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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를 지배하는 것은 지식이다. 주체를 지배하는 것은 지혜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 지성이다. 강호에 나가면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지성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없었다. 때와 장소와 흐름이 맞아서 지성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자신을 변화시켜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 나의 목표는 지성인이 되는 것이었다. 지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별을 따지는 못한다 해도 별을 바라볼 수는 있어야 한다.
전사의 영광은 말안장 위에서 죽는 것이다. 운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운명의 장소에 가 있는 사람이 지성인이다. 운명이 나를 부르거든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달려올 수 있어야 한다. 강호를 떠도는 지사는 될 수 있다. 가슴에 별을 품은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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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수동이고 지성은 능동이다. 지식은 객체를 알고 지성은 주체가 객체를 장악한다. 지식은 자동차와 마차를 구분하고 지성은 자동차를 운전한다. 지식이라는 도구를 사용할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지성이고 지성은 실천이며 실천은 도구를 쓴다.
지성 - 인간이 주체가 된다.
지혜 - 주체가 객체를 지배한다.
지식 - 객체를 파악한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학습하고 지혜는 응용한다. 지식은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알고 지혜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지식은 드러난 것을 알고 지혜는 감추어진 것을 안다. 지혜는 주체와 객체의 권력관계를 알고 둘을 잇는 메커니즘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자동차와 배를 구분한다. 지혜는 자동차 안에 엔진이 있음을 안다. 지성은 사람이 그 자동차를 운전한다. 안다는 것은 장악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에너지의 연결에 의해 메커니즘을 이루고 주체와 객체의 권력관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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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단서를 통해 추론해야 한다. 부분을 알고 전체로 확장하는 것은 지식이고, 전체의 틀을 알고 거기에 부분을 채워넣는 것은 지혜다. 부분에 전체를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식의 성립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있다. 지식을 스승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다.
지혜는 전체의 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배울 수 없다. 지혜의 틀은 타고나는 균형감각이다. 동물은 체계적인 지식이 없다. 학습된 지식은 있어도 응용하는 지혜가 없다. 동물에게 지혜가 없듯이 인간에게는 지성이 없다. 인간의 균형감각은 우연히 작동한다.
지식 -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간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으므로 스승에게 배운다.
지혜 -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간다. 큰 것은 타고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지혜가 있고 동물은 지혜가 없다.
지성 - 타고나는 것은 균형감각이다. 우연히 작동하는 균형감각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지성이다.
타고난 천재들이 있다. 배우지 않았는데 그냥 안다. 그것은 균형감각이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화음을 발견한 것이 그러하다. 문제는 감각이 일회용이라는 점이다. 발명가의 지혜는 문득 떠오른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지식이 지성이다.
자동차 운전은 감각으로 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배우는 것은 필기시험이고 실기는 자신의 감각을 계발해야 한다. 감각의 메커니즘을 알면 막강해진다. 논리적인 분석은 지식인의 것이다.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는 감각에 맡기는데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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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주체인 인간이 객체를 장악하여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지식이 객체의 문제라면 지성은 주체의 문제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다. 주체는 권력이 있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공자의 답은 '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다.
인간의 권력행사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집단의 문제, 둘째 환경의 문제, 셋째 관성의 문제다. 개인이 답을 알아도 집단을 장악하지 못하면 실패한다.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패한다. 지금 하는 일에 관성이 걸려 있으면 포기한다. 에너지의 문제다.
1. 집단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2. 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3. 하던 일을 그만둘 수 있는가?
세 가지 장벽 때문에 인간은 알아도 행하지 않는다. 어차피 행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판단하지 않고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한다. 리더에게 힘을 몰아주다가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진다.
왜 살아야 하는가? 왜 결혼해야 하는가? 이것은 지식이나 지혜의 영역이 아니다. 자신이 감당할 문제다. 결단의 문제다. 의사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유리한 결정을 하는 것은 지식이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것은 지혜다. 운명을 따라가는 결정이 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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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판단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 생각은 도구를 쓴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지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뿐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문득 지혜를 떠올리지만 의식적으로 지혜를 복제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단서를 가지고 객체를 추론하는 것이고 하나는 균형감각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객체의 문제는 분석하면 되는데 주체의 문제는 위험을 감수하고 결단해야 한다. 환경을 극복하고 에너지를 동원해야 한다.
