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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충격 - 앞부분
새로움의 충격
로버트 휴즈 지음 | 최기득 옮김
미진사 1995.07.15
인상깊은 구절
어쨌든 유토피아는 결코 도래하지 않았고 또한 쉽사리 포기되지도 않았다.
새로움의 충격 - 모더니즘의 도전과 환상
* 모더니즘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로지르는 세계사적, 인문학적, 미술사적 시각으로 바라본 훌륭한 저서이다. 각 시대별 예술가들을 다루면서 저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방식이라 문맥이 연결되는 부분들을 딱히 절취하여 요약하기가 적절하지 않은 관계로 summary를 위한 기초 자료 수집단계로 생각하며 읽어 주면 좋을듯 하다. 중요 문장들을 모으다 보니 분량이 꽤 많아지게 되어 일단 나누어서 목차중에서 쾌락의 풍경화 부분까지를 먼저 올린다. 뒤의 부분을 다음번에 이어 올리려 한다.
[ 목차 ]
기계의 천국
권력의 얼굴
쾌락의 풍경화
유토피아 건축의 환상
자유의 문턱에서
의식의 끝에서 본 세계
환경으로서의 문화
되돌아본 미래
[저자 서문]
이책은 영국방송협회BBC의 TV기획물 제작을 위해 내가 해설을 담당했던 방송원고를 바탕으로 마련된 것이다. 우리는 모더니즘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여덟 개의 주제를 정하여 그것에 관한 원고를 착실히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1880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문화에서 느껴진 현대적 감수성의 분출이 맨 먼저 다루어졌다. 이기간 동안에는 19세기가 20세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고도의 기계문명을 바탕으로 한 지복천년의 낙관적 분위기하에 미래에 대한 신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편 이 방영물의 마지막 부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제도화된 문화구조 속에서 아방가르드의 이념이 점차 약화됨에 따라 예술이 새로움과 가능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상실해왔던가가 설명될 것이다.
예술은 불만과 선동, 정치적 압력을 위한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해 왔을까? 쾌락으로 가득찬 세계, 성적인 감각으로 물든 사회집단, 그리고 세속적인 기쁨에 겨운 세상을 예술은 과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까?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예술은 어떤 노력을 기울였던가? 무의식과 불합리에 대하여 예술은 어떤 관계를 유지해온 것일까? 인간의 위대한 정신유산인 낭만주의적인 관점, 즉 세상을 절망이나 종교적 승화의 무대로 인식하는 태도를 예술은 어떻게 취급해 왔을까? 전통적인 전달매체인 회화와 조각을 대신해버린 매스미디어가 예술에 대해 강요한 변화는 무엇일까?..
텔레비전이 가지는 장점은 열광의 순간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텔레비전 매체를 좋아하는 이유가 된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자기의 전공분야에 있어서 결코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 저널리스트이다.
1.기계의 천국
1880년과 1930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세계의 역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문화적 실험이 촉발되고 있었다. 1940년 이후 그것은 점차 정체되어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양상으로 전개, 응용되다가 마침내는 최초 양상의 모방으로 종착되고 말았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더니스트의 실험실이 진공상태에 처해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심각한 실험을 행하는 하나의 터전으로서가 아니라 박물관에 별도로 마련된 시대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들어가서 관람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동참할 수는 없는 역사적 공간으로 변해버린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우리는 모더니스트 시대의 종단에 위치해 있다. ..20세기말의 문화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정의 분출, 이상주의, 확신등 앞으로 개척해야 할 영역이 무한정 잠재되어 있다는 희망이며, 더 나아가서는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문화의 내용이 그 향수자들에게 전달 될 수 있는 상징을 예술이 정당하게 마련할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모더니즘의 여가가지 의미가 집약된 단하나의 대표적 구조물 - 에펠탑:
에펠탑은 파리 만국박람회 행사의 정수로서 1889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서 1889년이라는 시기는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파리 만국박람회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수정궁보다 더 거창한 건물을 짓기를 원했다. ..박람회에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므로 행사의 핵심을 이루는 상징은 역시 바벨탑이 제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탑에 보다 의미심장한 사회적 의미가 내포되기를 소망하였다. 박람회의 주제는 누가 소유권을 쥐고 있느냐 하는 단순한 차원을 초월하여 제조기술과 가공능력, 그리고 자본의 역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세워질 이 탑에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승리라든가 토지적 재력에 대한 산업적 재력의 승리등 제3공화정과 구체제간의 현격한 경제적 차이를 예시해야 한다는 전제가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땅이라는 소유대상을 무시하는 한편 누구도 소유한 적이 없는 쓸모없는 공간, 즉 하늘에다 구조물을 설치하는 일은 매우 기발한 착상이었다.
