐琵琶)․방향(方響)․피리․중금과 더불어 고려 문종 때에
이미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6)
우리나라의 장구는 허리가 잘록하다하여 세요고(細腰鼓)라고도 한다. 장구를 만드는 통의 재료로 현재는 나무만
쓰고 있으나 ꡔ악학궤범ꡕ의 기록을 보면 사기․기와․나무 등을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 기와는 좋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27)
오늘날 장구 종류의 악기는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다. 장구의 기원지인 인도에서 조차 ‘장구(hourglass drum)는 한국 악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바로 외래 악기를 수용하는 조상들의 수용능력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2. 악조의 수용
선법을 연구하려면 악보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악보로는 ꡔ세종실록ꡕ(世宗實錄) 악보가 가장 오랜
것이다. 그래서 세종 이전의 선법 연구는 대단히 어렵다. 세종(1418-1450 재임) 이후에 편찬한 고려 음악의
악보로 연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문헌에서 악조 이름을 처음으로 소개한 문헌은 ꡔ삼국사기ꡕ(三國史記)이다. 이 책에 나오는 악조 이름을
살펴 당시 음악의 선법을 살펴 어느 악조가 외래 악조인가를 알아 보겠다.
ꡔ삼국사기ꡕ에는 가야고와 거문고 그리고 비파와 삼죽에 사용한 악조가 나와 있다.28) 가야고 음악에는 하림조
(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 두 가지가 있었고, 거문고 음악에는 평조(平調)와 우조(羽調) 두 가지가 있었다.
향비파 음악에는 궁조(宮調)․칠현조(七賢調)․봉황조(鳳凰調)의 세 가지가 있었다. 삼죽 음악에는 평조(平調)․
황종조(黃種調)․이아조(二牙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출조(出調)․준조(俊調)의 7가지가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ꡔ삼국사기ꡕ에 나오는 기록을 중심으로 신라음악의 악조를 알아보고, 그 중에서 외래 악조를 밝혀
볼 것이다.
1) 신라 삼죽의 일곱 악조
삼죽이란 대금․중금․소금을 말한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삼죽 음악에 사용한 악조는 일곱 가지이고, 곡수는 대금곡이 324곡, 중금곡이 245곡, 소금곡은 298곡으로 모두 867곡이다.
삼죽의 일곱 악조는 평조(平調)․황종조(黃鍾調)․이아조(二牙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출조(出調)․준조(俊調)
이다.
이 일곱 악조 중에 평조․월조․황종조․반섭조의 네 악조는 754년 당나라에서 이름을 바꾼 중국의 악조이다.
이 네 악조는 남북국시대 삼죽의 음악에서 뿐 아니라, 일본의 당악에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이아조․출조․
준조의 세 악조는 알 수 없다. 이들이 향악 악조인지 당악 악조인지 알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
2) 향비파의 궁조․칠현조․봉황조
ꡔ삼국사기ꡕ 악지에 의하면, 향비파 음악 악조는 궁조(宮調)․칠현조(七賢調)․봉황조(鳳凰調)의 세 가지이고, 곡수는
모두 212곡이었다.29)
3) 당속악 28조와 신라 음악
신라 음악의 악조를 중국의 당속악조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평조는 임종우(林鍾羽)이고, 황종조는 황종우(黃鍾羽)이고, 월조는 황종상(黃鍾商)이고, 반섭조는 태주우(太簇羽)에 해당한다.30)
이 중에서 반섭조는 인도에서 기원한 악조로 인도 판차마(panchama)와 관계가 있다.31)판차마는 인도 음악의
12스바라(svara) 중 8째 음이름으로 서양음악 음이름과 비교하면 ‘솔’이 된다.32) 이 반섭조는 산스크리트(梵語)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이것을 ꡔ수서ꡕ(隋書)에는 반섬(般贍), ꡔ송사ꡕ(宋史)의 악지와 진양(陳陽)의 ꡔ악서ꡕ(樂書)에서는 반섭(盤涉)으로, 일본 가가쿠(아악, 雅樂)에서는 반시키(盤涉)로 나온다33)이것은 모두 인도
쿠디미야마라이(Kudimiyamalai) 비문(碑文)의 7조 중에 나오는 판차마를 번역한 말이다.34) 이 반섭조는 북주(北周, 557-579))의 무제(武帝, 561-577)에게 돌궐(突厥)의 황후를 따라서 중국에 들어온 구자 음악인 소지파
(蘇祗婆)가 소개했다는 7조 중의 하나이다. 소지파는 ‘7조 5단’을 전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구자악(龜玆樂) 이론이다.
