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가장 창피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저는 언제였을까요? 목사가 가장 창피할 때가 언제인지 좀 궁금하시죠? 구체적으로 사건을 드리긴 좀 그렇지만 제가 가장 창피할 때는 제가 이 강단에서 강력하게 선포한 말씀들이 또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이 기도로 응답하신다고 선언했던 이 기도 제목들이 응답되지 않을 때 여러분은 별 그거 없이 그냥 지나가시겠지만 저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선포한 말씀의 내용들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때 목회자로서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병 낫기를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을 때 성도가 살아나기를 바래서 열심히 기도했는데 돌아가셨을 때 등등 이럴 때는 저는 되게 내적인 창피함이 있어요. 외적으로 매일 창피하게 다니지는 않지만 제 내면에는 창피함이 있습니다.
물론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기도하는 저의 믿음도 필요하고 기도를 받는 분들의 믿음도 필요하고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목사의 문제로 다 몰아가기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기도 응답이 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시간이 우리의 것과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우리는 기도를 이렇게 그 시간을 그냥 이렇게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런 내면에 창피함이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좀 괴로워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저자들은 마땅히 쫓아내야 할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이슈화돼서 지금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고쳤는데 왜 제자들은 못 고쳤을까? 예전는 제자들이 다 귀신을 쫓아냈는데 왜 오늘은 못했을까 이런 성웅성웅성함이 이 사건 현장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보고 있었고 이 사실을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그대로 보고했어요. 이거 또 창피한 거예요. 사람이 아닌 것도 창피한데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또 이 아들의 아버지가 보고까지 한 거예요.
이 사건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이미 이전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다는 거예요.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못 받았으면 모르지만 이미 받았는데 못 쫓아냈기 때문에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마가복음 6장 7절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6장 7절 같이 읽습니다.
12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이 12 제자를 파송할 때 분명히 귀신을 내쫓는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이미 권능을 가졌는데 권능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당연히 의심스러운 거예요. 제자들도 의심스럽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제자들을 보는 주변의 사람들도 또 의심스러웠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전에는 분명히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이 나가는 것을 자기들이 봤어요. 제자도 보고 주변의 사람들도 봤어요.
근데 오늘 이 일이 안 된 것 때문에 이게 이슈가 된 거죠. 그래서 웅성웅성 하게 된 것입니다. 병행 본문이라 그러죠. 같은 내용이 이 공간복음에 들어있는 것들을 우리가 병행 본문이라고 해요.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어요. 나머지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큰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을 내쫓지 못한 아들의 아버지가 이 모든 자초지종을 예수님께 말씀하시자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을 꾸짖으셨어요. 꾸짖고 난 다음에 귀신아 내가 내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하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를 경련을 일으킨 후에 나갔습니다.
이 정도 되면 궁금한 것이 당연할 거예요. 왜 우리는 귀신을 못 쫓아냈을까? 이미 쫓아낸 능력도 받았고, 이전에 쫓아낸 기억도 있고, 지금 예수님도 쫓아냈는데 왜 귀신을 못 쫓아냈을까? 마가복음 9장 29절에 거기에 대한 답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곳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정말 단적으로 말해서 앞뒤 잡아서 싹 빼고 정말 깔끔하게 말해서 기도하지 않아서 귀신을 못 쫓아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이 사건들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면 이렇게 됩니다. 귀신을 못 쫓아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 거예요.
또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고 믿음이 없으면 능력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그 이전에 어떤 은사를 받아도 믿음과 기도가 없으면 그 은사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것을 약속하셔도 귀신을 쫓아낸다 병 고친다. 무슨 약속을 해도 나에게 믿음과 기도가 없으면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없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더 주의해 봐야 될 곳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에 보면 기도 왜라는 문장이 되어 있는데, 이건 다른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외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은 먼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도와 금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은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고, 이미 받은 귀신을 내쫓은 능력은 제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교회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에 능력을 가지게 하는 도구예요. 교회가 세상이 가지지 않는 다른 능력을 가지려면 교회는 믿음과 기도가 있어야 돼요. 성도가 세상 사람이 가지지 않는 다른 능력을 가지려면 동일하게 믿음과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능력도 없고, 기도가 없으면 능력도 없어요.
이미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능력을 주셨어요. 교회 다닌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 목회자에게도 능력을 주셨어요. 근데 이 능력이 왜 교회와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일이 빈번하고 이제는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신앙생활할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과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믿음이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지 잘 모릅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믿음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기도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게 하는 것이 기도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본문에 보면 이 상을 면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는 것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정말 산을 옮기라는 내용도 되겠지만, 이 땅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기도는 이 땅에서 가장 어려운 일도 이루게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겁니다. 이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기라고 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 인간에게서 가장 힘든 일을 말하는 거예요.