에펠탑은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형상을 통하여 ‘기계적 공정’의 힘을 시사해 주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땅을 살 수 있겠지만 오로지 ‘현대의 프랑스’만이 하늘을 차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요구조건을 충족시기키 위하여 박람회의 운영위원회는 건축가가 아니라 엔지니어들에게 탑의 설계를 의뢰하였다... 탑의 설계는 당시 57세인 귀스타브 에펠이 맡게 되었고 간단명료 하지만 풍부한 의미를 가진 구조물을 설계하기에 매진하였다. 에펠탑은 멀리서 보면 인간의 형상을 닮고 있다. 그것은 파리의 한복판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선 관대한 거인의 모습에서 착안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탑은 17세기에 베르니니가 축제행사를 위해 축조한 분수탑<네개의 강>을 참고하여 설계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수많은 대중이 에펠탑을 흥미롭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소위 예술품이라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화랑이나 살롱을 드나드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로서 에펠탑이 구체적으로 제시해준 새로운 시대를 향한 감각에 고무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모더니즘이 잉태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기계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인구폭발이나 핵전쟁의 공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1889년 만국박람회 당시 윌리엄 블레이크와 엥겔스가 제기했던 소리없는 고통이나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기계의 존재는 결국 제작공정의 완벽한 정복을 의미하였으며 1880년 당시의 사람들이 동력기계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오늘날의 우리가 우주선의 발사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매우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기계문명의 ‘로맨스’는 오늘날에 비해 훨씬 더 황홀하고 낙관적이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물체도 그러한 감정에 입각하여 공공연히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것은 아마 기계에 의해 형성된 환경, 즉 도시라는 환경속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경치는 말을 타고 가면서 보는 경치와는 다른 것이다. 기차에서 보는 시각에 의하면 보다 많은 사물이 동시에 압축되어 인식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제 인간들은 한 가지 사물에만 눈을 고정시킬 시간적 여유를 잃게 된 것이다./
1890년대에 있어서 에펠탑의 가장 멋진 측면은 지상에서 탑을 올려다보는 시점이 아니라 탑위에서 지면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건축물 가운데서 가장 높았던 지점은 노틀담의 베란다뿐이었다. /
고갱, 모리스드니, 쇠라 등이 추구하였던 현대미술의 평면적이고 양식적인 특징은 에펠탑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초기 프레스코 벽화의 평면성이라든가 일본 목판화, 선명한 나선형 문양을 가진 칠보자기 등 미술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질적인 소재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고갱의 친구였던 드니가 1890년 여름에 발표한 ‘신전통주의의 정의’라는 선언문은 모더니즘의 규범이 될 수 있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림이란 그것이 말이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를 묘사한 것이기 이전에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덮힌 평면에 불과하다.” .. 에펠탑이 일깨운 공간개념, 즉 역동성이나 동세, 그리고 여러 가지 건축물과 지도 등의 추상적인 요소가 포함된 평면개념은 1907년과 1920년 사이의 기간 동안 가장 선구적인 유럽미술이 전개시켰던 공간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반동식 자동소총(1882)과 합성섬유(1883),파슨스 증기터빈(1884), 인화지(1885),가 개발되었으며 테슬라 전기모터,상자형 코닥 카메라, 던롭 공기 타이어(1888),코르타이트 화약(1889),디젤 엔진(1892),포드자동차(1893),영사기와축음기용 디스크(1894)등 수많은 발명품이 선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1895년에는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였고 마르코니가 무선 송수신기를 발명하였으며,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촬영기가 개발된 한편 러시아의 치올코프스키는 로켓 추진원리를 발표하였고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증상을 근원적으로 연구한 저술을 간행하였다./
증기기관의 시대가 전기동력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적 발명의 확산은 예술을 포함한 인간행동의 모든 분야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감각을 심어 주었다. 새로운 경험의 압력, 새로운 형식에 대한 요구 앞에서 규칙의 엄격성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고정된 지식적 규범 또한 의미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입체파의 그림은 중산층 부르즈와의 쾌락과 그들의 생활방식을 묘사했던 인상주의와는 달리 삶에 대한 직접적이고 일관성있는 관점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또한 입체파는 좀체 자연을 소재로 채택하지 않는데, 대부분의 입체파 그림은 정물화이지만 꽃이나 과일과 같은 자연물보다는 인간이 만든 물건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입체파는 관람자의 관심을 끌려는 화려한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리얼리티의 상대성은 우선 ‘모든 것은 주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부정함으로써 명확하고 진실된 서술이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관찰대상과의 상대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하더라도 마음을 조작하는 단순한 상상작용에 의해 의자 밑에 숨어있는 쥐를 제거시킬 수는 없을것이다./
세잔은 결코 입체파적인 그림의 제작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의 작품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현대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어쨌든 그가 입체파적인 추상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데 그 이유는 세잔이 기울인 모든 노력이 세계의 물질적인 모습-생 빅트와르 산의 형태, 비베무스 돌산의 거친 바위, 빨간 사과, 또는 정원사의 얼굴등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를 떠난 1890년부터 엑스에서 쓸쓸하게 지낼 동안 생애의 반에 걸친 기간을 통해 세잔이 제작한 그림에는 본다는 행위의 상대성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함께 자신뿐만 아니라 그 어떤 누구가 그러한 상대성을 물감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담겨져 있다.