그리고 소지파는 구자 사람이었다고 한다.35)
이 반섭조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면, 인도 - 구자 - 중국 - 한국 -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전파는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이 시대에 왕성했던 음악적 교류를 나타내는 것이다.이와 같이 반섭조의 교류 형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대 후기 신라에서는 서역 음악 악조를 수용하였으며, 서역 음악의 연주 활동이 더욱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36)
당 현종(712-756)은 754년(천보13) 7월에 조칙을 내려 조명(調名)과 곡명(曲名)의 변경을 천하에 알리는
글을 돌에 새겨 태상시(太常寺:禮樂을 관장하던 부서)의 태악서(太樂暑) 앞뜰에 새웠다37)
ꡔ삼국사기ꡕ에는 당속악조인 반섭조(般涉調)․평조(平調)․월조(越調)․황종조(黃鍾調)가 신라 삼현삼죽 악조로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중국의 당속악조가 신라에 수용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신라의
대표적인 향악기가 당속악조를 연주한 것은 외래 음악 악조인지 모를 정도로 익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악조는 중국에서 754년에 정한 것이므로 신라는 그 이후에 수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신라
당속악조 수용은 신라의 하대인 780년 이후라 하겠다.38)
이러한 수용의 결과는 최치원(崔致遠, 856 - ?)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로 나타난다. 최치원이 쓴 이 다섯
수의 시는 모두 서역의 춤과 음악을 묘사한 것인데 ‘향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서역음악은 이미 오래 전에 외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최치원 시절에 이미 ‘향악화’ 되어
있었던 음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충분히 ‘향악화’되어 외래음악이라고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향악
잡영오수’라고 ‘향악’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하겠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 나라 음악이 일찍부터 서역
음악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음악의 수용
고대의 음악 형편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영세하다. 악보가 있어야 당시의 음악을 알 수 있는데 악보가 없으니
글로 표현한 문장 중에서 음악을 찾아내야 한다.
이 부분에서는 백제의 기악(伎樂)과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를 예로 들어 음악의 수용을
알아보겠다.
1) 백제의 기악
ꡔ일본서기ꡕ에 의하면 백제 사람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귀화하여 오(吳)에서39) 배운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하였다.40) 기악의 탈[假面]이 일본 동대사(東大寺) 법륭사(法隆寺) 등 여러 곳에 보관되어 있어 기악무가 탈춤
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ꡔ교훈초ꡕ(敎訓抄, 1234)에 의하면, 그 탈춤은 적(笛), 삼고(三鼓, 장구와 흡사함),41) 동박자(銅拍子)42)의 반주로 추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탈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우리 나라의 산대가면극
(山臺假面劇)과 비슷하다.43) 다음에 기악과 산대 가면극의 비교를 표로 보인다.
<표 2> 기악과 산대 가면극의 비교
|
기악(伎樂) |
산대가면극(山臺假面劇) |
|
사자무(獅子舞) 오공(吳公) 가루라(迦樓羅)․금강(金剛) 바라문(婆羅門) 곤륜(崑崙) 역사(力士) 대호(大孤) 무덕악(武德樂) |
(봉산(鳳山)탈춤의 獅子춤) 연엽(蓮葉) 팔목중․완보(完甫) 冠쓴 중 노장(老丈) 취발이 양반(兩班) 좌악(坐樂) |
이와 같이 중국 남부에서 공연하던 기악(伎樂)이 612년에 백제 사람에 의하여 일본에 전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이것과 비슷한 산대가면극이 오늘날까지 한국에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보면 중국 남부의 기악이 백제에
전해져서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기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 나라의 산대극에서 사용하는 장단에 관한 궁금증 때문이다.
봉산탈춤에는 여러 가지 장단이 나오지만, 장단 대부분이(95% 이상)이 허튼타령 장단이다. 그런데 이 장단은 인도의
고대 음악에서 사용하던 장단이고 또한 인도에서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장단이다.44) 다음에 허튼타령 장단과 인도의
고대 음악의 장단과 비교할 것이다.
허튼타령 장단은 볶는타령 또는 자진타령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타령장단을 빨리 연주하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다음에 허튼 타령을 보인다. 이 장단의 특징은 네 장구점의 비율이 2:2:1:4 또는 3:3:2:5의 비율이다.
영산회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처음에는 한 곡이었던 것이 여러 곡으로 늘어나 지금의 규모가 큰 조곡이 되었다.
이 중에서 타령․군악은 ꡔ유예지ꡕ에 처음 보이는 것으로, 장단 구조가 상영산, 중영산, 세영산, 도드리 계통의 곡과
다르다. 즉, 상영산, 중영산, 세영산, 도도리 계통 곡의 장단은 雙鞭鼓鞭의 네 장구점을 각각 長短短長의 길이로
조합되어 있다. 그러나 타령 군악은 長長短增의 구조로 되어 있다.45)즉, 타령․군악 장단은 3:3:2:4의 비율로 네
장구점을 배열하고 있다. 다음에 여러 가지 타령․군악 장단이 장장단증(長長短增)의 구성임을 악보로 보이겠다.
