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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9장 바울을 무시하는 문제
고린도교회 곧 종합병동인 고린도교회는 분파문제, 음행문제, 송사문제, 결혼문제, 우상제물문제 등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바울을 무시하는 문제가 있었다.
만일 교회의 목사가 무시를 당하면, 성도들에게 굉장한 문제인 것이다. 바울 그 사람 신학교도 분명하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다소 출신이고, 자칭 사도라더라.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아볼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바울의 경우, 원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으니, 말이 많았다. 또한 바울 그 사람 할례를 무시하더라, 예수님을 만난 적도 확실하지 않다더라, 글은 잘쓰나 말은 졸하다는 식으로 무시를 당하였는데, 또한 그는 교회의 도움에 기대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바울은 자비량선교사였다. 바울은 당연히 교회에서의 보수를 받을 수 있는데도 고린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제자들이 연보를 가져오면, 그것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주님께 상 받기 위함이었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은 당연히 보수를 받을 수 있는데, 받지 않고, 다만 스스로 벌어서 일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권리를 쓰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상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캐릭터는 제사장같이, 나실인같이 살지 않고, 심지어 여러 모습으로 변하여 일을 하였다. 자유롭게 일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리고 절제한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러므로 바울은 특이한 사도였다. 그러나 유능한 사도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오해를 많이 샀고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12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사도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지역에 교회를 세웠는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주중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회당에서 대적을 당하자 회당 옆 집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1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가르쳤는데, 바울은 그동안에 고린도에서 사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게바 곧 베드로와 아볼로가 고린도로 왔을 때, 분쟁이 일어났는데, 분파로 나뉘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권능이 매우 컸다. 한 번 설교하면 3~5천명이 회심하기도 하였다. 아볼로도 알렉산드리아 쪽 세례요한의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자였으며 성경으로 유대인들을 잘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굉장한 설교자였다. 어떤 교회들을 보면, 처음에 개척자들은 별로 부흥되지 않다가, 나중에 온 사람들을 통해서 부흥이 되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바울도 그러한 케이스인데, 자신이 개척하였으나, 정작 중간에 온 사람들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상제물에 자유를 두었고, 할례를 상관없다고 하여, 유대인들과 충돌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바울 스스로도 말에 능하지 않다고 하였던 것으로 볼 때,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이지만, 앞의 두 사람과는 차이가 많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아볼로와 베드로에 비해 자유의 영역이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오히려 탁월하였다. 바울을 통해서 지중해 지역에 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겼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12사도들은 구제와 봉사는 성도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였는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되도록 많이 전도하기 위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길 원하여 그렇게 한 것 같다.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바울은 결혼할 수도 있었고,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하고, 성도들이 나누어 주는 것으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기도 하다. 구약에 제사장들은 성전 제사에 드려진 헌물 중에 일정량을 할당 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마10: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그런데 바울은 그것조차도 성도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또는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청빈에서 벗어나 삯꾼이 되거나 또는 등 따숩고 배불러져서 사명에서 벗어날까봐 그런 것 같다. 한 마디로 그는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채비를 가볍게 한 것이다. 채비가 무거우면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3개국어 이상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가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 바울이 변명한 것은 그렇게 해달라는 이중의 뜻이 아니다. 바울의 목적은 분명하다.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가볍게 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스스로 억지로 전할정도로 절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 여기서 사명은 청지기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 바울은 삯을 받을 권리와 후원자에게 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상으로 계산될 줄 알고, 가급적 상을 많이 받으려고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혼도, 후원도, 자유로 맡기고, 오직 복음 전파에 집중하려고 그런 것도 절제하였다. 마치 영적으로 배수진을 친 것 같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여기서 종이 되었다 함은 맞춰주는 것 섬기는 것이지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맞춰주는 것이 ‘종’이고 섬기는 것이다. 