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그림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최종적인 형태, 즉 환영의 승리이지만 세잔은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밧줄이나 도르래가 보이는 무대 세트의 위로 우리를 인도하여 연극 전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화가의 정확한 관찰력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비평가 바바라 로즈가 말한대로 세잔에게는 “이것이 내가 보는 것이다”라는 진술은 “이것이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대체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는 관계와 흡사하다. 한편 브라크는 고슴도치처럼 무겁게 있으면서 세잔의 예술이라는 큰것 하나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강박관념을 가질 정도로 세잔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브라크는 자신이 말한대로 “회화로부터 기교적인 완성이라는 개념을 제거한 업적” 때문에 세잔을 존경했던 것이다. 브라크가 사랑했던 것은 자연의 참 모습에 대해 번민했던 세잔의 태도, 그 완고함, 주제가 갖는 진실을 향한 집중력, 그리고 ‘고상한’ 예술성을 거부하는 태도 등이었다. ..피카소는 관념적인 기질을 가졌던 브라크와는 달리 강한 물질적인 감각으로부터 자신의 예술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피카소에게는 물체의 성질을 완벽하게 제시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의 형태나 중량감, 윤곽, 그리고 소리없는 물체의 성질까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동안 브라크와 피카소의 회화는 현실의 리얼리티와 그림 속의 복잡한 시각언어 사이에 하나의 긴장관계만 성립될 정도의 흔적만 남긴 채 빠른 속도로 추상으로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 같은 보조로 변화해 나갔던 이 두 사람의 그림은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같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피카소는 한때 “나는 나의 생각을 따라 형태를 그릴 뿐 보이는 대로는 그리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는 평생 동안 단 한 장의 추상화도 그리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그에게 있어서 물체가 부여하는 감각적인 리얼리티의 매력은 몹시 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단계의 입체파 회화는 1911년에 제작된 그림의 추상성으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마리네티는 자신을 ‘유럽의 카페인’이라고 불렀다. ‘미래주의’라는 이름은 도전적이기는 하지만 애매모호한 표현이기 때문에 마리네티는 꽤 재치있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 명칭은 역사를 부정하는 어떠한 미친 짓거리에도 붙여질 수 있는 것이지만, 마리네티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무리들이 계속 외쳐댄 미래주의의 근본이념은 기술에 의해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태어났으며, 마리네티의 계획에 동참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기계의 환상을 꿈꾸는 하나의 계급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기계의 존재는 바야흐로 유럽의 문화판도를 바꾸어 놓기에 이르렀다.(미래주의자들이 기대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기계는 힘 그 자체였으며 역사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만일 미래주의자들이 이탈리아와 같은 기술적 후진국에서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미래를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1차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마리네티 주위에 모여든 작가들이 않고 있었던 문제는 이런 종류의 영상을 어떻게 물감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한 가능성있는 해결책은 우선 빛과 색을 점으로 해체시키는 기법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점묘기법은 프랑스의 신인상주의에서 출발하여 1890년대의 이탈리아 화가들로 구성된 분할주의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었다. 분할주의 기법은 여러 주의적 기질을 가진 젊은 예술가들에게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첫째 그것은 에너지를 분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물감이 캔버스에 고착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나타나게 되는 부동성이라는 장애요소를 제거 시켜 주었다. 둘째, 정치적 의미로 충만했던 분할주의는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혁명가들의 양식으로 간주되었다./
새 시대의 광휘는 곧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1914년 이후 기계는 자신을 낳아준 발명가들과 그들의 자식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유럽의 평화가 40년동안 지속된 이후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 발발하여 그때까지 선하게 여겨져 왔던 테크놀로지와 그 은혜로운 기계에 대한 믿음을 불식시켜 버렸다. 미래의 신화는 충격 속에 가라앉아 버리고 유럽 미술은 모순과 혐오, 그리고 반항의 시기로 이행되어 갔던 것이다./
2. 권력의 얼굴
새로운 세기가 출현한 바로 그 시점에서 기계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현대문명이 약속했던 모든 낙관주의는 바로 그 기계주의에 의해 일시에 좌초해 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좀므 계곡에서의 전투가 있은 후에는 언어의 기능마저도 상실되어 그것은 이전의 의미체계에서 이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예술언어의 생명력을 변화시킨 양상 또한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과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친 무의미한 희생 이외에도 1차 대전이 문화 전반에 걸쳐 미쳤던 영향은 지대하다. 전쟁의 참상이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던 맹목적 애국주의자들에게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부분 청년들이었던 군인들과 고향에 남아 있었던 기성세대간에 경험상의 엄청난 간격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현대 문화의 한 특징인 세대간의 심각한 갈등현상이 비롯되었던 것이다./
미래주의는 취리히 다다이즘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요소로 작용하였다. 즉 마리네티 작품의 특징인 조절된 흥분상태와 계산된 과장의 결합은 이후 전위운동의 도전태세를 위한 수사학적 근간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후고 발이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다이즘은 낭만적이고 맵시있으며 기괴하기도 한19세기적인 예술개념의 재발견을 목표로 삼았으며 특히 마리네티의 자극적인 허세는 양식적인 표본을 짜라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다다이즘은 기계문명을 소중히 생각하지도 않았뿐만 아니라 전쟁의 미덕을 칭송했던 마리네티의 허장성세도 별반 염두해 두지 않았다./
다다이스트들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적인 화가는 바로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라는 하노버 출신의 작가로서 그는 거리에서 주워모은 여러 가지 기이한 물건들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슈비터스가 태어나기 5년전에 반 고호가 쓴 편지에는 기막힐 정도의 명문이 적혀 있는데 이 구절은 폐물이용의 귀재 슈비터스의 출현이 결국 시대상황이라는 문맥 하에서 당연한 귀결에 불과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하치하는
장소를 찾아갔다.
