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단순히 궁금증이나
호기심의 발현이 아니다.
기존의 이론이나 해석이나
설명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은 기존의 이론이나 설명이나
해석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갖는 정신 활동이다.
소크라테스가 <대화편>에서
테아이테토스에게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만 할 뿐,
그 대답은 알지 못하네.
신은 나를 산파로 점지했네.
따라서 나는 지혜도 없고
영혼의 소산도 없네.
하지만 나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득을 본다네.
그들은 훌륭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되지만,
그것은 모두 그들 자신이 낳은 것이라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다.
그는 답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아니라
답을 낳도록 질문을 던지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은 그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답을 배운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 지를 배웠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깨달음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질문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질문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마음속에 위대한
답들을 가지고 있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니 그 답이
깊은 물에 잠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1988년에 펴낸 <시간의 역사>에서
스티븐 호킹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제기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주 생성의 원리를 발견하고
‘소수의 과학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이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가 인간과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함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의 희망을 조용히 내 비쳤다.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233쪽 )
그랬던 그가 2010년에 펴낸 <위대한 설계>에서
‘자발적 창조’라는 기발한 말을 만들어냈다.
‘우주는 중력의 법칙과 양자이론에 따라
무(無)에서 스스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으며
자발적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중력과 같은 법칙도
스스로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왜를 물으며 똑똑한 질문을 했던 사람이
그의 생각을 뒤집었을까?
질문의 대상이 없으면 ‘자발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의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방법을 찾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지만,
아무리 정보를 교환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길은 여전히 미로이다.
그러나 질문의 대상을 가진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왜’를 묻는다.
‘어떻게’를 묻는 방법론적인 질문이
‘왜’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전환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서 헤어난다.
그리고 얼어붙었던 ‘왜’라는 질문들이
봄 햇살의 눈처럼 녹아내린다.
왜라는 질문이 녹아내린 곳에서 의미의 꽃이 핀다.
아들에게 ‘너는 내 성경 선생이다’는 말을 세번째 말할 때
아들은 ‘아빠 그 말 세번째 하는 말이예요’라고 환기시켜주었다.
나는 짐짓 ‘그래?’라고 말했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자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이 ‘왜 내가 아빠의 성경 선생이지요?’라고 묻기를 바라지만,
아들이 ‘왜’를 묻지 않기 때문에 대화가 계속되지 않는 것이다.
아들이 ‘왜’를 물어주어야 그가 나의 선생인 이유를 말하면서
왜 아비의 책을 읽어야 하는 지를 말할 텐데...
‘어떻게’라는 질문에 따라 손끝이 빛을 발하고
기술문명이 축적되었으며 삶이 윤택해졌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길을 밝히는 등불로서
길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길들은 모두 출구가 없는 데드앤드( dead end)이다.
인생의 궁극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는 한갓 텅 빈 질문일 뿐이다.
‘어떻게’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동정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죽은 자가 살 수 있을까?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왜’라는 질문은 삶에서 지혜를 캐내는 궁극 질문으로서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빛을 끄집어내는 요긴한 질문이다.
성경은 이 요긴한 언어에 대해
분명한 답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동정녀에서 탄생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려 하실까?
예수께서 죽으셔야 한다면
왜 조용히 죽으시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을까?
‘왜’라는 질문만이
영원으로 뻗어가는 길과 맞닿는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잘 대처하는 사람은
좋은 직장을 구한다.
하지만 어떻게만 물어서는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왜를 묻는 사람이다.
문명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묻는 사람들에 의해 밝아졌다.
왜 빠른 속도로 왕래해야 하는지를 질문한 인간은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다.
왜 빠른 속도로 계산해야 하는지를 질문한 인간은
계산기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었다.
왜 멀리 음성을 보내고
화상을 보내야 하는지를 질문한 인간은
전화기를 만들고 TV를 만들었다.
인간은 이유를 알면 필요를 느끼고
필요를 깨달으면 방법을 찾아낸다.
‘왜’라는 질문에서 의미가 튀어나오면
인간은 그 의미로 문명을 만들고 문명을 즐긴다.
하지만 찬란한 문명에 취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왜’를 묻지 않는다.
의미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어떤 것에도 의미라는 모터만 달아주면 힘차게 달린다.
사람이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면 생기가 돌고,
물질이라도 의미가 부여되면 사랑을 받는다.
의미를 위해선 왜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죽으실 수 있으셨는가’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지만,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왜 하나님이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에 성경은 분명히 답한다.