인간의 문제는 공간의 균형은 아는데 시간의 균형은 모른다는 것이다. 도박사의 오류는 균형감각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공간의 균형을 시간의 균형으로 착각한 것이다. 균형감각을 잘못 사용하여 실패를 반복하다가 결국 균형감각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
인간은 타고난 직관력을 사용하지 않고 의사결정을 회피하며 집단에 의존한다. 환경의 방해에 좌절한다.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며 관성력에 지배된다. 습관과 타성이다. 에너지를 사용하기를 두려워한다. 판단을 거부하고 결정을 거부한다. 용기를 내야 한다.
주체와 권력과 지성의 삼위일체다. 주체에 서서 권력을 사용할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주체와 객체의 권력관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식은 객체와 맞서고, 지혜는 객체를 이기고, 지성은 에너지를 동원하여 이기게 한다. 이기는 지식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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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가 있으면 역효과가 있다. 역효과는 부분이냐 전체냐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문제다. 역효과의 역효과도 있다. 역효과의 역효과는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의 문제다. 공간의 문제는 전략이 필요하고 시간의 문제는 믿음이 필요하다.
에너지는 두 번 방향을 바꾼다. 정에서 반으로 갔다가 다시 정으로 돌아오는데 그 정은 처음의 정과 다르다. 정과 반이 반씩 합쳐진 것도 아니다. 정으로 출발하고 반을 거쳐서 그다음은 초월이다. 우리가 초월적 사고, 믿음의 사고를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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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밸런스다. 밸런스는 역설이다. 역설은 의도와 반대로 된다. 저울이 움직여서 나의 결정을 뒤집는다. 밸런스 위의 밸런스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역설 위에 또 다른 역설이 있다. 뒤집어진 것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지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밸런스를 도구로 삼아 사유한다. 균형감각을 사용하여 직관한다. 문제는 사유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역설이 작용하여 의도와 반대로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판단은 집단이 뒤집고, 생각의 결정은 에너지가 뒤집는다.
내가 애써 이룩한 것이 집단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무수히 경험하고 인간은 상처 입는다.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는다. 직관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중의 역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의 급소를 노려야 한다.
한 사람의 용감한 행동이 거대한 에너지의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집단의 거대한 흐름도 공세종말점 이르면 멈춘다. 거기서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세상을 바꾼다. 집단은 에너지가 고갈되면 멈춘다. 직관에 논리가 뒷받침되면 막강해진다.
역설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다. 이중의 역설은 거기에 시간을 더하여 단기전과 장기전의 관계다. 작은 것은 뜻대로 되는데 큰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금방 끝나는 일은 뜻대로 안 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뜻을 이룬다. 직관과 논리와 믿음의 삼위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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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모든 지식을 한 단어로 집약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밸런스다. 밸런스는 의사결정구조다. 반대편에 원자가 있다. 밸런스는 원자의 자궁이다. 원자가 결정된 것이라면 밸런스는 결정하는 것이다. 원자가 단절된 개체라면 밸런스는 연결하는 메커니즘이다.
인간은 직관의 동물이다. 직관은 밸런스 감각이다. 그것은 균형감각이다. 세상은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에너지의 연결과 단절만으로 모두 판단할 수 있다. 에너지를 연결하려면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직관은 연결상태를 보고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직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는 직관으로 잘 판단하면서 중요한 문제는 의사결정을 회피하고 집단에 문제를 떠넘긴다. 에너지가 없으면 판단을 해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행에 옮기는 동력은 집단이 전진하는 관성에서 얻는다.
자신의 판단을 숨기고 집단과 연결된 상태 안에 머무르려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에너지는 행위에서 나온다. 인간은 행위에 맞추어 자신의 판단을 왜곡한다. 인간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집단의 관성과 행위의 관성에 의지하며 그냥 하던 짓을 반복하려고 한다.