기도는 여러분과 저에게서 가장 힘든 일, 가장 어려운 일도 하게 하는 것, 이루게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겁니다. 믿음은 인간이 가장 어려운 일을 일도 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고, 기도는 인간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을 이루게 하는 것도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과 기도가 하지 못한 일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과 저에게 믿음이 있으면 기도가 있으면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형편을 가지고 항상 해석을 해요. 나는 뭐가 없으니까 뭐도 안 되고, 나는 뭐가 없으니까 어떤 것도 안 되고, 성경은 여기에서는 그런 말을 일체 하지 않고 가난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배우지 못해서 못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기도가 없어서 못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믿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믿음은 나만의 믿음은 아니에요. 하나님과 관계된 믿음인 거죠. 제자들이 계속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잖아요. 계사들이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등장하는 이 믿음은 나만의 믿음 여러분 나만의 믿음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과 관계없는 나만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는 믿음은 고집이자 곧 아집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보면 믿으면 좋은데 고집 센 사람 어떤 의미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고집은 그냥 지푸라기처럼 꺾여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돼 있으면 내 아집은 그냥 지푸라기처럼 꺾여요. 왜요? 하나님 힘이 그렇게 강력하기 때문인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니까 고집이 엄청 강해 보이고 아집이 아주 세 보이죠.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고집과 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놈의 그분의 능력 앞에서 완전히 다 부서지고 박살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믿음은 자기 고집이거나 자기 생각이거나 자기 신념입니다. 믿음은 무조건 하나님과 관계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된 것이 믿음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의 믿음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정확하게 집어주십니다. 마가복음 9장 24절입니다. 우리 같이 2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 아들의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믿음을,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믿음을 정확하게 집어주셔요. 정말 대단한 것은 이 아버지가 예수님의 지적에 금방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말씀 앞에 자기가 비춰지고 자기가 깨달아지는 건 복입니다. 말씀 앞에 자기가 비춰지고 자기를 고칠 수 있는 건 복이에요. 아마 이 세상에 가장 큰 복이 그걸 거예요. 그러면 내 기도와 믿음이 세워지잖아요. 그럼 기도와 믿음이 할 수 없는 일이 없잖아요. 못한 일이 없잖아요.
어떤 사람은 평생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9장 24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한번 좀 보아봅니다. 이게 아버지의 말이에요. 시작.
그 아이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다른 사본은 이렇게 돼 있어요.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가 울면서 크게 말했다는 거예요.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의 삶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바로 수정한 후 큰 소리로 울면서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 외쳤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자기 믿음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셨고 즉시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아들을 괴롭히던 귀신을 꾸짖자 그 신은 그 자리에서 즉시 나갔습니다.
여러분 이미 받은 능력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내쫓은 능력을 받았어요. 이 능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뭐라고요? 믿음과 기도인 거죠. 이미 한국 교회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능력을 받았어요. 능력을 주셨어요. 그 능력이 교회에 나타나게 하는 비결은 믿음과 기도인 거예요.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부터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능력을 주셨어요. 이 능력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게 하는 비결은 믿음과 기도인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그 믿음을 그의 아들의 병을 귀신들림을 고쳐주셔서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조금 이렇게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지 못한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작은 것 표현이 이렇게 나와요. 제자들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믿음이 없다. 믿음이 작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것을 그냥 같은 수준으로 취급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믿음이 작은 것 곧 믿음이 없는 것 똑같다는 거예요. 믿음이 작아도 주의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없잖아요. 똑같이 믿음이 없어도 주의 능력이 통로가 되지 못해요. 그러니까 믿음이 작은 거나 믿음이 없는 건 같은 의미라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적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리고 작게 믿는다 이런 의미예요. 그래서 결국 믿음이 작은 것은 믿음이 없는 것과 동급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역사는 일어나지 않고 믿음이 작아도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에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기도가 전부라는 거예요. 기도가 이미 받은 능력을 유지하는 비결이고, 기도가 우리의 간절함을 이루는 비결이고 기도가 귀신을 쫓아내는 비결이라는 거예요. 기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능력을 잃어갑니다. 목회자도 능력을 잃어가고 성도들도 능력을 잃어갑니다. 교회가 빛을 잃어갑니다. 제가 완도 갔다 와서 한번 교회 권사님의 기도를 목회 목양 일지에도 올리고 또 말씀 때도 드렸죠. 이제 교인이 다 떠난 처음에 교회들은 그래 옛날에는 막 50명 100명이다가 다 떠나가고 이제는 작은 교회는 진짜 45명 좀 알아봤자 20명 내외의 성도만 남은 그 교회예요.
근데 권사님이 오전 예배 대표 기도 시간에 이제 안 계시니까 권사님들이 기도를 해줘요. 저는 지금까지 들은 기도 중에 가장 감동이 ‘하나님 교회가 빛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시골에 있는 권사님이 이런 멋진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교회가 빛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우리 교회 성도들도 기도를 정말 잘해요. 수요 예배도 이렇게 보면 너무너무 잘 하셔요. 근데 생각해 봤는데 시골의 교회인데 맨날 바닷가에서 조개 캐고 불 따고 미역 다시마 농사짓고 평생 막 그거 하다가 몸은 병이 들고 권사님이 낮 예배 때 교회가 빛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능력을 잃은 것은 이미 받은 능력을 권세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그럼 왜 기도를 하지 않을까요? 기도를 전부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능력이 세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교회는 기도가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으로 그 능력이 흘러가는 거예요. 돈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흘러가고 사랑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권세가 흘러가는 거예요.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능력을, 권세를 영광을 흘려보내야 되는 거예요. 물론 그것이 돈이나 사랑의 모습으로 성비의 모습으로 흘러가겠지만 그 성경보다 더 큰 틀, 그 사랑보다 더 큰 틀 그거는 능력과 권세와 영광인 거예요. 이것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으로 흘러가야 됩니다.
