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 김대중과 1997년12월 기적적인 대선승리, 미완의 이후과제>
'길위에 김대중'이란 128분 장편다큐영화 시사회가 전국을 순회 중입니다. 저는 지난월요일 오후2시 첫 시사회를 다녀왔는데요. 당시 이재명 대표와 김부겸 전 총리 등 많은 정치인이 왔습니다. 내년1월6일 김대중 탄신100주년에 맞춰 전국적으로 개봉된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한 사건전개를 박진감있는 음악효과로 뒷받침하고 있어서 마치 서울의봄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긴장의 끈을 놓기 어렵습니다.
저는 1970년이후의 김대중은 수십년의 언론보도와 관찰, 직접면담(2회)를 통해 잘 아는 편이지만 1960년대의 김대중에 대해서는 이번 다큐를 통해 주요장면을 접하며 인식을 새롭게 했습니다. 다큐영화는 1987년5월까지의 김대중만 보여주기 때문에 당시까지 10대였던 분들에게는 1970년대와 80년대의 김대중과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겁니다.
김대중은 국내외에서 누구도 비견될 이가 없을만큼 박정희ㆍ전두환정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모든 종류의 정치탄압을 받았습니다. 교통사고 위장 암살시도, 강제납치와 현해탄 수장시도, 사형선고에 의한 사법살인시도가 제일 무서운 거였지요. 그밖에도 구금고문, 정치활동금지, 가택연금, 해외망명을 두루 겪으면서도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국민을 믿고 역사를 믿고 흔들림없이 목숨을 내놓고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거친 구석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집마당에선 물론이고 감옥운동장에서도 날마다 화초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지요. 관제봉함엽서에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작디작게 쓴 감옥편지들을 보면 교정흔적 하나없이 가지런하고 반듯하며 아름다운 글씨가 빼곡 가득합니다. 사고와 표현이 모두 더할나위없이 정돈돼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번다큐를 보며 가장 놀라고 감동적인 부분이 그의 옥중서한이 보여주는 정갈하고 유려하며 흐트러짐 없는, 작디작은 그러나 균형잡힌 가지런한 글씨였습니다. 자간이건 행간이건 삐뚤빼뚤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시대정신과 역사의식, 정의감을 바탕 삼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실용감각을 결합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정치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철두철미 민주주의자이자 의회주의자였지만 1987년에서 1997년까지 통한의 10년간 그가 보인 정치적 선택에 대해선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동일제작사(명필름)가 다른 다큐영화를 준비해서 다룬답니다.
김대중은 87년12월 대선과 92년12월 대선에서 실패하고 1997년12월 대선에서 대선3수 끝에 승리합니다.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준비된 대통령.' 그는 만74세가 돼서야 비로소 갈고닦은 경륜과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된 거였습니다.
1998년2월의 김대중 집권은 세 가지 비상한 조건이 결합해서 간신히 이뤄진 정치기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보수헤게모니가 그만큼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작동중이었습니다.
김대중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세 개의 비상한 조건이 어떤 거냐고요?
첫째, 외환위기발 경제파탄. 중소기업 노동자는 물론이고 대기업에서 잘린 화이트칼라 실업자가 넘쳐나고 공식이자율이 40%까지 치솟고 금 모으기 캠페인이 벌어지고 문자그대로 국란이었지요. 이때 처음으로 보수세력의 경제신화, 경제능력은 보수 카피가 깨진 겁니다. 더 나빠질 수가 없었으니까요.
둘째, DJP연합. 김대중은 집권을 위해 김종필 유신본당과 손잡았습니다. 호남-충청 지역연합이 성립한 셈입니다. 1990년 노태우가 여소야대 탈출을 위해 김영삼 김종필과 손잡았듯이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호남고립작전에서 벗어납니다.
셋째, 제3후보 이인제의 450만표 득표. YS의 후계자를 자임한 이인제가 끝까지 대선후보로 뛰어서 무려 450만표를 주로 보수층에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도 간신히 50만표로 이겼던가요.
다시 말해서 이인제가 보수ㆍ중도표를 450만표나 가져가지 않았다면, DJP 호남ㆍ충청(구 백제지역) 지역연합을 해서 김종필 지지 충청보수표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무엇보다 외환위기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보수세력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위의 조건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김대중집권은 불가능했습니다.
김대중집권과 연이은 노무현집권으로 우리나라는 군부독재 과거청산을 넘어 인권복지국가의 제도틀과 구조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6.15와 10.4.정상회담을 거치며 남북화해협력도 비약적으로 진전되고 IT정보화에서도 선두를 달리게 됩니다.
김대중의 집권과 정권재창출, 노무현 집권에 의해 우리나라는 비로소 선진국반열에 오르는데 그 10년의 세계적 기류, 특히 미국의 기류가 워낙 신자유주의에 경도된지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도 신자유주의 담론 및 실리구조 아래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경제 호황과 대중무역 흑자로 완화된 측면은 있지만 외환위기로 강제 이식된 신자유주의체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양극화를 결과하고 어떤 정부도 의미있는 유턴에 실패합니다. 초고령화와 초저출생 경향을 돌려세우지도 못했습니다. 주택비용과 사교육비용 등 일반시민의 체감민생이 나아지지 않은 결과입니다.
국힘당이 대표해오고 국힘당으로 결집해온 재벌대기업, 보수언론, 보수법조계, 보수학계로 구성된 보수헤게모니도 상당부분 약화된 거 같아도 지금의 윤석열정권이 보여주듯 아직 건재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15년 정권교체 경험으로는 사회경제적 토대와 군사안보적 환경이 바뀌질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개헌과 선거제 등 근본정치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와 외교안보의 제도틀과 권력기관의 제도틀을 바꾸는 게 어려웠습니다.
다음정권은 출발시점부터 거대양당과 국회의원의 개헌독점권과 입법독점권, 특히 정치관계법 셀프입법특권을 내려놓는 본격적인 정치개혁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대의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되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가 보완적ㆍ실효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최강의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개헌안ㆍ법률안 국민발안권을 부여해서 개헌ㆍ입법독점권을 깨고 추첨시민의회와 추첨시민위원회를 법제화해서 정치관계법 셀프입법특권을 깨야합니다.
그나마 김대중의 천우신조 집권으로 가능했던 민주정부 10년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을지를 생각하면 김대중이란 인물은 우리현대정치사의 걸출한 거인임에 틀림없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 남북화해에 크게 기여한 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길위에 김대중을 보는 순간 길위에 백기완, 길위에 문정현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무명의 헌신과 동참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데 기여한 수많은 길위에 386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윤석열정권을 마음껏 비판 조롱 규탄하는 언론의 자유를 저 스스로 누릴 때마다 또는 저보다 더 강하게 누리는 분들을 볼 때마다 무명의 헌신과 희생을 했던 우리젊은이들을 떠올리며 고맙고 빚진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들이 나이 먹고 지금의 길위에 촛불시민이 됐습니다. 동료시민으로서 언제나 고맙고 든든합니다. 길위에 김대중이 꿈꿨던 남북평화와 공동번영의 길, 우리 후속세대들이 꾸준히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