이 비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허튼 타령, 볶는 타령, 자진 타령이 오히려 타령 장단의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이 있다면 단순한 것이 원형일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타령 장단이 악보로 표기된 것은
ꡔ동대금보ꡕ(東大琴譜, 1813)의 영산회산(灵山會山) 평조타령(平調打令)이 가장 오랜 것이다. 이 타령 장단은
쌍편고편이 2:2:1:3의 비율로 단순하다.46)
<악보 1> 여러 가지 타령 장단의 長長短增의 구조47)
① 「동대금보」의 타령 (8박)
⊝ |
|
ⅰ |
|
○ |
ⅰ |
|
|
② 「봉산탈춤무보」의 타령 (12박)
⊝ |
|
|
⊝ |
|
|
○ |
|
ⅰ |
|
|
|
③ 영산회상 중 타령
⊝ |
|
|
ⅰ |
|
․ |
⊝ |
|
ⅰ |
|
|
․ |
⊝ |
|
․ |
⊝ |
|
․ |
⊝ |
|
ⅰ |
|
|
․ |
⊝ |
|
․ |
⊝ |
|
․ |
⊝ |
|
ⅰ |
|
|
․ |
④ 영산회상 중 군악
⊝ |
|
|
ⅰ |
|
․ |
⊝ |
|
ⅰ |
|
|
․ |
⊝ |
|
․ |
⊝ |
|
․ |
⊝ |
|
ⅰ |
|
|
․ |
⑤ 계면 가락 도드리
⊝ |
|
|
ⅰ |
|
|
ⅰ |
|
ⅰ |
|
|
|
⊝ |
|
|
ⅰ |
|
․ |
⊝ |
|
ⅰ |
|
|
․ |
⑥ 양청 도드리
⊝ |
|
|
ⅰ |
|
|
ⅰ |
|
․ |
|
|
|
⊝ |
|
|
ⅰ |
|
|
ⅰ |
|
ⅰ |
|
|
|
다음에는 인도의 장단을 알아보고 그 중에 우리 나라의 타령 장단과 같은 구조의 장단을 보이겠다.
인도의 딸라는 우리 나라 장단에 해당하고 라야(laya)는 속도를 나타낸다. 오늘날 인도 딸라의 종류는 매우 많다.
딸라의 종류를 소개하는 단행본이 있을 정도로 많다.
인도 딸라에 관한 기록은 기원 전후 2세기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는 ꡔ나티야 사스트라ꡕ(Natya Sastra)48)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종류로는 5가지이다. 이후 13세기의 사른가데바(Sarngadeva)의 ꡔ쌍기따라트나카라ꡕ(Sangitaratnakara)에는 108종류의 딸라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음악가들이 스스로 좋아하는
딸라를 만들어 내고, 또 인기 없는 딸라는 사라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ꡔ나티야 사스트라ꡕ의 딸라를 중심으로 살펴 보겠다. 왜냐하면 너무 다양하면
비교가 어렵고 또한 ꡔ나티야 사스트라ꡕ에 나오는 딸라의 세 가지 속도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어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ꡔ나티야 사스트라ꡕ에 나오는 세 가지 속도는 다음과 같다. 빠른 것은 두르따(durta)라 하고 중간 속도는 마디야(madhya)라 하고, 느린 것은 빌람비따(vilambita)라 한다. 이 중에서 중간 속도인 마디야를 보통 속도로 생각하고
이것을 프라마나 깔라(pramana kala)라 한다.49)
ꡔ나티야 사스트라ꡕ에는 다섯 가지 기본형 딸라가 소개되어 있다.50) 이 이름을 적어 보면 챤챠뜨뿌따(cancatputa)․
챠빠뿌따(capaputa)․빤챠빠니(pancapani)․쌈빠끄베스따가(sampakvestaka)․우드갓따(udghattah)의 다섯 가지이다.
인도 딸라 구성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음을 사용한다. 세 가지 음이란 긴 음(long syllable)과 짧은 음(short syllable)
그리고 확대한 음(pluta)이다.51) 그래서 긴 음은 두 박자, 짧은 음은 한 박자, 그리고 확대한 음은 세 박자로 해석한다.52)
다음에 여러 딸라 중 챤챠뜨뿌따(cancatputa)와 챠빠뿌따(capaputa)를 살펴 보겠다. 챤챠뜨뿌따는 긴 음 둘과
짧은 음 하나와 확대한 음 하나로 구성한다.53) 즉 2:2:1:4의 구성이다. 챠빠뿌따(capaputa)는 뜨라야스라(tryasra)
계통인데 긴 음 하나, 두 개의 짧은 음, 그리고 긴 음 하나로 구성한다.54) 즉 2:1:1:2의 구성이다.