많은 교사들이 ‘왜’라는 질문을 묻다가
벽에 부딪히자,
왜 ‘왜’를 묻지 못하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쉽사리 그 질문을 ‘어떻게’로 바꾸었다.
노예는 ‘왜’를 묻지 못한다.
‘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순간
그의 등에는 채찍이 떨어진다.
인간이 ‘왜’를 묻지 못하고
‘어떻게’만을 물어야 한다면
그는 노예이다.
노예가 물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은
‘어떻게’이다.
그러나 그 답마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know how를 위해 정보를 교환하지만,
아무리 정보를 교환해도 그 길은 미로이다.
‘왜’를 물어야 한다.
미디안 땅에서 양 무리를 치던 모세가
타오르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다.
이에 가로되 ‘떨기나무가 왜 타지 아니하는고’
‘why the bush is not burnt’(Exd 3:3, KJV)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시며
두 번 부르셨다.
왜를 묻는 질문에
하나님은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어찌하여’(출 3:3)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두와는
‘why’ ‘how’ ‘what’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말 성경은 모두 어찌하여로 번역했으나
KJV, NIV, NAS 등은 why로 번역했다.
세상 종교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그들의 과제이다.
성경 종교의 중심에는 생명이 있다.
접근 방식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이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이유를 가지고 출현한 존재라면
인간은 죽지 말아야 한다.
깨뜨리기 위해 만드는 도자기는 없으며,
죽으라고 심는 나무는 없다.
그런데도 죽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요
그 이유를 찾아낸다면 살 방도도 있을 것이다.
‘왜’를 진지하게 묻는다면
성경은 가장 어려운 질문에도 쉽게 답을 가르쳐준다.
객관적 사실을 전달할 때는
육하원칙을 따라 서술해야 한다.
소위 누가(who), 언제(when), 어디에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이다.
사람들은 왜를 제일 마지막에 묻는다.
그런데 왜 성경 연구에서 ‘왜’가 중요한가?
사실을 묻는 검사는 어떻게 빵을 훔쳤는가를 묻지만
진실을 알기 원하는 변호사는 왜 빵을 훔쳤는가를 묻는다.
사실을 알고자 하는 검사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지만,
진실을 알기 원하는 변호사는 설명을 요구한다.
왜를 묻지 않으면 사실은 사실에 머물러 있지만,
왜를 물으면 사실이 진실로 바뀐다.
설명 없는 사건이 사실이요,
설명된 사건이 진실이다.
진실이라도 설명하지 않으면 사실로 머물고,
사실에 설명이 더해지면 진실이 된다.
왜 성경은 왜라는 질문을 기다릴까?
‘어떻게’는 사실을 밝힐 뿐
진실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왜’를 물어야 한다.
성경은 철든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읽듯이
읽기를 요구받는 책이다.
성경에 기록된 기록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성경의 하나님은 실수하는 하나님이요,
잔인한 하나님이요,
때로는 착한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고,
악한 사람에게는 평안을 가져다주는
불의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실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왜를 묻는다.
왜를 묻는 사람에게 성경은
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잔인할 수밖에 없으셨는지,
왜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으셨는지
그 진실을 말한다.
평범한 사실이라도 왜를 물으면
그것은 진실로 바뀐다.
BC 27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죽으셨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십자가의 진실이 밝혀진다.
방법을 찾아 나선 인간이
높은 건물을 세우고 위성을 우주에 쏘아 올리지만,
아무리 문명의 탑을 쌓아도
인간은 추한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
인간이 애타게 묻는 질문은
‘나는 살고 싶은데 왜 죽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나는 사는 줄 알고 살았는데
왜 사라져야 하는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아무리 똑똑한 AI도
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정으로 알기 원하면 신이 스승을 보내준다’는
속담을 만들고 기다려 보지만,
그 질문은 허공을 맴돌 뿐이다.
그러나 성경 세계에서
인간이 왜를 물으면 하나님이 다가오신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동물 세계에 있는 수 많은 포식자들을 제치고
지상 최상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왜라는 질문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진지한 탐구자들이
우주와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기 위한 노력의 한 부분만이라도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데 바친다면
우주 탄생 비밀의 빗장은 풀릴 것이다.
인간이 존재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탐구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아는 일에
신명을 바쳐주기를 바란다.
‘왜를 묻지 마라’라는 말은
당연한 경구처럼 들려서
‘왜 하필 난가요?’하고 묻던 인생들은
수줍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세상에서 왜라는 질문은
진실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는
고소자에 의해 해킹당한 질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려면
왜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은
3천여 개의 금지된 질문인 ‘왜’를 물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 나선 순례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