옛날에 보면, 어릴적에 어머니하고 탁구를 치는데, 어이쿠 잘한다. 아버지하고 씨름을 하는데, 아이쿠 졌네, 맞춰주는 것이다.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그러므로 눈높이를 맞추는 것처럼, 바울은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변형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수준을 맞추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남의 하나님을 쫓으면 안된다. 분명히 어디선가 걸린다. 어떤 것은 본받고 어떤 것은 버려야 한다.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이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 여기서 참여란 말은 함께 교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 바울은 모든 영역에서 달음질 하였고, 그것은 복음의 목적을 위해서 한 것이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그런데 이렇게 바울처럼 전할 때, 떼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러므로 항상 옷을 세탁해서 입어야 하듯이, 자신을 쳐서 복종 시켜야 한다.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두라고 하였는데, 예배 복음 믿음 자유 이런 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이런 것은 일치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은 서로 맞춰주던지 양보하던지 하는 것이 낫다. 어떤 교회에서 피아노를 옮기는데, 왜 중앙에 피아노가 있느냐, 강대상이 있어야지, 그래서 상식적으로 당연히 강대상을 중앙에 놓는 것이 맞으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하려고 하였으나, 너무 반대가 심해서, 일 년에 1센티씩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본질적인 것 애매한 것은 서로 양보하고 맞춰주는 것이 낫다. 그런데 또 경험상 애매한 것은 보니까, 왠만하면 상급자에게 맞추는 것이 낫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싸우면 서로 별로 좋지 못하더라. 그런 것은 왠만하면 우리 목사님이 술 마시지 말자. 그러면 마시지 말고, 우리 목사님이 술에 자유를 두자, 그러면 너그럽게 하고, 또는 가정에서 아버지가 하지 말라 하면 안하고, 해라 하면 하는 것이 낫다. 이런 것은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고, 해도 안해도 별로 지장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유연성을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바꾸면 안된다. 예를 들어 복음과 믿음 등은 혼합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자유가 있다. 예수 안에 자유가 있다. 거듭나는 것도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고 감동 주셔서 믿게 되는데, 그것도 마음의 문에 노크하고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은 본질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타력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하다. 혼합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수행종교 자력종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온갖 것들이 혼합된다. 카톨릭도 그런 요소가 있고, 개신교 내에서도 그런 요소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단들은 범신론처럼 되어 사람들을 속인다. 우리나라에만 자칭 예수 50명 자칭 엘리야 2명이 있다고 한다. 본질적인 것은 창조질서를 말한다. 낙태도 태아도 생명이므로 금지해야 한다. 본질적인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였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를 들어 온갖 물건들 또는 컴퓨터게임도 사람이 만들었는데, 물건들이 게임 속 유저와 환경이 저절로 진화하나. 게임 만든 사람이 업그래이드를 해야 바뀌듯이,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지금도 어느 산에서 어느 동물원에서 진화하는 생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그런데 진화론 유물론은 사람을 아무 의미없는 존재로 본다. 잘못된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고, 자연을 봐도 그렇다. 사람은 풀 한포기도 창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낙태가 만연한 것은 태아를 생명으로 보지 않고 그저 물질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출산율을 높이려면 낙태만 막아도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물론 산모의 생명에 지장이 있을 때는 할 수도 있는 정도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또 본질적인 것은,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아무거나 막해도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사랑을 오해를 많이 했는데,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씀이 사탄을 사랑하라는 것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라는 것인가. 오히려 베드로서를 보면 사탄을 대적하라. 성경에 책망의 말씀이 많고, 결산하시고 책망하시는데, 무슨 말씀인가.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국가적으로 적용하면,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성경에서 정의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요한계시록이나 예레미야서를 보면, 사랑타령을 하면서 괜찮다 괜찮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이렇게 가면 다 망하였다.
산에 가보면, 계시판에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종류를 소개하는데, 똑같이 보여도 다르다고 한다. 갈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참나무 등등 종류가 다양한데, 도무지 보기에는 차이를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똑같이 성도지만, 각자가 다 다른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똑같은 참나무이다. 그러므로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왜 바울 당신은 고린도 교회 후원도 안받고 특이하게 일하면서 말씀 전하느냐. 왜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하고, 할례문제로 싸우느냐, 게바나 아볼로는 이렇게 저렇게 사역하는데 왜 바울 당신은 이러느냐. 그러나 바울은 오로지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또한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적 변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