앞의 딸라는 다시 세 가지로 분화한다. 분화 방법은 깔라가 분화하는 것이다. 깔라(kala)는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인데
이것은 마뜨라(matra)로 셀 수 있다.
마뜨라가 둘인 것을 에까깔라 비디(ekakala vidhi), 마뜨라가 네 개로 분화한 것은 드비깔라 비디(dvikala vidhi),
마뜨라가 여덟 개로 분화한 것은 찻뚜스깔라 비디(catuskala vidhi)라 한다.55)
마뜨라가 둘인 에까깔라 비디(ekakala vidhi)는 빠른 속도이고, 다채로우며 기악이 중심이 되는 양식에 적당한
것으로 씨뜨라 마르가(citra marga)라고 한다. 마뜨라가 네 개로 분화한 것을 드비깔라 비디(dvikala vidhi)라하고,
이것은 보통의 속도이고, 성악과 기악이 균형을 이루는 보통의 양식에 적당한 것으로 브르띠 마르가(vrtti marga)라고 한다. 마뜨라가 여덟 개로 분화한 것을 찻뚜스깔라 비디(catuskala vidhi)라하고, 느린 속도이며, 기교적인
양식에 적당한 것으로 성악이 중심이 되며 다끄씨나 마르가(daksina marga)라고 한다.56)
이 세 속도의 음악을 비나(veena)로 반주할 때의 방법은 따트바(tattva)․아누가따(anugata)․오가(Ogha)의 세 가지가
있다. 따트바는 느린 빌람비따의 반주에 사용하는 것으로 ‘엄밀(嚴密)․정확’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비나로 반주할 때
성악의 선율을 충실하게 모방하는 것이다. 즉 속도(laya)․장단(tala)․선율선(旋律線, varna)․음절의 밀도(yati)․가사
처리(giti)․음절의 길이(aksara) 등을 엄격하게 성악 선율을 모방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성악에 종속적이다. 아누가따는 중간 속도의 마디야의 반주에 사용하는 것으로 ‘따른다(隋伴)’의 의미가 있다. 성악과 비나의 연주가 성악과 대등
하게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오가는 빠른 두루따의 반주에 사용하는 것으로 ‘화려한’의 의미가 있다. 비나 연주에 중점을 두는 기악적인 반주를 말한다.
다음에 다섯 가지 딸라 중에서 타령 장단 구조와 같은 챤챠뜨뿌따의 분화를 다음에 소개하겠다.57)
다음 악보에서 a․ni․vi․pra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는 무음타법(無音打法)이다. a는 아바빠(avapa)를 나타내고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가락을 둥글게 하고 박자를 세는 동작이다. ni는 니스크라마(niskrama)를 말하고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손가락을 편채로 박자를 세는 동작이다. vi는 비크세파(viksepa)를 표시한 것인데, 손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동작이다. 이것은 오늘날 북인도의 칼리(khali)나 남인도의 비사르지따(visarjita)와 같은 것이다. pra는
프라베사(pravesa)를 표시한 것인데, 반대로 손을 안으로 들여오는 동작을 말한다.
다음에 챤챠뜨뿌따(cancatputa)의 세 가지 분화를 정간보로 보인다.
<악보 2> 챤챠뜨뿌따(cancatputa)의 세 가지 분화58)
a) 에까깔라 비디(8박)
sam |
|
sa |
|
ta |
sa |
|
|
b) 드비깔라 비디(16박)59)
ni |
|
sa |
|
ni |
|
ta |
|
sa |
|
pra |
|
vi |
|
sam |
|
c) 찻뚜스깔라 비디(32박)60)
a |
|
ni |
|
vi |
|
sa |
|
a |
|
ni |
|
vi |
|
ta |
|
a |
|
sa |
|
vi |
|
pra |
|
a |
|
ni |
|
vi |
|
sam |
|
지금까지 인도의 챤챠뜨뿌따 딸라가 세 가지로 분화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분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장단증(長長短增), 즉 긴 음, 긴 음, 짧은 음, 늘어난 음의 구조로 전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타령의 2:2:1:3 또는 3:3:2:4 구조와 같다.
일본 기악의 바라문은 인도의 브라만과 관계 있고 이것은 우리 나라 산대극의 ‘관쓴 중’ 과장과 관련 있다. 여기에서
가능한 추론은 다음과 같다. 산대극은 오나라에서 온 것이다. 오나라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탈춤은 서역의
기예라고 한다. 그러므로 산대극은 서역 전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산대극의 장단에 인도 고대 음악의
장단이 나오고 연출과정에서 중이 등장한다. 이 중은 기악의 브라만과 관계있다. 봉산탈춤에서 사용하는 장단의
대부분은 허튼 타령이다. 이 허튼 타령은 인도의 챤챠뜨뿌따(canchatputa)와 관련 있다.
