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수상자 : 서정길
수상년도 : 2022년
수상작 : 물꼬
물꼬
보리타작을 끝낸 지 달포가 지나도록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장마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대지는 메말라갔다. 하늘에는 구름만 무심히 오갈 뿐이었다. 아버지는 연신 줄담배를 피우며 안절부절못했다. 훌쩍 커버린 모만큼 아버지의 근심도 자랐다. 모내기를 포기할 무렵에야 비가 세차게 내렸다. “사람을 먹여 살리는 건 하늘뿐인기라. 삽 들고 말랑들로 나오거라.” 바지를 둥둥 걷고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 검게 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버지의 가벼운 발걸음과 달리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서리질을 하는 아버지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역력하지만, 나는 긴 논두렁을 보며 한숨부터 내쉰다. 가을걷이 후 방치되었던 논두렁과 허물어진 물꼬를 고쳐야 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논두렁 곳곳에 뚫어 놓은 구멍은 두더지와 땅강아지 소행이었다.이긴 흙으로 구멍을 메우고 다시 두렁을 쌓는 일이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큰 비가 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실하게 쌓아라.” 하시던 아버지는 세상일은 기초가 튼튼해야 만사형통이라 며두렁을 두텁게 쌓는 요령을 직접 보여주었지만, 아버지처럼 하기에는 역 부족이다. 힘든 농사일이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온몸은 이내 땀으로 뒤범벅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모내기를 마친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아버지의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소화불량을 호소하며 가까운 의원을 찾았고 여러 차 례 진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출근 전에 아버지를 대신해 논을 둘러보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병충해가 왔는지, 벼멸구가 있는지, 논두렁과 물꼬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물꼬 는 사람이 먹는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라 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소화불량이 되고 적게 먹으면 영양실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누누이 강조해온 터다. 벼가 막피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풍년의 기쁨을 누리지 못 한 채 어머니와 오남매를 두고 이세상과 작별했다.
아버지께서 남기고 간 유산은 논밭뿐이었다. 여섯 식구의 생계가 달린 농지인지라 처분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바느질을 접고 농사꾼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연약한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시로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수리시설이 빈약했던 그때는 논에 물을 가두어 두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지만, 천수답에서 논물을 얼마만큼 가두어 두느냐가 한해 농사를 가늠케 했다. 병사가 성문을 단단히 지키듯 물꼬를 지켜야만 했고 가뭄 때는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파수꾼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백부께서는 수시로 집에 들렀다. “말랑 논은 너그 아부지가 살림나서 처음으로 장만한 논이니 아부지를 생각해서라도 자주 가보라.” 한다. 언제쯤 제초제를 살포하고 논두렁을 베야 하는지 물꼬부터 살피라며 꼼꼼하게 챙겨 주곤 했다. 모내기를 끝냈지만, 마른장마가 계속되었다. 비는 아이 오줌 누듯 찔끔찔끔 내렸다. 인근 저수지까지 메말라 양수 작업은 그림의 떡이었다. 벼는 더위에 시들었고 논바닥까지 쩍쩍 갈라졌다.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냈어도 하늘은 기세등등하게 햇살만 퍼부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버지의 심정도 이러했으리라.
애꿎게 하늘을 원망하는 것조차 지쳐갈 무렵에야 반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부터 먹구름이 낮게 깔리더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대지를 적셔 주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창문을 흔들며 기세등등하게 내렸다. 호우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일선 공무원은 비상근무 체제로 돌입했다. 담당 마을의 저수지와 하천이 범람하는지, 보에 이상 유무를 살펴야 했다. 현장을 둘러보면서도 논의 물꼬가 눈에 밟혔다. 마음이 물꼬 위에 머물렀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불안은 머릿속을 온통 하얗게 도배했다. 다행히도 밤 9시경에 비상근무가 해제되었다. 퇴근 후 곧바로 삽과 손전등을 챙겨 들고 논으로 달려갔다. 논두렁만큼 높이 쌓아 둔 물꼬인지라 필시 두렁 한두 군데가 무너져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제때 물꼬를 헐지 않으면 두렁이 무너지는 건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물꼬 앞에 흰 수건을 두른 어머니가 보였다. 두렁이 튼실해서 다행이라는 어머니 말씀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큰댁에서 분가 후 아버지와 함께 일군 논이라 했다. 몇 해 동안 자갈을 걷어내고 붉은 황토로 토양을 바꾸어 나갔다. 아버지의 열정이 논두렁을 지켜준 것 같았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논으로 달려갔다. 일렁이는 벼가 푸른 웃음을 토해내며 인사를 한다. 긴 가뭄을 용케 견뎌낸 벼가 대견해 보인다. 주위 곳곳에는 빗속에서도 무너진 논두렁을 복구하느라 비지땀을 흘린다. 물꼬에 물이 철철 넘친다. 평소에는 비 맞는 것을 싫어했어도 이 시간만큼은 그렇지 않다. 물꼬를 넘는 물소리가 노래라면 내리는 비는 선녀의 춤이었다. 비가 내릴 때기뻐하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눈에는 알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아버지가 그토록 농사일에 정성을 쏟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아버지의 삶처럼 진실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본다. 아버지처럼 세상을 그렇게 살아왔노라 할 자신이 없다.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한 것만 같아 부끄럽다. 아버지가 일러 준 것처럼 농사란 농부의 정성과 물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한 것임을 체득한다. 더구나 벼농사의 성패가 물꼬를 조절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도 물꼬를 막고 물꼬를 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아버지처럼 물꼬를 살피듯 내 안에 물꼬부터 찬찬히 살펴 인생의 모내기를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
수상 소감
인연의 꽃
수필과 벗한 지도 벌써 17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수필을 몇 권의 책으로 묶었지만, 활자가 된 작품은 하나같이 실망감을 안겼습니다.
