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그런 말이 있다. 꼭 공부 못 하는 것들이 책은 있는 대로 다 사고 기껏 책상에 앉았다 싶으면 서랍 정리하느라 시간을 다 보낸다고. 오늘 내가 꼭 그 꼴이다. 책을 보겠다고 앉았다가, 뭘 쓰려고 앉았다가 정작 책을 읽지도, 뭘 쓰지도 못한 채 딴짓에 빠져 계속 부스럭대고 있으니.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때로 딴짓이 훨씬 재미나다. 해야 할 짓이 재미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딴짓이 딴짓이라 재미가 있기도 하다.
오늘 내가 한 딴짓은, 새로 구입한 프린터를 배치하는 일이었다. 중고거래사이트인 ‘당근’에 올라온 제품이었지만 중고가 아닌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상품이었다. 아마도 어디서 선물로 받은 모양이었다. 운 좋게 저렴한 가격으로 새 상품을 구매하게 되었다. 쓰던 프린터가 작동이 잘 안 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좀 되었다. 우선 종이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종이가 밀려서 들어가는 바람에 내용의 앞부분이 잘려 나간 채 인쇄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종이를 여러 장 버려야 했고, 제대로 된 인쇄본을 받아보려면 나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대기하고 있다가 종이가 들어갈 즈음에 얼른 종이를 밀어넣어 주어야 했다. 그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 간신히 온전한 인쇄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종이 낭비, 잉크 낭비가 심했다. 특별히 중요한 자료가 아니면 그냥 대충 잘려 나간 채로 인쇄해서 썼다. 그러다 칼라인쇄라도 하게 되면 색깔이 나오지 않아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인쇄되는 것이다. 몇 번의 세척작업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색깔이 살아나곤 했다. 짜증스러웠다. 잉크도 남아 있었고 구매한 지 오래된 것도 아니어서 - 기계는 자고로 십 년은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 더 쓰려고 했지만 우리나라 제품이 아닌 탓에 수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부터는 아예 인쇄가 되지 않고 직직 줄이 그어져 나왔다. 에라이. 절로 욕이 나왔다. 이제 그만 헤어질 때가 되었나 보다, 마음에 체념이 들어앉기 시작했다.
매장엘 갈까, 생각했지만 그전에 ‘당근’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요즘은 그렇게들 많이 구매한다고 한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중고를 샀다가 또 고장이 나면 곤란했다. 알림 설정만 해놓고 몇 날을 보내다가 새 상품이 올라온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드디어 내 집에 그것을 들여놨다. 들여놓으려니, 당연히 있던 것을 처리해야 했다. 아직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어쩐지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간의 버려진 숱한 종이와 숱한 짜증을 애써 상기시키며 번쩍 들어다가 밖에 내놓았다. 그리고 새것을 들였다. 이제 자리를 배치해야 했다. 원래 두던 자리에 놓아도 되지만 좀 불편한 감이 있었다. 책상 아래 바닥에 두었는데 아무래도 다리 펴기가 불편해서 옮기는 게 나을 듯싶었다. 고민 끝에 다시 들어 책상 위에 놓았다. 기역자형 책상이라 한쪽 끝에 두면 그다지 공간을 차지할 것 같지는 않아 책상 위로 올렸다. 위에 두니 책상이 좁아지긴 했다. 그래서 또 노트북을 다시 옮기고 그러다 보니 독서대도 다시 옮겨야 했고 전기선도 다시 최대한 걸리지 않게, 그리고 보기에 지저분하지 않게 정리해야 했다. 하나를 바꾸니 줄줄이 바꿔야 했다. 그러니, 책을 읽겠다고 앉았지만 책은 한 줄도 못 읽고 낑낑대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보니 해 있을 때 시작했던 일이 어느새 저녁 먹을 때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래도 새것을 설치하고 내친 김에 그간 쌓였던 먼지도 닦아내고 쟁여 있던 잡동사니도 버리고 하니 마음이 산뜻해졌다. 더구나 새 프린터가 참하니 보기에도 좋고 쓰기에도 좋다. 이제 저 프린터로 뭐든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거리 없이 자리만 차지하며 늙어가지 않게 뽑아낼 거리를 잔뜩 만들어 부지런히 일을 시켜볼 참이다. 후훗.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