정리해 보면, 첫째로, 탈춤 반주음악으로 사용하는 장구가 인도 기원이다. 둘째로, 탈춤은 서역에서 기원한 것이다.
셋째는, 탈춤에서 사용하는 허튼 타령 장단은 인도의 챤챠뜨뿌타 딸라와 구조가 같다. 이러한 여러 정황 증거는 지금
까지 막연하게 짐작하던 산대극의 고향이 서역 여러 나라 중, 인도임을 알려주는 방증 자료라 하겠다.
2)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흔히 서역(西域)이라고 말하는 지역을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서역이라는 말은 중국의
서쪽 변방이라는 뜻인데 이 지역을 오늘날에는 흔히 중앙아시아(Central Asia)라고 한다.61) 이 지역은 고대의 교역로
였기 때문에 아시아 고대사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다.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서역악은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것은 885년(헌강왕 11) 3월이다.62) 그러므로, 향악잡영 5수는 헌강왕 11년
이후에 속하는 시(詩)라고 할 수 있다. 향악잡영오수는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
이며 ꡔ삼국사기ꡕ 악지(樂志)에 전한다.63)
최치원은 신라시대 말에 가까운 858년(憲安王 2)에 태어났고, 12살에 당나라에 건너가 학문에 힘썼고 높은 관직에
오른 적도 있지만 신라에서는 난세를 허무하게 여겨서 만년에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한 사람이다. 당나라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ꡔ계원필경ꡕ(桂苑筆耕), ꡔ최치원사륙집ꡕ(崔致遠四六集) 등을 당나라에 남겼다.
이와 같은 최치원이 읊은 칠언절구의 다섯 수는 어쩌면 당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견문이라면 ‘향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중국 음악에서는 향악(鄕樂)이라는 말의 용례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향악잡영오수는 신라에서 최치원 이전에 이미 오래 전에 들어온 음악이기에 신라인에게 익숙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음악은 외래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 땅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 온 음악이라는
생각으로 ‘향악’이라고 이름하였을 것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는 9세기 말 ‘향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점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에는 이미 향악화한 것이다. 이러한 향악화 과정은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중앙아시아 음악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통일 신라 이전으로 소급될 것이다.
(1) 금환(金丸)
중국에서는 농환(弄丸)이라고 하고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한(漢) 나라의 화상석(畵像石)에 자주 나타나고
중국에 예로부터 있던 산악(散樂: 雜伎, 百伎, 雜戱)이다. 그렇다면 금환은 금빛 나는 공을 던지는 곡예의 일종이다.
온 몸을 휘두르고 두 팔을 내저어
금환을 떼굴떼굴 힘차게 굴리니
명월이 굴러가고 별도 반짝반짝
고요한 바다 물결엔 고래도 춤을 춘다.64)
ꡔ수서ꡕ(隋書)와 ꡔ북사ꡕ(北史)및 ꡔ통전ꡕ通典)의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에 농주(弄珠)가 있었다’하고,
ꡔ삼국유사ꡕ에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蹴鞠), 즉 ‘농주지희(弄珠之戱)를 즐겼다’하고, 우륵의 12곡 중의 보기
(寶伎)도 농주에 속한다고 하겠다.65) 농환(弄丸)의 이름은 조선조에도 보이나 백제나 신라보다 앞서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즉 서기 4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팔청리(八淸里) 고분, 약수리(藥水里) 고분
수산리(修山里) 고분, 미천왕(300-330) 고분 등의 벽화에는 공과 장대를 던지는 금환(金丸)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66)
(2) 월전(月顚)
올라간 두 어깨에 목조차 들어가고
머리 위에 상투는 뾰족하게 나왔어라.
노래소리 들리자 웃음소리 요란하며
저녁에 단 깃발 밤새도록 휘날린다.67)
월전(月顚)은 서역 우전국(지금의 khotan)에서 전래한 탈춤의 일종으로 호인형(胡人形)의 탈을 쓴 배우들의 흉내
내기 놀이이며 경희극(輕喜劇)과 같은 것이라는 설,68) ‘군유투주배(群儒鬪酒盃)’라는 점에서는 일본의 우방악
(右方樂) 중의 호덕악(胡德樂)과 비슷할 것이라는 견해69) 등이 있다.
(3) 대면(大面)
황금색 탈 쓴 사람 누구인지 모를세라.
구슬 채찍 휘두르며 귀신을 쫓아낸다.