인간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은 직관을 사용하는데 직관을 뒷받침할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별수 없는 동물이다. 집단에 의지할 뿐 생각을 하지 않고 판단을 기피한다. 이론적 확신의 힘을 믿어야 한다. 직관에 논리를 더하면 막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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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틀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바로잡으면 된다. 문제는 생각에 사용하는 도구다. 생각이 틀렸으면 생각의 도구를 바로잡아야 한다. 생각의 도구는 밸런스다. 인간은 균형감각으로 판단한다. 문제는 집단에 속하게 되면 균형감각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무한동력이 틀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들어가는게 없는데 나오는게 있겠냐? 균형이 안 맞다. 균형감각으로 알 수 있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전략의 균형이 맞지 않다. 그런데 왜 오판하는가? 집단 때문이다.
그것은 호르몬 때문이다. 집단에 의지하려는 동물의 생존본능 때문이다. 집단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관성력 때문이다. 하던 일을 계속하려는 관성력 때문이다. 행위에 생각을 맞추는 인지부조화가 나타난다. 에너지 흐름에 압도되어 생각하지 않는다.
왼쪽으로 가려면 자전거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야 한다. 진실이다. 틀렸다. 자전거가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지 않으면 자빠진다. 그것이 역설이다. 역시 틀렸다. 페달을 세게 밟으면 자전거는 똑바로 선다. 이중의 역설이다. 모든 오류와 실패의 원인이다.
밸런스는 두 번 방향을 바꾼다. 오뚜기의 어느 부위를 건드리느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강하게 치느냐, 약하게 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여기서 빚어지는 혼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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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연수로 존재한다. 동물은 한 마리, 두 마리씩 있고 나무는 한 그루, 두 그루씩 있다. 해도 하나, 달도 하나, 별도 하나, 하나씩 손꼽을 수 있다. 과연 세상은 인간을 위해 세기 좋은 자연수로 되어 있을까? 자연은 그 자연수를 낳는 자궁으로 되어 있다.
자연수의 자궁은 밸런스다. 밸런스는 한곳에 몰아주는 성질이 있다. 밸런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중간이 없다. 중간이 없으므로 자연수가 된다. 어떤 둘의 연결지점에 밸런스가 작동한다. 밸런스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전달받는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다.
에너지를 전달하고 전달받는 과정에 형태가 바뀌는 것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에너지를 주고받을 뿐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에너지의 전달을 반복하여 최종단계에 이르면 줄 수는 있는데 받을 수는 없게 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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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의 전달은 밸런스에 의지하는데 말단부는 반드시 밸런스가 깨진다. 밸런스는 짝수다. 손이든 발이든 두 개씩 짝수로 되어 있는데 말단부는 홀수다. 어떤 일의 가운데는 짝수이고 시작과 끝은 홀수다. 알아야 할 것은 시작과 끝의 또 다른 밸런스다.
밸런스는 2다. 시작과 끝은 1이다. 우리는 중간의 수평 밸런스를 아는데 시작과 끝의 수직 밸런스를 모른다. 인류가 모르는 것이 그것이다. 인류의 모든 실패, 모든 오류, 모든 착오의 근원이다. 시작은 머리 1이, 중간 팔다리는 2, 말단부는 손가락 1이다.
모든 존재는 연결된 존재다. 밸런스는 연결되기 좋은 상태다. 돌은 구르기 좋고, 물은 흐르기 좋고, 열매는 매달리기 좋다. 세상은 연결되기 좋은 상태로 존재한다. 길은 다니기 좋고 차는 운전하기 좋다. 인간은 대화하기 좋고 자연 자체도 소통하기 좋다.
밸런스는 정靜이지만 그것은 동動에 의한 정이다. 정과 정의 밸런스는 아는데 정과 동의 밸런스를 모른다. 바퀴 두 개가 나란한 것은 정의 밸런스다. 관절이 유연한 것은 동의 밸런스다. 정과 정의 수평 밸런스는 아는데 정과 동의 수직 밸런스를 모른다.
같은 크기의 사과 두 개가 있다면 밸런스가 맞다. 큰 개 한 마리와 작은 개 한 마리는 밸런스가 맞지 않다. 큰 개가 멈춰 있고 작은 개가 달리고 있다면? 우리가 정과 정의 수평적 밸런스는 아는데 정과 동의 수직적 밸런스를 모른다. 차원 개념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