아, 그곳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들은 내일 그 쓰레기 더미에서 부서진 가로등과
몇 가지 재미있는 물건을 가져올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아끼는 것이며 만일 필요하다면
모델로도 쓸 수 있다.. 사람들이 쓰다
버린 쓰레기통이나 바구니, 주전자, 사발
물주전자, 철사, 등잔, 파이프와 솜뭉치
등의 잡동사니는 안데르센의 동화 같은
훌륭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다.
나는 오늘 밤에 그것에 대한 꿈을 꿀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겨울에는 내 그림에
그런 물건들을 좀 더 많이 다룰 것이다..
이 쓰레기장으로 여러분을 데려가는 일은 정말
하나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장소는
얼마나 추하게 보이든지 간에 화가에게는
진정한 파라다이스인 것이다.
네덜란드의 농부출신으로서 가혹한 핍박을 당했던 이 가난하고 비참한 화가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무것도 아닌 물체 그 자체로부터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름대로의 시적 분위기를 띠고 있다. 반고호 이전에는 폐물에 대한 감상적 태도를 그토록 분명하게 가졌던 화가는 존재하지 않았고 슈비터스에 오면 그런 태도가 훨씬 더 심화되는 것이다. 폐물을 그냥 그리는 방법 대신에 그는 그것을 예술 속으로 끌어 들였다. 폐물 쓰레기는 색이 변했거나 표면이 벗겨지고 녹이 슬거나 희어지고 찢어졌거나 구겨졌지만 슈비터스의 마술적인 손에 의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결합되면서 그 존재 가지를 드러내게 되었다./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게걸스런 행위는 짜라와 그 동료들에 의한 반문화적 전략과 마찬가지로 다다이즘이야말로 예술에 반대되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도대체 어떤 그림에 의해 그림 자체가 부정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어떤 조각작품에 의해 조각의 정당성이 와해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작품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918년경에는 중산계급이 가진 진부한 예술취향에 대해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리한 공격이 감행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중산층의 예술적 취향이 기업체의 보석-명작 전시회에 의해 살찌워졌고 그래서 미술의 감상은 값비싼 귀중품을 슬쩍 훔쳐보는 흥분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60년전 만 하더라도 예술은 종교와도 같은 면모를 갖고 있어서 예술가들은 죽은 뒤에야 신성한 창조자 또는 문화적 영웅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는 예술을 찬미하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적나라하게 풍자했던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모나리자의 얼굴에서 콧수염을 그려 넣음으로써 오만불손하게도 문화의 존엄성을 희롱하였다./
가장 뛰어난 예술이란 시대가 안고 있는 수천가지 문제들을 다루어내는 의식있는 예술이며, 바로 지난주에 있었던 폭발로 갈갈이 찢겨진 예술이며 바로 어제 있었던 충돌사고로 잘려나간 사지를 다시 끌어 모으는 예술이어야 한다. 표현주의는 과연 치명적인 사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킨 적이 있는가? .. 표현주의자들은 삶의 본질을 불태워 우리의 살과 피로 만드는 예술을 충족시켜본 적이 있는가?.. 내적으로 지향한다는 허위 속에서 표현주의자들은 문학과 미술의 역사에 명예롭게 기록되기를 고대하는 하나의 도당을 이루고 있다. .. 막스 에른스트는 포토 몽타주 기법을 이용하여 진정 흥미로운 작품을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다. ..한편 포토 몽타주를 가장 저돌적인 정치적 목적에 사용했던 사람은 하트필드였다. 그는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어떤 예술가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할 태도로 정치문제를 노골화 하였다. 그의 포토몽타주는 회화로는 다룰 수 없는 진실을 표명하였다./
독일 다다이즘은 전통에 대해 거부의 몸짓을 취하였으나 그것 역시 인간사회의 모습에 대해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즉 인간사회는 각기 다른 계급과 직업을 가진 상징적인 인물들이 도착의 예정없는 항해를 계속하는 ‘바보들의 배’라고 파악되었던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은 루터 종파의 삽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성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탄과 같은 교황의 모습 추잡한 승려, 방귀뀌는 마귀 등으로 가득찬 16세기 독일 목판화에서처럼 그들의 작품에 사회적인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특히 전쟁불구자는 다다의 작품에 강박적으로 등장했던 상징이었다. /
게오르게 그로츠(1893~1959)는 베를린의 작가들이 제작한 이러한 과격한 작품 중에서 가장 신랄한 작품을 남겼다. 그로츠의 태도는 그의 친구 중 하나가 그를 “회화 때문에 구토증세를 일으킨 회화의 볼세비키 분자”라고 부를 정도로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혁명이라는 실제적인 임무에 비교해 볼때 예술이란 “완전히 부수적인 일”일 뿐이라고 그로츠가 말한 적은 있지만 회화는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수단이었던 고로 그 자신 회화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츠의 속을 뒤틀리게 만든 것은 회화가 아니라 인간들이었고 그는 광기에 빠진 독일의 현실에 견디지 못하여 시의 세계로 탈주하고 말았다./
파리 미술의 관점에서 볼때 - 1920년대의 미술에 대해 미술사가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시각은 물론이고 - 그러한 이미지는 눈에 거슬리는 조야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시대에 뒤진 것이었다. 더 좋지 못한 것은 그것이 ‘설명적’인 이미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츠를 비롯한 다다이스트들은 정치적 충격효과라는 목적을 감안하여 그들 작품이 대량복제되어 널리 보급되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불 설명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이런 비난은 1920년대에 독일화가들이 조직하였던 ‘신형상파’의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 표현주의는 어느정도 비중있는 정치적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이 점은 1919년에 발행된 <모든예술가들에게>라는 책을 위해 페히쉬타인이 제작한 커버 디자인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과격분자적 열정에 타오른 예술가 - 영웅의 모습을 표현한 이 그림은 성스러운 심장을 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카톨릭 교회의 착색 석판인쇄물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표현주의는 오로지 자아만을 영웅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허점을 드러내었다. 그것이 얼마나 감각적인 설득력으로 제시되었든지 간에 도대체 어떤 노동자가 화가 자신의 나르시즘이나 존재의 불안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1925년 그로츠는 “나의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이해받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요즘의 사람들이 요구하는 깊이라는 것, 즉 개 같은 신비철학과 지적인 형이상학으로 가득찬 잠수기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가 볼 수 없는 깊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제 표현주의에 의한 무질서 상태는 종식되어야 한다. 보헤미안이나 거드름 피우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집산주의 사회의 구조 안에서 자신감있게 활보하는 건강한 인간으로서의 예술가가 출현할 날도 멀지 않았다”/