달아나며 춤추다가 으쓱으쓱 늦은 걸음
너울너울 춤을 추는 봉황새와 같아라.70)
황금의 가면을 쓰고 손에 붉은 채를 든 귀신처럼 달리고 혹은 걷고, 황새가 새벽에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ꡔ통전ꡕ(通典) 권146의 산악(散樂) 항목의 가무희(歌舞戱) 항을 보면 대면(大面)․발두(撥頭)․답요랑(踏搖娘)․
굴뢰자(窟儡子)의 네 가지 기를 소개하고, 대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면은 북제(北齊)에서 나왔다. 난릉왕(蘭陵王) 장공(長恭)은 재주와 용맹함이 있고, 더구나 용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늘 가면을 쓰고 적군을 대하였다. 일찍이 북주(北周)의 군대를 금용성(金墉城) 아래에서 무찌르고 그 용맹은
전군에서 으뜸이었다. 북제 사람들은 이것을 장하게 여겨 이 춤을 만들어서 그 아름다운 지휘하는 몸짓과 무찌르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곡을 ’난릉왕입진곡‘(蘭陵王入陣曲)이라고도 한다.”71)
(4) 속독(束毒)
고수머리 남빛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뜰에 와서 난(鸞) 새 같이 춤을 춘다.
북 소리 둥당둥당 바람 소리 살랑살랑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끝 없이도 춤을 추네.72)
속독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Tashkent)와 사마르칸드(Samarkand) 일대에 있었던 소그드73)(Soghd: 粟特) 제국에서 전래한 춤의 일종으로74) 일본에 전하는 고려악(高麗樂) 중의 숙덕(宿德)에 해당하는 것75)이다.
이 속독은 일본에 악보로 전해오고 있다. 후지와라노 모로나가(藤原師長, 1138-1192)가 편찬한 ꡔ진치요로쿠
ꡕ(仁智要錄) 쟁악보에 고마가쿠(高麗樂)로 소개하고 있다. 이 속독이 일본 사람이 고마가쿠라고 생각한 것은 이
음악이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ꡔ진치요로쿠ꡕ에는 퇴주독(退走禿 Taishudoku), 진주독(進走禿 Shinshudoku)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주독’(走禿)과 서로 음이 같은 ‘숙덕’(宿德 Shudoku)을 빌려 쓴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시는 머리카락이 쑥처럼 흐트러진 얼굴에 남색의 가면을 쓴 이상한 사람이 대열을 만들어 뜰로
들어와 난(鸞, 봉황의 일종)새가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쑥대 머리카락에 남색 가면이라고 하면 우무(右舞)의
나소리(納蘇利, nasori)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소리는 서역계일 것이기 때문에 속독(束毒)도 서역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당나라의 호무에 들어가고 그것이 신라시대에 들어가 신라시대에서 일본에 들어가고 그리고
그것이 우무에 편입되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76)
(5) 산예(狻倪)
서역에서 유사 건너 만리 길을 오느라고
털이 모두 떨어지고 먼지까지 묻었구나
머리를 흔들며 꼬리마저 휘두르니
온갖 짐승 어른 되는 네가 바로 사자런가.77)
산예는 서역 지방의 사자춤임을 알 수 있다. 우륵의 12곡 중의 사자기(獅子伎)도 이와 동계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자놀이는 구자(龜玆:庫車)에서 연행하던 것이다. ꡔ신당서ꡕ(新唐書) 예악지(禮樂志) 구자기(龜玆伎) 중
사자놀이는 ‘무자 4인, 오방사자(五方獅子)를 둔다. 높이는 장여(丈餘)나 되고 방위(方位)에 따른 빛깔로 장식하며
사자마다 12사람이 있어 화의(畵衣)에 홍불(紅佛)을 쥐고 머리에는 홍말(紅抹)로 장식한다. 이를 사자랑(獅子郞)
이라 한다.’ 라고 하였다.78) 이상과 같이 신라 오기(五伎)는 중국 또는 서역계의 잡희(雜戱)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잡희의 전파 경로와 그 시기는 밝히기 어렵지마는 적어도 수(隋)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9)
Ⅲ. 맺음말
이 글은 열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외래음악을 어떻게 수용하였나를 살피기 위한 글이었다. 당시의 우리 나라 음악을 알 수 있는 문헌이 극히 영세하고 더구나 음악을 살필 수 있는 악보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는 극히 제한적인
연구일 수밖에 없다.
이 시대는 기왕에 있었던 이 땅의 음악이 외래음악인 서역음악을 수용하여 화려한 음악 문화를 만든 시기이다.