치열한 창작활동보다는 작가라는 호칭 하나만 믿고 안주한 꼴이었습니다.
사실 글쓰기에 매달리기보다는 직장과 사회생활을 핑계 삼아 글쓰기와는 담장을 쌓아온 터였습니다.
그러던 중 ‘암’이란 복병을 만나 내 몸과 마음은 바벨탑처럼 무너져내리고 일상은 혼돈의 늪에서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투병하는 일 년여 동안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맨 먼저 찾아낸 곳이 글 밭이었습니다. 잡초가 무성해진 해묵은 밭이었지만, 글 벗과 함께 잡초를 걷어내며 새싹을 기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제대로 영글지 못한 열매이어도 캐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마당에 내려앉은 햇살이 도란거리는 오후, 한 통의 문자가 제 눈을 의심케 했습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수상 소식에 온몸은 전율에 휘감겼습니다. 눈을 들어 산야를 바라보았습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황금빛 들녘 그리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도 어제와는 달라 보였습니다.
마주하는 모든 것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마도 수상작으로 뽑힌 「물꼬」가 묵은 텃밭을 조금은 일군 것같았습니다. 이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글 밭에서 나만의 향기를 지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졸작을 뽑아 주신 한국수필가협회 최원현 이사장님과 심사위원님, 저와 함께 글 밭을 일구어 나가는 여세주 교수님, 수요반 문우님, 언제나 멘토가 되어 준 아내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서정길 tjwjdr@hanmail.net
『수필과 비평』(작품 「첫 고백」 2005) 등단. 대구 수비작가회의 회장. 대구 수필문예회 회장. 한국문협 달성지부장 역임. 대구 문인협회 부회장(현) 한국수필가협회부회장(현) 달성문인협회, 수비작가 회의, 가톨릭문인회, 어름문학회 회원. 달성복지재단이사장, 달성문화재단 대표인사 역임. 수상 : 자원봉사수기부문 대상(2005 대구시장). 수필집 : 『알아야 면장하제』(2014), 『아름다운 공존(2019)』 『마음에 동네 하나』(2020). 산문집 : 『달성의 풍경, 풍경을 담다』(2019 공저). 일반도서 : 『도동서원, 세계의 품에 들다』(2021).
심사평
심사위원|김혜숙ㆍ은종일ㆍ김선화
『한국수필』 제1322호(2021.12)부터 제1332호(2022.10)까지 게재된 특집을 제외한 456편을 대상으로 1차 10명의 추천위원이 매월 한두 작품씩 추천한 것 중 중복 추천이 된 박찬성 「충전과 방전」(2022.3), 서정길 「물꼬」 (2022.4), 서영희 「사랑받을 자격」(2022.4), 윤혜주 「검은 갈매기의 바다」(2022.5), 정옥순 「분홍 동백꽃을 입양하다」(2022.6), 허석 「창, 빛들다」(2022.7), 조현세 「에바부인, 앞집 새댁」(2022.8), 강현자 「수제비로 끓어나는 화」(2022.10)가 본심 심사 대상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8편에 대한 3명 의 본심 심사위원의 심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삶도 물꼬를 막고 트는 일이라는 화자가 보조관념 ‘물꼬’로 원관념 ‘아버지의 생존 철학’을구성적 비유로 형상 창작한 자아의 세계화 작품 서정길의 「물꼬」가 가장 높은 총점을 받아 영예의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반열에 올랐다. - 은종일(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