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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숙 |
대표작품 1 | 천년의 부활 |
대표작품 2 | |
수상년도 | 2017년 |
수상횟수 | 제8회 |
출생지 |
*수상 대표작품 천년의 부활 강 근 숙
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생명체나 삶에 관련된 물질적인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시나브로 소멸되어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에 스며있는 문화유산은 수천 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찬란한 문화를 지닌 뛰어난 민족이다. 문화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예술을 통틀어 말한다. 종교나 학문 사상, 관습이나 제도로 만들어진 유·무형의 문화유산은 인간의 역사 그 자체로 조상의 생활상과 의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우리고장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4기의 능이 있고 왕실가족묘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파주는 한양과 개경을 잇는 의주로를 통해 수많은 사신과 문필가들이 드나들었고 선비들이 학문을 하던 곳으로 이분들의 묘소가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능과 선현들의 묘역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지혜와 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며 온갖 유물을 만날 수 있는 자연박물관이다. 무덤의 주인을 찬하고 글씨를 써서 조각한 신도비와 묘갈, 정교한 조각가의 솜씨로 빚은 석물들은 당대 최고의 글쟁이와 장인이 남긴 문화예술품이다. 날카로운 붓끝과 칼끝과 정으로 쪼아가며 수없이 어루만졌을 신도비와 석물을 바라보며 먼 옛날 이 세상을 다녀간 위대한 조각가의 마음을 헤아린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다.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열정을 가지고 해설을 할 수가 없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와 파주문화원 문화유적해설사로 십년 넘게 활동을 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 중요성과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요즘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람객의 수준도 높아졌다. 나는 파주의 해설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순간적인 입담보다는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바르게 알려주고 궁금증을 풀어 지적 충만으로 이어지는 해설을 하려고 노력한다.
황희1363~1452선생 유적지에서 근무하는 날, 나이 지긋한 남자 네 명이 바람을 쐬러 나왔다며 해설요청을 한다. 한눈에 봐도 막역한 친구사이로 조선역사쯤은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들로 보여 간략하게 요점설명만 하였다. 황희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훈도로 온 것이 파주와의 인연이 되었고, 얼마 안가서 고려가 망해 두문동에서 은거하다가 새 왕조 요청으로 조선의 관리가 되었다. 태종의 신임을 받아 6조 판서를 두루 거쳐 세종대에는 18년이나 영의정을 지내며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청백리 아닌가. 장수 황씨로 보이는 일행 중 한사람이 “과연 우리 할아버지시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옆의 친구도 질세라 “고려광종 때 평장사를 지낸 선조 지해관의 묘가 황희선생 묘역 근방에 있는데 현재 남한에 있는 지씨 가문의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자랑을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했다. ‘지씨 평장사 묘역아래 황희선생 묘를 조성하면서 장수 황씨가 지해관 묘역 진입로를 막는 등 횡포가 심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지해관池海貫939~?은 충주지씨忠州池氏 시조인 지경池鏡의 장남으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지냈다. 평장사란 지금의 내무부장관 격으로 국가업무를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높은 관직이다. 충주지씨와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그동안 구전으로 들어온 이야기도 관심 있고, 충주지씨 2세 묘역으로 가장 오래된 유적이라 꼭 찾아보고 싶었다. ‘황희 묘역 위쪽에 지해관 묘가 있다’는 후손의 말만 믿고 무작정 황희 묘 담장 뒤편으로 갔다. 거기에는 정말 고총으로 보이는 세 기의 묘가 있었다. 봉분이 큰 무덤 앞에는 새로 세운 비석이 있어 황희 셋째아들 수신의 손자 예창禮昌부부 합장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아래 두 기의 묘는 도막 난 비석이 글씨가 마모되어 주인을 알 수 없었으나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한집안이지 싶었다. 그렇다면 두 집안 불편한 관계의 진원은 어디일까. 문헌에 나와 있는 자료가 없어 이 여름 우거진 산속에서 묘를 어떻게 찾을까 막막했다. 하지만 우리 고장에 묻힌 유적을 찾아내어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에 관심 있는 이에게 묻고 떼를 쓰듯 도움을 청했다.
드디어 묘역을 찾았다. 전 자운서원 류병기 원장이 수소문 끝에 묘역을 찾아 사전답사까지 다녀왔고 충주지씨 대종회에서 자료까지 구해주었다.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인사는 뒷전이고, 묘역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정인을 만나러 가는 여인처럼 달떠있었다. 묘역은 황희유적지 반구정伴鷗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던가. 바로 옆에 묘를 두고 몇 년을 궁금해 했다. 사목리 노인정을 지나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다보니 나지막한 산 중턱에 석물이 보인다. 묘역은 눈앞인데 사람 키 배나 되는 단풍잎돼지풀과 환삼덩굴이 엉클어져 길을 가로 막았다. 그야말로 밀림을 헤치듯 낫으로 풀을 쳐내며 비탈을 올라갔다. 이곳이 바로 ‘문산읍 사목리 산114번지’ 고려 평장사 지해관 묘역이다. 그동안 애타게 찾은 고려 평장사가 내게 ‘이제 오느냐’ 손짓을 한다. 그립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뛴다.