특히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인도 음악은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이와 같이 전파된 인도 음악은 서역 음악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고구려를 비롯한 신라․백제 그리고 가야까지 인도 문화의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필자는 악기의 수용, 악조의 수용, 음악의 수용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악기로는 거문고와 장구가 인도에서 유래한
악기를 수용한 것이고 악조로 보면 인도의 쿠디미야말라이 비문에 보이는 악조가 중앙아시아로 전해지고 신라의 평조와 반섭조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음악은 악보가 전해오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탈춤음악에 흔히 쓰느 타령장단은
인도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러한 외래 음악을 수용한 결과 우리 나라 음악은 악기․악조 등이 다양해졌다. 특히 인도 장구의 수용은 독특한 ‘장단’
이라는 리듬형을 만들었다. 장단과 흡사한 것을 여러 나라에서 수용하였지만 유독 한국의 장단이 다양한 것은 그만큼
우리 조상들의 음악성이 높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인도의 딸라(tala)․중국의 판식(板式)․인도네시아의
이라마(irama)․태국의 나탑(nathab)․일본의 효오시(拍子) 등은 모두 장단의 다른 이름이다. 이 모두가 길고 짧은(長短) 음으로 리듬을 구성해 간다는 점에서 인도 음악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면 일본 음악에 우리 나라의
장단과 비슷한 효오시가 있건만 이것은 가가쿠(雅樂)에만 사용하는 것이어서 다른 음악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 조차 한국의 ‘장단’과 같은 것은 없다고 할 만큼 일본 음악에는 장단이 소멸한 형편이다.
또한 이 글에서 탈춤에 사용하는 허튼타령이 인도 고대 음악문헌인 ꡔ나티야 사스트라ꡕ의 챤챠뜨뿌따(cancatputa)와
같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해 볼만한 중요한 사항이다. 이 두 장단의 리듬의 동일성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즉 연극에서 사용하였다는 점, 인도가 기원인 장구로 연주한다는 점, 불교와 관계있다는 점 등이 공통점이다.80)
장구가 들어오면 장구로 연주하는 장단이 들어왔을 터이고, 이 음악은 유관 음악에서 원형적인 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타령 장단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원형적인 것은 바로 봉산탈춤에서 사용하는 허튼
타령이다. 이 허튼 타령이 바로 챤챠뜨뿌따와 2:2:1:3의 비율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앞으로 전문가의 연구를
위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바이다.
이 글은 남북국시대의 외래음악 수용을 함께 다룰 예정이었으나 발해 음악 사료를 구하지 못하여 넣지 못하였다.
하루 빨리 발해 관계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81)
우리 조상들은 외래 음악을 수용하여 외래음악을 향악화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였다.
앞으로 다가올 21세기에 한국음악이 외국음악에 녹아들지 않고 독창적인 한국음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이와 같은 창조력을 이어받아야 한다. 이 글이 시대적으로 멀고, 자료가 영세하여 빈약하기 짝이 없는 한국고대음악사의 일부를 채우는데 일조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Bharatamuni. The Natya Sastra. Delhi: Sri Satgru Publications, 출판년대없음.
Lath, Mukund. A Study of Dattilam -A Treatise on the Sacred Music of Ancient India-, New Delhi : IMPEX INDIA, 1978.
Sen, A. K.. Indian Concept of Rhythm, Delhi: Kanishka Publishers, 1994.
Sharma, Akella Mallilarjuna. Permulative Genius in Tala(-Prastara) in Indian Music, Hyderabad India: Telegu University, 1992.
Shekhar, Indu. Sanskrit Drama: Its Origin and Decline,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77.
Tarlekar, G. H.. Studies in the Natyasastra, 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Private Limited, 1975.
ꡔ高麗史ꡕ, 卷80.
ꡔ唐會要ꡕ, 권33, 22b7-26b2(ꡔ文淵閣四庫全書ꡕ, 권 606, 456-459쪽.)
ꡔ東大琴譜ꡕ, 韓國音樂學資料叢書(서울: 국립국악원, 1987영인) 권22.
ꡔ三國史記ꡕ, 卷32.11 樂志.
ꡔ樂學軌範ꡕ, 卷7.
ꡔ新唐書ꡕ, 藝樂志, 卷11.
ꡔ日本書紀ꡕ,
陳暘, ꡔ樂書ꡕ, 韓國音樂學資料叢書(서울: 國立國樂院, 1982) 10.
權寧弼, “벽화에 남은 韓人 발자취 - 고대 사절단-,” 조선일보 1992년 1월 28일자.
金建民, 전인평 옮김. “仁智要錄 중 고려곡의 해석과 고증,” ꡔ중앙음악연구ꡕ(서울: 중앙대 중앙음악연구소), 제4집, 86쪽. 이 글의 원문은 ꡔ音樂藝術ꡕ(上海: 上海音樂學院, 1990), 1-15쪽에 수록되어 있음.