약 반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어버린 ‘벽’의 동쪽에는 다다이스트나 표현주의자 그리고 신형상파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최소한의 자유 즉 그 실효성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정부의 선전과 국민 사이에 개인의 예술을 소개 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렸던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스탈린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출현하기 전의 러시아에는 좌익에 봉사한 선구자적인 예술이 드높은 낙관론과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서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눈부신 결과를 산출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1917년과 1925년사이 공산주의가 제시한 약속이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공산주의와 제휴하게 된 기간 동안이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문화가 히틀러에 의해 말살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출현한 이 러시아 문화는 1930년대에 스탈린이 저지른 보복적인 문화적 탄압에 의해 그만 소멸되고 말았다./
시인이었던 세프첸코는 1913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세상은 부단히 움직이는 단 하나의 멋진 기계로 또는 거대한 자동조직체로 변형되었다. 이상적으로 제조된 기계인간과도 같이 우리는 시계에 맞춰 생활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 그리고 우리의 생활전반에 반영되고 있는 율동과 기계적인 조화감은 역시 우리의 사고와 정신적인 생활 속에서 즉 예술 속에서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러한 유토피아적 발상 속에서 무시무시한 반 유토피아적 미래의 징조가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상은 스탈린 치하의 기계국가를 묘사한 자미아틴의 <우리들>이나 그것이 영국적으로 각색된 오웰의 <1984>에 잘 설명되어 있다./
로웰(Margit Rowell)은 타틀린이 피카소가 가졌던 목적의식은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정물화(피카소의 조각작품은 대체로 정물화 같은 인상을 준다)란 부르즈와의 관습으로 오염된 장르라고 간주했다고 지적하였다. 정물화는 어떻게 보더라도 서양미술에 있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주된 표현형식이다.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하려면 예술가들은 소유할 수 있는 물체의 묘사를 중단하고 추상으로 나아가야 한다(타틀린은 아마 오늘날의 작품시장을 극악무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타틀린 자신이 만든 단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조각의 표현적인 힘은 ‘팍투라(Faktura)'즉 재료에 내재된 언어적 잠재력에서 발생한다. 그는 “엄숙단정함에 있어서 고대의 대리석과도 비교될 수 있는 철과 유리 등 현대적 고전주의의 재료를 결합하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그의 의도는 값이 싸고 사치스럽지 않지만 그 아름다움이 충분히 잘 알려져 있는 건축자재를 통해 표현될 수 밖에 없었다. 타틀린은 이런 재료로 만든 조각작품이 사회적 진실을 전달하는 우상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러시아인들이 흔히 우상을 위치시키는 실내의 구성에다 전시 하였다/
구성주의의 본질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물체’, 즉 스스로가 물질과 노동이 결합된 물체임을 드러내는 예술개념에 있었다. 러시아 전위미술 가운데에서 예술과 대중을 가장 효율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은 로드첸코(1891~1956)에 의해 제작되었다. 로드첸코는 원래 화가였으나 그래픽 디자인과 사진에로 관심을 돌렸으며 종국에는 하나의 총체적인 작품으로서의 새로운 국가라는 리시츠키의 생각에 동조하였다. “비구상회화는 거리와 광장, 도시, 그리고 세계 그 자체이다. 미래의 예술은 가정을 안락하게 꾸미는 장식 수준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장차 예술속으로 병합될 48층짜리 고층건물과 굳건한 교량, 무선전신, 항공술, 그리고 잠수함 등과 마찬가지로 꼭 우리곁에 있어야 할 대상이다.” 미래주의적인 이러한 감상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로드첸코는 디자인과 사진이라는 보다 실제적이고 보다 온건한 영역에서 그러한 관점을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거창한 광경은 거칠기 짝이 없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신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독일의 문학가 벤야민은 그러한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전쟁을 예찬하는 파시즘적 태도 그리고 ‘인체의 기계화’와 ‘기관총의 작렬’에 경탄했던 마리네티의 태도가 동일하다고 파악하였다. “정치를 미적으로 변태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오로지 전쟁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마리네티가 인정한 바와 같이 파시즘은 테크놀로지로 충만한 감수성에 대한 예술적 만족이 전쟁에 의해 유발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분명 예술을 위한 예술의 완전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전체주의적인 미적 태도가 그 완전한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은 회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회화와 동일한 비중을 갖고 있었던 두가지의 문화형태, 즉 영화와 체육이 서로 결합되었던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과 뉴렘버그 군중대회 때였다./