묘는 고려형식을 따라 장방형으로 봉분 위 메꽃 두 송이가 눈길을 끈다. 비석에는 ‘고려평장사지공해관지묘高麗平章事池公海貫之墓, 서해군부인김씨부묘좌西海郡夫人金氏祔卯坐’라 쓰여 있어 부인과 합장묘임을 알 수가 있다. 여느 묘와 다름없이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이 놓였고 양 옆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설치했는데 모두 근세 것이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석물 한 쌍만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해관은 어떤 연고로 이곳에 묻혔을까. 그의 부친 지경은 현 평안남도 중화군 당정면 당촌리에서 만년을 보내다 101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난 날짜까지 확실한데, 지해관은 만년을 어디서 보냈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묘 자리는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명당으로 보인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멀지 않은 파주에 좋은 터가 있어 후손들은 선친의 유택을 이곳에 정했는지 모른다. 산신석 옆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원래 이 마을은 지池 정승골로 불렸는데 4백년 후 태어난 황희가 득세하면서 장수황씨 집성촌이 되었다. 천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씨 후손들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조상의 묘를 실전했고, 1786년(정조10)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묘를 찾게 되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 것도 좋아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마을마다 익어가는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말의 진원이 있게 마련이다. 지해관 묘역에 관한 이야기는 날마다 나를 흔들어 깨운다. 토지대장을 떼어보니 내 추측이 어긋나지 않았다. 정말 묘소가 소재한 산은 1970년까지 장수황씨 소유였다. 아! 그랬구나. ‘장수황씨가 묘역 진입로를 막고 비석을 달구지로 끌어다 연못에 넣었다’는 말이 전해오는 진원지는 황희 묘역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다. 기세등등한 장수황씨 땅에 우뚝한 지해관 묘가 눈엣가시로 보였을까. 땅주인은 ‘내 땅 내 맘대로’ 길을 내고 담을 쌓기도 하는 과정에 두 집안의 갈등이 깊어 전설 같은 옛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는 것이리라.
장수황씨 종중에서 시제를 지내고 점심초대를 했다. 사목리 노인회관에서 밥을 먹으며 지해관 묘역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장수황씨는 전해오는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준다. 조선후기 장수황씨가 묘를 쓰려고 광중을 팠는데 지해관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묘를 쓰지 못하고 지석은 동네 앞 수렁에다 던져버렸다 한다. 그 사람은 훗날 황해도로 이사를 갔는데 충주지씨 집성촌으로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그는 충주지씨에게 ‘조상을 찾아줄 테니 돈을 내라’고 하여 큰돈을 받았고, 충주지씨는 비로소 실전된 조상 묘를 찾게 되었다한다. 지석을 수렁에 넣었다는 말이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와전되어 비석을 끌어다 연못에 넣었다고 전해오는 것은 아닐까. 알고보니 두 집안은 불편한 관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결국 충주지씨 조상의 묘를 장수황씨가 찾아주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옛날옛날 고려적에’란 말을 앞에 붙인다. 그 옛날 중국 송나라 단명전 태학사로 고려광종11년(960)에 왔다가 귀화한 선의공宣懿公 지경池鏡(903~1003)은 지해관의 아버지다. 그는 왜 고려에 귀화했을까. 그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五代(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왕조가 번갈아 건국되면서 세력다툼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70여 년의 오대십국 분열을 거쳐 송나라가 건국되자 광종은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였고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루어졌다. 나라의 기틀을 잡으려면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했고, 중국의 새로운 문물도 받아드려야 했다. 지경도 아름다운 고려에 마음이 끌려 본국의 승인을 얻어 귀화했다. 지경은 미비한 문물제도를 정립하는 한편 왕권강화에 큰 공을 세워 조정에서는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란 벼슬을 내렸다. 태보太保란 태사太師, 태전太傅과 함께 고려 삼사三師의 하나로 임금의 고문이며 오늘날 수상 급에 해당하는 최고 벼슬이다.