金元龍,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사절도.” ꡔ고고미술ꡕ, 제129-130 합집호.
무함마드 깐수, “사마르칸드 使行,” ꡔ新羅․西域交流史ꡕ(서울: 단국대출판부, 1992) 앞의 책, 435-442쪽.
무함마드 깐수, “처용의 정체,” ꡔ신라서역교류사ꡕ(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1992), 324-347쪽.
박전열, “일본 伎樂의 연구,” ꡔ韓國民俗學ꡕ(서울: 한국민속학회, 1990) 제26권.
宋芳松, “高麗 鄕樂의 樂調에 대한 音樂史學的 考察,” ꡔ高麗音樂史硏究ꡕ 서울: 일지사, 1988.
宋芳松, “新羅 三竹의 唐樂調 硏究,” ꡔ韓國音樂史論攷ꡕ(서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5), 61-87쪽.
宋芳松, “長天1號墳의 음악사학적 검토,” ꡔ한국학보ꡕ(서울: 일지사, 1984), 제35집, 2-36쪽.
安廓, “千年 前의 朝鮮軍樂.” 대한민국예술원, ꡔ한국예술총집 음악편 2ꡕ(서울: 대한민국예술원, 1988).
우에노 다카코(上野貴子) 지음, 전인평 번역, “쿠디미야마라이 비문의 악보 해독,” ꡔ韓國音樂史學報ꡕ(경산: 한국음악사학회, 1996,1997) 제16집(157-85쪽), 제18집, 157-83쪽.
李相奎, “대금의 淵源,” ꡔ동양음악ꡕ(서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양음악연구소, 1998), 253-68쪽.
李惠求, 日本에 傳來된 中國音樂의 變化,” ꡔ韓國音樂序說ꡕ(서울: 서울大學校出版部, 1967).
李惠求, “國樂史-上古에서 羅末까지-,” ꡔ韓國藝術總覽ꡕ(서울: 대한민국 예술원,1964), 111쪽.
李弘稙, “韓國樂器 圖象 過眼錄,” ꡔ李惠求博士頌壽紀念音樂學論叢ꡕ(서울: 社團法人 韓國國樂學會, 1969), 169-202쪽.
李惠求, “산대극과 기악,” ꡔ韓國音樂硏究ꡕ(서울: 국민음악연구회, 1959), 225-236쪽.
전인평, “거문고․비나 그리고 자케,” ꡔ동아시아의 현악기ꡕ, 국립국악원․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부설 동양음악연구소 주최 제1회 동양음악학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1996.9.19.-20. 339-362쪽.
全仁平, “중앙아시아와 한국음악,” ꡔ이혜구박사구순기념음악학논총ꡕ(서울: 이혜구학술상 운영위원회, 1998)
鄭永進, “신라 삼죽의 평조 연구,” 경산: 영남대학교 대학원, 1992.
河昌林, “蘇祗婆的 五旦 理論,” ꡔ絲綢之路 樂舞藝術ꡕ(中國: 新疆人民出版社, 1985).
한국사 특강 편찬위원회. ꡔ한국사특강ꡕ,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고병익, ꡔ동아시아 전통과 근대사ꡕ, 서울: 삼지원, 1984.
權五聖, ꡔ한민족음악론ꡕ, 서울: 학문사, 1999.
기시베 시게오(岸邊成雄), 송방송 번역, ꡔ고대실크로드의 음악ꡕ, 서울: 삼호출판사, 1992.
송방송, ꡔ한국음악통사ꡕ, 서울: 일조각, 1995.
李杜鉉, ꡔ韓國의 假面劇ꡕ, 서울: 一志社, 1979.
李弘稙, ꡔ國史大事典ꡕ, 서울: 知文閣, 1962.
ꡔ人間と 音樂の 歷史ꡕ, 古代インド (東京 : 音樂之友社, 1986(昭和 61년), 194-95쪽.
張師勛, ꡔ增補韓國音樂史ꡕ, 서울: 世光音樂出版社, 1986.
張師勛, ꡔ最新國樂總論ꡕ,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5.
張師勛, ꡔ韓國樂器大觀ꡕ, 서울: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969.
張師勛, ꡔ韓國傳統舞踊硏究ꡕ, 서울: 一志社, 1977.
張師勛 책임 집필, ꡔ韓國藝術總集ꡕ 音樂編 2, 서울: 대한민국 예술원, 1988.
전인평, ꡔ비단길음악과 한국음악ꡕ, 서울: 중앙대출판부, 1996.
韓萬榮․全仁平, ꡔ東洋音樂ꡕ 서울: 삼호출판사, 1991.
NHK취재반, ꡔ실크로드ꡕ, 서울: 서린문화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