입체파적인 양식성은 별도로 치더라도 <게르니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요소로는 근 4반세기전에 제작된 피카소의 콜라주에서 신문지가 사용되었듯이 말의 몸뚱아리가 신문기사의 평행선처럼 표현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빛의 신 미트라의 눈을 닮은 전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요소를 제외하면 이 그림에 나타나는 과감한 추상성이나 묘비명처럼 응고된 고통의 표현은 사진술이 발명된 당시의 상황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이 동시대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특징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완전히 흰색과 회색 그리고 검정색으로만 칠하였고, 그 결과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신문의 정치면을 연상시키는 순간성을 획득하게 된다. <게르니카>는 회화의 역사상 최후의 역사화로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권력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느낌을 변화시키려는 의도 하에 정치분야로부터 주제를 추출한 최후의 현대회화라는 중요성을 가진다/
3. 쾌락의 풍경화
우리는 19세기가 쾌락의 예술을 만들어낸 시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 19세기는 오로지 쾌락의 예술이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간 시기였을 뿐이다. 나폴레옹의 외교장관이었던 탈리랑드가 ‘프랑스 혁명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삶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고 한 말 가운데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져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완전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18세기 예술에 있어 쾌락의 원리는 전적으로 귀족계급에 의해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인상주의에 대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원인을 배경으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쾌락의 세계는 1870년경에 이르러 극적으로 다변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인상주의는 극빈선 이상의 상태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향유할 수 있는 오락 속에서 소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주의는 또한 화가들 자신이나 주위의 사람들로부터도 쾌락의 이미지를 추출하였다. 즉 르느와르, 모네, 시슬리, 까유보트, 드가, 피사로 등은 기법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태도면에 있어서 사실 매우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고 세상을 보는 눈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1880년데 중반에 이르면 자발성을 좋아한 인상주의의 태도가 젊은 화가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상주의적인 ‘시각’은 사실주의의 본질로서 어떤 한 순간의 현상, 즉 덧없이 사라지는 빛과 색의 모습을 포착한다. 다시 말해 인상주의의 풍경화는 화가가 목격하는 순간만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인상주의는 캔버스 위에서 신속히 형태를 조직하는 감각적인 붓놀림과 관찰의 기민함 이외에는 아무런 제작 방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렇듯 인상주의 회화에서 결여된 일관성있는 제작방식은 역으로 인상주의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 인상주의 그림에 의해 불쾌감을 느꼈던 사람은 없었다. 이점은 세잔느가 모네에 대해 이야기했던 내용에서 증명될 수 있다. “그에게는 눈밖에 없다. 오, 그러나 얼마나 뛰어난 눈인가! ” 그러나 이러한 찬탄에도 불구하고 세잔느는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런 문제점은 인상주의가 정신에 대해 눈의 우의를 강요한다고 생각했던 젊은 화가들에게도 의식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고전미술이나 동방미술의 영원성과 존엄성을 자기들의 작품에 주입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시각’의 무질서한 상태에 어떻게든 질서나 조직, 그리고 체계가 반영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이런 기대를 가장 훌륭히 충족시켰던 화가가 바로 쇠라(1859~91)였다./
쇠라가 선택한 주제는 인상주의와 동일한 것이었으나 그의 목적은 그들과 달랐다. 자신이 가졌던 이상을 보다 선명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그라벨린느 포구>가 제작되기 6년전에 자신의 대표작인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우후>의 제작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 그림에 내재된 전통의 뿌리는 분명하다.즉 이 그림도 역시 앞에서 언급한 ‘전원의 축제’양식, 다시말해 이상향 아르카디아에서의 유희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카디아가 전설상의 장소인 것과는 달리 그랑자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로서 주말이 되면 파리 시민들이 아이들과 함께 소풍과 낚시를 즐겼던 센느 강변의 작은 섬이 었다. 따라서 이 장소에도 인상주의의 손길이 뻗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쇠라는 인상주의와는 정반대되는 목적을 실행하였다. 즉 그가 의도했던 것은 일순간에 노니는 장면을 포착하여 하루만에 그림을 완성해 버리는 즉흥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로 305cm 세로 210cm나 되는 <그랑자트>는 다비드, 그로, 들라크르와가 제작한 대형 그림과 맞먹는 등 인상주의자들이 제작한 어떤 그림에 비해서도 훨씬 큰 규격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중산계층의 인물들은 한때 왕과 신에게만 국한되었던 고귀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그랑자트>는 창문을 통하여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표면 자체로서 전통적인 회화개념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멈추어 서서 회화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쇠라는 언어로서어의 예술이라는 관점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다른 모든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188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한 관점은 그 자체 작품의 주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쇠라는 사물을 원자의 단위로 해체하는 분석적 의지가 모더니즘적 인식방식의 핵심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작품 또한 예술이 예술 자체를 소재로 취급하는 경향의 전조가 되었다. 예술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자의식의 상태하에서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구축한다는 것은 소재를 원소의 단위로 해체하여 작품형식의 질서에 따라 재조직함을 뜻하였다.