기도를 하는 것과 기도를 전부로 여기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앤드류 머레인은 이런 기도의 책을 썼어요.
기도가 전부가 되게 하라.
어떤 의미냐 하면 기도는 영적 생활의 최고의 동력이고, 기도는 하늘의 능력을 불러오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기도가 전부가 되게 하라고 이렇게 책 제목을 적었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를 전부라고 여기지 않을까요? 그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 이게 죄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왜 기도를 멈추지 않았을까요? 사무엘상 12장 23절에 보면 사무엘은 분명하게 기도하기를 쉬는 죄라고 기록해 놨어요. 기도를 멈추면 죄를 짓는다는 거예요. 기도하기를 쉬는 죄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냐면, 기도를 멈추면 죄를 짓는다. 그래서 죄 짓지 않기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기도가 멈췄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어요. 성전의 기도가 멈췄을 때 어떤 영적인 일이 성전에 일어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에요. 기도가 멈췄을 때 엘리의 아들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엘리의 며느리가 어떤 저주를 하고 죽었는지, 엘리가 어떻게 죽였는지, 이스라엘의 어떤 불행이 닥쳐왔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래서 기도를 멈추는 건 죄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평생해요. 사람이 치매가 걸려도요.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아니죠. 자식들 다 잊어버리는데,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식은 안 잊어요. 주변에 것 다 있는데 평생 자기가 소중히 여긴 건 아니죠. 사람들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인생 끝까지 가져갑니다.
최근에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설교 방송을 설교로 유튜브를 올리는 방송을 여셨어요. 그분은 목회함에 있어서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은퇴를 하고 난 뒤에도 설교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자기가 제사장직을 물러나도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이 멈춰진 것이 아니라 기도가 멈춰진 것입니다. 선교가 멈춰진 것이 아니라 기도가 멈춰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도가 멈춰진 것입니다. 기도를 전부로 여겨야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은혜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멈춰진 것이에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멈춰진 것입니다. 기도를 전부로 여기는 기도가 멈춰진 거예요. 기도를 그냥 일부 부분으로 하는 기도는 여러분과 저도 계속하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기도가 전부라고 여기는 기도를 아직 잘 올려드린 적이 많지를 않아요. 진짜 인생의 시작은 교회의 시작은 사역의 시작은 삶의 시작은 기도를 전부로 여기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 깨닫고 알아야 됩니다.
저는 새해에 기도로 돌파하라는 말씀도 받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받았습니다. 제 마음에 그럼 어떻게 교회를 세울까요? 어떤 사람에서 우리 교회가 든든해질까요라고 물음을 했을 때 제 마음에 드는 것이 첫 번째 받은 응답인 거죠. 기도를 전부로 여기는 사람, 기도로 돌파하는 사람에 의해서 교회는 채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 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더 강하거나 더 약해진 적도 없습니다. 약해진 건 우리의 믿음이었고, 없어진 건 우리의 기도였지, 그분의 능력이 약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변하는 거죠. 하나님은 늘 그 자리인데 우리만 왔다 갔다 하고 하나님은 늘 동일하신데 우리만 늘 변했고 하나님은 늘 일관적인데 우리만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기도가 전부인 자리로 기도가 모든 것은 자리로 우리가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이미 받은 능력을 교회는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목사인 저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되게 어려운 것처럼 생각하지만 순종하면 되게 쉬운 것이기도 해요. 기도는 우리 아이들을 되게 어렵게 생각하지 기도를 어떻게 아이들이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순종하면 기도는 되게 쉬워져요. 생각이 많고 불순종하면 기도는 어려운 것이 되지만 순종하면 기도는 되게 쉬운 것이 됩니다.
올 한 해 동안 여러분과 제가 기도로 전부로 여기는 기도를 전부로 여기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새벽에도 열심히 기도하시고 집에서도 열심히 기도하시고 교회가 기도하지만 눈물로 기도하시고 교회는 저는 옛날에는 이 말이 가장 싫었어요. 목사가 눈물 흘릴 만큼 교회는 흥하고 목사가 힘든 만큼 교회는 부흥한다는 말이 정말 싫었어요. 왜 내 목사가 힘들어야지 근데 그런 나쁜 의미가 아니었어요. 제 마음이 약간 삐뚤어져서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나 봅니다.
이제 우리 한 해 동안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런 마음으로 기도에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여러분이 회사가 어렵든 시간이 많든 아프든 건강하든 여러분 환경에 이유를 다지 마시고 우리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