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염색하다
이 향 희
수어지교(水魚之交)로 함께 다져온 오롯한 행복이 이순(耳順)의 문턱에서 파편으로 부서진다. 다 풀어내지 못한 복잡한 화가 이맛살과 입 꼬리, 미간에서 일그러진다. 상처가 덧나면 흉터도 커지고, 반복되면 영원한 옹이로 남는 것을 어쩌자고 이리 자꾸 마음이 어긋지는지. 부부는 서로의 자화상일진대 거울 속의 저 모습이 어찌 그만의 얼굴일까.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규방. 불빛도 흔들리지 않는다. 어쩌다 다툼하는 젊은 날엔 ‘칼로 물 베기’라는 속뜻을 실감하곤 했었다. 함씬함씬 서로를 얼우는 사랑에 눈치 빠른 달빛도 살짝 숨어주지 않았던가. 이제 그 달빛조차도 더 이상 교교하지 않다. 버겁도록 무거운 적막만이 근원의 설움을 삼키며 창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살갑게 다가오길 기다리는 나와, 앙다문 입술에 힘을 주며 뻗대고 있는 나.
사랑에 유효기간이 어딨냐며, 웃어넘기곤 했었다. 해운대의 파도를 보며 그 어떤 격랑도 이겨내리라 다짐했었던 사랑의 첫 맹세는 한낱 물거품이었단 말인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살그머니 문을 여는 소리. 얼른 눈을 감았다. 찰나의 갈등이 무색해진다. 조심스레 불을 끄고는 그냥 가버리는 게 아닌가.
부부의 인연은 억 겁의 시간, 잠자리 날개짓에 억 개의 바위가 닳아 없어진 만큼의 세월이 쌓여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고도 두 사람의 다리가 묶여져야만 된다니 부부의 연이 한 가닥 끈에 달렸다는 말이 공연히 생겨나지 않은 까닭이다. 남편과 나의 발을 묶었던 그 실이 끊어지려는 걸까, 속설처럼 이제 부부가 아니라 가족이 돼버린 걸까, 밤새 뒤척였었다.
“오후에 제주도 가자. 비행기 예매해 놨다.”
손보다, 발보다 가슴이 더 부산을 떤다.
대정(大靜)에 섰다. 큰 고요란다. 먼 대양 태평양의 거친 호흡이 몸부림치며 밀려드는 곳, 내기라도 하는 듯 바람과 파도소리 한 시도 그치질 않는데 참 얄궂은 이름이다. 태풍의 눈 속엔 차라리 바람이 없다. 걸핏하면 남편을 앗아가고 아들을 삼켜버리는 파도가 잠잠해지길 바라는 아내와 어머니의 염원이 대정이란 이름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8년 3개월의 유배생활에서 추사선생의 학문과 아내 예안이씨에 대한 그리움도 선생에게 어쩌면 권력싸움이란 태풍의 눈 속이 아니었을지.
추사선생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던 적거지를 둘러본다. 가시만 남아 살벌함을 더한 탱자나무가 울을 치고 있다. 그 속에서 오만한 금수저 천재는 파도에 살을 빼고 바람에 기름기를 빼며 추사체와 세한도의 위대한 예인으로, 학자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을 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 아래 거름 되라고 묻어 주었소.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
누가 이토록 가슴 후벼 파는 러브레터를 썼더란 말인가.
지금까지 발견된 선생의 한글 편지는 40통이다. 그중 자부에게 보낸 2통을 제외하면 모두 부인에게 쓴 편지이며 대부분이 대정에서 보낸 편지이다. 특히 마지막 편지는 병약했던 아내가 죽은 줄도 모르고 이틀을 연달아 쓴 것이다. 보내고 나서 며칠이나 지난 후 부고를 받았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어떻게 월하노인을 상대로 소송을 해서라도(那將月老訟冥司)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꿔서 태어났으면(來世夫妻易地爲)
나는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我死君生千里外)
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 알게 했으면(使君知我此心悲).
똑같은 일을 겪게 하여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는 선생의 도망처가(悼亡妻歌)는 애도(哀悼) 시의 백미다.
입장 바꿔 달라는 선생의 생떼를 월하노인은 들어주었을까?
염려와 그리움으로 빨개진 아내의 눈자위를 떠올리게 했던 동백은 지금도 붉은 빛이 유난하다. 선생이 다시 내려와 보신다면 이제는 미소 머금은 아내의 입술을 떠올리실 지도 모른다. 입장을 바꿔주지 않은 덕분에 남편으로 다가가 서로의 기다림과 그리움을 맘껏 채울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실 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었다. 동백을 사이에 두고 부부가 미소 한 자락 살그머니 물고 있다.
인연에 관한 책에 따라 남녀의 다리를 실로 묶어 부부로 만든다는 전설 같은 중매쟁이 월하노인 이야기, 선생 부부의 사랑 얘기를 나누며 유배길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덧 날이 저문다.
남편과 나의 다리를 묶고 있는 실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청실과 홍실, 선명하고 곱디곱던 실이 세월에 빛이 바랬을까? 간당간당 유효기간이 다 된 건 아닐까. 속절없이 뚝 끊어지는 낭패를 보기 전에 손을 봐야할 일이다. 흰머리를 염색하듯 염색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월하노인이 정성을 다해 끈을 엮었던 것처럼 물이 고루 예쁘게 들도록 달빛 아래서 염색을 할 일이다.
갱년기(更年期)의 문자 更은 昏(어두울 혼)과 五(ㄨ,다섯 오)의 합성이며 숫자 五(5)는 심장의 상징이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면(昏) 불을 밝히듯 사랑(ㄨ)의 열정도 식어버리지 않게 조치가 필요함을 나타낸다. 오래되어 낡은 집을 수리하듯 인연도 그럴 일이다. 금이 가거나 닳았거나 퇴색한 곳은 고치고 손질하여 원래의 빛깔을 찾을 일이다. 사랑의 불을 지펴 온기를 나누며 다시 가슴 뜨거워질 일이다(更). 이것이야말로 갱년기란 말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갱년기의 속뜻을 처음으로 깨달은 두 사람은 이해와 사랑으로 염색약을 만들었다. 연(緣)줄로 묶고 있는 헐겁고 빛바랜 실을 가닥가닥 달빛에 섞어 염색을 한다. 파도와 바람 소리로 대정의 밤은 고요를 더해가고, 일상을 벗어둔 부부는 수평선처럼 밤을 유영하며 인연을 염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