리얼리티란 명확하게 고정된 작은 현상들의 그물조직으로 제시될 때 영속성을 지니게 된다. 궁극적으로 말해 이것이 바로 <그랑자트>가 차지하는 예술적 의미 인 것이다. 이 그림은 ‘실제모습’이 상실되는 대가를 치루면서도 끝없는 분할과 무수한 연관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쇠라가 <그랑자트>를 발표했을 즈음 모네는 쇠라와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동일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만일 모네가 쇠라가 죽은 해인 1891년에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인상주의의 대표화가로 인정되었겠지만 현대미술에 대한 그의 비중은 그렇게 막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에서 풍경의 외관을 모네만큼 우아하게 찬미했던 사람은 없었다. 느르와르가 여자의 살결에 비유된다면 그는 나무와 바다, 그리고 하늘에 비유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50세가 되기 이전에 제작한 그림의 대부분은 쾌락이라는 기준 하에서 진행된 위대한 분석의지의 결과, 즉 고요함과 영원성을 갖추지 못하였다. 1880년 무렵부터 모네는 하나의 미술운동으로 고착되어버린 인상주의와 인상주의의 트릭을 손쉽게 써먹을 줄 알았던 이류화가들에 대해 혐오감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술이라는 게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눈과 마음의 교호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취급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모네는 하나의 소재가 각각 다른 시각, 다른 기상조건하에서 무한정하게 변화하는 빛의 영향을 받아 어떤 모습을 나타낼 것인지 궁금해 하였다. 이런 경우 15장의 그림에 묘사된 하나하나의 짚단더미는 수없이 많은 평범한 물체를 대변함으로써 대상의 가치와 의미를 따지고 드는 인간의 태도를 불식시켜 버린다. “모래알에 깃든 영원성, 그리고 한 송이 꽃에 존재하는 천국”./
..다시 말해 그의 태도는 개인의 의식이 종교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암시하였던 것이다. 연작으로 제작된 성당의 모습은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과 같이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물감으로 처리되었다. 그 결과 성당건물은 공기 속에 가라앉은 분위기가 아니라 물감 덩어리로 굳어진 형상을 취하게 되었다. 연작을 진행해 나가는 동안 모네는 하나의 특별한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을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주제라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주관의 전개, 즉 정신의 과정이다. 이러한 작업은 적대적이거나 불쾌한 소재를 채택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재가 수반하는 내용에 의해 너무나 막대한 혼란상태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잔느는 쇠라와 모네를 뒤이어 19세기 후반 이러한 시도를 감행했던 세 번째의 탐구자 였다. .. 역사의 구속으로부터 화가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자연밖에 없다. 세잔느는 자기를 존경했던 젊은 에밀 베르나르를 “자연을 충분히 관찰하지 않고 미술관에 걸린 작품만 기억하고 있는 지식인에 불과하다”라고 평하고 “하나의 화파 또는 모든 화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위대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 세잔느의 풍경화는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뼈대가 굵고 명확했던 그의 기질이 산화된 작품이며 그것은 차가운 물 한 모금이나 올리브 열매의 맛과 마찬가지로 즉시 느껴질 수 있다. .. 그는 똑같은 모습의 산을 결코 두 번 그린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 장 한 장의 그림은 산까지의 거리가 변화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로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폴 고갱(1848~1903)은 반 고호를 제외하고 애초부터 색채의 자율성이나 상징성이라는 생각과 함께 색채의 예술적인 기능에 주목했던 화가로 꼽힌다.