지경은 귀화하기 전 홍농모씨弘農毛氏와 혼인하여 얻은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 장남이 지해관으로 김씨에게 장가들어 지윤과 지영을 낳았으며, 지영은 지득상과 지응상을 낳았다. 지득상의 손자가 바로 충주어씨忠州魚氏 시조 지중익이다. 지씨 가문이 가장 번성한 시기는 고려 말이다. 무과에 장원급제한 충원부원군 지용기는 활약이 대단했다.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에 동참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보위에 올린 한사람으로 정가의 기둥이었다. 지용기는 훗날 조선창업에 협조하지 않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 하였는데도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지용기의 공을 잊지 못해 개국공신으로 포상했고, 돌아간 지 오랜 그의 부친도 공신에 추록하게 하였다. 지용기 외에도 지윤, 지용도, 지용수 지씨가문 네 사람은 지문사룡池門四龍이라 칭송이 자자했다.
지문사룡 중 한사람인 문하찬성사 지윤은 이성계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큰아들 방우에게 큰 딸을 시집보내고, 둘째인 방과가 경주김씨(정안왕후)와 결혼하여 소생이 없자 둘째, 셋째를 시집보내 겹사돈이 되었다. 태조 왕건이 혼인정책으로 세력을 키웠듯이 고려에서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정치적인 협력으로 최고 권신의 딸들을 며느리로 맞았고,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 일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성계와 지윤에 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고 ‘방우는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했다’ 짧게 소개되었다. 이성계의 맏며느리인 삼한국부인 지씨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고, 조선 2대왕 정종의 빈이 된 성빈지씨와 숙의지씨는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아 왕실을 번성케 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 최고의 권신이며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하여 백성을 편안케 한 상원수 지윤은 낮게 평가되었고, 그의 딸들에 대한 기록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이성계의 큰아들 방우는 개국 이듬해 세상을 떠났고, 둘째아들 방과는 조선조 2대왕(정종)으로 등극했다. 지씨 부인의 소생, 즉 지윤의 외손자들은 모두 왕위계승자들로 주목을 받게 된다. 왕위는 결국 권력의지가 강했던 방원에게 돌아갔고, 정종이 왕의 자리를 양위하는 과정에 극력하게 반대한 세력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많은 신료들의 직첩을 거두고 귀양을 보내는 과정에서 지씨 가문은 크게 위축되었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다. 태종에 이어 세종은 아버지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게 되고 오월동주吳越同舟, 한배를 탔던 지씨 가문은 형편없이 폄하되었다. 그 당시 왕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처녀를 겁탈하고 사람 한두 명 죽여도 엄벌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는 일이 없었다. 정종의 왕자들이 남의 집 노비를 빼앗고 기생과 놀아났다하여 직첩을 거두고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낸 것은 왕위계승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정잡배와 놀아난 왕자들은 혹여 왕위를 넘본다는 모함을 받기 싫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 방우의 후손 이견신은 태조의 적손으로 ‘왕위를 옹립한다’는 소문이 돌아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의 가족 5명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는 과거를 비춰보는 현재의 거울이다. 묵은 이야기는 단순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질문을 던진다.
죽음보다 삶을 잘 가르치는 것은 없다. 내가 묘역을 즐겨 찾는 이유다. 묘 앞에 서면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가 보이고 난세에 치열하게 살다간 인물과 사건들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달려 나온다. 지경은 고려에 귀화하여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두 아들 지해관, 지도관 후손들이 번창하여 고려조에 평장사 36명과 조선조에는 문·무과에서 100여 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어디 그 뿐인가. 병자호란 때 목숨 걸고 종묘宗廟를 지킨 지봉수,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사와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지여해, 지계최, 우두를 전국적으로 실시해 천연두를 예방한 현대의학의 선구자이며 국문학자인 지석영과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 등 지씨 가문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하는 것은 조심스런 일이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섣불리 이야기하다가는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우리고장 문화유산을 찾아 조명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내가 하고자 한 것은 지씨 가문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려진 역사를 끌어안고 싶었다. 지해관 묘역은 남한에 있는 충주지씨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우리 고장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고려 때 여진정벌에 공을 세운 윤관장군보다 백년이 앞선 묘역으로 나는 감히 문화재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거리의 황희유적과 연계관광코스로 개발되어 파주를 찾는 관람객들과 또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다. 지해관 묘역을 다시 찾았다. 새로운 유적을 발견하여 기뻐하던 처음과는 달리 지씨 가문의 내력을 알고 나니 생각이 깊어진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묘를 실전했고, 묘를 찾고 나서도 이어지는 나라의 변란으로 조상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 묘를 찾은 지 2백년이 지난 1964년에 이르러서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인근 땅을 사들이고 묘역을 새로이 단장했다. 곁방살이하던 조상님께 번듯한 유택을 마련해드렸으니 후손들은 얼마나 떳떳할 것이며 조상님 또한 얼마나 기꺼워하시겠는가. 그때 설치한 신참내기 문석인은 금관조복을 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멀뚱하게 서 있고, 비바람에 씻겨 형체도 없는 두루뭉술한 고려 적 석물이 깨어나 내게 말을 걸어온다. 마음을 열면 석물도 온기가 돌아 그 속에 담긴 사연을 하나둘 꺼내 놓는다. 삶을 훌쩍 뛰어넘은 눈도, 코도, 입도, 귀도, 다 뭉그러진 키 작은 석인 어깨를 끌어안고 나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문화가 없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한 나라를 없애려면 그 민족의 문화부터 말살시키지 않던가. 일본이 그랬듯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제일 먼저 민족의 얼이 담긴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 민족은 모진 핍박 속에서도 문화를 버리지 않았고, 피를 흘리면서도 우리의 문화를 지켰기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10위권의 정치,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 국력의 상승이 역사와 문화전통 없이 가능했을까. 우리 민족은 같은 혈통으로 같은 제도와 풍습을 지니고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 그 역사의 연륜이 쌓이고 쌓여 우리에게는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문화유산을 나열할 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다. 그 맥을 잇기 위해 장인의 기술을 전수하고 전국 문화원에서는 수많은 수강생들이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히느라 땀을 흘린다.