.. 따라서 고갱이 화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 타히티에서였다는 일반의 믿음은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을 구성해주는 모든 요소 - 평평한 색의 패턴, 굵은 윤곽선, 인간의 운명과 감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는 기대, ‘원시’미술에 대한 관심, 그리고 색이 하나의 언어로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등은 그가 타히티로 떠난 1891년 이전에 그의 작품에 응집되어 있었던 것이다. .. 이렇게 볼 때 고갱이 묘사한 타히티의 낙원은 문화적인 허깨비로 가득찬 모독받은 에덴이며 기만에 찬 에덴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렸던 타히티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황금시대 사람들의 망령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러한 상황은 고갱의 그림에 내포된 형식적이고 고전적인 측면에 잘 부합되었다. 우리는 고갱을 한 사람의 현대화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전혀 현대적인 화가가 아니었다. 즉 고갱이 가졌던 상상력의 세계는 20세기에 속해 있었다기 보다는 여전히 제3세게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림의 은유성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그림이 불길한 내용을 담은 하나의 도덕적 이야깃 거리가 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단순히 시각적인 감각을 취급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도덕적인 가르침을 행하는 교사라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야수파의 작품세계는 하나의 일관된 이론을 표방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 상징주의와는 달리 야수파는 아무런 이론도 갖추지 않았으며 이론을 장만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 화가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는 것으로 대충 정의될 뿐이다. 그들은 잠시동안 이었지만 마티스의 작품세계와 프랑스 남부의 풍경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여기에는 블라맹크, 드랭, 뒤피, 브라크, 반 동겐, 망갱 등의 작가들이 포함된다. 야수파 회화의 일반적 특징으로는 조화되지 않은 밝은 색채, 성급하게 칠해진 조악한 캔버스 표면, 왜곡된 형태, 생생하고 활발한 자극에 대한 애착 등을 들 수 있다. ..몇년후 이러한 야수파의 저돌적인 색채 구사 방식은 독일 표현주의에 의해 계승된다. 그러나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았던 것은 감각적 완전성을 동반한 낙관주의적 태도였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재료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색채를 통해 스스로를 표명하였다./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전개되어 오면서 사색과 여유, 그리고 청명함으로 가득차게 된 마티스의 작품세계는 모더니즘이 이룩한 중요한 발견들이 과거를 격렬하게 거부함으로써 성립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쓸모없이 만들어 버린다. 전통에 대한 끝없는 반발로 점철된 피카소의 작품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작품은 오히려 전통에 바탕을 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시절 르동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마티스는 마네와 세잔느의 그림을 주의 깊게 연구 하였다./
마티스는 언젠가 그의 예술이 지친 사업가에게 편안함을 주는 안락의자와 같은 효과가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예술에 의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1960년대에 마티스의 그러한 태도는 어쩌면 매우 소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마티스가 가졌던 평범한 생각만큼은 존종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그는 관람자에 대한 불명료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그는 교육받은 부르즈와만이 선구적인 예술에 호응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역사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에 있어서 호텔이나 아파트의 방 등이 소재로 채택되었던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실내 풍경이라는 공통된 주제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입장에서 자애로운 세상을 명상해보는 행위와도 같다. 여기서 창문은 실내와 실외를 구분짓는 여과기의 작용을 수행한다. 과감하고 힘차게 그려나간 <콜리우르를 향한 창문>에서와 같이 이러한 실내의 정경은 때때로 몇 가닥의 선으로 결정되면서 하나의 추상으로 변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마티스는 세잔느가 했던 말과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목적은 나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상태는 나를 둘러싸고 나 자신속에서 반응하는 물체와 나 자신의 존재에 의해 야기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나 자신을 그림 속에 포함시키며 나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내 앞에 바다와 하늘밖에 없는 것처럼 공간과 그 속에 있는 물체를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브라크는 자신의 화실을 하나의 주제로서 이용한 유럽화가중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브라크는 풍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가 일차적으로 다룬 주제는 창문이 있고 물건들이 가득찬 닫힌 상자로서의 방이었다. 세련된 느낌으로 가득찬 브라크의 작업실은 마치 속세의 성당과 같은 곳으로서 그가 자기의 작업실을 묘사하여 그것을 예찬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페르메르, 벨라스케스 같은 옛 대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브라크가 채택한 화실이라는 주제도 작가의 사고와 작업의 존엄성을 내포하게 된다. 한편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화가의 작업실은 실험실이나 공장에 비교해 볼 때 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비스런 장소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마티스가 물려 받았던 자연에 대한 두가지의 태도, 즉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미술의 상징적 전통에 연결되기도 한다. ..마티스는 <춤>의 제작을 마지막으로 15세기 이래 작가적 능력의 척도가 되어왔던 인습적인 주제와 결별하고 갖은 죄악에서 벗어난 순수한 동물상태의 인간이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한 채 힘찬 동작으로 움직이는 세계에로 몰입해 들어갔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는 사실 어려운 질문이긴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해결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난감한 문제는 ‘무엇을 그릴까’라는 질문인 것이다. 문화적으로 다소 고립되었던 일부 동료화가들과는 달리 마더웰은 보들레르에서 웰뤼아르까지 연결되는 프랑스 현대시의 전통 가운데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부분적으로나마 규명할 수 있었다. 마더웰은 1950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 ‘구성주의’의 전통속에서 모더니스트 회화에 만연되고 있는 취약점은 구체적인 감각의 세계에 확실하게 부리를 내리지 못한 ‘추상’형태를 고안하려는 시도에서 발견된다. 예술은 구체적인 감각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현대시의 정신은 그러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모더니스트 회화는 그저 회화형식에 내포된 내적 구조의 관련성 하에서 전개되어오지 않았다./
==>> 다음에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