훼손된 문화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돌릴 수 없다.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은 천년만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할 소중한 우리의 재산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도 문화를 모르는 민족은 가난뱅이요, 문화를 즐기고 사랑하는 우리는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민족이다. 역마살인가.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마을에 묻어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곳엔 분명히 그 말의 진원이 있고 문화유산이라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우리고장에 전해오는 이야기의 진원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결코 지해관 묘역과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지씨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오고 간 그 어느 길이 평탄하기만 했겠는가. 막막하고 슬프고 외로웠을 세상의 녹록치 않은 길, 옛사람들의 흔적을 밟으며 우리고장 문화유산을 보듬고 지키며 해설하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야기꾼이다.
*수상 소감
작은 습관이 오래가면 생활이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의미 있는 관계는 언제나 가까이서 손을 놓지 않기 마련이다. 이십여 년 수필을 끌어안고 살았다.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 활동을 하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관람객에게 바르고 깊이 있는 해설을 해야 하기에 역사책을 두루 읽었다. 짝사랑인줄만 알았던 수필과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은, 알고 보니 나를 지켜준 버팀목이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속 깊은 동반자였다.
내가 나고 자란 파주는 많은 선비들이 학문과 덕행을 쌓고 후학을 가르치던 문향의 고장이다. 선현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땅 파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시대의 벽을 허물고 역사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마을 곳곳에 묻어있는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했을 때는 설렘으로 가슴이 콩닥거렸고, 그 감동을 공유하고 싶어 기행수필을 쓰기 시작했다.『천년의 부활』은 이 땅에 먼저 살다 간 선조들의 흔적을 밟으며 보고 느낀 행복한 시간이 오롯이 담겨있다.
글쓰기를 잘했다. 글 쓰는 일은 언제나 해산의 고통이 따르지만 생명의 피돌기가 되어 가슴을 뛰게 한다. 긴 세월 수필과 함께 살아온 내게 꽃다발을 안겨준 ‘인산수필기행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큰 상을 받았으니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기위해 노력해야겠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준 심사위원께 큰절 올리며,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글벗들과 영광스런 상을 품어 안는다.
*작가 프로필
1998년 한국수필 등단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 파주문화원 문화유산해설사.
저서 : 수필집<천년의 부활> <흑백사진>
수상: 원종린문학상, 제31회 전국향토문화공무 우수상. 경기도 문학상 본상
*작품심사
제8회 ‘인산 기행수필 문학상’ 심사소감
2017년도 <인산기행문학상>에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집은 강근숙의 <천년의 부활>이었다. 현대엔 ‘여행’이 삶의 휴식과 충전을 제공하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행’만큼 역사와 문화를 통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체험도 없을 듯하다.
이런 까닭으로 ‘여행’은 현대인들에게 생활의 충전과 새로움을 안겨주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현대는 갈수록 기행글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다른 점이 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안내 기록과 감상을 적은 글이 기행문이라면
기행수필은, 여행지 정보와 감상을 내면화시켜 자신만의 정서로 재해석을 해내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먼저 기행문집의 평가 관점을 말한다면, 주마간산식 나열이 아닌 작가만의 탐구과 관점을 보인 기행문인가를 살펴보았다. 전문성을 띈 기행문을 선정하고 싶은 까닭이다. 심사위원의 관점에 든 작품집이 『천년의 부활』이다. 『천년의 부활』은 문화관광해사로서 파주문화유산 수 십 곳을 집중 취재하여 문학성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10년 넘는 해설사의 직분이 작가를 재탄생시키는 결과물을 얻게 했다. 자신만의 주제에 따라서 작가다운 관점과 해석으로 기행문학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제8회 인산기행수필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수필가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장 정목일 유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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